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행정구역]] [Include(틀:조선의 행정구역)] ||<-4> '''[[파일:조선 어기.svg|height=15]] [[조선|{{{#000000,#dddddd 조선}}}]]의 [[군(행정구역)|{{{#000000,#dddddd 군}}}]]'''[br]{{{#!wiki style="margin: -5px -10px; display: inline-table" || {{{#!wiki style="margin: -5px 0" '''{{{+1 평창군}}}'''[br]平昌郡[br]{{{-1 Pyeongchang-gun}}}}}} ||}}} || ||<-4> [[파일:대동여지도 평창군.jpg|width=100%]] || ||<-2> '''관아 소재지''' ||<-2>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 ||<-2> '''하위 행정구역''' ||<-2> 4면 1읍 || ||<-2> '''인구''' ||<-2> 1만 7820명 || ||<-2> '''평창군수''' ||<-2> 구연수(具然壽)[* [[1908년]] [[2월 10일]]에 승정원일기에서 기록한 마지막 평창군수.]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 강원도 평창 지역을 다스렸던 군. == 상세 ==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목조(穆祖)의 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고향이었다는 이유로 다시 평창군으로 승격시켰다. 제14대 선조 당시 김광복이 노산성을 축성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 권두문(權斗文)·이지사함·우응민·이인노등과 함께 군민들이 천연의 요새인 응암굴에서 왜군에 항전했다. 이 때 병사들은 장렬히 전사하고 권두문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뒤에 권두문은 탈출에 성공해 당시의 일을 일기로 남김으로써 임진왜란의 증인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에 충주관찰사 소속의 군이 되어 5개 면을 관할했으며, 다음 해 다시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 역대 평창군사와 평창군수 == == 태종 ~ 문종 == 평창군사 남인전(南仁琠) [[태종]] 11년(1411년)당시의 지평창군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최초로 기록된 평창군사이다. 다른 지사들과 뇌물을 보내던 강원 감사 박습(朴習)에게 면포와 가죽과 종이를 기증했다한다. 평창군사 박전(朴箋) 태종시기 [[사헌부]] 감찰사 출신으로 태종 13년(1413년) 사헌부에 여러 대장들이 탄핵당하자 감찰사 손관(孫寬)이 황경돈(黃敬敦)과 박전에게 대고(臺庫) 열게하여 이게 알려저 태종의 명에 의해 조사에 들어가 [[순금사]]에 보내 조언에 따라 [[속죄할 속|속(贖)]]을 거두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강릉판관 최안선(崔安善) 등과 함께 세종에게 사조하여 [[세종대왕|세종]]이 불러 "강원도는 지난해 실농(失農)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많이 유리(流離)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그 고을에 가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삼가며 농상(農桑)을 권장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소복(蘇復)되게 하여 내 뜻에 부응(副應)하게 하라."라고 했다. 평창군사 김유보(金兪甫) 세종 12년 호조에서 여러 공법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때 다른 강원도에 관찰사.판목사.군사 등과 함께 "땅의 비옥함과 척박함이 각기 다르고, 묵히기도 하고 개간하기도 하는 등 산 위에 화전(火田)의 경작이 몹시 많으므로, 전대로 손실에 따라서 조세를 거두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평창군사 강일우(姜一遇) 문종 즉위년(1450년) 당시 포대 300개를 만들어 사는 고을로 가져가 민간에 강제로 팔았다. 