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고려의 임금, rd1=광종(고려), other2=삼국시대(중국)의 인물, rd2=왕소, other3=삼국지연의의 가공인물, rd3=왕소(삼국지연의))]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30년 출생]][[분류:1081년 사망]][[분류:주장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2> '''{{{+1 王韶[br]왕소}}}''' || || '''시호''' ||양민(襄敏) || || '''성''' ||왕(王) || || '''이름''' ||소(韶) || || '''자''' ||자순(子純) || || '''생몰''' ||1030년 ~ 1081년[* 《[[속자치통감]]》에는 1077년이라고 나온다.] || || '''출신''' ||강주(江州) 덕안현(德安縣) || || '''주군''' ||[[송신종]][br]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관료로 자는 자순(子純)이고 호는 부양자(敷陽子)로, 강주(江州) 덕안현(德安縣) 출신이다. 송 휘종 시기 하황을 탈환하는 왕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생애 == 1030년에 태어났고 1057년 진사에 급제했으며, 신안현(新安縣) 주부(主簿), 건창군(建昌軍) 사리참군(司理參軍)을 역임했다. 이후 제과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해 섬서 일대를 돌며 변방의 사정을 속속 파악하였다. 1068년 예궐하여 [[신종(송)|신종]]에게 '''평융책(平戎策)''' 세 편[* 대략적인 내용은 북송이 서하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하, 황 2주를 차지함으로써 서하를 포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토번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해 하황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서하를 양면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을 바쳐 [[서하]]를 공략하는 전략을 상세히 진술했다. 왕소의 평융책은 신종 및 [[왕안석]] 등을 위시한 변법파들의 주장과 일치하여 북송 조정의 높은 중시 및 채택을 받아 진봉로경략사(秦鳳路經略司) 기의문자(機宜文字)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왕안석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하황[* 칭하이 성 일대. 하황 문화로 유명한 지역이고, 황하와 황수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수복의 임무를 맡았다. 당시 대부분의 북송군은 군기가 해이하여 전투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왕소의 통원군은 별개의 존재처럼 전군의 규율이 엄격하고 장병들의 투지가 대단했다. 당시 하황 일대는 청당 지역[* 오늘날 칭하이성 시닝시]의 유용가(俞龍珂)가 이끄는 부족이 제일 강성하였는데, 위원(渭源)의 강족과 [[서하]] 모두 유용가를 자신들에게 종속시키려고 했다. 장수들이 먼저 유용가에 대한 토벌을 의논할 때, 왕소는 변경의 상황을 살피고자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유용가의 장막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강족과 서하에서 수령들을 파견하고 왕소와 함께 떠났으며, 뒤에 유용가가 12만에 달하는 부하들과 함께 귀순하였다. 왕소는 뒤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원(渭源)에서 진주(秦州)까지 경작하지 않은 양전이 1만 경이나 됩니다. 자못 상인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 이득을 취하여 양전을 관리할 수 있도록 시역사(市易司)를 설치하시기 바랍니다. 신종은 왕소의 말을 받아들여 왕소를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전임시키고 왕소에게 관리를 명하였다. 그러나 경략사 이사중(李師中)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왕소가 이렇게 하는 것은 국경의 궁수들이 가진 논밭을 자신이 점유하려는 것이고 또한 장차 시역사를 고위(古渭)로 옮기려는 것입니다. 진주의 사무가 더 번거로워지고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그러나 왕안석은 왕소의 의견을 지지하여 이사중을 파면시키고 후임으로 두순경(竇舜卿)을 앉혔으며, 또한 이약우(李若愚)를 파견하여 사실관계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약우가 도착하여 왕소에게 경작하지 않은 양전의 소재를 물었지만 왕소는 여기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두순경이 확인해보니 양전이 고작 1경 뿐이었고 이마저도 지주가 소송을 당해서 몰수되었다가 뒤에 다시 돌려받은 땅이었다. 