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수도방위사령관)] ||<:>{{{#000000 '''역임한 직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국군기무사령관, 명칭=육군방첩부대장)] [include(틀:역대 한국도로공사 사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E475, #FFE475 20%, #FFE475 80%, #FFE475);" '''[[수도방위사령관|{{{#000 제3대 수도경비사령관}}}]][br]{{{#000 {{{+1 윤필용}}}[br]尹必鏞 | Yoon Phil-yong}}}'''}}}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윤필용.jpg|width=100%]]}}} || || '''본관''' ||[[파평 윤씨]] || ||<|2> '''출생''' ||[[1927년]] [[3월 10일]]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63529|윤구용]](尹九鏞)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2534|윤병림]](尹炳林)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200&key=20110415.22028191804|#]] || || '''사망''' ||[[2010년]] [[7월 24일]] (향년 83세) || || '''학력'''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2 (졸업)}}} || ||<-2> '''군사 경력''' || || '''임관''' ||[[육군사관학교]] {{{-2 (8기)}}} || ||<|2> '''복무''' ||대한민국 육군 || ||[[1949년]] ~ [[1973년]] || || '''최종 계급''' ||이등병 {{{-2 (대한민국 육군)}}}[*불명예전역] || || '''최종 보직''' ||수도경비사령관 || || '''주요 보직''' ||[[제5보병사단]] [[군수참모]][br][[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직무대행[br][[안보지원사령관|육군 방첩대장]][br][[제20보병사단|제20보병사단 사단장]][br][[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사단 사단장]]||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정치 [[군인]]. [[종교]]는 [[불교]].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친위대]]인 [[하나회]]를 관리하고 군 인사 문제를 박정희와 상의하는 등 군부 실세로 군림했지만, 말 한번 잘못했다가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당했다.[*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아닌 일개 수도방위사령관이 군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행태만 보더라도 [[군부]]의 실세라 할 수 있었다. 이는 나중에 하나회 등 [[불법]] 사조직 발생을 막기 위해 장성급 인사 추천권은 민간인 출신인 [[안보]]수석이나 [[국가안보실장]]에게 위임하는 사례의 근거 중 하나가 된다. 사실 이런 이상한 군 인사 처리는 근본적으로 [[5.16 군사정변]] 자체가 육군사관학교 8기생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1961년 당시에 8기생들 대부분이 [[중령]]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박정희도 육군사관학교 2기 출신이라 육군참모총장들이 [[대한민국 대통령]]하고 동기나 기수 차이가 별로 안나는 [[군대]] 선후배들이었다. 더욱이 10기까지는 군 경력자가 많이 필요했던 건군기의 특성 상 수료 기간이 4년이 아닌 몇 개월에 불과해 기수 간 차가 더욱 적었다. 특히 박정희 말년의 육군참모총장인 [[이세호]] 대장 같은 경우는 아예 대통령 [[친구]]라서 인사안이 거의 승인되었다.] == 생애 == 1927년 3월 10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였고 [[제5보병사단|5사단장]] 박정희 [[준장]] 휘하에서 [[군수참모]]로 있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를 지냈으며 1965년 [[육군]] [[국군기무사령부|방첩대]]장(현재의 [[국군방첩사령부]] [[사령관]])에 보임되자마자 [[원충연 반혁명 사건]]을 파악하고 사전에 모조리 제압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샀다. 1968년 [[1.21사태]] 때 방첩대에서 [[김신조]]를 수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신조의 "내레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디요"라는 발언을 여과없이 [[방송]]에 내보냈다가 경질되었다.[* 후임 방첩부대장이 바로 [[제6군관구사령관]]이었던 [[김재규]] [[소장(계급)|소장]]이다.] 그 후 [[제20기계화보병사단|20사단장]], [[베트남]] 파병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장]]을 지내고 1970년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관]]으로 보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손영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인 [[하나회]]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1년 8월 육군보안사령관 [[김재규]] [[중장]]의 지시로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 요원들이 자신의 [[전화]]를 도청한 사실을 적발하고 보안반 요원들을 내쫓았다. 이때 모 [[대장(계급)|4성 장군]]이 그의 집에 [[세배]]를 할 정도의 위세를 누렸으나 1973년 4월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를 갔다 와서 [[태종무열왕|왕]]이 되었듯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북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왔잖소. 