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include(틀: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들의 등장인물 및 단체)] ---- [include(틀:고려의 승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지눌국사.jpg|width=100%]]}}} || ||<|2> '''출생''' ||[[1158년]] || ||[[경기#s-4]] 동주 (現 [[황해북도]] [[서흥군]] [[자인면]]) || ||<:> '''사망''' ||[[1210년]] [[4월 22일]] {{{-2 (음력 3월 27일)}}} || ||<:>'''{{{#white 법명}}}'''||지눌(知訥)|| ||<:>'''{{{#white 호}}}'''||목우자(牧牛子)|| ||<:>'''{{{#white 시호}}}'''||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white 탑호}}}'''||감로(甘露)|| ||<:>'''{{{#white 성씨}}}'''||정(鄭)|| ||<:>'''{{{#white 아버지}}}'''||정광우(鄭光遇)|| [목차] [clearfix] == 소개 == >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 사람이 땅바닥에서 넘어졌으면 땅바닥을 짚어야 일어설 수 있지, 땅바닥 아닌 다른 곳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지눌이 [[불교]]계 정화를 위한 수선결사를 일으키면서 작성한 권수정혜결사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 잘못해서 미혹에 빠지는 것도,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것도 결국 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넘어졌다고 땅을 욕할 것이 아니라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속담을 빌어 불교계 개혁과 쇄신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고려]]의 [[승려]]. 속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者)[* [[소]]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 [[조선]] 시대의 지방관들을 '목민관'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의 '목'과 같은 [[한자]]이다. 목민(牧民)은 [[백성]]을 돌본다는 뜻. [[선종(불교)|선종]]에서는 자기 마음의 본성을 찾는 과정을 [[목동]]이 잃었던 소를 찾는 것에 빗대서 심우도(心牛圖)라는 10개 장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설명한다. [[절(불교)|절]]에 가면 [[대웅전]] 같은 건물 외벽에 그려진 소 끌고 가는 목동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 그림이 바로 심우도이다.],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그래서 보통 '보조국사'라고 많이 부른다.] 종래의 [[구산선문|9산 선문]]을 [[조계종]]에 통합하는 등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일치를 시도한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한 인물. 의천의 천태종이 실패로 끝난데 반해 지눌의 법통은 현재 [[한국 불교]]에서 조계종이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결사 운동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 생애 == 동주(洞州)[* 현재의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고려 성균관|국학]]의 학정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다. [[의종(고려)|의종]] 19년(1165년)에 출가하여 [[종휘]]의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명종(고려)|명종]] 12년(1182년)에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포기하고 [[개경]]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창평]] 청원사에서 6조 혜능의 《단경》을 읽고 대각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명종 15년(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교종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쳤다. 명종 18년(1188년), 공산[* 현재의 [[대구시]] [[팔공산]]]의 [[거조사]][*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군]]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경내의 [[영천 거조사 영산전|영산전]]은 [[우왕]] 1년(1375년)에 세워졌는데 국내에 딱 4개 남은 고려시대 목조 [[건축]]으로 유명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소속 [[은해사]]의 말사로 거조암(庵)이라고도 불린다.[[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3925|#]] ]에 머물면서 세속화되어 가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해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신종(고려)|신종]] 3년(1200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해 깨달음 이후 남아있는 무명을 수행으로 사그라뜨리자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달아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것. 현대 한국의 승려 [[성철(승려)|성철]]은 '깨달음 뒤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게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리로 지눌을 비판했다.([[돈오돈수]]) 지눌은 돈오점수라는 수행방식을 갓난아이로 비유해 설명했다.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단순히 태어남만으로 끝내지 않고 [[부모]]가 기르고 자신이 먹고 자고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았다고 해서 수행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논리.]와 이론학습과 참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로써 용(用)을 삼아야 한다." 하고 말해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지눌의 사상에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 말에는 선종 중심의 뜻이 드러난다는 주장도 있다. '말씀'과 '마음'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본질에 가까울지는 예상이 가능하지 않은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송광사 전 보조국사 가사 국립중앙박물관1 수정2.jpg|width=100%]]}}}|| || [[희종(고려)|희종]]이 하사한 가사[* 1951년 6.25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가로 약 105cm이고 세로 약 280cm이다.] || [[희종(고려)|희종]]은 즉위하자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현 송광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 시기 [[무신정권]]이 기존의 [[귀족]] 중심 교종[* 교종 중에 [[법상종]]은 [[문벌귀족]]들이 신봉했던 종파이다. 때문에 왕들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법상종을 통합하려 했고 무신정권은 선종을 중심으로 법상종과 천태종을 포함한 교종까지 통합하려 시도했다.]을 밀어내고 선종 위주의 조계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해석도 많다. 이후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해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입적하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지눌의 뒤는 [[유불일치설]]로 유명한 [[혜심]]이 이었다. == 책 == *『권수정혜결사문』 1권 *『수심결(修心訣)』 1권 *『진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3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권]] *[[간화결의론|『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 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법어가송(法語歌頌)』 1권 == 기타 == * 지눌의 불교 [[개혁]]을 계기로 불교가 안전한 영적 정화를 이루어 고려 말까지 [[부패]]하는 일이 거의 없이 고려를 영적으로 잘 이끌어왔다면 설사 차기 [[왕조]]에서 [[성리학]]이 나라를 완전히 지배한다 해도 불교는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백성]]들에게 필요한 개혁과 발전을 끓임없이 설파했을 것이다. [[중국]]에 구애받지 않고 넓게 보아 나라의 [[수명]]을 510여 년으로 제한하지 않고 더 영속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지눌이 깨달음과 수행 방법에 대해 쓴 수심결(修心訣)은 《목우자수심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시대에 [[한글]]로 [[번역]]되기도 했으며 막 출가한 [[승려]]들에게 수행을 권하는 내용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은 [[원효]]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야운[* 고려 [[충렬왕]] 때 승려로 생몰년은 모른다.]이 지은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와 함께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으로 엮여 오늘날까지 출가한 승려들의 입문 [[교재]]로 쓰인다. * 현대에 들어와서 [[돈오돈수]]를 주장한 [[성철(승려)|성철]] 스님이 지눌을 비판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 대중매체에서 == || [[파일:attachment/지눌/지눌.png|width=100%]] ||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 <[[징기스칸 4]]>에서는 원판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유통사의 건의로 [[정식발매]]판에서만 등장했다. 정치 61, 무력 25, 지력 71이고 문화 특기가 있어 내정과 무역에 쓸만한 편. 문화 특기가 있으니 가까운 남송과 동맹을 맺고 대상으로 활용하면 개성의 문화 수치를 쉽게 올릴 수 있다. 지력이 높은지라 근처 쟈다란이나 히라이즈미, 가마쿠라에 간첩으로 파견하여 무력이 높으면서 충성도가 낮은 제베, 무카리, 요시쓰네, 시케타다 등의 무장을 영입하는데 쓰인다. 원 [[일러스트]]의 주인은 pk버전 4번째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토번의 군주 총카파. == 관련 문서 == * [[간화결의론]]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 [[원돈성불론]] * [[의천]] * [[교종]] * [[선종(불교)|선종]] * [[고려]] * [[불교]] * [[한국 불교]] * [[조계종]] * [[요세]] * [[승려]] * [[철학]]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각주] [[분류:1158년 출생]][[분류:1210년 사망]][[분류:고려의 승려]][[분류:종교 개혁가]][[분류:서흥군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