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1 남송의 대신[br]장사충숙남(長沙忠肅男)[br]{{{+1 趙方 | 조방}}}}}}''' || ||<:>'''작호'''||<(> 장사현남(長沙縣男)|| ||<:>'''시호'''||<(> 충숙(忠肅)|| ||<:>'''성'''||<(> 조(趙)|| ||<:>'''이름'''||<(> 방(方)|| ||<:>'''자'''||<(> 언직(彦直)|| ||<:>'''부친'''||<(> 조당(趙棠)[* 원래 조상(趙常)의 아들이었으나, 조상의 형인 조당에게 아들이 없어 조당의 양자가 되었다.]|| ||<:>'''국적'''||<(> 송(宋)|| ||<:>'''출신'''||<(> 담주(潭州) 형산현(衡山縣)|| ||<:>'''생몰'''||<(> ? ~ 1221년||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송]]의 명신으로 자는 언직(彦直)이다. [[조규(남송)|조규]]와 [[조범(남송)|조범]][* 조규, 조범 형제는 [[이전(몽골)|이전]]의 군대를 격파하나, [[단평의 입락]]시기 실책을 저질렀다.]의 아버지. == 생애 == === 초기 생애 === 담주(潭州) 형산현(衡山縣) 출신으로 조상(趙棠)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상(趙棠)은 일찍이 [[장준(송나라)|장준]](張浚)을 알현하였는데 장준은 조방의 재능을 기이하게 여기고 아들인 장식(張栻)을 조상과 교유하게 하였다. 이후 조방은 장식에게 수학하였다. [[효종(송)|효종]] 순희(淳熙) 8년(1181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포기현위(蒲圻縣尉)로 선임되어 판결하기 어려운 옥사를 대부분 해결하였다. 이후 대녕감(大寧監) 교수(敎授)로 제수되었는데 대녕감의 풍속이 매우 나쁘자, 조방은 교화할 만한 인물은 교화하여 이곳에 진사로 급제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었다. 조방은 이후 지청양현(知靑陽縣)을 역임하고 강서(江西) 안무사(安撫司) 주관기의문자(主管機宜文字)를 맡다가 이대성(李大性)이 조방을 지수주(知隨州)로 벽소하였다. === 대금 전선 === [[한탁주]]의 [[개희북벌]] 실패 이후 남송과 [[금나라]]가 화의를 체결하자, 조방은 병사를 모집하고 장수들을 선발하여 토호 [[맹종정]](孟宗政)[* 남송 최후의 명장인 [[맹공]]의 아버지이다.] 등에게 관직을 주었다. 조방은 제거경서상평 겸 전운판관, 제점형옥, 금부원외랑, 직비각, 호북 전운판관 겸 지악주(知鄂州), 직환장각(直煥章閣) 겸 권지강릉부(權知江陵府), 비각수찬, 지강릉부, 주관호북안무사 겸 권형호치사를 역임하였다. 1208년 화의가 체결된 이후 금나라가 몽골로부터 압박을 받고 1214년에는 남송의 옛 수도인 개봉부로 천도하자, 조방은 금나라의 침공을 예상하여 밤낮으로 경계하였고, 형문(荊門)의 동서쪽에 있는 험준한 산들을 요충지로 이용하여 보루를 구축하였다. 조방은 다시 관직이 우문전 수찬으로 올라갔다. 금나라의 장수였던 번쾌명(樊快明)이 송나라(宋)에 귀순하려고 하였는데 번쾌명을 추격하는 부대가 양양까지 당도하자, 조방은 맹종정과 호재흥(扈再興)을 보내 1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금나라의 추격대를 요격해 물리쳤다. 조방은 권공부시랑(權工部侍郎), 보모각(寶謨閣) 대제(待制), 경호 제치사(制置使) 겸 지양양부(知襄陽府)가 되었고, 금나라가 경계를 침범할 조짐을 잡아내어 전군에 경계 명령을 내린다. 과연 조방의 예상대로 1217년, 출호고기(朮虎高琪)와 오고륜경수(烏古倫慶壽) 등이 진주(陳州), 광화군(光化軍), 수주, 신양군(信陽軍), 균주(均州) 등지를 침범하자, 조방은 밤중에 아들 조범(趙范)과 조규(趙葵)를 불러 전쟁을 결의하고 상소를 올려 항전을 주장하였으며 양양부로 출격하였다. 