문종 1년(1451년) 장령 나홍서(羅洪緖)가 강일우의 죄의 증인들이 모두 자백하였으니 처벌하는 게 어렵다고는 하나 백성을 다스리는데 마땅하지 않으니 파면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문종이 내가 마땅히 고쳐 임명하겠다고 했다. == 성종 ~ 명종 == 평창군수 김순성(金順誠) 성종 3년(1472) 원래 [[한성]]에 서윤으로 임명받았으나 어떤 이유로 평창군수로 가게되어 엄청난 불만을 가지게 되어 아내에게 병을 부탁하고 자식에게 글을 올려달라고까지 한다 심지어 사헌부 장령인 허적(許迪)이 평창군수에 쓰지 말아달라고까지 하였다 다른 장령인 이맹현(李孟賢)은 죄를 줘야한다고 했다 평창군수 김성경(金成慶) 성종 20년(1489년) [[선산 김씨]]로 통례원 인의와 헌납(獻納) 출신이다 현조 정랑 조지서(趙之瑞)에게 오해를 받아 가둬졌었다 이후 청주 목사로 지냈었다 평창군수 박원장(朴元長) 중종 6년(1511년) [[사간원]]에서 여러 현감.부정 등과 함께 잔약 용렬하다고 평가하며 속히 갈아야한다고 하였으나 농사철이라 갈면 피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신속히 갈지는 않았다 5월 1일 파직 당한 것으로보이는데 어째 이름이 박장원(朴長元)으로 되어있다 번역과정에서의 문제거나 혹은 당시의 실수 일 것으로 보인다 평창군수 신희정(辛熙貞) 중종 18년(1523년) [[사헌부]]에서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지 못 한 일들이 있었으니 바꿔달라고 하였으나 "전 군수[* 위에 박원장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모른다 ]가 불법적인 일로 파직되어으니 전관보다 현명한 사람을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체직 된 사람이 많기에 이조가 꼭 주의할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니, 보내더라도 어찌 방해롭겠는가?"라고 하였다 평창군수 이유언(李幼彦) 명종 12년 [[사헌부]]의 의하면 원래 경망한 사람이였으나 관의 노비와 함께자는 음탕한 짓을 자행하고 전조의 장관을 비방하녔다고한다 그런데 4품에 올라 파직을 명해달라고 올리자 말한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평창군수 양사언(楊士彦) 명종 16년(1561년) 상소를 하나 올렸는데 매우 길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평창 군수(平昌郡守) 양사언(楊士彦)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대략에, ] 신이 맡고 있는 고을은 바로 옛적 예맥(穢貊)의 한 작은 고을입니다. 주민들은 모두 암굴에서 짐승처럼 거처하는 섶을 묶어 입구를 가리며 비탈밭을 경작하여 근근이 수확하면서 구차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목조(穆祖)008) 의 비(妃)009) 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감면했는데도 전결(田結)은 8백 결(結)에 불과하고 민호(民戶)도 5백 호를 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세가 바뀌어 청백한 수령이 부임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원망 속에 살아 온 지 60여 년이 되는데 그 사이 논밭은 날로 더욱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갈수록 유리(流離)되었습니다. 신이 도임한 날에 먼저 장적(帳籍)을 펼쳐보니 곡식이 9백 석이고 주민이 40호이고 잔리(殘吏)가 8∼9명이고 시역(廝役)이 수십 명이었는데, 귀신 같은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를 했고 옷은 해져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애처로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전지가 묵게 된 까닭을 물어보니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인데 누구와 더불어 경작하겠는가? 40호의 힘으로 옛날 5백 호의 부역을 감당해야 하고 1백 결의 전지로 전날 8백 결의 공물을 내야 한다. 아비 죽은 아들과 남편 죽은 과부뿐이어서 일족이 떠난 데는 호(戶)가 끊어졌고 이웃이 떠난 데는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우리 고을을 점검해 보면 위태롭고 고달픈 사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마음에 감촉되는 바가 있어 신은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깊이 생각하고 심력(心力)을 다 기울여 세 가지 계책을 얻었는데 전하께서는 잘 살펴 주소서. 