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사군)] [[파일:한사군.jpg]] {{{+1 臨屯郡}}} [목차] == 개요 == [[중국]]의 전한 제국 제7대 [[무제(전한)|세종 무황제 유철]]이 [[위만조선]]을 상대로 1년여의 격렬한 전쟁 끝에 멸망시킨 뒤 그 땅에 설치한 군현들([[한사군]]) 중의 하나이다. == 기록 == 위만조선 이전에는 [[고조선]]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임둔국]]'''이었다. 다른 군현들처럼 기원전 108년에 설치됐으나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하고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으며, 현도군의 일부로 합쳐졌다. 인구가 원래 적은 곳이었고, 또 고조선 멸망 이후 이탈하는 인구도 있어서 별개의 군으로 유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도군이 고구려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밀려난 후에는 [[낙랑군]]의 부속구역인 '''[[동부도위]]'''가 그 자리에 설치되었다. 그 와중에 임둔군 아래 지배를 받던 세력들이 독립해 나가 [[옥저]][* 사실 옥저는 전통적으로 [[현도군]]의 영역이었으나, 현도군이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면서 임시로 맡게 되었다.], [[동예]] 등이 되었다. 400년 넘게 존속된 서쪽의 낙랑군과는 참으로 비교가 된다. 《[[한서]]》 <무제기>(武帝紀) 원봉(元封) 3년 여름[夏]조에 대하여 신찬(臣瓚)[* [[서진]](西晉) 때 사람이며, 《[[한서]]》에 주석을 달았고, 《한서집해음의》(漢書集解音義)를 저술한 학자이다. 특이한 사항은 이름인 찬(瓚)만 남기고, 성씨를 알 수 없는데, 참고로 앞 글자인 신(臣)이 성씨가 아니고, 신하를 뜻하는 글자이다. 일설에는 신찬의 성씨로 부(傅), 배(裵), 설(薛)씨 등이 언급되고 있다.]이 인용한 《무릉서》(武陵書)에 따르면, 현은 총 15개[* 이후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한 현이 총 7개이다. 기원전 75년 영서 지방에 있다가 [[현도군]]이 치소를 고구려현으로 옮기면서 단단대령 이동의 옥저와 동예는 [[낙랑군]]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단단대령 이서의 8현은 버려진 것 같다. 또는 해당 8개 현이 [[진한]]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통지]]》에 영서가 [[현도군]] 고구려현에 속했다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가 존재했고,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었다. 그런데 이 《무릉서》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진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년]]~[[기원전 117년]])는 한무제가 임둔군과 진번군을 설치하기 약 9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신채호]]가 해당 구절의 신뢰도를 의심했다. >신찬은 “《무릉서》(武陵書)에 따르면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고 장안에서 6,138리를 간다. 15현이다.''' 진번군의 치소는 잡현이고 장안에서 7,640리를 간다. 15현이다.”라고 말하였다. >안사고는 “樂의 음은 낙이다. 浪의 음은 랑이다. 番의 음은 보와 안의 반절(반)이다. 暆의 음은 익과 지의 반절(이)이다. 霅의 음은 장과 갑의 반절(잡)이다.”라고 말하였다. >---- >臣瓚曰, “茂陵書, '''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師古曰, “樂, 音洛. 浪, 音郎. 番, 音普安反. 暆, 音弋支反. 霅, 音丈甲反.” >---- >[[https://ctext.org/library.pl?if=gb&file=79525&page=147|《한서》 권6 <무제기>]] 원봉 3년 여름 조 주석 위치는 임둔군의 유적이 확실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진번군]] 동쪽인 현 [[함경남도]] 일대에서 [[강원도]] 북부 쪽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고 4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芚)이라 하였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9001|《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 임둔군의 위치를 강릉으로 비정했다. == 고고학적 근거? == 1997년 중국 [[랴오닝성]]에서 ‘임둔태수장’ 봉니(封泥)가 출토되었다. '봉니'란 문서를 봉인할 때 진흙을 붙이고 그 위에 도장을 찍은 것을 말한다. 서양 중세를 다룬 영화에서 문서 두루마리에 촛농을 묻히고, 그것이 굳기 전에 인장(반지 겸용)으로 꾹 눌러 표시하는 것의 고대판이다. 이 봉니가 출토된 것을 두고 ‘임둔군의 위치가 이쪽으로 밝혀졌으므로 기타 한 군현과 고조선 위치까지도 다시 설정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었고, 특히 [[환빠]]들이 이에 부화뇌동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유물 발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음이 확실한 상태에서 문헌들이 낙랑군의 동쪽에 임둔군이 있다고 전하고 있고, 랴오닝성 쪽엔 임둔군이 아니라 요동군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겨우 봉니 한두 개 나왔다고 지금까지의 지명 비정을 모두 갈아엎을 수는 없다. 게다가 단순히 출토된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봉니라는 물건 자체가 문서를 보내는 쪽과 받는 쪽 양쪽 모두에게 다 남아있을 수 있기에 위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 [[부산광역시]] 소인이 찍인 우편 봉투가 [[광주광역시]]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광주=부산’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각주] [[분류:한사군]] [[분류:한나라의 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