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형장공(刑莊公)[br]{{{+1 蘇烈 | 소열}}}''' || || '''[[시호|{{{#fff 시호}}}]]''' ||장(莊) || || '''[[작위|{{{#fff 작호}}}]]''' ||형국공(刑國公) || || '''성''' ||소(蘇) || || '''이름''' ||열(烈) || || '''자''' ||정방(定方) || || '''부친''' ||소옹(蘇邕) || || '''출신''' ||기주(冀州) 무읍현(武邑縣) || || '''생몰''' ||592년 ~ 667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무장이다. ‘정방’은 [[자(이름)|자]]이고, 본래 이름은 ‘열(烈)’이다. [[제갈공명]], [[조자룡]], [[관이오|관중]], [[나관중]], [[오운|오자서]], [[소손녕]], [[항우]], [[이목(전국시대)|이목]]처럼 이름보다 자로 더 유명한 경우이다. == 생애 == === 소년기 === [[허베이성]] 출신으로 원래는 [[수당교체기]]에 아버지 소옹(蘇邕)을 따라 허베이성의 유력 [[군벌]]이었던 [[두건덕]] 휘하에서 종군했다. 어린 시절부터 활약해 인근의 도적을 토벌하기도 했고, 그의 용맹이 출중했는지 두건덕의 휘하 장수인 고아현의 양자가 되기도 했다. 고아현을 따라 유흑달에게 속했다가 고아현과 유흑달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뒤늦게 벼슬길에 올랐다. === 돌궐 전선 === [[당나라]]에서 벼슬해 광도부 절충으로 [[이정(당)#s-1|이정]]을 따라 39세이던 630년, [[동돌궐]] 정벌에 참여했고 귀환하자 좌무후중랑장이 되었다. 이때가 39세였지만, 이상하게도 이후 세월이 흘러 [[환갑]]도 넘은 655년까지 진급이 없이 뚜렷한 기록이 없다. 아무래도 두건덕 세력 출신의 소위 항장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가 당 제국을 대표하는 장수로 부각된 것은 655년 [[고구려]] 원정과 656년 [[서돌궐]] 원정에서였다. 655년 2월 영주도독 정명진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어 655년 5월에는 정명진 등이 고구려군 병력이 적은 지점을 발견하고 공격해 1,000여 명을 죽이고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앞의 2월 기록을 봐선 5월의 전투에도 정명진 등(等)의 진영에 소정방이 포함되어,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655년 [[서돌궐]] 내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이 기회를 틈타 [[정지절]]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공격한 당나라 원정군에서 전군총관으로 종군한 소정방은 서돌궐군 20,000여명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때부터 당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돌궐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소정방은 한 장수의 시기를 받았다. 당시 응사천(鷹娑川)에서 당나라와 서돌궐은 서로 호각으로 겨뤘는데, 돌궐의 서니시(鼠尼施)가 군대를 이끌고 추가로 당도하자, 소정방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서니시가 당도하는 모습을 보고 즉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서니시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그런데 부대총관인 [[왕문도]](王文度)라는 장수가 소정방의 공적을 시기하여, 총지휘관인 정지절에게 >“비록 이번에 적군을 물리쳤다고는 해도, 관군도 마찬가지로 사상자가 생겼는데,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법도가 어찌 이 일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는 마땅히 방진을 치고 치중대는 모두 안쪽에 배치하며, 사면으로 군대를 펼치고 갑옷을 입은 채 수비하고 있어야 만전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갑옷을 벗어서 가벼워지는 것은 없으니, 병사의 손실이 덜해질 것입니다.” 라고 건의했다. 왕문도는 또한 정지절이 용맹함을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긴다며 고종의 칙명을 사칭하여 자신이 군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나라 군대는 피로가 극에 달하여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소정방은 여기서 정지절에게 왕문도를 유폐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정지절은 소정방의 건의를 따르지 않았다. 뒤에 항독성(恒篤城)에 당도하여 몇몇 오랑캐들이 항복하자, 왕문도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취하자고 건의했다. 여기서 소정방은 약탈한 재물을 단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정지절은 이때의 일이 원인이 되어 면직되었고, 소정방을 시기했던 왕문도는 처형되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뒤에 제명되어 서인이 되었다. 657년, [[고종(당)|당 고종]]은 서돌궐을 정벌할 것을 결정하고 소정방을 필두로 [[임아상]], 소사업 등 당나라측 장수와 아사나마사, 아사나보진 등 기마부족에 속한 이민족 번장들을 지휘부로 삼아 서돌궐 공략을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 있었던 것은 소정방군이었는데, 보병 10,000여명과 회흘(위구르) [[기병|기병대]]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서돌궐]]측은 이런 소정방군을 제거하기 위해 기병 100,000여 명을 동원했는데,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와 양군의 전투 기록에서 여타 당군의 지원과 관련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유목]] [[기병]]의 기동력을 살려 흩어져 진군하는 당군을 각개격파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정방군은 금산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서돌궐측 부대 하나를 격파한 이후 전진했으나 예질하에서 서돌궐군 본대와 조우하여 위기에 처했다. 