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의 국보)]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국보|{{{#f39100 대한민국 국보 제291호}}}]]''' || ||<-2> {{{#fff {{{+1 '''용감수경 권3~4'''}}}[br]{{{-1 梁山 龍龕手鏡 卷三~四}}}}}}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 || '''{{{#fff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목판본 / 관판본 || || '''{{{#fff 수량/면적}}}''' || 1점 || || '''{{{#fff 지정연도}}}''' || 1997년 1월 1일 || || '''{{{#fff 제작시기}}}''' || [[고려시대]](11세기) || [[파일:용감수경1.jpg|width=550]] [목차] == 개요 == 龍龕手鏡. [[중국]] [[요나라]] [[성종(요)|성종]](聖宗) 15년(997) [[거란]]의 승려 행균(行均)이 편찬한 한자 [[자전(사전)|자전]]. 현재 [[고려]] 중기에 한국에서 제작된 세계 유일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었고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291호로도 지정되었다. == 내용 == 997년 거란의 승려 행균이 처음 저술한,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자전 중 하나이다. 중국 [[한자]]를 부수별로 먼저 배열하고, 또 같은 각수 안에서는 운(韻)별로 배열하여 여러 가지를 병용하는 방법을 취하였고, 정자 이외의 속자까지도 전부 망라하여 해설을 붙였다. 10세기 중국어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본자(本字) 2만 6430여 자에 주(註)가 16만 3170자에 달하여 자전으로서 가치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요나라 시대의 음운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 역사 == 이러한 용감수경은 중국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멸실되었다가 [[남송]] 때에 와서 용감수감(龍龕手鑑)이란 이름으로 책이 새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요나라 시절 원판본은 더 이상 전해내려오지 않는다고 여겼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초중기까지는 분명 국내에 책이 존재했던 모양이지만, 이후 알 수 없는 경위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어버렸다. 그러다 이 책이 잠깐 다시 등장한 것이 [[조선]] [[세조(조선)|세조]] 시기이다. 당시 고려시대 문화재를 복원하는 사업을 하던 세조가 고려 초에 만든 『용감수경(龍龕手鏡)』 일부를 발견하였고 이에 고려본 『용감수경(龍龕手鏡)』을 저본으로 하여 글자의 수를 증보하고 내용을 교정 및 수정하며, 4권 체제를 8권 체제로 재편집하여 한국 고유의 용감수감으로 간행토록 하면서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세조가 복원했던 이 책 또한 왕이 인쇄토록 했다는 기록만 남은 채 다시 소실되어버렸다. 그리고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 등의 김수온(金守溫)의 발문에 따르면 [[인수대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성종(조선)|성종]] 3년(1472)에 간행한 책의 목록 가운데에 용감수감 50부가 들어있으나 이 책들도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실 세조와 인수대비가 복원했던 고려판본 용감수감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전량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15세기 승려 [[신미(승려)|신미(信眉)]]의 장서인(藏書印)이 있는 《용감수감》이 소장되었는데, 책의 형태 등으로 미루어 세조 초의 간본이라고 추정한다. 늦어도 [[성종(조선)|성종]] 3년(1472) 인출본(印出本)이거나 그보다 앞선 초인본(初印本)이다. 그리고 인수대비가 세조 복원본을 토대로 만든 한국판 용감수감도 일본에 같이 딸려갔음을 확인했다.[[http://kostma.korea.ac.kr/dir/viewIf?uci=RIKS+CRMA+KSM-WD.1472.0000-20140423.TOYO_1494|해외한국학자료센터]] 현재 전량 일본에 소장되어 문화재 지정은 불가능했다. 현재 한국에 남은 것은 16세기 중엽 조선 [[명종(조선)|명종]] 때 만들어진 용감수감으로, 전 세계 학자들은 요나라판 용감수경 원본은 완전히 산실되었다고 여겼다. == 발견 == 그러다 [[최남선]]의 장서에서 이 책이 발견되었다. 나주목관조각사권입구십삼장(羅州牧官雕刻四卷入九十三丈)"이라는 글을 줄을 올려서 쓰고, 다시 줄을 바꾸어 낮게 "사록장서기차양온령권득령(司錄掌書記借良令權得齡)"이라고 새겨져 나주에서 권득령(權得齡) 책임 하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보다 이른 11세기에 [[고려]] [[나주]] 지역에서 만들었음을 확인하였다. 결국 국보 제291호는 『용감수경』의 원형으로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 등 다른 해외에서는 완전히 없어진 요나라 시대 원본이며, 아울러 귀중한 고려본이라는 사실로 인해 1996년 11월 28일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로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30호에서 국보 제291호로 등급이 조정되었다. 이 용감수경은 중국 [[요나라]]의 음운 연구로는 현전하는 유일한 원본 자료이자 [[귀중본]]으로써,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 외부 링크 == * [[https://ko.wikipedia.org/wiki/용감수경|한국어 위키백과: 용감수경]]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9147&cid=46674&categoryId=46674|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용감수경 권3~4]]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207742&cid=51070&categoryId=51070|한국 자전의 역사: 용감 수경]]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93202&cid=60533&categoryId=60533|국어국문학자료사전: 용감수경]]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0000&cid=40942&categoryId=33388|두산백과: 용감수경]] == 국보 제291호 ==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1,02910000,11&pageNo__=5_1_1_0&pageNo=1_1_2_0|문화재청 홈페이지: 용감수경 권3~4 (龍龕手鏡 卷三~四)]] >중국 요나라 성종 15년(997)에 행균스님이 편찬한 한자의 자전이다. > >이 책은 재래 중국의 자전과 달리 부수 별로 먼저 배열하고, 또 같은 각수 안에서는 운(韻)별로 배열하여 여러 가지를 병용하는 방법을 취하였고, 정자 이외의 속자까지도 전부 망라하여 해설을 붙인 것이다. 이 책을 우리나라에서 언제 중간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단지 나주에서 권득령의 책임 하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책의 원형인 『용감수경』은 중국에서는 벌써 없어지고 남송 때에 와서 『용감수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나왔으므로, 요나라 때의 원판본은 일찍부터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발견된 『용감수경』권1과 최남선의 장서 가운데에서 발견된 권3 및 권4가 있었는데, 이 책의 원본은 고려시대에 다시 새긴 본으로 짐작된다. 결국 국보 제291호는 『용감수경』의 원형으로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라고 할 수 있어 1996년 11월 28일 보물 제130호에서 등급이 조정되었다. > >본자가 26,430여 자이며, 주가 163,170자에 달하여 자전으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요나라의 음운 연구에는 유일하므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된다. [[분류:대한민국의 국보]][[분류:고려의 도서]][[분류:조선의 도서]][[분류: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품]][[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