이약우가 돌아와서 신종에게 왕소의 보고가 허위였다고 상주하자, 왕안석은 다시 두순경을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후임으로 한진(韓縝)을 앉혔다. 한진은 왕소의 보고가 사실이었음을 알렸고, 결국 이약우와 두순경은 폄적되었으며, 왕소는 태자중윤(太子中允), 비각교리(秘閣校理)가 되었다. 뒤에 [[곽규]](郭逵)가 왕소가 몰래 시역전(市易錢)을 빌렸다고 상주하였으나 왕안석이 곽규의 조사가 부족하다고 여겨 곽규를 경원(涇原)으로 옮겼다. 희녕 5년(1072년), 군사를 이끌고 망망대막(望望大幕)에 들어가 강족 군대와 대결했다. 마방산·죽우령 일대에서, 강족들이 지세를 타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송군을 제압하였고, 이에 송군의 침공이 좌절되자 군사들이 퇴각하려고 하나, 왕소가 몸소 갑옷을 입고 북송군을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송군은 역전을 거듭해 강족들을 격파하였다. 또한 그 이듬해 하주로 진격해 토번군을 격파하고 하주를 수복한다. 이로서 불과 몇 년 사이에 희, 하, 조, 민, 탕, 첩주를 수복하고 2천여 리를 개척함으로써 [[서하]]를 포위하는 기세를 형성한다. 이에 따라 신종이 자신의 패옥을 떼어 왕안석에게 증정하는 한편 왕소를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단명단학사(端學士)로 승진키고 이듬해에는 자정전 학사로 승진시킨 뒤 숭인방을 하사한다. 1074년 토번군이 쳐들어오자 답백성에서 송군이 패하는 등 심각한 상황에 놓이자 희하로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왕소가 반격하여 토번군을 역으로 항복시킨다. 그러나 신법에 폐단이 많자 왕안석이 실각하고 그도 신종과의 갈등 하에서 실각하게 된다.[* [[송월희녕전쟁|송나라와 베트남 이조 간 전쟁이 있던 시기]]에 왕소가 조정을 비난하였으나 이를 알게 된 신종에 의해 좌천되고 만다.] 원풍 2년(1079년), 복직되어 지홍주로 자리를 옮기고 태원군 개국후(開國侯)에 누봉되었으나 중병에 들었다. 원풍 4년(1081년) 6월 24일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시호는 '양민(襄敏)'이다. == 사후 == 1096년 철종이 희하로에 왕소묘를 세웠고 1104년 휘종 시기에는 왕소의 하황 개척 공로로 '충렬'이라는 묘액을 하사받았으며, 1114년에는 태위(太尉)·사공(司空)·연국공(燕國公)으로 추증되었다. == 대표 작품 == 《희하진법》 1권이 있고,《송사·예문지》에 따르면《부양자》 7권과 《왕소주의》 6권을 저술했는데, 지금은 산실되었다고 한다. == 기타 == [[안사의 난]] 이래로 [[토번]]에 빼앗긴 하황 일대를 수복하였으나, [[북송]] 멸망 이후 다른 문인들에게 북송 멸망의 원흉이라고 비난받았다. 왕소가 탈환한 하황은 1081년~1083년부터 지속된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배 이후[* 하필이면 서하를 공격한 사령관이 환관이었던 이헌인 데다가 충악을 비롯한 장수들 간 단합이 되지 않았으며,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 이후에는 [[심괄]], 서희의 주도로 영락성을 수축하려 했다. 이전 영락성을 쌓았던 [[충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희(북송)|서희]]가 이를 무시한 채 영락성을 쌓아 한 곳으로 출격해 서하를 멸망시키려고 하였으나, 서하의 역공을 받아 서희가 패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서하도 경제적으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구법당이 득세하자 구법당은 하황을 토번에 넘겨주었고, 철종 시기 [[왕후(북송)|왕후]]로 하여금 하황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서하와 토번이 합세하여 북송에 대항함으로써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휘종 시기 [[장돈]]과 채경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왕후와 동관[* 왕후의 군대에 감군으로 파견됨]이 청당[* 오늘날 칭하이 성 시닝 시] 지구를 개척하는 등 하황을 토번으로부터 되찾게 되었고, 저 너머 황두회흘까지 점령함으로써 농우도호부가 설립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많은 재정과 군사력이 소모되어,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망하게 된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정강의 변 이후에는 하황을 금과 서하가 동시 관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