서돌궐측이 노린 대로 소정방군과 서돌궐군의 전력차는 현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질하 전투'''에서 소정방은 강 근방의 고지대를 선점한 이후 보병 10,000여 명으로 서돌궐군 10만 기의 세 차례에 걸친 맹공을 모두 튕겨내는 괴력을 발휘했고, 이에 전열이 흐트러진 서돌궐군에 대항해 자신이 스스로 위구르족 기병을 지휘, 역습을 가해 서돌궐측을 대파해 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이후 퇴각하는 서돌궐측을 거듭 추격했고, 당군의 맹공에 투항하는 부족이 늘어나면서 서돌궐 세력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갔다. 소정방은 투항하는 부족들은 아사나마사 등 후방의 당군에 맡겨버리고 자신은 계속 서돌궐측 수뇌부를 추적했는데, 폭설이 내리자 당군이 오지 못하리라 안심하고 있었던 서돌궐측에 대해 200리를 돌파해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결국 여기서도 깨진 서돌궐 가한을 포함한 지도부는 중앙아시아 서역으로 도망갔다가 그 지역 국가들에 의해 당나라에 인도되어 나라가 멸망해 버렸다. 이 전공 한방으로 소정방은 [[설인귀]] 이상의 위상을 지닌 장군으로 솟아 올랐다. 659년에는 사결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했고, 오해에서 [[토번]](티베트) 군대를 토벌했다. 소정방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형국공'''(刑國公)으로 책봉되었으며, 또한 소정방의 아들인 소경절(蘇慶節)도 무읍현공(武邑縣公)에 책봉되었다. === 만주 및 한반도 전선 === 이후 660년, [[고종(당)|당 고종]]이 [[백제]]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을 때 반대쪽의 서역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워버린 소정방이 대총관으로 임명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며, 130,000명의 원정군으로 황해를 가로질러가 백강 하구에서 방어전을 편 백제군을 가볍게 격파해 버리고 전진했다. [[계백]]의 저항으로 인해 신라군과의 합류가 늦어지긴 했으나 [[김유신]]이 계백까지 밀어버리고 합류하면서 사실상 백제의 멸망은 확정되었으며, 이후 압도적인 전력으로 [[사비성]]을 함락하고, [[웅진성]]으로 도망간 [[의자왕]]을 사로잡아 백제를 멸망시켰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 진영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원래는 당군과 신라군이 7월 10일에 만나기로 했으나 계백과 황산벌 결사대의 저항으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4차례 패배한 끝에 승리하면서 하루를 지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결국 소정방과 약속했던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이에 소정방은 화가 나기도 하고 신라 측의 기를 꺾어놓을 목적으로 신라를 계속해서 무시하며 오만방자하게 굴었고, 심지어 신라군 장수 중 한 명인 [[김문영]]을 처형하려고까지 했다. 황산벌에서 겨우겨우 백제군을 격파하고 온 [[김유신]]은 소정방의 이처럼 오만방자한 행실에 분개한 나머지 소정방의 면전에서 당장 처형을 취소하지 않으면 >'''“우리가 백제를 정벌하기 전에 네놈들을 먼저 박살 내버리겠다”''' 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놀란 소정방은, 바로 김문영의 처형을 취소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김유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신라군이 제시간에 도착을 못한 이유는 황산벌 결사대의 저항도 있었다. 신라군의 합류가 늦을수록 백제군 주력을 상대하는 당군의 피해가 늘어나므로 소정방의 입장에서는 역정을 낼만도 했다. 동맹군 장수를 처형하겠다는 것은 좀 너무 나간 감이 있지만. 그리고 소정방이 김문영 처형을 취소한 것도 김유신한테 순수하게 겁먹어서보다는,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파트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나 1차 고당전쟁 등으로 중국이 아무리 강한들 단독으로는 고구려를 뚫지 못했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2019년에 중국에서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소정방은 이미 659년 출진 준비 시점에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받아서 유사시 신라까지 기습할 계획이 이미 백제 원정 시점부터 있었음이 드러났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이미 이 시점에 당군이 신라까지 공격할 야욕이 있을 거라고 예측해 왕에게 조언하는 부분도 나오는만큼, 이는 단순히 김문영을 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경고였던 셈이다. 