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ttachment/antoniopadova1.jpg|align=center]] Santo António de '''Lisboa'''([[포르투갈어]])[* 고향은 리스본, 활동한곳은 이탈리아 파도바로 전형적인 두 도시가 우리 동네 성인이라고 두고 싸우는 성인이다. 대외적으론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로 알려져있지만 리스본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동네마다 장식에 성화에 리스본 출신이란걸 강조하니깐 포르투갈 사람들 앞에선 리스본의 성 안토니오라 불러주자.] Sant'Antonio da Padova ([[이탈리아어]]) [[1195년]] [[8월 15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보아]] ~ [[1231년]] [[6월 13일]] [[시에나 공화국]](현 [[이탈리아]]) 베로나 [목차] == 개요 == 본명은 페르난두 마르팅 드 불룡이스 이 타베이라 아제베두(Fernando Martim de Bulhões e Taveira Azevedo).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의 [[수도자]], [[신부(성직자)|신부]], 교회박사. [[안토니오 아빠스]]와는 달리 [[가톨릭]]에 한정된 성인이며 축일은 [[6월 13일]]. 상징물은 지식의 상징인 [[책]], [[빵]], 환시 때에 봤다는 아기 [[예수]], [[백합]], [[물고기]], 불타는 [[심장]]. 36세라는 [[요절|젊은 나이에 죽은]] 성인이므로 어디선가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설명할 때 노인의 모습이 그려진 성화가 첨부되어 있다면 그건 [[안토니오 아빠스]]를 착각한 것이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머리 가운데가 [[도넛]]처럼 뚫린 탁발 [[수도자]]의 모습을 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기 [[예수]]와 [[백합]]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분실물의 [[수호성인]]이며 그에게 [[전구]]하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파도바, [[포르투갈]],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특히 [[파도바]]에서는 축일이 되면 성인을 기리는 퍼레이드를 연다. 신분이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페르난도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5세 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이어 1212년에는 지인들을 피해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1219년 수도사제[* [[사제]]이면서 [[수도자]]. 수사신부 또는 성직수사라고도 한다.]가 되었다. [[파일:attachment/antoniopadova2.jpg]] 그런데 그 다음 해 1월 말, 성 베라르도를 위시해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순교]]한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이들의 [[순교]] 과정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항목 참고. 사실 페르난도는 모로코로 가는 길에 성 십자가 수도회에 들른 5명의 [[수도자|수사]]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5명의 성해가 [[포르투갈]] 친왕 동 페드루 페르난드슈에 의해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다. 마침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성 십자가 수도회의 소극적인 성향이 답답했던 페르난도는, 그 순간 자신도 [[순교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 지체 없이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로 갈아탔다.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로, 페르난도란 이름은 귀족만이 쓸 수 있는데 속칭 거지들 틈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어 바꿔야 했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필리피노 수사와 [[모로코]] 선교를 지원하여 갔으나, 병이 나서 [[포르투갈]]로 돌아가야 했다. 물론 폭풍우 때문에 돌아가는 길도 순탄치는 못했다고. 1221년, 포르치운쿨라의 작은형제회 총회에 참여한 안토니오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고, 무작정 [[순교]]하려 하는 게 옳은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허락을 받고 포를리라는 곳의 몬테파올로 운둔소에서 고행생활을 하다, 1222년에는 코임브라 관구장 그란치아노 신부와 함께 [[도미니코회]] 수도사제 [[성품성사|서품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강론할 사제가 어떤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수도원장의 주청으로 대신 강론하게 되었다. 그의 웅변 포텐이 여기서 우연히 터지게 되었는데,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곳의 수도원장은 안토니오에게 운둔생활에서 벗어나 설교활동을 하길 종용했고, 곧 이단이 판치던 남부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곳 외에도 몇 곳을 돌아다니며 연이은 대박을 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223년에는 작은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교수가 되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죽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후계를 정하는 총회에 참석한 뒤 파도바의 수도원으로 가 그 지방의 사람들을 완전히 감화시키는 등 활발한 설교 활동을 하였다. 사람들은 가공할 설교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안토니오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 있는 언약의 궤''''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안토니오는 [[리미니]]에서 영감을 받아 바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했고, '''물고기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한다.''' 36세가 되던 1231년, 열병이 난 안토니오는 요양을 위해 캄포 산 피에로로 갔다 낫지 않자 파도바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베로나의 [[http://www.clara.or.kr|가난한 글라라 수녀원]]에 들른 그는 6월 13일, 그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사후 그의 성해는 파도바에 돌아와 묻혔고, 바로 다음 해인 1232년 5월 30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시성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성인(기독교)|성인]]이 되었다.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st+anth+tongue.jpg|width=400]] || || 성 안토니오의 [[혀]] || 1263년에는 안토니오 성인이 묻힌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이 때 기공식에서 성인의 유해 이장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당시 [[프란치스코회]] 총장인 성 [[보나벤투라]]였다. 이 때 유해가 일반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다른 부분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혀]]만이 썩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볼로냐의 귀도 [[추기경]]이 유해를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여전히 썩지 않은 혀는 따로 꺼내어져 [[성유물]] 상자에 보관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946년]] [[1월 16일]]에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분류:가톨릭 성인]] [[분류:교회학자]] [[분류:가톨릭 수도사제]] [[분류:프란치스코회 수도자]] [[분류:이탈리아의 가톨릭 신부]] [[분류:1195년 출생]] [[분류:1231년 사망]] [[분류:화폐의 인물]] [[분류:리스본 출신 인물]] [[분류:포르투갈계 이탈리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