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한국의 음반 유통/음반 제작 기업, rd1=신나라레코드, other2=한국의 트로트 가수, rd2=신나라(가수), other3=춘추전국시대 신나라, rd3=신나라(춘추전국시대))] [include(틀:중국의 역사)] ---- [include(틀:만주의 역사)] ---- ||<-3><:>'''{{{#ece5b6 {{{+1 신}}}'''[br]'''{{{+1 新}}} }}}''' || ||<:><-3> '''{{{#ece5b6 9년 ~ 23년 (1대 14년간)}}}''' || ||<-2> '''{{{#ece5b6 성립 이전}}}''' || '''{{{#ece5b6 멸망 이후}}}''' || ||<-2> '''[[전한|{{{#ece5b6 전한}}}]]''' || '''[[현한|{{{#ece5b6 현한}}}]]''' || ||<:> '''{{{#ece5b6 국명}}}'''||<-2>신(新) || ||<:>'''{{{#ece5b6 위치}}}'''||<-2>[[중국]] 대륙 || ||<:>'''[[수도(행정구역)|{{{#ece5b6 수도}}}]]'''||<-2>[[장안|상안]] {{{-2 (9 ~ 23)}}} || ||<:>'''{{{#ece5b6 인구}}}'''||<-2>미상[* 전한 멸망시 5959만명.] || ||<:>'''{{{#ece5b6 정치체제}}}'''||<-2>[[군주제]] || ||<:>'''{{{#ece5b6 국성}}}'''||<-2>[[왕(성씨)|왕]](王) || ||<:>'''{{{#ece5b6 국가원수}}}'''||<-2>[[황제]] || ||<:>'''{{{#ece5b6 주요 황제}}}'''||<-2>[[왕망]] {{{-2 (9 ~ 23)}}} || ||<:>'''{{{#ece5b6 언어}}}'''||<-2>[[상고한어|상고 중국어]] || ||<:>'''{{{#ece5b6 문자}}}'''||<-2>[[한자]] || ||<:>'''{{{#ece5b6 종족}}}'''||<-2>[[한족]], [[산월]] || ||<:>'''{{{#ece5b6 종교}}}'''||<-2>[[유교]], [[도교]], [[중국 신화|중국 토속 종교]] || ||<:>'''{{{#ece5b6 통화}}}'''||<-2>[[오수전]], [[포화]], 화천(貨泉) 등|| ||<:>'''{{{#ece5b6 현재 국가}}}'''||<-2>[include(틀:국기, 국명=중국)][br][include(틀:국기, 국명=베트남)][br][include(틀:국기, 국명=몽골)] {{{-2 (일부)}}}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역사상 '''통일 제국 중 최단명 제국이자 독자적인 시대로 구분되지 못하는 유일한 제국'''이다. 거기에 고작 '''1대(왕망) 15년'''이라는 매우 짧은 역사를 자랑(?)하는데, 10년도 가지 못했던 [[서초(초한쟁패기)|서초]]의 [[항우]]조차 [[사마천]]에 의해 정통한 천하 종주의 계보인 <본기>에 기록되고, [[초한쟁패기]] 자체가 하나의 시대로서 인정받는 것과는 크게 상반되는 부분이다.[* 물론 사마천은 정통성보다는 현실에 좀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시로 제2대 혜제 ~ 제4대 후소제 기간을 사마천은 <여후 본기>로 묶었지만 《한서》는 각각의 <본기>로 나누었다.] [[진(영성)|진나라]]의 통일전쟁과 [[초한전쟁]]으로 황폐화가 된 [[중원]]을 원상복구시키고 발전한 [[전한]]의 황금기를 끝내고 다시 [[군웅할거]] 모드로 전환시켜 결국 세조 [[광무제]]에 의해 [[내전]]이 끝날 때까지 경제와 산업 상태를 최악으로 만든 제국이었다. == 역사 == [[전한]]과 [[후한]] 사이에서 잠깐 활약했던 단명 제국으로 일반적인 역사 구분에서는 역대 제국에 포함되지 않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삼국지]]》가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36년 전인 [[황건적의 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신나라 전체 역사는 전한 말의 왕망의 찬탈 과정부터 후한의 건국 과정 사이에 집어넣어도 무방하다.], 전한과 후한 사이에 공백이 있기 때문에 서술한다. [[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이 [[선양]], 즉 [[역성혁명]]을 통해서 건국했다. 당시의 문제였던 [[호족]] 지배를 타파하고자 급진적인 토지 제도와 정책을 시행했으며, 동[[흉노]]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황제가 된 왕망은 허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각계각층의 반란을 불러왔다. 이를테면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면서, 모든 관료의 [[열정 페이|'''봉급을 없애고''']] 순수 명예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왕망은 '''모름지기 관리란 국민에게 봉사할 마음으로 해야지 돈 벌 목적으로 해먹으면 한나라 꼴 난다고''' 생각하여 [[관료제]]를 개편했다. 왕망의 역성혁명을 지지하면서 그래도 [[개국공신]]인데 좀 챙겨주겠지 [[설레발]]치던 신나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관료 계층은 문자 그대로 멘탈에 금이 가서 [[뇌물]]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현대 [[행정학]]의 인사론에서도 가르치는 부분인데, 개인에게 바랄 수 있는 공명심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에게 적정 수준의 봉급과 노후보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공무원은 필연적으로 뇌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나라를 말아먹는 직격탄이 되었다. 관료계층 뿐만 아니라 평민은 평민대로 죽어나갔다. 왕망은 [[유교]] 제당, 유학소 등의 몇몇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유재산]]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고, [[상나라|상]] • [[주나라|주]] 시대의 [[정전제]](井田制)를 강제로 시행하게 했다. 