금나라가 조양(棗陽)을 포위하자, 조방은 맹종정과 호재흥을 보내 조양을 구원하고 광화군·신양군·균주의 수비병을 증강하였다. 조양의 수장인 조관(趙觀)이 성 바깥에서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자, 조방은 맹종정과 호재흥을 보내 조관과 함께 금나라 군대를 격퇴하였다. 조방은 이후 보리가 무르익을 시기를 맞아 군대를 보내 백성들의 보리 수확을 보호하였고 [[청야 전술]]을 펼쳤으며 화의가 불가능한 이유를 조정에 알려서 조정의 주전 의지를 이끌어냈다. 금나라의 장수인 완안새불이 남송의 국경을 침범하자, 조방은 군대를 나누어 상가천(尙家川)과 마자평(磨子平)에서 금나라 군대를 각각 격퇴하였다. 또한 조방은 유세흥을 불러 군대를 이동하여 허국(許國), 호재흥과 함께 조양으로 파견하였고, 장흥(張興)과 이웅도(李雄韜)를 수주로 파견하였다. 맹종정은 성을 수비하면서 성 동쪽에 복병을 배치하였고 복병과 함께 금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금나라가 삼면으로 침공하자, 조방은 장수들을 지휘하여 삼면의 침공을 다시 물리친다. 공적을 세운 조방은 용도각(龍圖閣) 대제로 승진하고 장사현남(長沙縣男)으로 책봉되었으며 식읍을 하사받았다. 금나라 군대가 다시 대규모로 침입하면서 완안와가(完顔訛可)에게 조양을 포위하도록 명하고 성 밖에 참호를 파고 토성을 둘러쌌다. 조방은 금나라 군대가 참호를 통해 성으로 침입할 것을 예상하여 금나라의 후방을 찔러 승전하였다. 금나라의 사기가 떨어지자 조방은 허국과 호재흥을 불러와 금나라 군대를 공격하도록 명하였고, 사기가 떨어진 금나라 군대는 결국 달아난다. 조방은 이윽고 환장각 직학사가 되었다. 조방은 금나라가 여러 차례 조양을 도모하는 것에 실패하여 동시에 여러 성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허국과 맹종정에게 당주로 출병하고 호재흥에게 등주로 출병하도록 명하면서 “깊숙이 들어가지 말고 성을 공격하지 말되, 다만 그들의 보갑을 물리치고 성채를 불태우고 그들의 양식을 비우기만 하면 된다.”라고 알렸다. 조방의 명령에 장수들이 움직인 결과 금나라 군대에는 항복하는 자들이 잇달았다. === 죽음 === 조방은 이후 병에 걸렸고 휘유각(徽猷閣) 학사, 경호 제치대사(制置大使)로 진위되었고 1221년에 죽었다. 사후 남송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조방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증했다가 거듭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숙(忠肅)’이라고 하였다. == 기타 == 뒷날 원나라에 투항하는 [[유정(원나라)|유정]][* 본래 북방 한인 출신이다. 조방 사후, 맹공의 수하로 활약하나 1261년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를 받았고,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하자 이에 두려워하였고, 상사벽과 조세웅이 죽자 불안감을 느껴 그가 지키던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한다. 그의 투항으로 인해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비록 노주는 나중에 여문덕이 수복하지만, 유정의 투항은 남송에 큰 손실이 된다.]을 경계하여, [[조규(남송)|조규]]에게 유정을 중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정은 재기가 있으니, 너희 대에 쓸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규는 듣지 않았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221년 사망]][[분류:헝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