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정구영(동명이인))] [include(틀:민주공화당 총재 및 당의장)] [include(틀:역대 대한변호사협회장)] ---- ||<-2> '''대한민국 제6·7대 국회의원[br]{{{+1 정구영}}}[br]鄭求瑛'''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rokps.or.kr/825.jpg|width=100%]]}}} || ||<|2> '''출생''' ||[[1894년]] [[5월 14일]]|| ||[[충청도]] [[옥천군]] 군내면 저전리[br](現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2> '''사망''' ||[[1978년]] [[5월 22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 '''본관''' ||[[연일 정씨]][* 문정공파-이의공파 28세 구(求) 항렬.][[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984|#]]|| || '''호''' ||청람(淸嵐)|| || '''부모''' ||[[아버지]] 정석용, [[어머니]] 안동 권씨|| || '''형제자매''' ||3형제 중 장남|| || '''배우자''' ||홍영표|| || '''자녀''' ||슬하 3남 4녀|| || '''학력''' ||[[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교청년회관]] {{{-2 (상과 / 졸업)}}}[br][[서울대학교 법과대학|경성전수학교]] {{{-2 (졸업)}}}|| || '''의원 선수''' ||'''2'''|| || '''의원 대수''' ||[[제6대 국회의원|'''6''']], [[제7대 국회의원|'''7''']]||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이호범(정치인)|이호범]] 전 국회의원은 그의 조카의 사위이다. == 생애 == 1894년 5월 14일 [[충청도]] [[옥천군]] 군내면 저전리(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https://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641|#]]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78_1_0024979|정석용]](鄭錫溶, 1878.10.5 ~ 1951.5.30)[* 창씨명은 마쓰카와 시요(松川錫溶).]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중섭(權重燮)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석용은 [[구한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군]] [[헌병대]] [[부위]]로 복무한 인물로,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고향 옥천군에서 자제단(自制團) 결성에 참여하고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581|#]] 이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및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 밖에 조부 정복(鄭澓)은 구한말 종9품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을 시작으로 종6품 부사과(副司果), 종4품 익산군수(益山郡守) 등을 역임했으며, 증조부 정시준(鄭時浚) 또한 종9품 통례원 가인의(通禮院假引儀)와 정3품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한 관료였다. 이렇듯 구한말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911년 [[성동고등학교|황성기독교청년회관]] 상과를 졸업하고 1914년 [[진천군]]에서 판임관견습을 한 후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옥천군 서기로 근무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9&totalCount=9&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9%84%AD%E6%B1%82%E7%91%9B&brokerPagingInfo=&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9%84%AD%E6%B1%82%E7%91%9B&searchKeywordConjunction=AND|#]] 그러다가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 경성법학전문학교는 해방 후 서울대 법대로 통합된다.]에 입학, 1919년 졸업하였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경성지방법원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여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1924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검사를 지내다가 1925년 사직하고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변호사개업을 하였다. 이후 [[변호사]] 업무를 계속 하면서 1959년 대한변호사협회장, 1960년 국제변호사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 변호사로서 재산가의 상속사건,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등 세인의 이목을 끈 대사건을 수임하여 명변론을 펼쳤으며 법정에서 가여운 여성의 변론을 하는 때에는 방청객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변론솜씨도 발휘했다. 경성조선인 변호사회 회장으로 1930년 4월(24대), 1933년 4월(27대)에 각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에 비협조적인 인사로 보여 친구들과 마작놀이한 것을 도박죄로 기소하여 벌금 50원을 물고 1933년 8월 31일 변호사자격도 취소되어 회장직도 물러났다. 다음해 2월에 재개업하게 되어 1943년 4월(37대) 경성변호사회(한일통합) 회장에 또 선출되었음에도 친일적 시국강연에도 불응하고, 장남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했으나 아버지 때문에 공무원에 채용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2학년 재학 중 학병을 피해 도피해 있어 요시찰인이 되었다. 변호사 회장 임기가 끝난 후 1944년 박흥식 등과 [[마작]]을 한 것을 상습도박죄로 입건 구속기소로 42일간 갇혔다가 공판에서 김광근 변호사의 변론으로 도박죄로 벌금형이 선고되어 풀려났으나(박흥식 등은 [[불기소처분|불기소]]) 같은 해 10월 변호사자격도 취소당했다. 해방 후 정구영은 [[자유당]] 통치기간을 통하여 줄곧 반정부적인 재야법조인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정구영이 변론을 맡았던 사건 가운데 유명한 것은 서민호 사건과 [[경향신문]] 폐간사건이다. 감히 어느 누구도 이승만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변론을 맡으려 하지 않을 때 그는 의연히 정의의 기치를 높이 치켜든 것이다. 특히 [[서민호]] 사건[* 당시 반독재투쟁의 선봉자 국회의원 서민호가 전남 순천에서 육군 대위 서창선의 저격을 막고자 그를 살해한 정당방위사건.]에서 정구영이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꼬박 8시간 동안 혼자서 진행한 ‘마라톤 변론’은 지금도 법조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져 오고 있다. [[4.19 혁명]] 당시 정구영은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정구영은 대한변협의 진상조사단의 진상조사 보고를 받고 즉각 ‘마산사건은 방자한 관권의 극치요, 민권유린의 악랄한 표본으로서 민주주의의 비참한 도살행위였다. 우리는 민족적 시련의 중대 시점에서 이 대통령의 하야와 재선거 실시를 촉구한다’는 성명서를 직접 만들어 발표했다. [[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4337|#]]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민주공화당]]에 입당, 세상을 놀라게 했고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1964년 민주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옥천군 자택으로 내려갔다. 이 때 정구영을 설득시키러 간 육군보안사령관(현 국군기무사령관) [[김재규]] [[중장]]과 민주공화당 [[차지철]] 국회의원이 정구영 앞에서 설전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 대쪽같은 성품으로 인해 공화당의 양심이라고 불렸으며 [[베트남 전쟁]] 때 월남 파병을 피묻은 돈으로 호의호식하느니 깨끗하게 굶는 것이 낫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에 이어 [[10월 유신]]까지 일으켜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이 출범하자 1974년 1월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1978년 5월 22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2200329201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22&officeId=00032&pageNo=1&printNo=10043&publishType=00020|#]] == 소속 정당 == || '''{{{#fff 소속}}}''' || '''{{{#fff 기간}}}''' || '''{{{#fff 비고}}}''' || || [include(틀:무소속)] || 1961 - 1963 || 정계 입문 || || [include(틀:민주공화당)] || 1963 - 1969 || 창당 || || [include(틀:무소속)] || 1969 - 1971 || 제명 || || [include(틀:민주공화당)] || 1971 - 1974 || 복당 || || [include(틀:무소속)] || 1974 - 1978 || 탈당[br]정계 은퇴 || == 기타 == *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 배우 [[권성덕]]이 그를 연기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사건축소 및 은폐를 시도한 정구영 전 검찰총장(당시 서울지방검찰청장)과는 다른 인물이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정구영(1938)|정구영]] 문서 참조.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민주공화당 입당을 밀어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관련 문서 == * [[정치인/목록]] * [[법조인/목록]] == 둘러보기 == [include(틀:제6대 국회의원/전국구)] [include(틀:제7대 국회의원/전국구)] [[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연일 정씨]][[분류:옥천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민주공화당 총재 및 당의장]][[분류:1894년 출생]][[분류:1978년 사망]][[분류:제6대 국회의원]][[분류:제7대 국회의원]][[분류:민주공화당(1963년) 국회의원]][[분류:성동고등학교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