《[[삼국유사]]》에도 소정방이 백제 멸망 이후 신라까지 치려고 준비를 했는데 김유신이 이를 간파했다는 일화가 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후 유사시 신라까지 어떻게 해 볼 의도는 있었지만 (김유신의 강경 대응 등이 겹쳐) 시행하지 못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수도 사비성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를 정복한 기념으로 글을 새겨놓고, 일부 병력만 백제 땅에 남겨 [[웅진도독부]]로 삼아 [[백제부흥운동]]군을 상대하게 하고[* 백제 땅에 남겨둔 당군은 백제부흥군 토벌 목적도 있었지만 신라가 멸망한 백제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나라에 협력하는 백제인과 연합해(그래서 [[나당전쟁]] 기록에서 웅진도독부를 그냥 '백제'라고 칭하는 대목이 많다)[[나당전쟁]] 때 신라와 맞붙지만 패배하고 철수하게 된다.] 소정방과 당군 본대는 다시 [[황해]]를 건너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이듬해인 661년에는 1년 전 백제를 무너뜨린 방식 그대로 다시 황해를 건너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661년)|평양성으로 직행해 포위]]했으나, 《[[일본서기]]》에 따르면 때마침 평양에 맹추위가 몰아닥쳐 [[대동강]]이 얼어붙자 그 위로 공성무기를 올리고 공세를 취해 [[고구려]]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평양성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평양성은 대동강이 3면을 감싸 엄호하기에 강력한 방위력을 자랑하는 성이다. 그런데 그 대동강이 얼어붙어 버렸으니... 참고로 이런 내용은 전쟁 종결 후 고구려 사신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한 이야기가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에 부딪혀 자체 전력으로 평양 함락에 실패했고, 튀르크계 [[철륵]]의 반란으로 일부 군대가 빠져나간데다 [[사수 전투]]에서 합류하기 위해 남하하던 [[방효태]]의 군대가 전멸당하자 위기에 빠졌지만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의 목숨을 건 식량 보급을 통해 목숨을 건져 철수했다. 이후 667년, 소정방은 76세로 사망했다고 한다. 소정방은 유주(幽州)도독으로 추증되었고, '장'(莊)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http://yesan.grandculture.net/yesan/toc/GC06600340|소도독사(蘇都督祠)]]라는 소정방의 제사를 모셨던 사당이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의 임존성 일대에 있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폐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문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처럼 한국 왕조에 도움을 준 인물도 아니고, 이전의 또 다른 한국 왕조인 백제를 멸망시킨 중국의 옛 장수의 제사를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모셨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소정방이 백제 정복을 자기의 공으로 자랑했어도, 어쨌든 백제 멸망은 또 다른 한국 왕조인 신라에게도 업적으로 남았고, 후대 왕조들은 백제보다는 신라의 입장에서, 즉 신라 중심적인 사관이 고려-조선으로 계속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 기타 == [youtube(kW0ZluPsJWM)] * [[한국방송공사|KBS]] <[[역사스페셜]]> 등에서는 소정방이 김유신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대표적인 근거가 《신당서》와 《구당서》에서 소정방의 죽음을 너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돌궐 평정 때 보여주었던 화려한 전공에 백제까지 멸망시켰는데도 '''“니들 왜 소정방의 추증에 대해서 건의 안 하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경상북도]] [[상주시]]와 [[문경시]] 사이의 3번 국도에는 ‘뙤다리’라 불리던 다리가 있었는데 뙤다리를 한자로 쓰면 ‘당교’, 즉 ‘당나라 다리’라는 뜻이 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소정방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실 소정방을 유인해서 독살하려는 게 목적이였고, 결국 소정방과 당군들이 모두 죽자 김유신은 이들의 시체를 상주 인근에 묻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당교라는 것이다.[* 소정방의 살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양성 함락 이후 소정방이 당나라로 병력을 물리지 않고 신라 쪽으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교가 있는 곳은 문경시로 통하는 곳이며 문경에는 신라로 통하는 오랜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로인 새재(조령)가 있다. 