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924년 출생]][[분류:988년 사망]][[분류:창즈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include(틀:동도사략)] [목차] == 개요 == 李崇矩 (924년 ~ 988년)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장수로 자는 수칙(守則)이다. 노주(潞州) 상당현(上黨縣) 출신. == 생애 == === 초기 생애 === 이숭구는 어린 시절에 외롭고 가난했지만 선행이 있어서 이숭구의 고향 사람들이 이숭구를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뒤에 [[유지원]]이 진양에서 거병하고 상당에 주둔할 때 유지원의 선봉도교로 있던 사홍조가 이숭구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사홍조가 금병을 거느리고 경성순검(京城巡檢)을 겸할 때 군민들을 잔인하게 죽이자, 사홍조의 부하들은 사홍조를 두려워하여 점점 사홍조의 밑을 떠난 반면 이숭구는 더욱 신중하게 사홍조를 받들어서 사홍조가 죽은 뒤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 후주 시기 === 사홍조와 교분이 두터웠던 [[후주]]의 태조 [[곽위]]는 사홍조의 옛 관리들을 찾을 때 이숭구를 만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사홍조는 [[후한(오대십국시대)|한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함께 힘을 합쳐 왕실을 장려하고 도왔지만 간사한 이들에게 참소를 당하여 사홍조는 결국 큰 재앙을 입었고 나 또한 겨우 재앙을 벗어났소. 그대는 사홍조의 옛 관리이니 나를 위해 사홍조의 친척들을 찾아주시오. 내가 장차 그들을 위로하겠소. 이숭구는 사홍조의 외삼촌 복(福)[* 이름이 복으로 성은 불명이다.]을 곽위에게 천거하였다. 이숭구는 본디 사홍조의 집안일을 주관해서 사홍조의 집안 재산을 모두 모아 복에게 주었다. 곽위는 이숭구를 칭찬하여 그를 자신의 양자 [[시영]]의 막하에 두었다. 954년 시영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세종이었다. 이숭구는 공봉관(供奉官)으로 보임되었으며, [[고평 전투]]에서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로 전임되고 작방사(作坊使)로 전임되었다. 959년 세종의 4남 [[시종훈]]이 즉위하니 이가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였다. 이숭구는 시종훈이 즉위한 뒤 [[남당]]으로 가서 시영의 죽음을 알렸으며, 돌아와서 판사방관사(判四方館事)가 되었다. === 송태조 시기 ===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난 뒤 후주의 전전도점검 조광윤이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북송을 세운다. 이때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후주의 구신 [[이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숭구는 [[태조(송)|태조]]을 받아 금군 수천 명을 이끌고 하양(河陽)에 주둔했다. 그리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어 대회채(大會砦)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500명을 참수하였으며, 택로남연행영전군도감(澤潞南面行營前軍都監)으로 전임되고 [[석수신]], [[고회덕]], [[나언괴]]와 함께 연자곡(碾子谷)에서 이균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균이 평정된 뒤 이숭구는 태조의 명으로 먼저 입성하여 도책을 보관하고 창고를 관리했다. 이때 이숭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당은 소신의 고향입니다. 소신의 아버지가 아직 마른 풀에 묻혀 있으니, 제가 아버지의 관을 수도로 호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태조는 이숭구의 요청을 허락하고 이숭구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이숭구가 회군할 때 마침 판삼사(判三司) [[장미(북송)|장미]]가 전출되자, 이숭구는 우감문위대장군(右監門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삼사사(三司使)를 맡았다. 이숭구는 같은 해 [[이중진]]을 토벌할 때도 참전했으며, 돌아와서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가 되었고 여전히 판삼사를 맡았다. 964년, 조보를 대신하여 추밀사(樞密使)로 임명되었다. 967년,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더해졌다. 당시는 [[후촉]]이 평정된 뒤로 금군을 이끄는 장수인 여한(呂翰)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많은 망명한 군인들이 이숭구의 군중에 있어서 그들의 처자를 주벌하라는 상주가 조정에 올라왔다. 태조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이숭구를 불렀다. 이때 이숭구와 태조 사이에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 >이숭구: 반역한 이들은 당연히 자손까지 주륙해야 합니다만 명부를 살펴보면 만여 명이 주륙되어야 합니다. >태조: 짐은 단지 그들이 여한에게 휘둘려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자신의 본심이 아니라고 할까 걱정이오. 이숭구의 말을 들은 태조는 모두 풀어주도록 명하였으며, 여한은 이 소식을 듣고 부하들이 점점 귀순하였고 여한은 결국 패망하였다. 이숭구는 개보 연간 초에 북송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을 정벌할 때 종군하였으며, 북송군이 회군할 때 후미를 맡았다. 하지만 상산(常山)에 이를 때 이숭구는 병에 걸려 태조가 태의(太醫)를 보내 이숭구의 병세를 살폈으며, 양거(凉車)에 올라 개봉부로 돌아오도록 명했다. 이숭구는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사양하였다. >양거는 천자의 수레인데, 소신를 양거에 태우는 것은 소신의 죽음을 재촉하려는 것입니다. 당시 조보가 태조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이숭구는 자신의 딸을 조보의 아들인 조승종(趙承宗)에게 시집보내 사돈 관계가 되면서 조보와 서로 친분이 두터워졌다. 하지만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당시 이숭구의 문하에는 정신(鄭伸)이라는 인물이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문객으로 있었는데, 정신은 성품이 음험하고 간사한데다 품행도 나빠서 이숭구는 정신을 점점 박대하였다. 정신은 자신을 박대하는 이숭구를 원망하여 태조에게 글을 올려 이숭구의 음모를 고발하였다. 정신의 고발문이 올라오자 이숭구는 여기에 대해 제대로 변명하지 못했으며, 태조는 이숭구를 석방하여 불문에 부치고 진국군절도사(鎭國軍節度使)로 전출시켰으며, 정신에게는 진사출신을 내리고 산조현(酸棗縣) 주부(主簿)로 삼고 예기와 비단, 습의(襲衣),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973년, 이숭구는 다시 입조하여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이 되었다. === 태종 재위기 === 976년 태조가 죽고 태조의 아우인 진왕 조광의가 즉위한다. 977년, 황하의 제방이 자주 터지자 이숭구는 [[태종(송)|태종]]의 명으로 제방을 순시하였으며, 옹귀심빈횡흠6주도순검사(邕貴潯賓橫欽六州都巡檢使)로 전출되고 다시 경애첨만4주도순검사(瓊崖儋萬四州都巡檢使)로 옮겼다. 부하 군사들이 이숭구를 꺼리자, 이숭구는 그릇과 금백을 모두 내어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여적(黎賊)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숭구는 여적의 동굴로 가서 여적을 위무하고 자신의 재산을 추장에게 주기도 했다. 조정으로 돌아온 뒤 우천우위상장군(右千牛衛上將軍)이 되었다. 986년, [[송악(북송)|송악]]을 대신하여 판우금오가장(判右金吾街仗)로 임명되고 육군사사(六軍司事)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986년 사망하여 태위(太尉)로 추증되고 원정(元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