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1162년 사망]][[분류:싼먼샤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張玘 (? ~ 1162년) [[남송]]의 장수로 자는 백옥(伯玉)이다. 남송 초기 항금 명장으로 충의전에 열전이 있다. == 생애 == 장기의 집안은 대대로 하남부(河南府) 민지현(澠池縣)에 살았다. [[건염(연호)|건염]] 연간, [[정강의 변]]으로 [[휘종(송)|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많은 북송의 황족과 신료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붙잡힌 상황에서 휘종의 서자 강왕 조구가 응천부(應天府)에서 신료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송나라의 명맥을 이으니, 이가 제10대 황제인 [[고종(송)|고종]]이었다. 이때 장기는 집안의 재산을 털어 군대를 모았고 장기의 모집에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때 [[적흥]]이 경서북로안무사제치사(京西北路安撫制置使)를 맡고 있었는데, 장기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적흥의 밑에 들어갔다. 금군이 신속하게 진군하여 황하를 건너려고 하자, 장기는 황하의 백랑구(白浪口)에서 금군의 진군을 막아냈고 전공을 쌓아 무익대부(武翼大夫)·성주자사(成州刺史)로 보임되었다. 동선(董先)이 제치사(制置司) 전군통제(前軍統制)가 되자, 장기는 동선을 보좌하여 매번 전투를 벌일 때마다 선봉에 섰다. 1131년, 금나라의 장수 고경(高瓊)이 군대를 이끌어 상주(商州)를 함락시켰다. 동선이 고경을 방어할 때 장기는 자신이 이끄는 기병들이 장기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진군하여 단기로 사호묘(四皓廟)에 도착하고 금나라의 기병 수백 명이 도착하자 장기는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외치며 칼을 빼들어 돌격하여 금군은 장기의 위세에 짓눌려 감히 진군하지 못했다. 이날 장기는 9번의 전투를 벌여 모두 완승하였고 금군을 시검관(試劍關)까지 추격하여 금군에서는 앞다투어 관문을 넘으려다가 밟혀 죽은 이들이 100명이나 되었다. 1132년, 장기는 동선과 함께 남전현(藍田縣)을 거쳐 위수(渭水)를 건너 장안을 수복하려고 했다. 당시 [[유예(남송)|유예]]의 경략사(經略使) 이악(李諤)이 위북(渭北)에 주둔하여 금나라의 장수 절합패근(折合孛堇)과 서로 기세가 드높았는데, 장기는 화엄천(華嚴川)에 병력을 배치했고 장기의 장사들이 매우 분발하여 흥평(興平), 함양(咸陽), 위하(渭河), 석별곡(石鱉谷)에서 전투를 벌였다. 한편, 유예가 송나라의 옛 수도인 개봉부를 점령하며 동선군의 군량로를 차단하자, 동선은 식량이 부족해져서 결국 거짓으로 유예에게 항복하며 가족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유예가 사람을 시켜 동선의 아내를 맞아들이려고 하자, 동선은 몰래 장기에게 글을 보내 자신의 아내를 유예에게 보내지 말도록 알렸고 또한 자신이 반드시 돌아올 뜻도 함께 전했다. 또한 유예가 추관(推官) 기종유(祁宗儒)를 보내 장기를 상괵순주로병마도감(商虢順州路兵馬都監)·동통제군마(同統制軍馬)로 삼겠다고 꼬드겼지만 장기는 기종유를 유폐하였다. 괵주(虢州)의 사무를 처리하던 왕기(王倚)가 몰래 유예에게 항복할 뜻을 품자, 장기는 왕의에 대해 근심하였다. 때마침 상주에서 동진(董震)이 왕의를 찾아오자, 왕의는 기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진은 나와 친한데 지금 동진이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로다. 왕기는 동진과 함께 장기를 살해할 것을 계획했고, 동진은 겉으로 왕기의 계획에 찬성했지만 몰래 장기에게 왕기의 계획을 알렸다. 다음날, 왕의가 장기의 군영으로 와서 장기와 논의할 때 장기는 장기를 꾸짖었고 이전에 유폐했던 기종유와 함께 왕기를 참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예는 낙양에 있던 하남안무사(河南安撫使) 맹방웅(孟邦雄)과 총관(總管) 번언직(樊彦直)에게 군대를 이끌고 장수(長水)로 진군하여 장기를 치도록 명했다. 장기는 이에 장수 진준(陳俊)으로 하여금 백마산(白馬山)을 수비하게 했고 사고(謝皐)로 하여금 선판산(船板山)을 수비하게 했고 양진(梁進)으로 하여금 금병산(錦屏山)을 수비하게 한 뒤 정예 부대를 모두 매복시켰다. 금군이 파죽지세로 침입해오자, 장기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동관(東關)에서 전투를 벌였고 진준, 사고, 양진이 일제히 장기에게 호응하여 금군을 격퇴하였다. 장기는 정예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하룻밤에 300리를 질주하여 새벽에 낙양에 도착하였으며, 맹방웅은 사로잡혔고 번언직은 달아났다. 이때의 전공으로 장기는 패주방어사(覇州防禦使)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1133년 봄에 동선이 돌아오자, 진기는 동선에게 병권을 반환하고 물러나 당시 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겼다. 적흥 사후, 조정에서는 적흥의 아들인 적종(翟琮)에게 적흥의 직위를 계승하도록 명했다가 적종이 장기의 전공을 조정에 상주하여 정식으로 장기는 무익대부·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하남부맹여당주마보군부총관(河南府孟汝唐州馬步軍副總管)이 되었다. 장기는 당주(唐州)·등주(鄧州) 일대에서 금나라의 장수 염예(閻銳)를 공격하고 선두에 서며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이윽고 동선과 함께 신무후군통제(神武后軍統制)가 되었다. 또한 [[악비]]를 따라 6개의 주를 수복했고 반란을 일으킨 종자의(鍾子義) 등을 평정하며 전공을 쌓아 공위대부(拱衛大夫)가 되었다. 뒤에 비로소 왕기를 주벌한 일이 알려지면서 고종은 장기가 왕기를 주벌한 일을 기록하게 했고 조서를 내려 장기를 칭찬하며 친위대부(親衛大夫)로 승진시켰다. 1162년, 어영숙위전군도통(御營宿衛前軍都統)을 겸임하며 사주(泗州)에 주둔하던 장기는 금군이 해주(海州)를 공격하자, 진강도통제(鎭江都統制) 장자개(張子蓋)와 합류하여 해주로 향했다. 금군이 해주성을 겹겹이 포위하자, 장기는 해주에서 북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서 금군과 전투를 벌여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금군의 진영으로 수십 명과 장수를 직접 죽였고 1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하지만 금군이 퇴군할 때 장기화살에 맞아 죽었고 장자개가 장기의 공을 조정에 보고하여 특별히 관찰사로 추증하고 장기의 후손 9명에게 관직을 주었으며, 충용(忠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종(송)|효종]]이 즉위한 뒤 장기가 전사한 해주에 장기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 장기를 청원군승선사(淸遠軍承宣使)로 추증하였다. 아들인 장세웅(張世雄)은 부리(符離) 전투에서 전사하여 무절대부(武節大夫)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