||États généraux ([[프랑스어]]) States-General ([[영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uder_Stati_generali.jpg]] [목차] == 개요 == [[앙시앵 레짐]] 시기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의 세 신분의 대표자가 만나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한 일종의 신분제 의회. 1신분은 [[가톨릭]] [[성직자]], 2신분은 [[귀족]], 3신분은 [[평민]]이다. == 편성 == 삼부회는 3신분의 투표로 선정된 대표자들의 모임이고, [[왕]]의 명에 의해 소집된다. 형태는 의회와 비슷했지만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와 달리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전무했으며 사실상 국왕의 자문기관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쳤다. 주된 자문사항은 회계 문제. 그런 점에서 오히려 삼부회의는 잉글랜드의 의회보다는 동시대 [[스페인 왕국]]의 [[코르테스]]나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 의회]]와 여러모로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점은 코르테스나 제국 의회는 꾸준히 열렸고, 삼부회는 국가적인 위기 시에만 열렸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프랑스의 중앙집권이 강화된 [[1614년]] 이후로는 160년 넘게 아예 개최조차 되지 않다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 마지막으로 열리게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와의 또다른 차이는 극심한 지역 갈등이었는데, 프랑스 중북부를 흐르는 루아르 강을 경계로 북부 (랑그도일)과 남부 (랑그도크) 간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왕권 강화를 돕는 결과가 되었다. 애초에 자유농, [[요먼]]이 도시민과 함께 [[영국 서민원|하원]]에 있던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와 [[귀족]], 그리고 일부 극도로 부유한 [[젠트리]]만이 회의에 참석한 [[프랑스 왕국|프랑스]]는 출발부터 차이가 컸다고 할 수 있다. == 역사 == [[1302년]]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을 겪던 [[필리프 4세]]가 자신의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한편으로 갈등과 관련되어 해결책을 제시받기 위해 각 지역의 [[영주]], [[성직자]] 및 대표자들을 소집한 것이 삼부회의 시초였다. 그리고 이 구성은 삼부회가 지속되는 내내 변하지 않는다. 삼부회가 주로 처리했던 업무는 [[국왕]]에 대한 자문과 더불어 징세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삼부회가 순순히 징세에 동의를 표하지는 않았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징세의 대가로 자신의 영지에 속한 백성(주로 [[농민]])들에 대한 지배권의 강화를, [[평민]](상류층 평민인 [[부르주아]])들은 경제적인 특권을 부여받고자 노력했다. 맨 처음 삼부회가 개최됐을 무렵인 [[14세기]] 전반기에는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부회는 상당한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영국 의회]]도 왕이 자의적으로 소집하는 과세 자문회의로 시작했다가 이런 저런 권한을 획득한 것이니 삼부회 또한 그런 식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루이 9세]]의 황금기를 이은 [[필리프 4세]] 시대에 프랑스 [[카페 왕조]]는 그 절정이었지만 필리프의 [[플란데런 백국|플랑드르]] 복속 전쟁과 [[가스코뉴]] 회복 시도 같은 잦은 원정으로 쇠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한은 [[백년전쟁]] 시기 최고점에 오르게 된다. [[1355년]]의 2차 삼부회에서 남부 (랑그도크)와 북부 (랑그도일)의 대표들은 합심하여 [[장 2세]]로부터 새로운 세금의 과세 시에 삼부회의 협의를 거친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듬해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자, [[섭정]]인 왕자 [[샤를 5세]]는 부왕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1357년]]에 삼부회를 열었다. (3차 삼부회) 그 역사적인 회의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 Estate General 이라 불린다.] 에티엔 마르셀 (Etienne Marcel)이 제안한 대조례 (The Great Ordiance)가 통과되었고, 샤를은 삼부회에 재정 통제권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삼부회는 재차 분열해, 이듬해 자크리의 난 때 에티엔이 농민군과 접촉하자[* [[1358년]] [[여름]]의 일. 반란의 기세가 꺾이자 그는 [[나바라 왕국|나바르]] 국왕에게 [[파리(프랑스)|파리]] 성문의 열쇠를 넘기려고까지 하다가 [[7월 31일]]에 한 [[수문장]]에게 암살되었다.] 위기를 느낀 [[귀족]]들은 [[국왕]] 밑으로 집결하였고, [[부르주아]] 내부에서도 에티엔이 너무 나아갔다고 여겨 [[왕권]]이 회복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친 삼부회는 납세 동의권을 왕에게 반납하는 초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왕한테는 이게 웬 굴러들어온 호박이냐 할 노릇이었고 뒤늦게야 아차 싶었는지 [[1484년]] 삼부회는 [[국왕]]에게 납세 동의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당연히 무시했다. '''그리고 이 [[1484년]] 이후로 프랑스에서 삼부회는 76년 동안 열리지 않는다.''' 