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창덕궁)] [include(틀:한국의 정원)] ||<-5> [[파일:정부상징.svg|width=30&height=30]] '''[[대한민국의 보물/1601~1800호|{{{#fff 대한민국의 보물}}}]]''' || || 1763호 ||<|2> ← || '''1764호''' ||<|2> → || 1765호 || || [[창덕궁 부용정]] || '''창덕궁 낙선재''' || 서산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 ---- ||<-2>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보물|{{{#f39100 대한민국 보물 제1764호}}}]]''' || ||<-2> {{{#fff {{{+1 '''창덕궁 낙선재'''}}}[br]{{{-1 昌德宮 樂善齋}}}}}}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창덕궁 낙선재,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와룡동)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 '''{{{#fff 수량}}}''' || 1동 || || '''{{{#fff 지정연도}}}''' || 2012년 3월 2일 || || '''{{{#fff 제작시기}}}''' || [[조선시대]], 1847년 창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unesco.or.kr/wh_changdeok13.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일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낙선재_전경.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원경[*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1454&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TD7OetofTM)] }}} || || {{{#gold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 || [목차] [clearfix] == 개요 == [[창덕궁]]의 주거 건물이다. 전반적으로 [[한옥|양반가]] 형식을 따랐으나 [[궁궐]] 침전 양식을 가미한 [[집]]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부분에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헌종(조선)|헌종]] 때는 창덕궁이었고,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에는 창경궁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다시 창덕궁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위치도 창덕궁 주요부와 꽤 떨어져있고 오히려 현재 창경궁과 훨씬 가깝다. 낙선재라 하면, 낙선재 건물 한 채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 부른다. 좁게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만을 말하며 넓게는 건물들 뒷편의 화계와, 그 위 너머로 있는 상량정 · 한정당 · 취운정까지 통틀어 낙선재 권역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이 1989년까지 살았던 곳으로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궁궐]] [[전각]]들 중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 이름과 현판 == '낙선(樂善)' 뜻은 '선을 즐긴다'이다. 《[[맹자]]》에 나온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을 즐겨(樂善) 게으르지 않는 것(不倦)을 천작(天爵)[* 남에게서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덕행.]이라고 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현판[* [[https://www.cha.go.kr/newsBbz/selectNewsBbzView.do?newsItemId=155685914§ionId=ocp&pageIndex=11&pageUnit=10&strWhere=&strValue=&sdate=&edate=&category=&mn=NS_01_02|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낙선재 권역 1》.]]] '''}}} || 현판 글씨는 [[청나라]] 문인 섭지선(葉志詵, 1779 ~ 1863)의 글씨이다. 단, 집자[* 集字. 글자를 모아 작품 하나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보소당.png|width=100%]]}}} || || {{{#gold ''' 보소당 현판[* 사진 출처 - [[카카오맵]].] '''}}} || 정면 쪽 툇마루 안쪽 오른쪽 칸에는 '보소당(寶蘇堂)' 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헌종의 [[당호]]이기도 하며 '[[소식(시인)|소식('''蘇'''軾, 소동파)]]을 보배('''寶''')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헌종(조선)|헌종]]이 소식을 많이 흠모했던 듯 하다. == 역사 == 1847년([[헌종(조선)|헌종]] 13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이 지었다. 낙선재 영역 언저리엔 원래 [[동궁]] 중 하나인 [[창경궁 낙선당|낙선당]]이 있었는데, 1756년([[영조]] 32년) 불탄 뒤 재건하지 않았다. 그 후 90여 년 뒤 비슷한 자리에[* 연구자들은 낙선당과 낙선재의 자리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이름이 같은 낙선재와 그 주변 건물을 지었는데 낙선당의 복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름만 딴 새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엔 [[동궁]]에 살 [[태자|세자]]도 없었고, 무엇보다 건립 이유가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조선)|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가 서로 붙어있어 [[순조]]가 태어난 것처럼, 경빈 김씨도 헌종 곁에서 머물며 [[후계자]]를 낳기를 바란 의도였다. [[헌종(조선)|헌종]]은 낙선재에,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의 [[창덕궁 석복헌|석복헌]]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창덕궁 수강재|수강재]]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 여 뒤인 1849년 [[헌종(조선)|헌종]]은 [[죽음|승하]]했고 [[경빈 김씨]]는 [[궁]]을 나와 안국동 일대에 머물면서 낙선재는 비었다. 그러다 [[갑신정변]] 직후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잠시 이 곳에 머물면서 [[신하]]들과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10023_003|#]]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112019_001|#]] 1907년([[융희]] 1년)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덕수궁|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移御. 