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잠비아 대통령)] [[영어]]: Hakainde Hichilema [[잠비아]]의 사업가 출신 정치인으로, 제7대 대통령. [목차] [clearfix] == 초기 생애 == [[영국]]령 시절이던 1962년 [[몬즈 구역]]에서 태어났으며, [[잠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및 경영학을 전공했다. 이후 잠비아를 식민 통치했던 영국으로 건너가 [[버밍엄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으며, 금융학 및 경영전략을 추가로 공부했다. 이후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 정치 활동 == 자유주의 성향의 [[국가개발통일당]](UPND)에 입당해 정치 활동을 시작한 그는 2006년 [[앤더슨 머조카]] 대표가 사망하자 당권을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대선을 무려 '''5번'''이나 도전했지만 떨어졌고, 여섯 번째에서 겨우 당선되었으니... 한마디로 전형적인 제3지대 정치인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시작은 2006년 대선이었다. 본디 머조카 대표가 UPND의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정치 경험이 부족한 히칠리마가 대신 물려받게 되었고, 대선도 그가 대타로 나서게 되었다. [[케네스 카운다]]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면서까지 나름의 기대를 모았으며 투표 결과 25.32%의 득표율로 꽤 선방했지만, [[다당제민주운동]](MMD)과 [[애국전선(잠비아)|애국전선]] 간의 양당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3위로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5년을 기다려야만 하던 와중이던 2008년, [[레비 뭐나와사]] 대통령이 급서하면서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고, 히칠리마는 UPND의 후보로 다시 출마한다. 하지만 뭐나와사에 대한 애도 분위기 속에서 정국은 뭐나와사가 속한 MMD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과는 MMD 후보이자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루피아 반다]]의 승리로 끝난다. 히칠리마의 상황은 좋지 못했는데, 그냥 3위에 머무른 정도가 아니라, 득표율이 19.96%로 20%에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 아무리 제3지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선을 2번이나 말아먹었다는 점에서 히칠리마 본인의 경쟁력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와 UPND의 입지도 불안불안한 상황이었다. 당장 2번이나 낙선한 것도 모자라 당은 여전한 제3당 신세인데, 이런 상황에서 독주를 감행한다? 결과야 뻔한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2009년 6월 애국전선과의 연대를 선언했고, 2011년 대선 및 총선은 양당이 연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진이|하지만 이 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양당 간의 이념차는 둘째쳐도, 대선 후보로 누가 나가냐를 두고도 갈등이 지속되었다. 애국전선 후보로 줄곧 출마하던 [[마이클 사타]]도, 꾸준히 대통령직을 노리던 히칠리마도, 둘 다 대통령직에 혈안이 되어있던 상황에서, 이 자리를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어찌어찌 합의해서 한 쪽이 부통령 후보로 빠지는 방법도 있었지만, 애초에 부통령직 자체가 콩라인 그 자체라서...[* 더더욱이나 잠비아 부통령은 [[미국 부통령|미국과는 달리]] 대통령의 궐위 시 승계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궐위 시 [[대한민국 국무총리]]처럼 잠깐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는 정도에 불과하며,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당선자가 잔여 임기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언급한 루피아 반다 부통령도 뭐나와사 대통령 사후에 대통령직을 바로 물려받지 못하고, 권한대행만 하다가 조기 대선에서 당선되어 잔여 임기를 겨우 마무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이 "야권연대"는 선거도 치르기 전에 와해되고 만다. 그나마 야권연대의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사타는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있었고, 애국전선도 원내 1당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득을 본 것은 사타였고, 히칠리마가 전혀 아니었다. 야권 분열에 질린 유권자들, 특히 히칠리마 지지자들 중 일부가 [[사표심리|정권교체 불발을 우려해 대거 사타로 향했고]], 히칠리마는 18.54%라는, 전보다 더 떨어진 득표율을 기록했다. === 2015년 대선 === 이대로 가면 영원한 제3지대, 아니, 군소후보로 추락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예기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사타 대통령이 임기 중 급사하면서 2015년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고, 히칠리마는 어김 없이 4수에 도전한다. MMD와 애국전선 간의 고질적인 양당제 속에서 히칠리마의 입지는 뻔했고, 유권자들도 "또 그 인간이냐?"