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392px-Princess_Chichibu_Setsuko.jpg]] ||이름||야스히토 친왕비 세츠코[br](雍仁親王妃勢津子)|| ||결혼 전 이름||마츠다이라 세츠코(松平節子)|| ||탄생||[[1909년]] [[9월 9일]]|| ||사망||[[1995년]] [[8월 25일]] (향년 85세)|| ||가족관계||남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학력||[[https://en.m.wikipedia.org/wiki/Sidwell_Friends_School|시드웰 프렌즈 스쿨]][* [[워싱턴 D.C.]]에 위치한 [[사립학교]]이다. 오바마의 두딸과 클린턴 부부의 딸 첼시 클린턴도 이곳을 졸업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기능이 통합된 학교이다. 다만 세츠코 비가 재학했을 당시에는 이름이 그냥 '프렌즈 스쿨'이었다.] 졸업|| ||오시루시||[[국화]]|| [목차] == 개요 ==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친왕비]]). == 생애 == 1909년 [[외교관]]인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와 나베시마 노부코(鍋島信子)의 딸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이후에도 [[중국]]과 [[미국]] 등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마사코 황후]], [[키코 비]]와 같은 [[귀국자녀]] 출신.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의 어머니인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가 세츠코의 이모라서, 이방자에게는 이종사촌 여동생이 된다. == 결혼과 가정 == [[다이쇼 덴노]]의 차남인 [[야스히토]] 친왕은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워싱턴 DC]]의 주미일본영사관에서 세츠코를 처음 만났으며, 두 남녀는 1928년 9월 28일 혼인했다. 세츠코의 할아버지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아이즈 번]]의 9대 번주로, [[신선조]]의 스폰서이자 [[메이지 유신]]에 반대했던 [[다이묘]]였다. 당연히 유신정권 이후 아이즈 번과 마츠다이라 가문의 처지는 좋지 않았는데, [[일본 황실]]에서는 [[야스히토]] 친왕과 세츠코를 혼인시키는 것으로 아이즈 번과 마쓰다이라 가문을 복권시킨 것이다. 본래 세츠코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도 같은 한자를 쓰고 있었기에 결혼하면서 한자를 勢津子로 바꾸었다. [[이세 신궁]]이 있어 [[일본 황실]]과 인연이 있는 지역인 이세(伊勢)에서 勢를,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즈 번|아이즈]](會津)에서 津을 따와서 지었다고 한다. 세츠코 비는 딱 한 차례 [[임신]]했으나, [[2.26 사건]] 당시 남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함께 주둔지에서 [[도쿄]]로 돌아오다가 추운 날씨에 몸을 해쳐 [[유산(의학)|유산]]했다. 이후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 황실 가계도 === [include(틀:일본 황실 가계도)] == [[사다코 태후|시어머니]]와의 관계 ==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 [[나가코 황후]]에게는 혹독한 시어머니였던 것과 달리,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 셋째며느리 [[키쿠코 비]], 넷째며느리 [[유리코 비]]에게는 좋은 시어머니였다.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녀라, [[화족]] 가문의 서녀 출신인 사다코 태후보다 출신 신분이 더 높았다. 그래서 사다코 태후는 열등감을 가졌다는 소문도 있다. 또한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 가문이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것과, 나가코 황후가 줄줄이 딸 넷을 낳은 것도 시집살이의 원인이었다. [[사다코 태후]]는 특히 세츠코 비를 총애해서, [[히나마츠리]] 때가 되면 세츠코 비가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인형들을 장식해두고 같이 보면서 즐기곤 했다. 이에 대해 세츠코 비는 만년의 회상록 《은의 본보니엘(銀のボンボニエール)》에서 "아드님만 네 분이시니, 매년 즐거움으로 삼으신 일이었다."고 추억했다. 사다코 태후는 자신과 생일이 똑같은 차남 [[야스히토]] 친왕을 편애했고, 세츠코 비는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에게 시집 온 며느리이니 더욱 예뻐하였다고 한다.[* 물론 편애를 했다고 해서 형제 관계가 틀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는 차남 [[후미히토]] 친왕을 방임해서 키워, 훗날 후미히토 친왕은 막장이 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형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내고 자기가 천황이 되려고 해서 문제가 되었다.] == [[미치코 상황후|쇼다 미치코]]를 반대하다 ==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자 [[가쿠슈인]] 동창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1947년의 [[신적강하]]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평민으로 강등되었지만, 그들의 콧대는 여전히 높았다. 1957년, [[아키히토]] 황태자는 평민 [[미치코 상황후|쇼다 미치코]]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1958년, 둘은 곧 결혼할 계획임을 발표한다. 미치코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었고, 쇼다 가문은 당시 일본 재계 20위 안에 들던 재벌가였다. 그러나 황실의 오랜 전통을 깬 '평민'과의 '연애결혼' 계획에, 옛 황족들과 화족들은 분노했다. 노부코는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노부코의 언니 이츠코[* [[이방자]]여사의 어머니이다.]는 아예 일기에다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세츠코 비의 형님이자 [[아키히토]] 황태자의 어머니인 [[나가코 황후]], 세츠코 비의 아랫동서 [[키쿠코 비]], [[야나기하라 뱌쿠렌]][* [[다이쇼 덴노]]의 친어머니인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조카. 웃긴 것은, 뱌쿠렌도 미천한 신분의 [[첩]]을 어머니로 둔 [[서녀]]였다는 사실이다.]까지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아키히토 황태자의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가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면서 결혼을 허락하여, 반대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1959년 4월, 미치코는 무사히 시집와서 황태자비가 되었다. 이후 세츠코 비는 다른 황족들과 화족들과 함께,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에게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가혹한 시집살이]]를 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서, 이후에는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해졌다고 한다. == 말년 == 세츠코 비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아키히토]]의 자식들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친손주처럼 아꼈다. 1990년, 3남매 중 후미히토가 가장 먼저 결혼했다. 키쿠코 비는 후미히토의 아내 [[키코 비]]에게 결핵예방협회 총재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국자녀]]이자 친왕비가 된 키코 비에게 친근감과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세츠코 비가 사망하는 것으로 지치부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부부가 살던 저택은 사망 기준으로 [[다카쓰카사 가즈코]] 저택[* 원래는 [[유모]]들을 위한 시설이었으나,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태자비]] 때부터는 유모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비어 있었다. 이후 사별한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친정으로 돌아와 이곳에 살았고, 가즈코가 죽은 후로는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신혼집이 되었다.]에 살던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가 어린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를 데리고 거주하게 되었다.[* 물론 대충 수리를 한 다음에 후미히토 일가가 입주했다고 한다. 후미히토 내외는 리모델링을 요구했으나 여러가지 사유로 거절당했고, 2006년에 탄생한 [[히사히토]]의 방을 만든 것 외에는 수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9년에 들어오면서 수십억엔을 들여서 저택을 개보수하고 있는데, 집 수리에 돈을 많이 써서 일본인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있다.][* 수리는 당연히 일본인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분류:일본의 친왕비]][[분류:도쿠가와 가문]][[분류:1909년 출생]][[분류:199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