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薦擧 천거란 어떠한 조직에서 구성원이 그 조직의 리더에게 인재를 발굴해서 조직에 가입시켜 직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낙하산 인사]]라고 볼 수도 있는데, [[시험]]이 아닌 소개를 통해 등용되는 것을 천거라 한다. 물론 그로 인해 자신을 천거해 준 사람의 라인에 자동으로 들어가 영원히 뗄 수 없는 인맥이 된다. == 역사 == 현대에는 대체로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방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세계 대부분 문화권에서 인재 등용은 [[세습]] 아니면 천거 방식이었다. 예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중세부터 [[과거 제도]]라는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았지만, 동아시아 역시 고대에는 천거가 일반적이었다. === [[중국사]] ===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에게 인재를 추천해서 등용하게 했는데 이 때는 추천한 사람이 일종의 [[보증]]을 서게 되어 있었다. 천거 대상자의 업무능력이 무능해도 상관없긴 한데, --어차피 가만히 그 직함만 갖고 있기만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문제는 천거 대상자가 천거된 이후 모반을 일으키거나 큰 사고를 칠 경우 그 사람을 천거한 사람도 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천거는 상당히 신중을 기해서 해야 했으며 심지어 "본인은 부덕하고 무능하여 주변에도 천거할 인재가 없어 감히 천거를 할 수가 없다"라고 겸손한 멘트를 내세워 천거를 거부하기도 했다.] 후한 말기에는 이게 엄청나게 범람했고, 그래서 유력 군벌이 관직임용 대상자를 먼저 임명부터 하고 나서 나중에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해 허락을 받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안량]]과 [[문추]]가 [[원소]]에게 나중에 천거하는 형식을 취하고 일단 임시로 임명되어 장군이 되었는데 이후 [[여포]]가 원소의 객장으로 들어왔을 때 여포 본인은 [[동탁]]을 사살한 공으로 황제에게 직접 관직을 받은 상태에서 안량과 문추를 '원소가 임명한 관리'라는 이유로 비웃고 못살게 굴었다. 결국 그 이유 때문에 여포는 원소의 휘하에 더 있지 못하고 추방당했다. 당시 [[태수]]에게는 1개월당 1인씩 효렴으로 천거하는 게 가능했는데 [[손견]]이 [[환계]]를 천거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환계는 이걸 눈물나게 고마워했고 그래서 손견이 사망한 후 죽음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찾아가서 손견의 영구를 찾아왔다. 실제로도 이렇게 천거가 어렵다보니 천거한 사람과 천거받은 사람간에는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조]]역시 천거에 반드시 필요한 월단평을 [[허소]]에게 획득하기 위해 허소의 친척이자 자신의 친구인 [[허유]]에게 그렇게 매달렸고 결국 허소로부터 '''태평지간적, 난세지영웅'''이라는 칭호를 획득해낸다. 조조는 '난세지영웅'이라는 저 말 한마디에 엄청나게 기뻐했다.[* 당시에는 [[향거리선제]]가 반쯤 무력화되었고 대신 중요해진 것이 명사들의 인정이었다. 명사들이 자신을 좋게 평가해주면 다른 명사들, 혹은 명사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능력이든 뭐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주거나 할 것이니 그런 인정이 정말 중요했던 것. 그나마 조조같은 경우는 인정을 받아내서 덜 고생했지 유비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쌩고생 해가며 경력을 쌓아야 했고 원소의 경우에도 얼자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6년상이라는 고행을 치러야 했다.] 삼국시대로 접어들어도 인재 등용의 기본틀은 천거였는데 위나라에서 실시된 [[구품관인법]]은 천거의 권한이 지방관리에서 중앙관료로 바뀌었지만 천거 자체는 유지되었다...만 천거의 권한이 중앙관료인 중정에게 넘어가다보니 천거 자체가 지나치게 중앙관료들의 손에 휘둘렸다. 덕분에 말만 천거로 흘러가버리게 되었다. 800~1000년을 거슬러올라와 [[북송]]시대 중국에서도 신법당인 [[왕안석]]도 재상 증공량의 천거로 지방관 -> 중신 -> 당상관 ->대신이 되어 신법당의 대표로 떠오르게 되었다. === [[한국사]] === [[신라]]의 [[화랑]]은 보통 [[청소년]] 수련 단체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랑의 매력으로 인재를 모으고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의 공동생활로 결속력을 다지고 교육해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문무관직에 부임시키는 역할이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도 고국천왕이 천거를 통해 [[안류]]와 [[을파소]]를 등용한 바 있다.