며 거의 관심을 끄는 수준에 불과했다. 애국전선 후보로 출마한 [[에드가 렁구]] 전 국방장관과, MMD 후보로 유력했던 루피아 반다 전 대통령 간의 맞대결이 예상되었고, 다들 둘 중 하나가 당선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반전은 얘기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반다 전 대통령이 MMD 대선 후보로 유력시되던 상황에서, [[네버스 멈바]] MMD 대표 간의 골이 깊어졌고, 대선 경선은 진흙탕으로 번지고 만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당 내에서 반다를 밀어주던 상황에서 법원 판결도 반다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게 세간의 예측이었지만, 이러한 예상을 뒤엎고 대법원은 멈바를 MMD의 정식 대선 후보로 선언하였다. 결국 당은 내분을 겪게 되었고, 반다도 1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승복했을 정도였다. 이러는 사이 지지층은 MMD로부터 등을 돌렸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데 제3지대에서 계속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히칠리마에게 관심을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애국전선과 렁구를 지지할 리가 없던 이들 입장에서는 히칠리마가 그나마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보였고, 이들의 지지에 힘업어 히칠리마는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얘기치 못한 급부상에 전국이 깜짝 놀랐고, 이대로 가면 당선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득표 결과, 1.68%라는 초접전 끝에 낙선한다. 갑작스런 돌풍 탓에 일방적인 당선을 노리기에는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타 대통령 서거로 인해 정국이 애국전선에게 유리한 분위기였던 것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애국전선과 골이 깊었던 히칠리마는 부정선거라고 규탄하며 대선 불복 의사를 밝힌다. 물론 부정선거라는 확실한 근거도 없어서 [[부정선거 음모론|그저 음모론 정도로 끝났지만]], 이미 정국은 양극화가 심화된 상황이었다. 이미 대선 정국에서부터 동서로 분열된 상황이었고, 렁구에게도 주어진 임기가 고작 1년 뿐이라서, 분열된 여론을 통합해야 하는 상황에 놓았다. === 2016년 대선 === 사타의 잔여 임기가 고작 1년 뿐이라 대선은 1년 만에 다시 치러지게 되었고, 이번에도 렁구 vs 히칠리마의 리턴매치가 벌어졌다. 투표 결과, 1년 전보다 조금 더 떨어진 47.63%의 득표율로 마무리했다. 렁구의 임기가 고작 1년 뿐이었던 탓에 렁구와 애국전선의 입장에서는 허니문 대선이나 마찬가지였고, 여론도 렁구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자는 데 있었다. === 위기, 그리고 반전 === 이렇게 대선을 5번이나 떨어지면서 본인도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던 2017년 4월 11일, '''반역죄'''로 구속되고 만다. 가뜩이나 선거를 말아먹는 것도 모자라 중대범죄로 체포되기까지 했으니, 그의 인생은 아예 끝장났다고 봐도 무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내막이 있었는데, 그의 체포를 주도한 이가 다름아닌 '''렁구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빼도 박도 못할 정치 탄압임이 분명했는데, 그도 그럴만 한게 히칠리마가 애국전선과 사이가 나빴던 것은 물론, 렁구 본인에게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부상했으니, 어쩌면 렁구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독이 될 정적 1순위를 제거하는 게 시급했던 모양. 당연히 서방 국가들은 그를 일제히 규탄했다. 물론 이것 쯤이야 "제국주의 세력들의 음모" 정도로 규정하고 무시하는 것도 가능했겠으나, 서방뿐 아니라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마저 규탄에 동참하는 바람에,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던 상황. 결국 8월 16일, 구속된 지 4개월 5일 만에 전격 석방되었다. === 2021년 대선 === 우여곡절 끝에 2021년 대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번이 무려 여섯 번째였고, 히칠리마 본인 입장에서도 사실상 마지막이라는 심산으로 도전했다. 위에서 언급한 구속 사건으로 렁구는 이미지에 큰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 여론은 히칠리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무려 5번이나 낙선했는데다가, 억울하게 체포되었다는 이미지까지 겹쳐 동정여론이 일었기 때문. 그리고 59.02%의 득표율로 압승하여 그간의 "만년 후보" 꼬리표를 떼고 대통령직을 거며쥐게 되었다. 같이 치러진 총선에서도 167석 중 82석을 차지해 비록 과반에는 아슬아슬하게 미달했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큰 문제가 없게 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대통령 및 총통 일람)] [[분류:잠비아 대통령]][[분류:1962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