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31230 0%, #131230 20%, #131230 80%, #131230 )" '''[[틀:역대 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ffffff 독일민주공화국 제4대 국가평의회 의장}}}]][br]{{{#ffffff {{{+1 에곤 크렌츠}}}[br]Egon Krenz}}}'''}}} || |||||| {{{#!wiki style="margin: -5px -10px" [[에곤 크렌츠|[[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1984-0622-026%2C_Egon_Krenz.jpg|width=100%]]]]}}} || ||||<:><#131230>'''{{{#white 본명}}}'''||에곤 루디 에른스트 크렌츠[br] Egon Rudi Ernst Krenz || ||||<:><#131230><|2>'''{{{#white 출생}}}'''||[[1937년]] [[3월 19일]] ([age(1937-03-19)]세) ||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5]] [[나치 독일|독일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30px-Vorpommern_flag.svg.png|width=25]] [[포메른]] 콜베르크 || ||||<:><#131230>'''{{{#white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독일)]|| ||||<:><#131230><|2>'''{{{#white 재임기간}}}'''||제4대 국가평의회 의장|| ||[[1989년]] [[10월 18일]] ~ [[1989년]] [[12월 3일]]|| ||||<:><#131230>'''{{{#white 서명}}}''' ||<-2>{{{#!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Signature_of_Egon_Krenz.png|width=150]]}}} ||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전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 당시 동독 국가수반이었다. 전임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 휘하에서 [[2인자]] 자리에 있었다는 것과, 그의 후임으로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는 것, 그리고 서기장의 말 한마디로 붕괴된 [[베를린 장벽]] 사건 때문인지 그래도 인지도가 있는 편. == 생애 == [[1937년]] [[3월 19일]], [[포메른]] 지방 콜베르크[* 현재 [[폴란드]] 쿠야브스코-포모르스키에 주, 코워브제크 시]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동부 포메른에서 [[독일인]]들이 추방당했을 때 그의 가족은 리프니츠-담가르텐으로 이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독]]이 수립된 지 10년이 지난 [[1955년]], 그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에 입당하였는데, 여기서 크렌츠는 [[서독]] 사민당수 [[에리히 올렌하워]]로부터 '''완전히 냉담한 인간'''이라고 불릴 정도의 냉혹함과 수완을 발판 삼아 당과 내각에서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에른스트 텔만]] [[피오네르|피오니어단]]의 지도자를 지내다가, [[1973년]] 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으며, 또한 국가 인민의회의 의원(1971~90)을 지내면서, [[1981년]]까지 국가평의회 위원을 겸하였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공산당 청년 운동 단체인 자유독일청년단의 지도자,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빌리 슈토프[* Willi Stoph, 1914 ~ 1999, 동독의 정치가이자 3대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던 인물. 이 사람이 집권할 때부터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총리가 이끌던 각료평의회의 [[각료]]로도 재직했다. == [[서기장]] 취임과 [[동독]] 붕괴 == 원래 에곤 크랜츠는 자신의 후견인인 호네커에 대해 "생전에 호네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존경하고 있었으며, 당 최고권력인 서기장조차도 호네커의 은퇴 후 내지는 사후에야 취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989년]] [[동유럽 혁명]] 과정에서 호네커가 내부[* 당시 호네커는 와병중이었기 때문에 동유럽 민주화 혁명의 흐름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대규모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을 주문하면서 중앙당 내부에서도 지도력이 의문시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한편 [[정규군]]인 [[국가인민군]] 내부에서는 인민들을 인민의 군대가 진압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주독 [[소련군]]은 호네커의 진압 요청을 대놓고 거부했다. 라이프치히 시위에서는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가 파견되었지만 지역당에서 나서서 유혈사태를 막는 판국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면적인 강경진압을 명령했다면 호네커는 자진사퇴가 아니라 남의 손에 끌려내려왔을 것이다.]와 외부[* [[고르바초프]]는 본인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대놓고 거부한 호네커에 대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내부의 호네커 축출 움직임을 묵인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물론 고르바초프의 사적인 감정이 없었더라도 당시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쇠퇴를 인정하고 소련을 [[주권국가연맹|연방 잔류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유럽 공산정권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 없었고, 더군다나 위성국 위기에 대한 소련의 무력 개입을 명문화한 [[브레즈네프 독트린]] 또한 고르바초프가 파기했기 때문에 개입할 명분 또한 없었다.]