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의경세자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include(틀:조선 추존왕 및 추존령)]}}}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세조(조선)|{{{#ffd400 조선 세조조 왕세자}}}]][br]{{{+1 의경세자 | 懿敬世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추존 국왕[br]{{{+1 덕종 | 德宗}}}'''}}}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rince_Successor_Uigyeong.jpg|width=100%]]}}} || ||<-2> {{{-2 경릉 전경}}} || ||<|2> '''출생''' ||[[1438년]] [[10월 12일]][* [[율리우스력]] [[10월 3일]].][br](음력 [[세종(조선)|세종]] 20년 9월 15일)|| ||[[한성부]] [[경복궁]][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2> '''책봉''' ||[[1455년]] [[9월 16일]][*A [[율리우스력]] [[9월 7일]].][br](음력 [[세조(조선)|세조]] 1년 7월 26일)||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2> '''사망''' ||[[1457년]] [[9월 29일]][*B [[율리우스력]] [[9월 20일]].] (향년 18세)[br](음력 [[세조(조선)|세조]] 3년 9월 2일)||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경복궁 자선당 정실]][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 '''능묘''' ||의묘(懿墓) → [[경릉]](敬陵)||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 ||[[1455년]] [[9월 16일]][*A] ~ [[1457년]] [[9월 29일]][*B][br]{{{-2 (음력 [[세조(조선)|세조]] 1년 7월 26일 ~ 세조 3년 9월 2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현동(賢同) → 숭(崇) → 장(暲) || || '''부모''' ||부왕 [[세조(조선)|세조]][br]모후 [[정희왕후]] || || '''형제자매''' ||4남 [[의숙공주|1녀]] 중 장남 || || '''배우자''' ||[[소혜왕후]][* 배우자가 각종 드라마에서도 그 유명한 [[인수대비]]이다.] || || '''후궁''' ||[[귀인 권씨(덕종)|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 || '''자녀''' ||[[월산대군|2]][[성종(조선)|남]] [[명숙공주|1녀]]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자''' ||원명(原明) || || '''군호''' ||도원군(桃源君)[*C 군호는 [[강원도]] [[정선군|정선]]의 옛 지명인 도원군(桃源郡)에서 따왔다.] || || '''묘호''' ||'''[[덕종]](德宗)''' || || '''시호''' ||'''[[조선]]''': 의경세자(懿敬世子)[br]→'''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br]('''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굵은 글씨는 [[1475년]] [[성종(조선)|성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 ---- '''[[명나라|명]]''': 회간(懷簡)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세조(조선)|세조]]의 적장자이자 [[성종(조선)|성종]]의 아버지. [[묘호]]는 덕종(德宗). 왕손 시절 군호(작위)는 도원군(桃源君). 정실부인이 바로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소혜왕후)다. 1살 연상의 정실부인이였던 소혜왕후와는 5년간의 짧은 [[결혼]] 생활 동안 3명의 자녀들을 둘 만큼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슬하에 [[월산대군]], [[명숙공주]], [[성종(조선)|잘산대군]] 등 2남 1녀를 두었다. 이외에 [[왕세자|세자]] 시절 아버지 [[세조(조선)|세조]]의 명으로 정식으로 간택한 [[귀인 권씨(덕종)|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등 3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다. 자식복이 있어서 두 아들인 [[월산대군]]과 [[성종(조선)|잘산대군]]은 학식과 덕망이 깊고 인품이 훌륭한 수재들이었고 두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사후에 차남인 [[성종(조선)|성종]]의 강력한 의지로 [[왕]]으로 [[추존]]되는데 조선 최초의 왕세자 출신 추존왕이기도 하다.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의 시아버지이고 [[세종(조선)|세종]]의 첫 손자이다. [[단종(조선)|단종]]의 사촌형이며[* 동생이 아니다.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단종의 아버지 [[문종(조선)|문종]]보다 3살 어리지만 덕종(의경세자)이 단종보다 3살이 많다.]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의 할아버지이다. 동생인 [[예종(조선)|예종]] 다음의 왕들은 모두 의경세자의 직계 [[후손]]이므로 의경세자는 [[세조(조선)|세조]]와 함께 조선 [[왕조]]의 중시조이다. == 생애 == [[1438년]](세종 20년) [[9월 15일]], 아버지 [[세조(조선)|세조]]와 어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적장자|장남]]으로 태어났다. 법도로 따지면 세자가 아닌 일반 [[왕자]]의 부인으로서 장차 분만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대궐 밖 저택으로 나가야 되었지만, [[정희왕후]]는 특히 양궁([[세종(조선)|세종]]과 [[소헌왕후]])의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의경세자를 금중(禁中)에서 낳았다. 