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42년 출생]][[분류:중국공산당 14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분류:중국공산당 15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중국공산당 16기 중앙정치국 위원]][[분류:중국공산당 16기 중앙서기처 서기]][[분류:중국공산당 17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분류:우시시 출신 인물]][[분류: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장]] [include(틀:역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안부장)] ||<-2>
'''{{{#ffff00 제11대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장[br]중국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br]{{{+1 저우융캉}}}[br]周永康 | Zhou Yongkang}}}'''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周永康.jpg|width=100%]]}}} || || '''{{{#ffff00 이름}}}''' ||[[한문]]: 周永康 ([[한어병음|병음]]: Zhōu Yǒngkāng)[br][[한국 한자음]]: 주영강 || ||<|2> '''{{{#ffff00 출생}}}''' ||[[1942년]] [[12월 3일]] ([age(1942-12-03)]세) || ||[include(틀:국기, 국명=대만, 출력=중화민국)] [[장쑤성]] 우징 || || '''{{{#ffff00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중국)] || || '''{{{#ffff00 학력}}}''' ||쑤저우고등학교[br]중국석유학원[* 현재 중국석유대학.] || || '''{{{#ffff00 직위}}}''' ||[[중국 공산당]] 국토자원부 부장 ([[1998년]] 3월 ~ [[1999년]] 12)[br][[쓰촨성]] 당서기 ([[2000년]] 1월 ~ [[2002년]] 12월)[br][[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부장 ([[2002년]] [[12월 7일]] ~ [[2007년]] [[10월 28일]])[br][[중국 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 ([[2007년]] [[10월 22일]] ~ [[2012년]] [[11월 20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저우융캉은 [[중국 공산당]]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비리 혐의로 제명된 [[상하이방]] 계파의 정치인이다. 한때는 정법위 서기로서 [[후진타오]] 시대에 상무위원의 자리에 앉기도 했다. == 생애 ==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1992년 10월, 1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98년 9월, 1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2002년 11월, 1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여 중국 공산당 서열 9위이자 사실상의 사법권 총수나 다름 없는 중앙정치법률위 서기까지 겸하였었던 중국의 거물 정치인이자 상하이방의 주요 인물 중 한명으로 별명은 '사법·공안의 차르'. 하지만 2012년, 정치적 후원 관계로서 자신의 정계 제자나 다름없었던 또 다른 거물 정치인인 [[보시라이]]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정법위 산하에 있던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무경부대)를 동원해 사실 상의 쿠데타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하였고, 이후 2014년 12월 5일, [[부정부패|뇌물수수]]·기밀[[유출]]·문란한 [[성별|성]]생활 등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면서 사실 상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7286134|#]] 1989년, 천안문 사태의 여파로 [[자오쯔양]]이 숙청된 이후 거의 30년 만에 숙청된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장쩌민 시대 이후로 지켜지던 정치국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刑不上常委)는 불문율이 마침내 시진핑 시대에 이르러 깨지게 되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수준을 처벌하는 것도 상당히 꺼렸다. 정치국 위원 중에서는 1995년 베이징 서기 천시퉁, 2007년 상하이 서기 천량위, 2012년 충칭 서기 보시라이의 숙청 3건 정도가 있다.] 그의 숙청을 시작으로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는 전직 정치국 상무위원, 위원급 거물들을 시진핑이 많이 처벌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발탁한 외교부장 친강, 국방부장 리상푸도 숙청하는 등 마오쩌둥 시대의 엄혹한 일인지배로 회귀하고 있다. 공안부와 정법위를 모두 장악했던 거물이자 [[상하이방]]의 주요 인물이었던 만큼 이후 반발하는 공산당 내 파벌 싸움이 있었으나[[https://www.joongang.co.kr/article/14436441#home|#]] 결국 2015년 5월 22일 이루어진 1심 재판에서 예상과 다르게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 판결에 대해 저우융캉이 항소하지 않음으로써 형이 확정되고 공산당에서도 제명되었다. 이후 그는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http://kr.people.com.cn/n/2015/0612/c203278-8906035.html|#]] 스스로가 [[상하이방]] 계열의 거물 정치인인 동시에, [[시진핑]]과 함께 [[후진타오]]의 차기를 두고 경쟁하고, [[시진핑]] 이후에도 여전히 유력 차기 권력 주자 중 한 명이기도 했었던 [[보시라이]]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만큼, 그의 실각은 [[태자당]] 출신인 [[시진핑]]의 일인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한 전략적 포석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특히, 상술하였던 [[보시라이]] 실각 당시 그가 지니고 있던 정법위 산하 무경부대([[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를 움직이려 했던 사건으로 인해 이후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는 [[시진핑]]에 의해 아예 중앙정치법률위(정법위) 소속에서 중앙군사위 소속으로 옮겨져 [[중국 인민해방군]]의 일원이 되었다.[* 그 전에는 정법위 산하로서 인민해방군이 아닌 공안부의 군대였다.] 그만큼 저우융캉의 실각은 여로모로 [[시진핑]]의 권력 강화의 방점을 찍는 계기가 되는 사건 중 하나가 된 셈.[*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가 중앙군사위로 옮겨감으로써 사실 상 중국 내 모든 무장 세력을 손에 넣게 됨.] 그의 축출을 기점으로 [[태자당]], [[공청단]]과 함께 중국 집단 지도 체제의 일원을 이루고 있던 [[상하이방]]은 세력을 급격하게 상실하게 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자연자원부장)] [include(틀:중화인민공화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제17기))] [include(틀:역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 [include(틀:역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안부장)] [include(틀:역대 쓰촨성 영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