사라져가던 삼부회를 다시 살려낸 것은 바로 [[16세기]] 전 [[유럽]]을 뒤흔들어버렸던 [[종교 개혁]]이었다. 거듭된 [[위그노 전쟁|종교 전쟁]]으로 돈이 궁해진 국왕이 다시 앵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 그리고 이 시기 삼부회는 잘만하면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의회와 같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각 [[신분]]들이 삼부회에 출석할 자신들의 대표자를 투표로 선출하였으며[* 물론 [[보통선거]]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투표]]로 대표자들을 뽑았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 사실 이렇게 투표로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관례는 3신분의 경우 삼부회가 처음 개최되던 [[14세기]]부터 있었다. 다만 모든 [[신분]]들이 자신들의 대표자들을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진 것이 [[16세기]] 중반. 지금 시선으로 보면 밑바닥 싸움이긴 하지만, 최후의 삼부회 소집 당시 인구 대비 3신분 대표 선출 유권자 비중은 동시대 잉글랜드의 인구 대비 하원 선거 유권자 비중보다 높았다.], "왕의 의지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주장에 맞서 "왕과 [[신민]] 사이에는 상호 우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표출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1576년]]에는 당시 국왕 [[앙리 3세]]에게 '''삼부회에게 [[입법권]]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결의된 법은 국왕 역시 준수할 것'''까지도 요구했지만 딱지를 맞고 만다. 이후 [[17세기]]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과 [[중앙집권제|중앙집권]]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삼부회는 [[1614년]]을 끝으로 175년 동안 개최되지 않는다.''' === [[1789년]] === 프랑스 재정을 다 태워먹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프랑스의 사회는 갈수록 혼돈스러워졌다. 루이 14세에게 눌려 지내던 [[성직자]]와 [[귀족]] 계급은 루이 14세의 사후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들의 경제 / 사회적 특권을 확장시키는 데 열심이었고 그 결과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인구의 2%가 채 안 되는 1, 2신분이 전체 프랑스 토지의 40%를 차지하는 촌극을 빚는다. 이는 1신분의 경우 더욱 극에 달해, 당시 전체 인구의 0.04%가량이었던 1만 명이 프랑스 전체 토지의 10%를 차지했다. 이 시기 프랑스의 총 인구는 2,500 ~ 2,600만 명이고 그중 1신분이 10,000명, 2신분은 40 ~ 50만 명 정도니, 당시 사회의 불평등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이들 특권층은 정치적으로도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고 면세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세금을 비롯한 각종 경제적 부담은 고스란히 제3신분의 몫으로 남는다.[* 당시 프랑스와 경쟁국이었던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이미 개혁을 통하여 귀족과 성직자들도 세금을 납부하였다.] 게다가 3신분 가운데서도 힘이 있었던 [[부르주아]]들이 이런 저런 명목으로 회피해, 실질적인 부담은 프랑스 국민 중 가장 빈곤했던 농민들이 안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모순'''이다. 이들이 특권층에 대한 적개심에 활활 불타오른 것이야 당연지사.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개혁은 안 하고]],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과 같은 대외세력다툼에만 몰두했고 그 덕분에 이미 루이 14세의 사망 시점에서 엉망이었던 프랑스의 재정은 [[1780년대]]에 이르면 [[파산]] 직전에 이른다. 결국 국왕 [[루이 16세]][*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6세]]는 검소하다고 알려진 왕이다. --조상을 잘못 만났어....--]는 재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삼부회를 175년 만에 다시 열기로 결정하고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최된다. 국왕은 어떻게든 삼부회의 논의사항을 재정 문제로 국한시키고자 노력했지만 분노에 휩싸인 제3신분이 그럴 리가 있나. 삼부회는 개최되자마자 3신분에 의해 프랑스의 모순적인 사회구조를 개탄하는 목소리로 뒤덮인다. 이어서 3신분은 자신들의 대표자 수를 기존의 2배로 늘려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내지만 허울 좋은 기만책이었다. 기존의 삼부회 의사결정 시스템이었던 투표 방식[* 대표자 한 명당 한 표가 아니라 각 신분이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이었다.]은 변경되지 않았다. 결국 [[6월 17일]] 제3신분은 자신들에 동조하는 일부 제1, 2신분과 함께 삼부회를 박차고 나와 국민의회를 설치한다. 루이 16세는 당황해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려고 하지만 이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로 잘 알려진 국민 의회의 단결만을 더욱 굳건히 해주었을 뿐이다. 이로써 500년 가까이 진행된 삼부회는 붕괴됐고 이후 '''[[인류]] 역사를 뒤흔든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다.''' [각주] [[분류:프랑스 부르봉 왕조]][[분류:나라별 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