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조동석}}}[br]趙東奭'''}}}}}} || || '''자''' ||국필(國弼) || || '''본관''' ||[[풍양 조씨]] || ||<|2> '''출생''' ||[[1845년]] || ||[[경상도]] [[상주시|상주목]] [[모서면]] 갈천동[br](現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 || ||<|2> '''사망''' ||[[1895년]] [[6월 17일]] (향년 50세) || ||[[안동시|안동부]] [[상주시|상주군]][br](現 [[경상북도]] [[상주시]]) || || '''묘소'''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 || || '''학력''' ||유학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45년 경상도 상주목 모서면 갈천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에서 풍양조씨 대종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주하(趙胄厦)다. 1874년([[고종(조선)|고종]] 11) 증광 [[생원|생원시]]에 3등 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74_035353|입격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당하자 국권 피탈의 위기를 느껴 이듬해인 1896년 음력 2월 10일[* [[양력]] [[3월 23일]].]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68|이기찬]](李起燦)·[[허위(독립운동가)|허위]]·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대구광역시|대구부]] [[김천시|김산군]](現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산군 군내면 읍내를 점령했다. 그리고 포군(砲軍)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해 무장시켰으며,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의병대의 군문도총(軍門都摠)에 취임해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 강무형은 찬획(贊劃), 허위는 참모장(參謀將)에 선임했다.] 이후 진용을 갖춰 대구부 [[대구광역시|대구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을 미리 간파한 관군에 의해 [[성주군]]에 주둔해 있던 진영이 공격을 받았고, 관군의 대공세가 잇따랐다. 결국 음력 2월 18일[* 양력 3월 31일] [[고종(조선)|고종]]의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302018_001|의병 해산 조령]]이 내려지자 그해 4월 이기찬은 의병대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의병진을 해산하고 남은 의병들의 무장을 해제해 모두 돌려 보냈으나, 관군 및 일본군에 체포돼 1895년 6월 17일 순국했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풍양 조씨]][[분류:1845년 출생]][[분류:189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