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미합중국 부통령)]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미국 부통령|{{{#0d1635 미합중국 제15대 부통령}}}]][br]{{{#0d1635 {{{+1 해니벌 햄린}}}[br]Hannibal Hamli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 Hamlin.jpg|width=100%]]}}} || ||<|2> '''출생''' ||[[1809년]] [[8월 27일]] || ||[[미국]] [[매사추세츠 주]][* 현재 [[메인 주]].] 파리 || ||<|2> '''사망''' ||[[1891년]] [[7월 4일]] (향년 81세) || ||[[미국]] [[메인 주]] 뱅고어 || ||<|2> '''재임기간''' ||제15대 [[미국 부통령|부통령]] || ||[[1861년]] [[3월 4일]] ~ [[1865년]] [[3월 4일]] || || '''서명''' ||[[파일:해니벌 햄린 서명.svg|width=150]] || || '''배우자''' ||새라 에머리 {{{-2 (1833~1855)}}}[br]엘렌 에머리 {{{-2 (1856~)}}}[* 전처의 이복누이.] || || '''자녀''' ||6명 || || '''종교''' ||[[유니테리언]] || || '''정당''' ||[include(틀:민주당(미국))] {{{-2 (~1856)}}}[br][include(틀:공화당(미국))] {{{-2 (1856~1891)}}} || || '''의원 선수''' ||'''2''' ,,(하원),,[br]'''5''' ,,(상원),, || [목차] [clearfix] == 개요 == 미국의 제15대 부통령이다. 메인 주의 주 하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연방 상원의원, 주지사[* 상원에 복귀하기 위해 한달여만에 사임했다.]를 역임했으며 노예제에 반대하여 [[1856년]]에 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적했다.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미국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햄린의 지명은 특히나 링컨이 공화당의 통합된 지지를 얻는데 크게 작용했는데 중서부 [[일리노이]] 출신이었던 링컨이 대선에서 북동부 지역인 [[매사추세츠]], [[메인주|메인]] 등에서 이탈표 없이 안정적으로 선거인단을 확보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 메인 주지사까지 지낸 햄린의 공이 있었기 때문. 다만 행정부에서의 역할이 크진 않았는데, 본인이 부통령이라는 역할보다는 겸임하는 상원의장이라는 역할에 좀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예 해방 선언이나 [[미국 흑인|흑인]]들의 무장을 강력하게 촉구했지만 본인이 여기 직접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사실 [[조지프 후커]]를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도록 압박을 넣었다가 후커가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한 탓에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로버트 E. 리]]가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에게 대패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던 점을 생각하면 전시 부통령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던듯 하다. 1864년 대선에서는 링컨이 분열된 국가를 통합한다는 의미로 남부 출신임에도 연방에 잔류했던 민주당원인 [[앤드루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재선 도전엔 나서지 못했다. 남북전쟁 전후에는 [[공화당 급진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869년에 상원의원으로 복귀하여 1881년까지 재임했다. 1881~1882년 동안 주스페인 공사를 역임한 후 공직에서 은퇴했고 1891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사망했다. [[분류:미국 부통령]][[분류:미국 상원의원]][[분류:메인 주지사]][[분류:미국 공화당 소속]][[분류:옥스퍼드 카운티(메인) 출신 인물]][[분류:1809년 출생]][[분류:1891년 사망]][[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