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Jön-Türkler.png]] 터키어: Jön Türkler / Genç Türkler 불어: Les Jeunes Turcs 영어: Young Turks [목차] == 설명 == [[오스만 제국]]의 [[급진주의]], [[내셔널리즘]] [[정당]]으로,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 통일운동]] 지도자 [[주세페 마치니]]가 창당한 '[[청년 이탈리아당]]'의 영향을 받아 '[[청년]]'이 들어간 당명을 채택했다. == 역사 == [[1889년]] [[압뒬하미트 2세]](1876~1909)가 미트하트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키자, 이브라힘 테모를 중심으로 한 젊은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만들었다. 처음에는 비밀 결사로 시작했으나 20세기에 세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젊은 지식인, 육군 장교, 공무원 등 각 계층이 가담하였다. 1906년에 공식적으로 '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창설하였으며, 1908년에는 혁명을 일으켜 압뒬하미트 2세에게 헌법&입헌군주제 부활과 퇴위 서명을 강요했다. 그렇게 [[압뒬하미트 2세]]를 폐위시킨 후 정식 정당으로 승격하여 1918년까지 10년동안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초기에 청년 튀르크당은 2차 헌법을 제정하고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여 신민법과 신상법을 공포했으며,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여성의 지위 개선 및 취업을 위한 조치와 국민 교육을 위한 각종 단체의 설치를 진행하였다. 1911년에 청년 튀르크당 내에서 분열이 일어났는데, 연합진보위원회에서 일부 당원들이 '자유와 합의당'을 창설하여 갈라졌다. == 분파 == === 연합진보위원회 === 급진적 [[튀르키예]] [[내셔널리즘]] 정당으로 [[종족 내셔널리즘|반소수민족]], [[반교권주의|반교권]], [[국민국가]] 확립을 내걸었다.1912년 총선에서 자유와 합의당이 연합진보위원회를 상대로 승리하자, 1913년에 [[엔베르 파샤]]가 이끄는 일부 연합진보위원회 당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오스만 제국]]의 정권을 잡았다. 당시 연합진보위원회의 상부에는 세 명의 파샤(탈라트 파샤, 제말 파샤, 엔베르 파샤)가 있었는데, 이 세 명의 파샤는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독일 제국]]과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이 있는 [[동맹국]]에 가담했다. 1918년에 전쟁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난 뒤, 연합진보회의는 해체되었다. 세 파샤는 10월 13일에 사임했고, 재판을 받은 결과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요 명령자였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비밀결사]]의 보복 표적이 됐다. 탈라트 파샤는 베를린으로 갔다가 1921년에 아르메니아인에게 암살당했고 제말 파샤 역시 1922년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엔베르 파샤는 튀르크 제국 재건국을 위해 유라시아 중부로 갔다가 내전 중 살해되었다. === 자유와 합의당 === [[자유보수주의]] 정당으로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청년 튀르크당 온건파로 [[지방자치]]와 [[소수민족]] 자치를 보장하는 정책으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1912년 총선을 승리하고 대재상으로 카밀 파샤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쿠데타가 발생하고 연합진보위원회가 정부를 장악한다. 대외정책에서 친영파였던 자유와 합의당과 다르게 연합진보위원회는 친독파였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를 공격하는 희대의 악수를 두고 만다. 세 파샤가 전쟁 시기 가히 끔찍한 수준의 지휘를 한 결과 전쟁은 참패로 끝났다. 자유와 합의당은 복귀하게 되었고 당수 다마트 페리트 파샤가 신임 대재상으로 임명되어 [[세브르 조약]]에 사인하며 전쟁을 종결하게 된다. 자유와 합의당은 전쟁 책임을 뒤집어 쓰고 만신창이가 된 연합진보위원회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와 합의당이라고 지지도가 높아졌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에 사인한 것과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시인한 것 때문에 [[미하일 고르바초프|국내의 인기는 낮아지고 해외에서만 오스만의 양심으로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조약반대파가 봉기하며 [[튀르키예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여당이었던 자유와 합의당은 튀르키예 대국민회의와 [[케말 파샤]]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와 합의당 인사들도 전쟁을 피해 상당수 국외로 망명하거나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정당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잃은 청년 튀르크당은 1922년 11월에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함께 해체되었다 == 파생 용어 == 서구권에서 영턱스(Young turks)는 뭔가 저항적인, 급진적인 청년 진보 정치 운동을 상징하는 표어가 됐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오리지날 운동과는 별개로 개혁적, 급진적, 진보적, 반체제 운동에 [[영턱스]]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많다. 동명의 언론도 있고 한국의 가수인 [[영턱스클럽]]도 이 청년 튀르크당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역사적 용어를 잘 모르니 '젊은 개구쟁이들의 클럽'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 정당인 [[신한청년당]] 역시 이 정당의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여운형|당수]]의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 [[대만]]의 [[군소정당]]인 [[중국 청년당]] 또한 [[파리(프랑스)|프랑스 파리]]에 있던 [[중화민국|중국]] 유학생들이 청년 튀르크당의 영향을 받고 설립했다. [[분류:19세기 정당]][[분류:과거의 독재정당]][[분류:급진주의 정당]][[분류:오스만 제국]][[분류:내셔널리즘 정당]][[분류:빅 텐트 정당]][[분류:튀르키예의 없어진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