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대한민국의 정치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원조(정치인))] == 대한민국의 미국변호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원조(변호사))] 정치인 [[박영선]]의 남편이다. == 문학 평론가 == || [[파일:이원조 선생.jpg|width=200%]] || [* 한때 이 사진이 [[구마적]]의 사진으로 잘못 알려져왔다.] 李源朝 [[1909년]] [[6월 2일]] ~ [[1955년]]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본관은 [[진성 이씨|진성]](眞城)[* 원촌파(遠村派) 21세 원(源) 항렬.], 자는 해경(海卿), 호는 여천(黎泉), 임목아(林木兒)이다. [[이육사]]의 동생으로 유명하다. 1909년 6월 2일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現 [[안동시]] [[도산면(안동)|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李家鎬, 1878 ~ 1941. 4. 26)와 어머니 [[김해 허씨]] 허길(許吉, 1876 ~ 1942. 4. 29)[*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해 거의한 [[13도 창의군]](정미의병)의 의병장 [[허위(독립운동가)|허위]]의 사촌 형 허형(許蘅)의 딸이다.] 사이의 7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기 [[장릉(김포)|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한문을 배웠고, 자라서는 [[정인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이때 정인보로부터 '장안(長安) 3재(才)의 1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주가 비상했다고 한다. 이후 [[독립유공자]] [[이관용(독립운동가)|이관용]]의 딸인 이정원(李貞媛)과 결혼했다. 좌익계의 문학 평론가로, 처음에는 [[조선일보]]의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부문에 입선한데 이어 1929년 동 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부문 가작에 당선되며 문예 활동으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이후 시, 소설보다는 문예 비평 쪽에 더 관심을 가지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5년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했다. 좌익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카프]]에 참여한 인물은 아니지만 카프계와 유사한 노선을 걸으며 부르주아 문학을 비판함과 동시에 당시의 조류였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알리기도 했다. 이후 1942년 이후 광복까지는 아예 절필해버리면서 친일문학과 거리를 둔다. 광복 이후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들고, 이어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후 월북하여 조선공산당 기관지였던 해방일보와 좌익계 일간지 현대일보의 창간에 관여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남조선로동당]] 숙청 사건에 휘말려 옥에 갇힌 후 1955년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 내에서는 1990년 이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문민정부 이후 재발굴되어 알려졌다. 모교였던 교남학교의 후신인 [[대륜고등학교]]에 그와 형 이육사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분류:동명이인]][[분류:1909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진성 이씨]][[분류:호세이대학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