할아버지 [[세종(조선)|세종]]의 첫 손자이며 친히 '''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받았고 [[세종(조선)|세종]]이 친히 안고 데리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다른 왕손과 달리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은 숭(崇)이었는데 후에 장(暲)으로 고쳤으며, 자는 원명(原明)이다. [[1445년]](세종 27년) 도원군(桃源君)[*C]에 봉해졌고 [[1455년]](세조 즉위년), 아버지 [[수양대군]]이 사촌동생 [[단종(조선)|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왕사|왕]]으로 즉위하자 [[왕세자|세자]]가 되었다. 그는 체격이 준수하면서 숙성(淑成)하고 용모가 단아했으며 의표(儀表)가 아름답고 온량(溫良) 공경(恭敬)하여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해서]]를 잘썼다. 의경세자는 아버지 [[세조(조선)|세조]]와는 다르게 성품이 바르고 온화해서인지 생전에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평판이 좋았으며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착했다고 전해진다. 의경세자는 학업을 즐기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하루 3번씩 서연관[* 세자를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다. 보통 명망이 있는 신하들을 기용하고 세자의 스승이 되어 세자의 공부와 그 공부에 대한 평가를 한다. 그리고 이 신하들은 보통 종3품~정2품의 당상관으로 임명된다.]을 불러 강론(講論)하였다. 일찍이 서경(書經)을 읽다가 순전(舜典) 기형주(璣衡註)에 이르러 그 제도가 [[문자]]만으로는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즉시 서연관과 더불어 간의대(簡儀臺)에 올라가 [[혼천의]](渾天儀)를 관찰하고 서경(書經)에 실린 바와 더불어 참고하고 증험(證驗)하여 애체(礙滯)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글을 읽을 때에도 다 그러하였으니 의심이 나면 반드시 묻고 물으면 반드시 살피었다. [[세조(조선)|세조]]가 직접 사부(師傅) · 빈객(賓客)과 서연관을 선임하여 교양하는 법을 다하였고 [[세조(조선)|세조]]가 일찍이 "병진(兵陣)은 [[전주 이씨|우리 가업]]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친히 황석공(黃石公) 등의 서적을 주니 성훈(聖訓: 부왕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간직해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이 날로 진취(進就)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렀다. 세조가 일찍이 제릉(齊陵)[* [[세조(조선)|세조]]의 증조모할머니이자, [[태종(조선)|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가 묻힌 함경도 함흥에 위치한 제릉을 말한다.]을 알현하고 인하여 대수(大蒐: 봄철에 크게 수렵을 행함)를 하였는데 세자에게 명하여 [[한양도성|도성]](都城)에 남아 지키게 하고 부절(符節)을 주어 일을 전결(專決)하게 하였더니 일이 모두 합당하였다. [[1456년]](세조 2년) 여름에 [[명나라]] 전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세조(조선)|세조]]에게 고명(誥命)을 주었고 [[1457년]](세조 3년) 여름에는 지금의 [[황제]]가 한림 수찬(翰林修撰) 진감(陳鑑) 등을 보내어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두 사신이 의경세자의 의관(儀觀)의 훌륭함과 예법의 자상함을 보고 다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매일 [[닭]]이 울면 [[세조(조선)|양]][[정희왕후|궁]](兩宮)을 찾아 침소를 문안(問安)하고 시선(視膳)하며 화열(和悅)에 찬 효도를 다하였고 여러 숙부를 공경히 섬기고 [[예종(조선)|형제]]간에는 신의 있는 우애를 행하였으며 좌우의 사람에 대해서는 어질면서 위엄이 있었고 [[사대부]]를 접대함에는 공손하면서 예절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 [[세조(조선)|세조]]께서 일찍이 검약(儉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니 무릇 여마(輿馬)·의복의 차림을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도록 힘쓰고 사치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원량(元良: 세자)으로서 덕을 극진히 갖추어 민심이 귀의(歸依)하는 바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병약(病弱)하여 잔병치레를 자주 했고 [[1457년]](세조 3년) 병이 크게 들어 [[세조(조선)|세조]]의 명으로 21명의 [[승려]]가 [[경복궁 경회루|경회루]]에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의정부]] 당상관 및 6조 판서와 좌찬성 [[신숙주]], 도승지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다. [[서예]]를 잘했던 병이 든 의경세자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였던지 지필(紙筆)을 찾아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芍葯)이 주란(朱欄·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당현종|명황(明皇)]]이 [[안록산의 난|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裝·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 라는 [[시]](詩)를 썼는데 세자를 [[간호]]하던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며 매우 걱정했다. [[세조(조선)|아버지]]의 [[왕위]] 찬탈 과정을 지켜본 [[세자]]의 중압감을 표현한 글이라고 했으니 [[조선시대]]에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월산대군]]과 [[성종(조선)|성종]] 형제의 아버지답게 의경세자도 시문에 능했던 것 같다. 