등(滕) 나라와 설(薛) 나라가 부용국(附庸國)으로 조회(朝會)하지 못한 것은 땅이 편소했기 때문이고, 여좌(閭左)의 한전(閒田)에 대해 공물을 받지 않은 것은 주민이 가난했기 때문이고, 관문(關門)과 교량(橋梁) 및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은 것은 흉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열 집에 아홉 집이 빈 고을이 무익하게 허명(虛名)만 있으니 삭제하고 다른 고을에 합쳐 다스리기만 하고 부역을 시키지 않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46호의 주민들을 위로하고 각종 명목의 신구(新舊) 공물을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미수한 대여 양곡은 포기하고 10년 동안 산림세를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계책을 쓰고도 유민(流民)이 돌아오지 않거나 양곡이 저축되지 않았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불쌍한 이 백성들이 전하의 어진 정치를 받아 10년간 부역도 공물도 세금도 부담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한 고을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온 나라의 유민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이 수령의 적에 있으니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허기(虛器)만 안고 앉아 있을 수는 없겠기에 쇠잔한 고을 잿더미 위에서 먼저 세 가지 계책을 바치고 다음으로 도형(圖形) 【상소문 아래에 그 고을의 산천을 그리고 또 민호(民戶)·전결(田結)과 창고 양곡의 해마다의 모곡(耗穀)을 조목조목 열기하였다.】 을 그려 올리니 전하께서 밝게 살피소서. 아아, 눈앞의 참담하고 급박한 상황은 문사로만 애통해 할 정도가 아니니, 어찌 여유를 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대신들과 상의하여 안으로는 해사에 위임하고 밖으로는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결단을 내려 시행하신다면 백성을 은혜롭게 보호하는 정치가 이번 이 일에서 실천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저의 어리석은 소견을 용서하소서. }}} 대충 요약하자면 60년동안[* 위에 박원장-신희정-이유언을 말하는 것 같다] 청백한 수령이 임명 된 적이 없어 백성들이 죽어나간다는 글인데 정원에 언급을 보면 그림까지 그렸다는 것을보아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군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선조 시기 ==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 가장 잘 알려진 평창군수 안동 권씨로 1543년(중종 38년)~1617년(광해군 9년)까지 살았다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산성을 재보수하고 응전했으나 점령되자 가족과 군민들을 매화굴(응암굴)로 피신시키고 이지사함·우응민·이인노등과 함께 군민들이 천연의 요새인 응암굴에서 강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왜군에 항전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여러 관원들과 포로가 되었다 그후 원주로 끌려가 적진 가운데 있으면서 적의 정세를 세밀히 탐지해 관군에게 알렸는데, 이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 [[호구록|호구일록(虎口日錄)]]이다 서고에 갇혔으나 서고의 벽을 뚫어 탈출 후 평창으로 돌아갔다 이때 평창군민들의 환호를 받았다고한다 백유항(白惟恒) 정유재란 당시 현령 선조 30년 10월 13일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이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수령들에 대해 아뢴 내용에서 왜적이 경내까지 들어올 때 마지막으로 피신할때 잡혔으나 가까스로 도망가 도내에 있었다 평창군수 강봉수(姜鳳壽) 사간원에서 산골짜기의 매우 잔폐(殘弊)한 고을로서 백성이 30호[* 집 30채]도 못되므로 소생하도록 하려면 현저하게 근간(勤幹)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라고하며 나이가 늙고 성품도 어리석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라고 하여 밑에 김호로 바뀌었다 평창군수 김호(金浩) 선조 37년(1604년) 임명됐다 선조 38년(1605년) 강원도에 대규모 폭우로 "이달 20일 큰비가 억수 같이 퍼붓고 동북풍이 거세게 불어 물가의 민가 10여 채가 전부 떠내려 갔고 올곡식과 늦곡식이 모두 손상되어 