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스탕달}}}[br]Stendha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Stendhal.jpg|width=100%]]}}} || || '''본명''' ||마리앙리 벨[br]Marie-Henri Beyle|| ||<|2> '''출생''' ||[[1783년]] [[1월 23일]]|| ||[[프랑스 왕국]] [[그르노블]]|| ||<|2> '''사망''' ||[[1842년]] [[3월 23일]] (향년 59세)|| ||[[7월 왕정]] [[파리(프랑스)|파리]]|| || '''직업''' ||소설가|| || '''사조''' ||[[리얼리즘]]|| || '''종교''' ||[[가톨릭]] → [[무종교]]||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의 소설가. 본명은 마리-앙리 벨이며, 스탕달은 필명인데, 독일의 예술비평가 J. J. 빙켈만이 태어난 [[프로이센]]의 도시 이름 [[슈텐달]](Stendal)에서 따온 것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와 함께 프랑스 근대소설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 생애 == 프랑스 동남부의 주요도시 그르노블에서 고등법원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열렬한 왕당파였고, 가정교사는 [[예수회]] 신부였다. 이런 보수적인 가정 분위기에 질린 스탕달은 계몽주의자이자 자유주의적인 지식인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제도를 바꾸고, 시류를 틈타 외조부는 에콜 상트랄이란 학교를 세웠는데, 스탕달은 이 학교에서 공부한 후 파리의 이공계 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곧 중퇴했다. 1800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의 군대에 입대해 이탈리아 원정군 장교로 밀라노로 가기도 했다. 군 생활을 마친 후 스탕달은 파리에서 극작가가 되기 위해 수련을 쌓았다. 그러나 다시 육군성에 들어가 참사원 서기관의 직책에 오르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부르봉 왕가]]의 [[왕정복고]]가 되면서 서기관을 사퇴한 후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예술 등의 비평문을 쓰며 지내다가 1826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추방된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1830년 [[7월 혁명]] 이후 신 정부에 의해 [[이탈리아]] 주재 영사로 발령받았지만 업무보다는 주로 사교계 출입에 열중하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842년 3월 뇌출혈로 인해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이탈리아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그의 바람에 따라 묘비에 밀라노인이라는 묘비명이 적혀졌다. 저서로는 <[[적과 흑]]>, <파르마의 수도원> 등이 있다. [[분류:프랑스 남성 작가]][[분류:프랑스의 소설가]][[분류:1783년 출생]][[분류:1842년 사망]][[분류:프랑스의 무종교인]][[분류:그르노블 출신 인물]][[분류:프랑스 혁명 전쟁/군인]][[분류:나폴레옹 전쟁/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