세조와 의경세자는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늘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까운 부자 지간이였다. 그 예시로 의경세자가 병이 들었을 때 [[세조(조선)|세조]]는 자신이 [[조선/왕사|임금]]이 되기 전의 집인 사가에 세자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조(조선)|세조]] 스스로도 거처를 옮겨 의약품을 챙기는 등, 친히 의경세자의 병구완을 했다. 10여 일 뒤 병세에 잠깐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세자를 돌본 측근들에게 후한 상급까지 내렸다. 어머니인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화원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했는데,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전에 그려두었던 장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추후에 성종이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봉안하려고 할 때, 반대파에 맞서서 성종의 편이 되어주고 추존이 성사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457년]](세조 3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는데, 세는나이로 계산하면 겨우 20대에 들어설 시기에 [[사망]]한 셈. 사후 아버지 세조로부터 의경세자(懿敬世子)[* 시호 '의경'은 아버지 [[세조(조선)|세조]]가 직접 내린 것으로 '온화하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의(懿)'''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는 의미이다.]라는 [[시호]]를 받았다. [[세조(조선)|세조]]는 죽은 맏아들을 위해 친히 여러 차례 [[묘]]자리를 찾아 다니기까지 했는데[* 이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세조가 [[풍수지리]]에 있어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묘자리를 알아보는데도 관여한 바 있었다.], 세조가 의경세자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경세자가 사망한 뒤 왕통은 그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아닌 동생인 [[예종(조선)|예종]]에게 넘어갔으며, 이는 [[왕위 계승의 법칙]]인 종법제에서 어긋나는 행위였지만 딱히 반발은 없었다. [[세조(조선)|세조]]의 [[왕권]]이 워낙 강력하기도 했고 어린 [[단종(조선)|단종]]에게서 [[조선/왕사|왕위]]를 [[계유정난|찬탈하는 일]]을 거든 중신들로서도 종법을 따지며, 의경세자의 장남이지만 어린 [[월산대군]]을 [[후계자]]로 밀어붙일 이유가 없었다. 또한 세조가 의경세자와 그 [[가족]]을 매우 아낀 것은 사실이기에 '주상이 세자를 홀대하고 차남을 총애해서 승계했다'라는 식의 뒷말도 나오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자 덕종 승하하는지 11년후인 1468년([[세조(조선)|세조]] 11년) [[예종(조선)|예종]]에 왕위에 오르자 하루만에 [[세조(조선)|세조]]가 부왕에 사망하였고 1년후인 1469년([[예종(조선)|예종]] 1년) 덕종 동생인 [[예종(조선)|예종]]도 왕위까지 마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차남 [[성종(조선)|자을산군]]의 즉위 이후인 [[1470년]](성종 원년) 왕으로 [[추존]]되어 의경왕(懿敬王)이 되었다가 5년 뒤 대왕으로 추숭되고 [[명나라]]로부터 정식 [[시호]]를 받았으며 같은 해 '''덕종(德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차남인 [[성종(조선)|성종]]은 태어난지 2달만에 아버지 의경세자를 여의여서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평소에 아버지를 굉장히 그리워하고 사모했다고 한다. 성종은 [[조선/왕사|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의경세자의 초상화를 처음 봤는데 이 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초상화를 그린 화원 최경에게 높은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할 정도로 자신의 친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성종은 [[법|법적]]으로는 작은아버지 [[예종(조선)|예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해 즉위하였지만,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위해서 왕으로 추존하고 결국 [[종묘]]에 봉안까지 하게 된다. 이 과정은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의 반대 [[상소]]도 빗발쳤으나 [[성종(조선)|성종]]의 확고한 의지로 밀어붙여서 일을 성사시킨다. 의경세자의 [[묘호]]를 정할 때 의정부와 6조의 참판 이상의 모든 고관들이 모여 장종(章宗)·효종(孝宗)·안종(安宗)으로 묘호를 올렸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성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獻宗)으로 올리니 생전에 덕망과 인덕이 높았던 것을 고려해서 비로소 '덕종(德宗)'으로 정하고 왕으로 [[추존]]된다. 