쉽게 말해 [[임금]]이 [[이사]]하는 것.]한 후엔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유학]]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종이 이 곳에 가끔 머물면서 [[일본인]]들을 접견했으며 1917년 [[창덕궁]] 내전의 [[화재|대화재]] 이후 내전을 재건할 때까지 여기서 거주했다. [[순종(대한제국)|순종]] 사망 직전에는 순종의 [[어진]]을 이 곳에 모시기도 했고[[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3019_001|#]] 순종 사후 한 달 뒤에는 [[창덕궁 대조전|대조전]]에 머물던 [[순정효황후]]가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6052700209205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5-27&officeId=00020&pageNo=5&printNo=2053&publishType=00020|#]] 이후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1929년 3월에 서행각 등 건물 일부를 증축했다. 그렇게 20여 년 넘게 잘 살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순정효황후]]는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휴전 후 돌아왔으나 [[이승만]]이 [[창덕궁]]은 국유재산이라며 낙선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면서 [[서울특별시|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인수재(仁壽齋)에서 임시로 머물렀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야 다시 돌아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B_IMG_1474742176563.jpg|width=100%]]}}} || || {{{#gold ''' 낙선재로 들어오는 순정효황후와 상궁들[* 맨 앞줄이 순정효황후, 그 뒤로 성옥염 상궁.] '''}}} || 이후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엔 [[영친왕|의민태자(영친왕)]]와 [[이방자]]가 [[귀국]]하면서 낙선재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 때 낙선재 본채는 의민태자 - 이방자 [[부부]]가[* 영친왕은 혼수상태라 귀국 직후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낙선재와 한남동 일반주택을 오가며 생활했다.], 석복헌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했다. 순정효황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둘 다 같은 해 4월에 사망. [[덕혜옹주]]가 4월 21일에 사망하고, [[이방자]]가 9일 뒤인 4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낙선재는 마지막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낙선재 서행각.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낙선재 서행각 외경 2.pn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82년 낙선재.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낙선재 출입.png|width=100%]]}}} || ||<-2> {{{#gold ''' 근현대에 달라졌던 낙선재 풍경. 윗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 오른쪽은 낙선재 서행각 현관,[br]아랫 사진 왼쪽은 낙선재 본채에서 바라본 서행각, 오른쪽은 정문 장락문이다.[* 사진 출처 - MBC Archive.] '''}}} || 근래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았으니 당연히 [[조선시대]]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었다. 1990년대 들어서 낙선재의 증축한 부분들을 철거하고 조선시대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2005년 7월 [[영친왕]]의 아들 [[이구(1931)|이구]]가 사망하자 빈소를 이 곳에 설치하여 [[조선/왕사|조선 왕실 - 대한제국 황실]] 최후의 빈소로 기록에 남았다. 2012년 3월에 [[문화재청]]에서 [[대한민국의 보물/1601~1800호|보물 제1764호]]로 지정했다. 이후 (명목상) [[이구(1931)|이구]]의 [[양자(가족)|양자]]인 황사손[* 皇嗣孫. '황실의 적통을 잇는 자손'이란 뜻이다.] [[이원(1962)|이원]]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문화재청에 제안한 적이 있으나 [[문화재청]] 측에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186217|#]] == 구조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낙선재_근경.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본채[*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1451&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기본 몸체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나 서쪽의 누마루가 남쪽으로 1칸, 동쪽의 방이 북쪽으로 2칸 더 나있어 실제로는 15칸이다. [[처마|겹처마]] [[양식]]에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이익공,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제일 아랫 부분에는 장대석으로 [[기단]]과 [[계단]] 3개를 조성했다. 누마루의 하단은 화강석을 길게 깎아만든 주초석을 놓았고, 장귀틀 하부에 낙양 모양을 내었으며 누마루가 끝나는 부분의 하단은 얼음조각무늬로 장식했다.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기와]]로 마감했으며 양반가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기에 [[잡상]]은 놓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보물_제1764호_창덕궁_낙선재(2012년_국보,보물_지정보고서)1.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누마루 내부[*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2282022&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서쪽 끝에 [[마루|누마루]]가 정면 1칸, 측면 2칸의 2칸이 나있고 그 뒤로 [[온돌|온돌방]]이 있으며 마루와 온돌방 사이엔 둥근 모양으로 문을 내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차례로 [[대청]] 2칸, 온돌방 2칸, 그리고 마루방과 [[창고]]가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놓여있다. 