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Split-Croatia-Wallpaper.jpg|width=820]] 로마 시대 (1세기)의 원형 경기장.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목차] == 개요 == [[크로아티아]] 북서부의 [[항구 도시]]. 리예카에서 남서쪽으로 60km, 이탈리아령인 [[트리에스테]]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져 있으며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5만 8천여명이다. '''크로아티아의 로마'''로 불릴 만큼 시내에 로마 유적이 즐비하며, 온화한 [[기후]]와 해변 덕에 관광객이 많다. [[20세기]] 이전까진 트리에스테와 더불어 이스트리아 지방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도시였으므로 로마 유적을 제외하고도 아직도 그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다만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을 거친 후,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대다수이고 이탈리아계 주민은 5%에 그친다. 나머지는 세르비아, 보슈냐크계 주민들이다.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풀라 [[공항]]이 있다. == 언어별 표기 == || [[크로아티아어]] || Pula || || [[이탈리아어]] || Pola(폴라) || || [[슬로베니아어]] || Pulj(풀) || == 역사 == ||[[파일:Arco_de_los_Sergios,_Pula,_Croacia,_2017-04-16,_DD_43.jpg|width=300]]||[[파일:Templo_de_Augusto,_Pula,_Croacia,_2017-04-16,_DD_51.jpg|width=243]]|| || 세르기우스 개선문 || 아우구스투스 신전 || 원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리리아]] 인들의 거주지로 폴라이로 불리다가 기원전 177년, [[로마]]에게 정복되며 현재 위치에 도시가 세워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기에 식민도시 (콜로니아)로 승격되었고 인구 3만이 넘는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벌어진 [[안토니우스]] &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 & [[카시우스]] 간의 내전에서 풀라는 후자의 편을 들었고, 그 대가로 2차 [[삼두정]]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룰리아에 의해 재건되며 세르기우스 개선문과 원형 경기장 등 대부분 현존하는 건물들이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기에 풀라는 황실의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며 악명이 높았다. --[[런던탑]]--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354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촌[* 할머니가 다른 이복사촌.] [[콘스탄티우스 갈루스]]가 처형되었다. 둘다 공동황제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였음에도 황제의 일방적인 호출에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죽음을 맞았다. [[425년]], 도시는 주교령이 되었고 [[476년]]에는 [[오도아케르]]에게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후 풀라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라벤나 엑사르크령]을 거쳤고 [[788년]]부터 [[프랑크 제국]],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1148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 [[중세]] ~ [[근대]] === [[12세기]]부터 [[베네치아]]가 [[피사]], [[제노바]] 등과 해상권을 두고 경쟁할 때마다 풀라는 그 적국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도시 내부에서도 [[로마인]] 혈통의 귀족들과 신흥 귀족들간의 암투가 벌어져 점점 쇠퇴하였다. [[1192년]], 풀라는 피사에게 점령되었으나 곧 베네치아가 회복하였다. 그리고 [[1243년]], 풀라는 피사와 동맹하였다가 베네치아에게 점령되기도 하였고 [[1267년]]에는 그와 전쟁 중이던 제노바 측에게 함락되었다. --이탈리아 3대 해양 세력에게 모두 함락당한..-- [[1291년]], 트레비소 조약으로 풀라는 [[아퀼레이아]] 주교령에 포함되어 잠깐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왔다가 [[1331년]]에 베네치아가 되찾안 후로는 그와 4세기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풀라를 이탈리아의 가장자리로 일컫기도 하였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이 계속 이어지며 풀라는 [[1397년]]에 재차 제노바 군에게 함락되었고 그 외에도 헝가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의 습격을 받았다. 또한 전염병도 찾아오며 [[1750년]]에 이르자 풀라는 3천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로 쇠락하였다. [[1797년]],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체되자 풀라는 [[프랑스 제국]]령 일리리아주를 거쳐 [[1813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내륙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의 획득으로 유일한 해양 진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베네치아를 상실하자 이스트라 반도의 풀라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핵심기지로써 기능하며 오랜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1859년]]에 해군 기지가 지어졌고 합스부르크 황실은 풀라로 여름 휴가를 오기도 하였다. || [[파일:테케토프급_드레드노트.jpg|width=100%]] || || 풀라항에 정박중인 오스트리아 해군의 [[테게토프급 전함|테게토프급]] 드레드노트 || === [[근대]] ~ [[현대]] === 오스트리아 지배기 동안 도시에는 인근 크로아티아계 이주민들이 노동자로서 유입되었는데, [[1910년]] [[통계]]에 따르면 시민 중 15%가 크로아티아계였다. 다만 아직까지 도시 인구의 과반수는 이탈리아계였다. 한편,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풀라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는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갔고 도시는 폴라주의 치소가 되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파시스트 세력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박해하였고, 따라서 상당수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의 [[U보트]] 기지로 쓰이던 풀라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고, [[나치 독일군]]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서로 적군의 부역자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하는 전쟁 범죄를 일으켰는데 전자가 훨씬 가혹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풀라에 [[영국군]]이 주둔하였고 [[1947년]] 파리 평화 조약의 결과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었다. 이후 폴라의 이탈리아계 주민들은 유고슬라비아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트리에스테]] 쪽으로 이주하였고 이때부터 폴라는 완전한 크로아티아계 도시가 되어 이탈리아식 명칭인 폴라보다 풀라로 불리게 되었다. [[1991년]]에 유고 연방이 해체된 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속하여 현재에 이른다. == 여담 == [[파일:터키 이탈리아 풀라.jpg]] 종종 지역 행사가 열리는 풀라 원형 경기장 축구팬들에게 잘 알려진 [[NK 이스트라 1961]]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분류:크로아티아의 도시]][[분류:휴양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