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CE774,#FCE774 로마 제국 제128대 황제}}}[br]{{{#FCE774,#FCE774 {{{+1 요안니스 8세}}}[br]Ίωάννης Η}}}'''}}}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0023CE6-87B0-4F6E-9F22-C23C542CF72A.jpg|width=100%]]}}} || || {{{#FCE774,#FCE774 '''이름'''}}}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br]Ἰω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 ||<|2> {{{#FCE774,#FCE774 '''출생'''}}} ||1392년 12월 18일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2> {{{#FCE774,#FCE774 '''사망'''}}} ||1448년 10월 31일 (향년 55세)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2> {{{#FCE774,#FCE774 '''재위 기간'''}}} ||{{{#000 로마 황제}}} || ||[[1425년]] [[7월 21일]] ~ [[1448년]] [[10월 31일]] '''(23년)''' || || {{{#FCE774,#FCE774 '''전임자'''}}} ||[[마누일 2세]] || || {{{#FCE774,#FCE774 '''후임자'''}}} ||[[콘스탄티노스 11세]] || || {{{#FCE774,#FCE774 '''부모'''}}} ||[[아버지]] : [[마누일 2세]][br][[어머니]] : [[엘레니 드라가시]] || || {{{#FCE774,#FCE774 '''배우자'''}}} ||[[안나 바실리예브나]], [[몬페라토의 소피아]], [[트라페준타의 마리아]] || || {{{#FCE774,#FCE774 '''종교'''}}} ||[[그리스도교]]([[정교회]])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의 [[로마 황제|황제]]이자,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제11대 황제. == 생애 == === 재위 초기의 행적 === 부황 [[마누일 2세]]가 [[1425년]]에 사망하자 황위를 물려받았으며, 그가 즉위할 무렵 [[동로마 제국]]은 [[요안니스 5세]] 시절에 세력을 키운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반도로 진출해 영토를 크게 넓히는 바람에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과 [[번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모레아]]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만 남고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나마 마누일 2세 시절까지만 해도 유지되던 [[테살로니키]]는 요안니스가 즉위하기 직전에 오스만의 침공을 받자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양도되었고 [[1430년]]에 함락된다. 같은 무렵, 요안니스의 동생들[* [[콘스탄티노스 11세|콘스탄티노스]],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디미트리오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토마스]]]이 파견된 모레아에서는 [[데스포티스]] [[콘스탄티노스 11세|콘스탄티노스]]가 베네치아에게 예전에 양도된 항구 몇 곳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수복했다. === 피렌체-페라라 공의회 ===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안니스 8세는 [[교황령]]과 협상을 시도하여 [[동방 정교회]]가 서방 [[가톨릭]]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고 [[서유럽]]의 지원군을 불러와 [[오스만 술탄국]]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1437년]]에 요안니스와 동방 주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열린 피렌체-페라라 공의회에 참석했고,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확인한 교황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소집했다. 하지만 이 조건을 알게 된 동방 교회는 매우 거세게 반발했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밖에서는 오스만의 침략과 안에서는 동서교회 통합 찬성파와 통합 반대파의 다툼이라는 내우를 겪게 된다.[* 물론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멸망]]한 뒤 이 조건으로 성립된 동서 교회 통합은 흐지부지된다.][* 다만 이 시기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등 요안니스 8세를 따라온 [[그리스인]] [[학자]]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지식인]] 계층이 자극을 받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발아가 싹트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 [[바르나 전투|바르나 십자군]]의 실패와 죽음 === 교황의 십자군 요청을 수락한 [[폴란드 왕국|폴란드]]와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은 둘로 나뉘어 육군은 오스만이 지배한 [[유럽]] 영토로 향했고, 해군은 [[아나톨리아]] 방면에서 진군하는 [[오스만 제국군|오스만군]]을 막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이 때 [[알바니아]] 등에 퍼진 반(反) 오스만 세력과 싸우던 [[술탄]] [[무라트 2세]][* 이 때 무라트는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한 후 은퇴했으나 십자군과 반란군에 시달리던 아들에게 [[복위]]를 요청받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는 십자군에게 10년 기한의 [[휴전]]을 제안했지만 십자군을 따라간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이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갈 거냐?"며 휴전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자 십자군은 진군을 계속하여 불가리아 동부의 [[바르나(불가리아)|바르나]]에서 오스만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오스만군에게 패배했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왕 [[브와디스와프 3세]], 교황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을 포함한 십자군의 병력이 다수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에 호응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11세|콘스탄티노스]]가 [[모레아 전제군주국|모레아]]에서 [[동로마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십자군을 물리치고 반격해 온 오스만군에게 쫓겨났고, 뒤쫓아온 오스만군은 [[코린토스]] 해협을 넘어 모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갔다. 요안니스 8세는 4년이 지난 [[1448년]]에 사망했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 [[로마 제국]]의 [[망국의 군주|마지막 황제]]로 이름을 남긴다. == 참고 자료 ==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각주] [[분류:동로마 황제]][[분류:팔레올로고스 가문]][[분류:1392년 출생]][[분류:1448년 사망]][[분류:이스탄불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