동쪽의 온돌방과 마루방 북쪽엔 위에 적었듯이 온돌방이 2칸 더 나있는데 《동궐도형》에 따르면 이 덧댄 온돌방을 통하여 석복헌과 실내로 연결되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낙선재_내부_창살모양.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내부 창살 모양[*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1455&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특이하게 창호가 각 [[방]]마다 다른데 만(卍)자 살, 아(亞)자 살, 정(丁)자 살을 비롯하여 당초무늬, 박쥐무니, 마름모고리무늬 등으로 상당히 개성있고 아름답게 꾸몄다. * 정면 동쪽 끝에는 작은 [[나무]]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서편에 또 다른 문이 있는데 양쪽 기둥을 [[벽돌|전벽돌]]로 쌓고 거기에 판장문을 달았다. 이런 [[양식]]은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낙선재 뒤뜰의 화계를 볼 수 있다. * 낙선재 동남쪽에 작은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행랑이 보이며 이 행랑에 난 문을 지나 좌측으로 들어가면 석복헌이 나온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낙선재_후원_화계.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보물_제1764호_창덕궁_낙선재(2012년_국보,보물_지정보고서).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화계[*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1460&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첫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2282023&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두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낙선재_후원에서_본_낙선재_근경.jpg|width=100%]]}}} || || {{{#gold ''' 화계 위에서 내려다 본 낙선재[*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1460&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건물 뒤편에 계단 정원인 화계가 있다. 풍광이 굉장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벽돌|전돌]]로 쌓고 장식한 [[문]]과 [[담|담장]], [[굴뚝]], 괴석, 석지(石池) 등을 세웠다. == 부속 건물 == === 석복헌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석복헌)] === 수강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수강재)] === 평원루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평원루)] === 취운정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취운정)] === 한정당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창덕궁 한정당)] == 여담 == * 2015년 [[문화재청]]에서 낙선재 권역을 객실로 개방하는 이른바 '궁 스테이(宮 Stay)' [[사업]]을 추진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보물/1601~1800호|보물]]로 지정된 낙선재 본채는 놔두고, 부속 건물인 석복헌과 수강재를 수리하여 개방하려 했던 것. 그러나 하루에 300만 원 씩 받는 금액 논란에다 [[화재]] 위험 때문에 계획을 무산시켰다.[[https://www.ytn.co.kr/_ln/0106_201607140959388646|#]] * 가끔 문화 행사들도 열리는데, 특이하게도 '''[[고려시대]]''' [[차]] 문화 행사를 열기도 했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0201744001&code=960100|#]] * [[영친왕]]이 [[일본]]에 있을 때 [[고국]]이 너무 그리워 [[한국]]으로 낙선재에 있는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고, 마침 황실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조약돌을 전해줬다고 한다. 그 뒤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조약돌을 계속 바라보고 만졌다고 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낙선재_야경.jpg|width=100%]]}}} || || {{{#gold ''' 낙선재 야경[*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411453&ccbaKdcd=12&ccbaAsno=1764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창덕궁 낙선재.]]] '''}}} || 〈창덕궁 달빛기행〉 코스 중 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달빛감상을 주로 이곳에서 한다. == 매체에서 == *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영친왕]]([[서인석]] 분)의 추억이 서린 곳으로 나왔다. 임종 직전의 영친왕이 들 것에 실려 낙선재로 옮겨진 뒤, 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https://www.youtube.com/watch?v=nQoCavhda9w|#]] * 1996년 [[MBC]] [[광복절]] 특집극 〈덕혜〉에서는 [[일본]]에서 돌아온 [[덕혜옹주]]([[이혜숙]] 분)가 머무는 곳으로 나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성황후 낙선재.png|width=100%]]}}} || || {{{#gold ''' 〈명성황후〉에 나온 낙선재 '''}}} || 2001년 방송된 [[KBS2]]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 수렴청정을 거둔 [[태후|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김용림]] 분)가 [[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견제로 나머지 [[효정왕후|대]][[철인왕후|비]]들과 함께 머무는 곳으로 등장했다. 이 때 신정왕후는 '할 일 없는 과부 셋([[신정왕후 조씨]], [[효정왕후]], [[철인왕후]])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라며 비꼬았다. 다만, 실제 낙선재는 지나가는 배경 화면으로만 나왔고 실제 촬영은 [[경복궁]]의 [[경복궁 함화당 · 집경당|함화당]]에서 했다. --아니 실제 낙선재에서 찍지 굳이 왜--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경빈 김씨, version=20, title2=영친왕, version2=640, title3=순정효황후, version3=389, paragraph3=5.2)] [[분류:창덕궁]][[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