조선에서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가 임금으로 추존된 최초의 사례이다. 능은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西五陵, 사적 제198호) 경내에 있다. == 가계도 == * 증조부 : [[태종(조선)|태종]](太宗, 1367 ~ 1422) * 조부 : [[세종(조선)|세종]](世宗, 1397 ~ 1450) * 조모 : [[소헌왕후]] [[청송 심씨|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 ~ 1446) * 부 : [[세조(조선)|세조]](世祖, 1417 ~ 1468) * 모 : [[정희왕후]] [[파평 윤씨|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 ~ 1483) * 정비: [[소혜왕후]] [[청주 한씨|한씨]](昭惠王后 韓氏 / 仁粹大妃, 1437 ~ 1504) * 장남: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 ~ 1489) * 며느리: [[승평부대부인]] [[순천|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1455 ~ 1506)[* [[박원종]]의 누나, [[장경왕후]]의 이모이다.] * 며느리(첩) : 부부인 [[원주 김씨]](府夫人 原州 金氏) * 서손자: 덕풍군(德豊君, 1485 ~ 1506) * 장녀: [[명숙공주]](明淑公主, 1456 ~ 1482) - 당양위 [[남양 홍씨|홍상]](唐陽尉 洪常)에게 하가 * 차남: [[성종(조선)|성종]](成宗, 1457 ~ 1494) == 기타 == * [[단종(조선)|단종]]을 [[계유정난|몰아낸 것도 모자라서 살해한 것에 대한 업보]]로 세조의 형수(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저주를 내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야사에서는 이에 더해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를 향해 침을 뱉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 [[세조(조선)|세조]]가 침이 뱉은 자리에 피부병('''[[한센병]]''')이 발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숙주]]의 아내가 [[사육신]]을 배반한 [[신숙주]]를 부끄러이 여겨서 [[자살|자결]]했다는 야사와 더불어 가장 많이 퍼진 [[야사(역사)|야사]]. 그런데 실제로 의경세자는 [[단종(조선)|단종]]이 죽기 1달 전에 죽었다. 신숙주의 아내도 [[사육신]]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죽었다. 정사에 따르면 신숙주가 [[명나라]] 사절로 떠났을 때 [[수양대군]]이 "그대의 공로에 깊은 감사를 표하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대의 부인이 병으로 작고했소."란 편지를 직접 보냈다 한다. * 의경세자 뿐만 아니라 아우 [[예종(조선)|예종]]도 19세에 죽어 [[세조(조선)|세조]]의 적자는 모두 같은 나이에 요절했다.[* 단, 서자들인 [[덕원군]]과 [[창원군]]은 무난히 20대를 넘기며 오래 살았다. 특히 덕원군은 세조의 적·서자를 포함한 4남 1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50세까지 살면서 가장 장수했다.] 또한 세조의 손자녀들인 [[월산대군]](35세)과 [[성종(조선)|성종]](38세), [[명숙공주]](28세)도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다. [[제안대군]]만이 오래 살며 부인과 해로했으나 대신 슬하에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제안대군은 육순에 도달한 나이에 사망). 이 때문인지 [[성종(조선)|성종]]~[[연산군]] 시대에는 왕실에 유난히 '젊은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 대중매체 == * 1970년 개봉한 영화 <세조대왕>에서는 배우 [[이순재]][*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와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2번이나 [[김종서(조선)|김종서]] 역할을 맡으면서 [[유동근]]의 얼굴을 한 수양대군에게도 당하고 [[김영철(배우)|김영철]]의 얼굴을 한 수양대군에게도 당하며 2번이나 의경세자의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죽임당한다.]가 연기했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서는 배우 박병훈이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배우 [[윤다훈]]이 연기했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이광기]][*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의경세자의 숙부인 [[안평대군]] 역.]가 연기했다.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권현상]]이 연기했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는 배우 [[백성현]][* 여기서는 성종도 연기해서 1인 2역.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소현세자]] 역.]이 연기했다. 아버지인 세조와 대립하는 관계로 나온다. * 2017년 개봉한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에서는 배우 [[박정민(배우)|박정민]]이 연기했다. [[분류:1438년 출생]][[분류:1457년 사망]][[분류:조선의 왕세자]][[분류:조선의 추존 왕]][[분류:즉위하지 못한 계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