[* 대신들에게 처음 천거받은 사람은 안류였으나 안류가 을파소를 재천거했다. 안류의 안목은 정확해서 을파소는 [[진대법]]([[환곡제도]]의 전신)을 시행하는 명재상이 되었고 안류도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인정받아 대사자라는 높은 벼슬을 받았다.] [[과거 제도]]가 정착한 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배치했지만 조선 시대에도 천거가 있었는데 [[류성룡]]이 장수 3명을 천거했다. 그 대상자로는 [[이순신]], [[권율]], [[원균]]이었는데[* 물론 이들은 아예 생짜 일반인은 아니었고 다들 과거에는 합격해서 작은 관직을 하고 있다가 류성룡에게 천거된 것이다.] 원균만 유일하게 류성룡의 얼굴에 먹칠했다.[* 그리고 유성룡은 이게 분했는지 본인도 원균이 노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징비록에서 원균을 비판했다.] 나머지 두 장수 이순신과 권율은 류성룡이 자기 이름을 걸고 천거한 값을 확실히 해냈다. 다만 조선시대는 [[과거 제도]]가 정착한지라 천거가 공식 제도화되진 않았다. 그래도 천거를 공식적인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없던건 아니라서 [[조광조]]는 현량과라는 천거제도를 도입하려고 했고 [[이익(실학자)|이익]], [[박제가]] 등도 천거를 제도화하자고 주장했다.[* 다만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모두 과거 제도에 비해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천거 제도를 내세운 것이지만 조광조의 현량과는 처음부터 끼리끼리 해먹을 수 있다는 단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익이나 박제가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 한계와 결과 == 하지만 천거제는 태생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소개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천거하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은 아예 천거될 수 없었다. 때문에 천거제 시스템 하에서는 천거받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천거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의 주변 사람의 눈에 띄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뇌물]]과 부정부패는 당연히 따라오는 일로 무슨 짓을 해도 천거하는 이외 천거받는 이와의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으며 권력 그나마도 중국의 경우 [[향거리선제]]는 그나마 견제장치라도 있어 천거에 주의를 가지기라도 했지 그런 것도 없던 [[구품관인법]]은 개판 그 자체가 되어 위나라, 서진, 동진 그리고 남조국가들을 말아먹는다. 결국 이러한 천거 시스템과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문벌귀족]]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고 귀족이 되고 말고는 황제가 간섭할 수 없고 귀족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든가 황제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귀족들이 얕잡아보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제도가 쉽게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결국 수나라 때에 가서야 [[과거 제도]]의 전신격인 제도가 마련되어 과거 제도의 시작을 알리지만 그 후에도 그 잔재는 많이 남아[* 기본적으로 북주 때부터 형성된 관롱집단이 당나라 중기까지 세를 떨쳤고 당나라 말기에는 환관들이 강해져 과거제가 활성화될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측천무후나 당현종 같은 이들은 과거 급제자들을 어느정도 써줬다.] [[송나라]] 때에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과거 제도로 바뀐다.[* 송나라 시기에 본격적으로 과거제가 꽃피울 수 있던건 반쯤 주전충 때문이다. 주전충은 당을 멸하는 과정에서 환관, 문벌귀족 등 기존 당나라 체제의 지배층을 대거 학살했고 오대십국시대가 열리며 무장들의 권력이 강해졌지만 정작 이 무장들은 송나라 건국 후 아주 평화롭게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결국 환관도 없고 문벌귀족들도 없고 무장들도 없으니 자연스레 과거제가 꽃피워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천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서 위의 예시처럼 조선에서도 천거란 흔했다. 