의 불신임 속에서 사임하자 동독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89년]] [[10월 18일]]에 서기장에 취임한다. 취임 후 그는 호네커를 공개비판한 뒤, 호네커 시대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해소하고 이동의 자유를 포함한 점진적인 개혁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정책은 대체로 호네커의 정책에 간판만 바꿔 단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와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맹국을 통한 망명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등 질서의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동독 각지로 계속해서 확산되어 가고 있었고, 수도인 동베를린에서까지 시위의 불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11월 9일]]에 크렌츠 정권은 구체적인 여행자유화 정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동서독 국경]]을 통한 입출국 허용 및 절차 간소화와 같은 제도적 개선을 골자로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개선 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단순히 "빨리"와 같은 수사적 표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점, 공식적인 절차보다도 [[슈타지]]에 의한 신분 조회와 같은 비공식적 절차가 더 큰 문제였다는 점, 그리고 이미 그 시점에서 크렌츠 정권이 본격적인 개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대다수의 동서독 양 국 국민들은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크렌츠 정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여 여행자유화 계획을 발표하게 될 [[귄터 샤보프스키]] 대변인에게 제대로 브리핑을 하지 않았고, 막 복귀하여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갑작스러운 정치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샤보프스키는 다음날 자정부터 발효될 여행자유화 정책이 '''이미 발효되었다고 착각'''하고, 기자회견장에서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동서독 국경]]을 '''즉시, 지연없이''' 개방한다"고 발표하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여러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베를린 장벽]]은 그날 밤 무너졌고, 출범한지 1달도 지나지 않은 에곤 크렌츠 정권도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정부가 동독 주민들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분명해짐에 따라 [[국가인민군]], [[슈타지]], [[국경경비대]] 등 동독 정부의 통치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관과 수단들이 모두 무력화되었다. [[기민당|동독 기독교민주연합]], [[독일 자유민주당(동독)|동독 자유민주당]] 등 동독 인민의회의 구색정당들은 족쇄가 풀리자마자 내각 총사퇴와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자유 총선거를 요구하였고, 크렌츠 정권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할 권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 1일]]에 [[사회주의통일당]]의 [[일당 독재]]를 명문화하였던 동독 헌법 제1조가 삭제되었고, 이틀 뒤 에곤 크렌츠와 당 정치국, 당 중앙위원 전원이 총사퇴했다. 크렌츠의 후임으로 사회주의통일당의 의장에 취임한 그레고르 기지(Gregor Gysi)[* 훗날 [[독일 좌파당]]의 원내대표를 지내며 통일 독일의 대표적 급진좌파 정치인이 된다.]는 급진적 개혁파였으며, 취임 즉시 사회주의통일당을 [[민주사회당(독일)|민주사회당(PDS)]]으로 재창당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동독 고위급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에곤 크렌츠 또한 민주사회당으로부터 [[1990년]]에 [[제명]]되었다. == 서기장 퇴임 이후 == [[1997년]] 크렌츠는 베를린 장벽 및 동서독 국경의 월경자 사살 명령을 내린 혐의를 비롯한 동독 시절의 범죄 행위에 기소되어 징역 6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크렌츠는 자신을 기소한 것을 "패자에 대한 승자의 복수"라 변호해 보기도 하고, [[유럽인권재판소|유럽인권법원]]에 재심을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4년을 복역하고 [[2003년]] [[가석방]]되었으며 그 뒤로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에 살고 있다. 다른 동독 고위간부 출신자들이 최대한 노출을 피하고 조용하게 여생을 보낸 것과 다르게 미디어에 자주 출연하며 동독 정권과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양, 옹호하고 있다. 구 동독 지역에서는 오스탈기(Ostalgie)[* 직역하면 동쪽 [[향수병]]이라는 의미이다.]라 하여 지금도 동독 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크렌츠는 그런 오스탈기를 대표하는 인물들 중 하나이다. 2019년에는 BBC와 인터뷰를 했는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그날에 대해 "인생 최악의 날"이라고 회고했다.[[https://m.seoul.co.kr/news/newsView.php?cp=seoul&id=20191110500019|#]] [[분류:독일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서기장]][[분류: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위원]][[분류: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분류:1937년 출생]][[분류: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주 출신 인물]][[분류:독일의 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