그나마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초스피드로 국가 정치체제를 완전히 혁명해버려서 [[호족]], 평민 할 것 없이 엄청난 혼돈에 빠지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왕망이 추구했던 정책은 사유 재산 폐지, 집단 농장 등 '''[[공산주의]] 그 자체에 가까웠다.''' [[전한]] 말기의 여러 병폐들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해보기 위해 [[의도는 좋았다]]지만, 훨씬 뒤이은 시기에 어느 정도 [[자본주의]]를 겪고 시작된 19세기 [[유럽]]의 [[공산주의]]도 문제점이 많았는데 잘 될 리가 없었다. [[중화사상]]에 입각해 [[흉노|동흉노]]나 [[선비족|선비]], [[고구려]]와 같은 주변 군사 강국의 군주의 칭호를 제멋대로 격하했다. 흉노 [[탱리고도선우|선우]]는 처음에는 하사하는 인장만 '[[璽|새]]'에서 '[[章|장]]'으로 낮추더니 나중에는 항노복우([[降]][[奴]][[服]][[于]])[* [[제후]]의 칭호에 '''항, 복''' 글자가 들어가 있다.]로 고쳤고, 고구려 왕은 '하구려후'([[下]][[句]][[麗]][[侯]])[* '높을 고'([[高]]) 대신 '낮을 하'(下)를 사용했다. 게다가 '후'는 작위로 보면 '공'보다도 아래이다.]로 부르게 해 [[흉노|흉노 제국]]의 오주류약제 선우나 [[고구려]]의 [[유리명왕]], [[대무신왕]]과 격렬하게 충돌했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외교 관계 악화로 이어져 왕망이 친히 이민족들을 정복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그리고 대외 원정을 위한 대규모 전쟁 물자 공출까지 더해지자, 관료들의 엄청난 수탈 + 사유 재산 불허 + 호족의 군사 반발 등 모든 [[국가 막장 테크]]의 징조가 더해져 각지에서 [[적미군]]과 같은 대반란이 속출했으며 여기에 지방관들은 황제인 왕망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병해 반기를 들었다. 이후 대란이 계속되던 와중 나중에 [[후한]]의 초대 황제 세조 [[광무제]]가 되는 유수(劉秀)의 군대에게 [[곤양대전]]에서 대참패를 당하며, 결국 왕망은 [[경시제]]의 [[군대]]에 의해서 붙잡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신나라도 비참하게 멸망하게 되었다.[[http://www.sangsunomc.co.kr/board/sangsunomc_info_04/12|#]] 특히 왕망의 최후는 대단히 끔찍해서 그야말로 '천참만륙'을 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도 상안(= [[장안]])이 함락될 당시에 [[군인]]들이 먼저 왕망을 발견했고, 경시제가 왕망을 죽이는 자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했기에 공적을 탐한 군인들은 왕망의 몸뚱이는 물론이고 다른 인간의 팔다리까지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서초 패왕 [[항우]]도 비슷한 이유로 산산조각 나긴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대규모 전쟁들을 일으키게 하고, 유랑민을 속출하게 만들고 난 뒤에 최후를 맞은 왕망은 훗날 '''[[역적]]의 [[대명사]]'''로 까이게 되었다. '''[[망탁조의]]''' 문서 참조. 심지어 1,800여 년이 지난 [[청나라]] 시대까지도 비판받게 되었다. 그래도 '''닥치고 놀자식의 [[폭군]]은 아니었고''' [[호족]]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문제 의식과 시도만큼은 좋았기에 이 부분만 현대에 와서 어느 정도 세계 역사가들에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한계와 악영향을 뒤집을 정도는 결코 아니다. 당시 [[전한]] 말기의 상태가 꽤나 [[막장]]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왕망은 대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어쨌든 간에 혼란한 시대를 보며 [[혁명]]을 단행한 것은 옳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요약하자면 '''"[[건국]] 및 [[개혁]]의 [[의도는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해내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 세운 단명 제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역대 황제 == [include(틀:역대 신 황제)] ---- || 대수 || 이름 || 묘호 || 시호 || 연호 || 재위기간 || 능호 || || 추존 || [[황제(중국 신화)|희헌원]](姬軒轅) || 태초조(太初祖) || 황제(黃帝) || - || ? ~ ?[* [[삼황오제]].] || - || || 추존 || [[순(삼황오제)|우중화]](虞重華) || 시조(始祖) || 제순(帝舜) || - || ? ~ ?[* [[삼황오제]].] || - || || 추존 || [[진완]](陳完) || 통조(統祖) || 진호왕(陳胡王) || - || - || - || || 추존 || [[제왕건|전건]](田建) || 세조(世祖) || 경왕(敬王) || - || BCE 264 ~ BCE 221[* [[제(춘추전국시대)|전제(田齊)]] 군주 재위기간.] || - || || 추존 || [[전안(제나라)|전안]](田安) || 왕조(王祖) || 제북민왕(濟北愍王) || - || - || - || || 1 || [[왕망]](王莽) || - || - || 시건국(始建國) 9 ~ 13[br]천봉(天鳳) 14 ~ 19[br]지황(地皇) 20 ~ 23 || 9 ~ 23 || - || == 같이보기 == * [[고구려-신 전쟁]] * [[왕망]] [각주] [[분류:한나라]][[분류:1세기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