단지 그것이 주가 아니었을 뿐 다만 조선에서도 이런 천거 시스템을 다시 제도화하려는 주장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중종때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를 주장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과거 제도]]의 문제점과 폐단을 지적하며 과거 제도와 천거제의 병행이나 혹은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천거제로의 회귀를 주장했으나 아무래도 천거제의 태생적 문제점이 과거제보다도 심한지라 현량과는 실패했고[* 실패해도 대실패로 끝났다. 어느 정도냐고? 전국에서 33명을 뽑는데 '우연히도' 모두 서울 출신의 명문가 자제에 정승인 안당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으며 무엇보다 조광조 세력만 뽑았다.천거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 실학자들도 "좋은 인재들을 잘 선발해서 천거해야~" 수준의 주장만 할 수 있었지[* 이런 건 아무나 다 한다(...) 하다못해 향거리선제와 구품관인법도 취지는 이런 것이었다.] 어떻게 천거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할 지는 내놓지 못했다. 분명 천거제는 장점도 있다. 천거하는 사람의 역량이 뛰어난 경우 누가 봐도 "어? 이 사람은 아닌데?" 라고 할 사람이지만 정작 앉혀놓고 보니 제대로 된 사람인 경우도 있다. 앞서 말했듯 유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순신은 너무 특진이라고 유성룡과 동기 겸 같은 당파인 김성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렇게 천거제는 능력은 있지만 어떤 사정으로 인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던 사람을 발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장점은 단점이 되는게[* 갑툭튀가 벼슬에 앉을 수 있으니 천거하는 사람 눈에만 잘 띄면 자기가 능력이 없어도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부지기수인 것이 한계였고 결국 중국과 한국에서는 [[과거 제도]]에 그 자리를 내주고 기껏해야 '이 사람을 어떤 자리에 앉힐 것인가' 정도의 일에 활용될 수 있었다. 안량과 문추가 천거제의 부작용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증거가 없다.[* 문추는 그렇다쳐도 안량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저 [[관우|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 딱히 무능했다거나 삽질을 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 == 현재 == * 오늘날에는 각 정당에서 선거 후보를 [[공천]]할 때 천거를 통해 후보를 정해서 출마시킨다. * 문학계에서도 존재하는데 1965년, [[박목월]]은 [[유안진]]을 천거해 시인으로 등단시켰다. * [[이경규]]가 [[강호동]]을 연예계에 진입시킨 일이나 [[이영자]]가 [[홍진경]]에게 [[코메디언]]을 시켜준 일 등이 일종의 천거에 해당된다. * [[김영삼]]은 평소에 인재 욕심이 많아서 [[노무현]],[* 노무현과 함께 동료 [[문재인]]에게도 김영삼이 정계 입문을 제의했지만 당시 거절했다고 한다.]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안희정]] 등 인재들을 천거했는데 이 사람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각자 한 때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 중 노무현[* 정계 입문은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3당 합당]]에 반발해 탈당한다.]과 이명박 두 사람은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지만, 이인제와 안희정은 대권 도전을 했지만 실패했고, 그 중에서도 안희정은 재기불능에 빠졌다. * 이후 이회창 역시 [[박근혜]]를 천거했고, 그걸 이어받아 [[박근혜]]도 [[이준석]]과 [[손수조]]를 천거했는데... 둘 다 [[최순실 게이트|이거 한 방]]으로 다 같이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가 이준석은 다시 기반을 탄탄히 쌓아 올려 국민의힘 초대 대표, 그것도 '30대 당대표'로 생환했지만 기어이 쫓겨나고 만다. [[분류:한국사]][[분류:중국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