소정방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것은 그가 이곳까지 내려왔다는 의미이며 이는 결국 신라까지도 집어삼킬 속셈으로 내려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중국 사서가 소정방의 죽음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도 소정방이 신라에 의해 피살당하는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그것을 숨기기 위한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소정방이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은 탓에 당나라 조정의 신료들은 소정방의 추증을 감히 논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백제]]의 [[사비성]], 지금의 [[부여군|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소정방의 이름이 박혀있는데, 이유는 백제를 멸망시킨 공적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 이름을 기념으로 새겼기 때문이다.[* 비문의 이름은 [[대당평제비]]이다. 이것 때문에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평제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백'''제'''를 '''평'''정한 기념으로 탑에 지 이름을 박아넣었으니...] 거기다 [[서돌궐]] 정벌때도 금산에서 서돌궐군을 격파한 이후 홀로 본대를 찾아 전진하다가 단독으로 서돌궐의 총전력과 상대해 이긴 걸 생각하면 좋게 말하자면 대담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꽤나 자아도취가 심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 청년기에 두건덕 쪽으로 줄을 잘못 섰다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항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그저 그런 관직 생활을 하다가, 환갑이 넘어서, 내전으로도 볼 수 있는 중국 문화권 내부의 전쟁이 아닌, 더 거리가 멀고 힘든 서돌궐, 토욕혼, 토번, 백제, 고구려 등 수천km 스케일의 외정(外征)을 소화하는 괴물 같은 [[노익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 10대 때는 일신의 무용으로 적진을 함락시키고 손수 적장을 참살하는 무인이었으며, 부장 시절에는 직접 발로 구르면서 보병을 거느리고 10배가 넘은 돌궐 기병을 제압한 용병가이자 기병전으로 20배 가까운 유목 기병을 압도하는 선봉장이었다. 대장이 되어서는 80배가 넘는 토번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으며, 광역 전선에서도 산과 강, 바다, 사막, 초원과 고원을 넘나들며 '''3개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왕 모두를 사로잡았으니 그야말로 당나라 시대 초기 야전의 만렙 끝판왕이었다.''' 아마도 [[연개소문]]만 이겼더라면 [[곽자의]]가 부럽지 않았을 듯 하지만 매체에서의 인지도는 뭔가 B+급의 분위기이다. 나당전쟁기 신라가 대기병 전술을 고안하고 다듬는 것에 영향을 준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 대중매체 == * 1992년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폭삭 늙은 분장을 한 [[김유신]]보다 아랫연배처럼 묘사되는데 아무래도 김유신한테 소정방이 쩔쩔대는 장면을 넣기에 김유신이 연장자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림]]이 되기 때문인 듯 하다. * 2003년 개봉한 [[영화]] <[[황산벌(영화)|황산벌]]>에서는 [[중국]]의 베테랑 배우 가오무춘(高牧春:고목춘)[* 1947년생 중국 국가경극원의 1급 배우로 1993년에 한중 수교 축하 공연 때 [[한국]]으로 처음 와 [[경극]] <삼차구>를 공연했다.]이 연기했다. 소국을 깔보는 거만한 모습과 대국의 중신으로서의 위엄을 함께 갖추고 있는 소정방의 성격을 명품 연기로 멋지게 표현했다. 여기서는 소정방의 [[나이]]가 김유신보다 위라는걸 잘 묘사했으며 첫 대면시에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나이를 물어보는데 표정부터 김유신을 깔보는 표정으로 말하는게 자기 자신이 연장자라는걸 각인시키기 위한 의도이다. [[김인문(신라)|김인문]]이 멋대로 건방진 말투로 [[통역]]한 것도 있지만 김유신이 이런 소정방의 태도를 보고 의도를 눈치채 “알거 없다 캐라.”라고 불쾌감을 표출한다. * 2006년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드라마)|대조영]]>에서는 배우 김기복[* <[[불멸의 이순신]]>에서 남해현령 기효근 역할을 맡았다.]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를 고려하면 백발의 노장으로 나왔어야 했으나, 드라마에선 중년 정도의 나이로 나왔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제3차 고당전쟁에도 참전하고 또 고구려 멸망 이후까지 살아있다가 소리소문없이 퇴장한다.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백인철(배우)|백인철]]이 연기했다. 아들 나이뻘 되는 [[설인귀]]보다도 젊게 묘사되고 심지어 사망한 이후의 일인 고구려의 멸망 대목에도 등장을 한다.[* 이때는 아무런 역할도 없이 그저 병풍처럼 다른 무장들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이었기에 역사적 오류까지 내면서 등장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정흥채]]가 연기했다. [각주] [[분류:592년 출생]][[분류:667년 사망]][[분류:헝수이시 출신 인물]][[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당나라의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