추수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변이가 비상하다" 라고 하였다 아마 이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 하여 관직에서 잘린 것으로 보인다 평창군수 조공근(趙公瑾) 선조 39년(1606년) 임명되었다 == 인조 시기 == 인문현(李文顯) 인조1년 강원감사 서목이 통천군 3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상피(相避) 해야 하니 해조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소서라하여 파출 당하였다 윤취지(尹就之) 인조3년 2월4일 임명되었다 거의 임기가 끝나기전에 파직되었는데 개인의 정 때문에 법을 무시해서 파직되었다 이천(李蕆) 인조3년 11월 10일 하직하였다 이유경(李有慶) 인조 6년 10월 15일 행호군 이준(李埈)이 상소하기를 나이가 노쇠하여 군수를 바꿔달라고 하였으나 "이유경이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필시 이 직임을 감당하지 못할 리는 없을 것이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라고 하며 윤허하였다 인조 8년 9월 16일 강원도 암행어사 서계(書啓)가 군수 이유경을 파면해달라고 하였다 권경(權儆) 인조 8년 10월15일 하작하였다 평창군수 심지한(沈之漢) 인조 18년(1640년) 조선왕조실록에서 사간원에서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있던 병자년에 마침 우리 군대가 마구 패하여 무너지던 때를 당해서, 명나라 사신을 내쫓는 변을 일으킬 때 조금이나마 가담한 흔적이 있었으니, 사형에 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가 고의적으로 한 사실이 없었음을 특별히 용서하여 비록 형률은 쓰지 않았다 할지라도, 지금 곧바로 수령의 직임을 제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라고 하였고 승정원 일기에서는 병자호란때 왕의 명을 받고온 사람을 내쫒았다고 적혀있다 군수를 바꿨다 이목(李 莯) 인조 18년 7월 21일 임명되었다 조국빈(趙國賓) 인조 20년 7월 5일 임명되었다 인조 21년 1월 2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아니 뭘요-- 평창군수 김정립(金正立) 인조 22년(1644년) 표라 1습을 하사하였다 김시번(金始蕃)의 계(啓)를 따른 것으로 일 처리를 잘한것으로 보인다 == 효종 시기 == 김우창(金大昌) 효종 즉위년(1649년) 임명되었다 이문주(李文柱) 효종 4년 7월 9일 임명되었다 변명익(邊命益) 효종 6년 1월 7일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뢴 내용 중 언급되는데 도감 간청으로 있을 때 궁노등의 물품에 세금을 감세해주었는데 수령으로 제수해주어 일을 마치게 해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여 효종이 그러라고 하였다 유위 효종 6년 1월 9일 변명익이 빠지며 임명되었다 효종 6년 2월1일 하직하였다 평창군수 [[유비]](柳秠) 효종 8년(1657년) 상소를 올리자 효종이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았다고 하였다. 내가 측은하게 여기니 해당 조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겠다."라며 본군의 세포를 감해주었다 == 현종시기 == 이운근(李雲根) 현종 즉위년(1659년) 임명되었다 정시심(鄭時諶) 현종 4년 4월 17일 임명되었다 조사기(趙嗣基) 현종 8년 10월 14일 임명 됐다 현종 8년 11월 20일 하직하였으나 현종 9년까지 평창에서 일하다가 이삼재(李三才)의 추천으로 사헌부에 계사(啓辭)로 들어갔다 평창현감 김세필(金世泌) 현종8년 12월 4일 호조가 신공(身貢)을 다 받지 못 하여 여러 부사와 현령을 의금부에 잡아다 신문 받게 하라는 내용에 이름이 적혀있다 김우(金楀) 현종10년 5월 14일 임명되었다 6월 18일 하직하였다 구옥 or 구만(具鋈) 현종 10년 11월 1일 임명되어 12월 12일 하직했다 송국귀(宋國龜) 현종 11년 1월 6일 사은을 했다 이후 현종 14년 농작물의 피해가 생겨 10부 이상의 피해가 생긴 고을의 수령을 파직시킨후 송국귀에게 벼슬을 내렸다 박세봉(朴世封) 현종 14년 10월 28일 임명 받았다 이상정(李象鼎) 현종 14년 11월 26일 하직하였다 이종정(李宗鼎) 현종 14년 12월 28일 12월 21일에 사망하였다 거의 유일하게 사망이 기록되어있는 군수다 == 숙종 시기 == 기위(愭爲) 숙종 1년 12월 27일(1675년) 임명되었다 권지(權 榰) 숙종 4년 9월 26일 관직을 버려 파직당하였다 --(??)