각하께서 연로하시니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이후락 형님은 중앙정보부장이 어울리지 않는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박정희|영감]]이 [[5.16 군사정변|혁명]]할 때 나이가 몇이었지"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청와대에 찍혀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육군보안사령관 [[강창성]] 소장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된다. 이후 [[계룡대|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법률)|재판]]에서 쿠데타 모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업무상 [[횡령]],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개 죄목이 적용되어 [[징역]] 15년형(...)과 벌금·추징금 약 2,600만원을 선고받았다.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을 포함한 [[장군]] 3명과 [[장교]] 10명에게도 징역형이 내려졌으며 이로 인해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무더기로 [[군복]]을 벗었다. 한국 현대사의 권력 [[스캔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건은 '''[[윤필용 사건]]'''이라고 불리는데,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쪽에선 [[박종규]]가 [[이후락]]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후 윤필용은 수감된지 2년 뒤인 1975년 [[석방]]되었다. 1980년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집권하자 전두환의 도움으로 [[한국도로공사]] 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10년 7월 24일 [[사망]] 직후에 아들인 미주제강 회장 윤해관이 [[재심]]을 청구하였고, [[보안사]]의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대중매체에서 ==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성우 [[박웅(배우)|박웅]]이 연기했다.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다.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배우 [[민지환]]이 연기했다. == 기타 == *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실세라도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간 어떻게 몰락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인물이다.[* 사실 입을 함부로 안 놀려도 박정희 자체가 2인자 견제에 거의 강박증까지 느끼고 있던 인물이었던지라, 박정희하고 친인척인 [[김종필]]만 해도 가택수사까지 당하는 등 지독한 견제에 시달려 결국엔 정계은퇴 수준으로 밀려나긴 했다. 그나마 김종필이 윤필용보단 노련한 면이 있어서, 견제 당하면서도 직접적인 처벌까진 받지 않았다는 차이는 있다.] 특히 [[이후락]]과의 술자리에서 '[[각하(호칭)|각하]]께서 물러나시면 형님(이후락)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취중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대한민국이 [[독재]] 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 발언의 의도가 어쨌건 쿠데타 모의 혐의로 뒤집어씌우기엔 부족할 것 없는 발언이었다. 더군다나 윤필용은 당시 세간으로부터 '필동 [[대한민국 육군본부|육본]]', '[[청와대]] 밖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박정희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꼴이 되니 대노한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도 "아니 윤 장군이 어째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윤필용을 힐난할 정도였으니 당시 청와대의 분노가 얼만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본인들도 쿠데타로 집권한건 함정.-- 윤필용의 경우에는 박정희가 군인인 시절부터 발탁되어 수십 년간 박정희를 보좌했으며, 군 인사 문제를 다른 사람도 아닌 윤필용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만 봐도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됐든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숙청되었고, [[이후락]]도 윤필용 사건 이후로 윤필용과 공모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역]]을 꾀한 [[역적]] 아니냐는 [[낙인]]이 찍혀버려 언제 중앙정보부장에서 쫓겨날지 모를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과하게 입증하기 위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획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물론 과정이 들켜버려 국내외적으로 독재 정권이란 쐐기를 박고 개망신을 초래하지만 말이다. * 2005년, 국적과 관련된 [[병역기피]] 문제와 관련한 [[국적법]] 개정으로 국적포기가 잇따르는 것과 관련한 [[PD수첩]]의 취재가 있었는데, 이때 PD수첩이 윤필용에게 찾아가 손자의 국적포기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https://youtu.be/4lac2WWXw8g|#]], 15분 40초 이후의 인터뷰.) 이 인터뷰에서 윤필용은 "모르겠어, 공부할려고 그러겠지", "세상이 이렇게 좁아졌는데 국적포기 하면 어떻고 안하면 어때" 라고 말하면서, [[530GP 사건]]에 대해서는 "미친 X이 저지른 단순한 사고인데 왜 위문하러 가냐"고 말했다. [[분류:한국도로공사 사장]][[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청도군 출신 인물]][[분류:파평 윤씨]][[분류:1927년 출생]][[분류:2010년 사망]][[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경북고등학교 출신]][[분류:박정희 정부/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