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1 남송의 유학자[br]충국청헌공(忠國淸獻公)[br]{{{+1 游似 | 유사}}}}}}'''}}} || || '''[[시호|{{{#fff 시호}}}]]''' ||청헌(淸獻) || || '''[[작위|{{{#fff 작호}}}]]''' ||충국공(忠國公)^^추봉^^ || || '''{{{#fff 최종직위}}}''' ||상서령(尙書令)^^추서^^ || || '''{{{#fff 공직기간}}}''' ||30년[* 반올림을 하여 30년이다. 실제로는 28년정도] || || '''{{{#fff 재상임기}}}''' ||5년 || || '''{{{#fff 성}}}''' ||유(游) || || '''{{{#fff 이름}}}''' ||사(似) || || '''{{{#fff 자}}}''' ||경인(景仁) || || '''{{{#fff 호}}}''' ||극재(克齋) || || '''{{{#fff 출신지}}}''' ||과주(果州) 남충(南充) || || '''{{{#fff 부친}}}''' ||유중홍(游仲鴻) || || '''{{{#fff 생몰}}}''' ||? ~ 1252년 || || '''{{{#fff 주군}}}''' ||[[영종(남송)|송영종]][br][[이종(송)|송이종]]|| || '''{{{#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 후말기 대 유학자인 인물이다. 자는 경인(景仁), 시호는 청헌(淸獻), 작위는 충국공(忠國公). == 생애 == 유사는 과주(果州) 남충(南充) 사람으로[* 오늘날 쓰촨성 난충.] 어렸을때 부터 근면하고 예의가 바르고 공부를 잘하였다. 공부를 잘하게된 이유는 어린시절 그의 스승이자 친아버지인 유중홍(游仲鴻) 덕분에 글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영종 가정 16년(1223년)에 전시에서 1등을 하고 진사에 합격하여 국자학록(國子學錄)에 진위되었고 이후 대리사직(代理事職)이라는 관직에 제수하였고 종학박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후 중앙 정계에 진출을 하여 한림학사, 우간의대부, 단명전(端明殿) 학사, 기거랑, 선의랑, 추밀원 편수관에 올랐고 과주 통판을 역임하게 되었다. 영종이 사망하고 이종이 황제에 올랐었는데 당시 이종은 성리학이라는 유학에 심취하였고 이후 조정회의를 하거나 강학과 제왕학을 배울때도 몰래몰래 주자(주희)가 쓴 성리학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었는데 그럴때 마다 유사는 이종의 취향을 빠르게 캐치하였고 항상 근무시간이 끝나고 이종의 침소에 드나들어 성리학에 관련한 얘기들을 많이 해주었고 이종은 그럴때마다 웃어주고 호응을 해주었다. 덕분에 의도치않게 출세가도를 달렸고 이종이 어느 관직으로 이동을 하고싶냐고 말했을때 그는 실록원 쪽으로 가서 남송의 역사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기록을 많이 하고싶다. 라고 하여 실록원 수찬으로 관직을 옮겼고 그는 매년 매월 매일 남송의 날씨나 농민들의 생활 그리고 [[금나라]]와 몽골과의 관계 등등을 송사 이종 본기에 기록을 하였다. 이종이 일을 잘하는 유사를 보고 신임을 하였고 [[정청지]]와 함께 동지추밀원사로 승진을 시켰다. 어느날 교행간이 이를 보고 일을 잘하고 근면있는 성실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신임을 하여 중앙 정계에서도 약간 인기가 없던 유사를 국정회의 때마다 불러 일을 잘처리 하는듯이 보여줬고 덕분에 조정 대신들에서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이름을 1번밖에 안들어본 사람이 없는 인물로 나름 인지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후 [[사미원]]이 이를 보고 정청지와 함께 유사도 신임을 하게 되었고 정청지와 함께 사미원이 국정에 관련한 정책을 낼때 뒤에서 보좌를 해주었다.[* 정청지가 오른쪽 후방에서 사미원을 도와줬다 라면 유사는 사미원 왼쪽 후방에서 그를 도왔다. 즉 좌찬성 우찬성 같은 그런 개념이다.] 그렇게 하여 사미원의 사후 1년뒤 정청지가 재상에 올랐고 고토수복을 주장하였을때 그는 신중론자에 정청지는 적극론자의 대표주자가 되어 당파싸움과 논공행상을 이루었다. 그렇게 1234년 정청지의 주도로 금나라 재북벌을 시도하였고 명장 [[맹공]]이 활약을 했다. 그렇게 1년뒤 1235년 단평의 입락이 종료되고 남송은 배상금과 영토할양을 하였고 정청지는 좌천되어 지방 관직으로 전출을 갔다. 그렇게 정청지가 없는 사이 2인자였던 유사가 재상직에 앉게 되었고 우승상 겸 추밀사가 되었다. 이후 2번씩이나 재상에 올라 죽은 사미원 대신 이종의 정치를 보좌해주었다. 그후 재상직을 물러나 예천관사(醴泉觀使)와 시독(侍讀)을 겸하게 되었다. 그렇게 순우 11년(1252년)에 일을 하다 과로로 쓰러졌고 심정지로 사망을 하였다. 사후 상서령이라는 관직에 추서되었고 충국공이라는 작위와 청헌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25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