-- 윤민성(尹敏聖) 숙종 4년 9월 28일 임명받았다 숙종 4년 10월 25일 하직하였다 숙종 6년 3월 26일 강원 감사에 의해 파직당할 뻔 했으나 농사철인지라 회유로 하라고 숙종이 말했다 최선(崔渲) 숙종 7년 4월 9일 임명받았다 숙종 7년 4월 17일 사은(謝恩)하였다 숙종 7년 4월 27일 하직하였다 한지원(韓志遠) 숙종 9년 11월 6일 하직하였다 조이한(趙爾翰) 숙종 16년 경솔하게 시장을 먼저 닫았다고 파출당했다--(???)-- 김필진(金必振) 숙종 16년 3월 20일 임명되었다 4월 22일 소장을 냈는데 원래있던 담증에 증세가 심해지고 감기에 걸려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하여 군수가 바뀌었다 이만(李琩) 숙종 16년 4월 26일 김필진이 담증으로 인해 파출되고 임명되었다 5월 29일 하직하였다 박태장(朴泰長) 숙종 16년 10월 24일 임명되었다 임이도(任以道) 숙종 16년 12월 3일 하빅하였다 곽창진(郭昌徵) 18년 5월 12일 하직하였다 권영로(權穎老) 22년 5월 22일 사은하였다 권팽로(權彭老) 숙종 22년 6월 9이 하직하였다 이문장(李文長) 숙종 23년 6월 26일 하직하였다 숙종 26년 10월 25일 파출당했다 이택(李澤) 숙종 26년 11월 18일 고질병의 악화로 파출되었다 성지민(成至敏) 숙종 26년 28년 9월 5일~ 26년 12월 13일 성숙(成璹) 숙종 28년 9월 5일 ~ 10월 17일 숙종 30년 11월 19일 진휼을 잘한 일로 품계를 승격받았으나 준직(準職)을 거치지 않아 어떻게 하냐는 이비의 말에 특별히 승격 하라고 하였다 평창군수 이형(李瀅) 숙종 32년 1월 10일 임명 받았다 숙종 35년 11월 20일 차사원으로 올라갔다 숙종 36년 8월 19일 참선(站船)을 개삭(改 槊) 할 때에 영문(營門)의 정식(定式)을 따르지 않고 본군(本郡)의 잘못된 규례라고 하면서 함부로 민결(民結)을 소비하였다고 했다 숙종 38년(1708) 포상을 받았다 홍우채(洪禹采) 숙종 36년 8월 23일 임명되었다 숙종 36년 9월 11일 사간원에서 사재감 첨정 이횡(李宖), 평창 군수(平昌郡守) 홍우채(洪禹采)는 일찍이 호조 낭관을 지냈고, 또 별영 별고(別營別庫)를 겸하고 있어 일이 대부분 비루하여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였는데, 사람들의 비난이 있게 되자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에 있어 염치를 심하게 잃었습니다. 음직(蔭職)으로 품계가 오르는 것은 이미 정사의 규례에 어긋나, 흉년에 수령으로 나가는 것이 물정(物情)을 만족시키지 못하니, 사재감 첨정 이홍(李宖)과 평창 군수(平昌郡守) 홍우채(洪禹采)를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호조의 낭관은 직무가 중하고 게다가 음로(蔭路)의 극선(極選) 입니다. 라고하며 파직해달라 하였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이명희(李命熙) 숙종 36년 9월 16일 ~ 숙종 36년 10월 15일 == 영조 시기 == 평창군수 최창억(崔昌億) 영조 7년(1731년) 실적이 없어 파직당했다 평창군수 유언휘(兪彦徽) 영조 27년(1751)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일은 안하고!]] 집에서 잘 놀다가 걸려 [[정의구현|파직당한 뒤 잡혀갔다]] 평창군수 이관하(李灌夏) 강원도 암행 어사 이우(李㘾)에게 딱 걸려 죄를 받았다 신귀창(辛貴昌) ? ~ ? 영조 50년(1774년) 5월 8일 유배한 죄인을 풀어주어 관찰사에서 처리했다 == 정조 ~순종 시기 == 정존옥(鄭存玉) 현장으로 정조 즉위년 당시에 평창군수였다 심규(沈逵) 정조 즉위년 서명선의 추천으로 새로 제수되었다 하지만 본청에 종형제인 좌랑(佐郞) 심씨(沈氏)가 있어 상피해야 되어야했어서 서명선이 아룄으나 그대로 계속 있게 해줬다 정조 12년 10월 3일 평창부원군 사우(祠宇)에게 승지를 보내어 공신이 된 걸 축하하라고 했다 임시익(林時益) 고종 29년(1892) 10월 9일 심의평(沈宜平) 고종 31년(1891년) 7월 5일 ~? 김태석(金台錫) 순종 1년 11월 21일 ~? 박영제(朴英濟) 순종 4년(1910년) 7월 21일~? [[주사|주사(主事)]][* 1880년대 후반부터 1907년까지 존재했던 관직으로 [[낭청]]과 비슷한 관직이었다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51506|영어]]] 출신이다 승정원일기에 적힌 마지막 군수다 == 출처 == [[https://sjw.history.go.kr/m/search.do]] [[https://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78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0065]] [[http://pcnews.kr/List.aspx?CNO=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