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사르데냐 총리]][[분류:이탈리아 총리]][[분류:1810년 출생]][[분류:1861년 사망]][[분류:피에몬테 주 출신 인물]][[분류:토리노 출신 인물]][[분류:말라리아로 죽은 인물]] [include(틀:역대 이탈리아 왕국 총리)] ---- ||<-7><:> [[사르데냐 왕국|[[파일:사르데냐 왕국 국장(1848).svg|width=100]]]] || ||<-7><#003399><:> '''[[이탈리아 통일|{{{#fff 이탈리아 통일 삼걸}}}]]''' || ||<#009246><:> {{{#fff '''카밀로 카보우르''' }}} ||<:><#ffffff> [[주세페 가리발디|{{{#000 주세페 가리발디}}}]] ||<#CE2B37><:> [[주세페 마치니|{{{#fff 주세페 마치니}}}]] || ---- ||<-2> '''SOMHA OSML COS[br]{{{+1 카밀로 카보우르}}}[br]Camillo Cavour'''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1px-Camillo_Benso_Cavour_di_Ciseri.jpg|width=100%]]}}} || || '''본명''' ||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br]Camillo Paolo Filippo Giulio Benso|| || '''작위''' ||카보우르·첼라렝고·이솔라벨라 [[백작]][br]Conte di Cavour, di Cellarengo e di Isolabella|| ||<|2> '''출생''' ||[[1810년]] [[8월 10일]]|| ||[[프랑스 제1제국]] [[토리노]]|| ||<|2> '''사망''' ||[[1861년]] [[6월 6일]] (향년 50세)||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25]] [[이탈리아 왕국]]|| || '''직업''' ||정치인, 외교관|| || '''정당''' ||[[왕당파]], [[역사적 우파]]|| || '''서명''' ||[[파일:Camillo_Benso,_conte_di_Cavour_Signature.svg.png|width=200&bgcolor=#fff]]||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 왕국]]의 정치가 본명은 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Camillo Paolo Filippo Giulio Benso)이다. 카보우르는 [[피에몬테]]에 위치한 [[도시]]이자, 그의 [[작위]]를 상징하는 [[영지]](領地)이다. [[주세페 마치니]], [[주세페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 건국 3걸로 꼽히며, '''이탈리아 통일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에 있던 [[롬바르디아]] 탈환과 중부의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파르마 공국]] 병합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하였으며, 가리발디를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가도록 회유한 장본인이다.] 카보우르가 태어난 [[토리노]]는 [[피에몬테어]] 사용 지역으로서 o가 /u/ 발음이라 Cavor로 쓰고 [kaˈʋʊr](카부르)로 읽는다. [[이탈리아어]]로도 [[프랑스어]]처럼 Cavour로 쓰고 [kaˈvur](카부르)로 발음하는 예외적 사례인데, [[외래어 표기법/이탈리아어|외래어 표기법]]이 만들어질 때 이런 예외를 인지하지 못해 표기가 '카보우르'가 되어버렸다. 과거 자료를 보면 카부르라 적힌 걸 확인할 수 있으며, [[1980년대]] 말에 나온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 [[박흥용]] 그림, [[이원복]] 감수]에서도 '카밀로 카부르'라 표기했다. == 생애 ==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 제1제국]][* 이 무렵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는 본토인 [[피에몬테]]를 프랑스에게 뺏기고 [[사르데냐]]로 피난가 있었다.]의 토리노에서 미켈레 벤소 제5대 카보우르 후작(Michele Benso, V marchese di Cavour)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아델라이드 드 셀롱(Adélaïde de Sellon)은 [[제네바]] 출신의 [[프랑스인]]이었으며, 게다가 대부모(代父母)가 무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폴린(Pauline)과 그의 남편 카밀로 보르게세(Camillo Borghese)였다. 그의 이름인 카밀로도 대부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10살 때 토리노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824년]] [[6월]]에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시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강한 고집으로 사관학교의 규율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한 번은 사관학교 내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을 열람해 [[빵]] 하나와 [[물]]만으로 삼일을 버티도록 처벌받은 적도 있었다. [[1827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장교로 임관하여, [[1831년]] [[11월]]까지 군에서 복무했다. 제대한 후에는 [[가족]]의 [[영지]]였던 그린차네(Grinzane)를 경영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변화에 앞서 경제적인 변화가 선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철도]], [[운하]]등의 기반 시설과 농업 기술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증기 기관의 열성적인 후원자였으며, [[이탈리아인]] 지주로서는 최초로 화학 [[비료]]를 도입하기도 했다.[* 의외로 화학 비료 자체는 [[19세기]]부터 어느정도 도입되었고 본격화된 것은 [[프리츠 하버]]의 질소 고정법.] [[1847년]]《[[리소르지멘토]]》지를 발간하여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제창하였다.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훗날의 통일전쟁 수행에 있어 [[강대국]]인 [[대영제국|영국]]과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며, 결국 이러한 외교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나폴레옹 3세]]로부터 이탈리아 통일을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차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기 위해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對) 오스트리아 전쟁에 나섰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완파하고 전면적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프랑스군이 빌라프랑카 강화 조약을 맺어 전쟁터에서 일제히 발을 빼는 배신을 행함과 동시에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여태까지 얻은 성과로 만족하고 전쟁을 멈추라는 권고를 했다. 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한 카보우르는 단독으로라도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지금까지 얻은 성과조차 모두 날리고 프랑스까지 적대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나폴레옹 3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고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나 여전히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피렌체]], [[로마]][* 이 당시 로마는 [[교황령]]이었다.] 등의 중부 이탈리아는 병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는 조건으로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와 [[사보이아 가문|왕실]]의 발원지인 [[사부아|사보이아]]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1860년, 로마와 북부지방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중-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대(大)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건설했다. 또한 [[양시칠리아 왕국]]을 전복시키려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원정을 지원하였고[* 그러나 가리발디는 카보우르를 굉장히 싫어했다. 통일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니스|니차]]를 프랑스에 양도했기 때문.], 원정이 대성공으로 끝난 [[1861년]] 양시칠리아 왕국까지 사르네댜-피에몬테 왕국으로 [[합병]]되면서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 지역이 통일되었다. 카보우르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신생 통일국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직 회복하지 못 한 [[로마]]와 [[베네치아]]를 수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격무에 시달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총리가 된 지 3달 만인 [[1861년]] [[6월 6일]] 사망했다. == 기타 == *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인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과 항공모함인 [[카보우르(항공모함)|콘테 디 카보우르급]]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와서 명명되었다. * [[돈 보스코]] 성인이 모국인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서 벌어진 반 교권 운동에 반발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한 적이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무시했으나 수상인 카밀로 카보우르가 그의 편지를 보고 대신 정중한 문장으로 답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