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왕릉)] || {{{#fbe673 '''오릉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경주시의 관광)] ---- [include(틀:경주역사유적지구)] ---- [include(틀:혁거세 거서간)] ----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gyeongjuimage.or.kr/w_%EC%98%A4%EB%A6%8903(%EC%A0%84%EA%B2%BD)_%EB%8F%84%EB%A1%9D148P.jpg|width=100%]]}}} || || {{{#fbe673 '''오릉'''}}} || ||
<-3><#000><:>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fff><:>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3><:> 이름 || 한글 || 경주역사유적지구[* [[석굴암]], [[불국사]], [[양동마을]] 제외] || || 영어 || Gyeongju Historic Areas || || 프랑스어 ||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국가·위치||<-2>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 ||<-3><:> [include(틀:지도,장소=오릉)] || ||<:>등재유형 ||<-2> 문화유산 || ||<:>등재연도 ||<-2> [[2000년]] || ||<:>등재기준 ||<-2>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지정번호 ||<-2> 976 || [목차] [clearfix] == 개요 == 五陵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경주)|탑동]] 67-1에 있는 [[신라왕릉]] 5기.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72호. 입장료는 성인 2천원.[* 2021년 9월 기준.] == 상세 == [[신라]] 초대 국왕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 2대 국왕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 다섯 명의 능이라고 전한다. 네 왕들의 공통점은 모두 [[박(성씨)|박씨]]라는 것. 가운데 하나를 두고 나머지 네 무덤이 한쪽 면에 자리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이 다섯 왕릉이 전부 박혁거세의 신체 일부를 따로 묻은 것이라는 설화가 있다. 박혁거세가 하늘로 승천한 후 시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공중분해~~ 땅에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시신들을 온전히 모아 무덤을 쓰려고 하자 큰 [[뱀]]이 방해하므로 결국 다섯 부위를 따로 묻어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이라 하는데, 사릉(蛇陵 뱀 릉)이라고도 부른다고 서술하였다. 당연히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는 없으니, 설화 속에서 시신을 모으기를 방해한 뱀이 어떤 세력을 상징하지 않는가 해석하기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서기 4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국인(나라 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5체(五體)를 5릉(五陵)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1 오릉은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추측한다. 신라 건국 초기의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니라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이므로 오릉은 신라 초기의 왕릉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이근직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2012년.] 돌무지덧널무덤, 즉 [[적석목곽묘]]로 추정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로 관곽을 만든 뒤 돌을 잔뜩 쌓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만든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목곽이 썩으면 위에 쌓인 돌과 흙의 무게 때문에 붕괴되어 봉분의 정상부가 살짝 내려앉아 편평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다만 봉분 윗부분이 이처럼 평평해지는 것이 꼭 목곽이 썩어야만 생기진 않기 때문에, 실제로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 이상 추측으로 남을 뿐이다. 물론 박씨 가문의 성지와 같은 곳이라 여길 발굴조사하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무덤을 파헤쳐 열어봄은 세계적으로 [[터부]]이지만, 특히 [[유교]]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에서는 그것이 어떤 정당한 이유이든 간에, 가령 학술적인 이유라도 후손들이 결사반대할 일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왕릉급 신라 고분들은 누가 묻혔는지 명확하지 않았던 [[황남대총]], [[천마총]] 등이지, 특정 왕릉으로 비정된 곳을 발굴한 사례는 거의 없다.[* 그 외에 [[신덕왕릉]]처럼 [[도굴]] 피해를 입은 뒤 수습하는 과정에서 내부 구조가 드러나는 경우는 있었다.] [[대한민국]]의 [[박(성씨)|박씨]]는 본관을 막론하고 모두가 계보상 박혁거세의 후손이므로, 그냥 문화재 정도 대우만 받는 다른 대부분 신라 왕릉들에 비해[* 이곳 외에 후손들이 중요시하는 신라왕릉으로는 [[경주 김씨]]의 중시조인 [[경순왕]]이 묻힌 [[경순왕릉]]이 있다.], [[시조]]가 묻힌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성지로서 중요시 한다. 아무튼 발굴조사는 못 해도 겉으로 보기에 무덤 양식이 고고학과 일치하지 않는 이런 모순을 설명하고자 [[눌지 마립간]]대의 ~~치트키~~ "수즙역대원릉(修葺歷代園陵, 역대 왕들의 무덤을 수리하고 보완하다)" 기록을 근거로 원래 있던 무덤을 눌지 마립간 당시 신라에 유행하던 적석목곽묘 스타일로 개축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설도 있다. 오릉 경내에 [[알영부인]]이 [[계룡]]에 의해 탄생한 전설상의 장소인 알영정 [[우물]]과, 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 [[숭덕전]], 조선시대에 세운 왕릉비가 있으며, 능원 서남쪽 소나무숲에는 숭덕전 남쪽에 있던 담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재를 옮겨 놓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박혁거세 탄생설화의 배경인 [[나정]]이 있다. 나정 자리에 있었다고 드러난 신라 [[신궁]] 역시 박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왕들은 즉위하면 1년 안에 신궁에 크게 제사를 지내는 관례가 있었다. 그리고 혁거세부터 사용한 [[금성(동음이의어)#s-2.1|신라 최초의 궁궐 금성]]도 아직 터를 찾지 못했고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일단 [[삼국유사]] 기록상으론 오릉 바로 근처에 있는 창림사 절터 자리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오릉과 후대의 모든 박씨 왕의 왕릉은 거의 천 년 뒤에 즉위한 [[신덕왕]] 등이 묻힌 [[배동 삼릉]], [[경애왕릉]] 등을 포함해 전부 경주 시가지 서남쪽, [[남산(경주)|남산]] 서쪽에 줄지어 있다. 그래서 경주 시가지 서남쪽, 남산 서북쪽의 이 구역이 [[서라벌]] 내에서도 박씨 세력과 특히 밀착된 지역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왕릉 외에 지금 남은 건물들은 조선시대 초반인 1429년 혹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은 것들이다. 또한 매년 [[춘분]]에 신라 역대 박씨왕을 기리는 숭덕전에서 춘향대제(春享大祭)를 여는데, 박씨는 본관에 상관없이 모두 박혁거세 계열에 근간을 두므로 범박씨가 모두 참여한다. 실제 [[고령 박씨]]인 [[박근혜]]도 대통령 당선 전에는 여기에 매년 참석했다. 오릉 주위로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었는데, 별로 넓지도 않은데도 능역에 [[고라니]]가 살아 가끔 관람하다 마주친다.[* 오릉 안내판에도 고라니가 출몰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되어 있다.] [[분류:혁거세 거서간]][[분류:신라왕릉]][[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경주역사유적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