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685년 출생]][[분류:762년 사망]][[분류:뤄양시 출신 인물]][[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퇴위한 군주]][[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현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2d2f34" '''돌궐 제18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6대 황제[br]{{{+1 현종 명황제 | 玄宗 明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ang_XianZong.jpg|width=100%]]}}} || ||<|2> '''출생''' ||[[685년]] [[9월 8일]] || ||[[당나라|당]] [[허난성|동도]] [[뤄양시|낙양]][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즉위''' ||[[712년]] [[9월 8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762년]] [[5월 3일]] (향년 76세) || ||[[당나라|당]] [[뤄양시|낙양]] 흥경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태릉]](泰陵) || ||<|6>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710년]] [[7월 28일]] ~ [[712년]] [[9월 8일]] || ||'''{{{#ece5b6 제6대 황제}}}'''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4EEB0; font-size: .9em" {{{#1e1e1d,#2d2f34 '''제18대 가한'''}}}}}} || ||[[712년]] [[9월 8일]] ~ [[756년]] [[8월 12일]] || ||'''{{{#ece5b6 당의 태상황}}}''' || ||[[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융기(隆基) || || '''부모''' ||부황 [[예종(당)|예종]][br]모후 [[소성황후]] || || '''형제자매''' ||6남 11녀 중 3남 || || '''배우자''' ||정실 [[폐후 왕씨(당현종)|폐후 왕씨]], [[정순황후 무씨|정순황후]][* 생전에는 혜비(惠妃)의 지위에 있었고 [[측천무후]]의 일족이었다. 현종의 총애를 얻었고, 사후에는 황후의 시호를 받았다. [[양귀비]]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수왕 이모(李瑁)가 그녀의 소생이었다.], 원헌황후[br]후궁 [[매비 강씨]], [[양귀비|귀비 양씨]] || || '''자녀''' ||24남 30녀 || || '''아명''' ||이삼랑(李三郎) || || '''작호''' ||초왕(楚王) → 임치군왕(臨淄郡王)[br]→ 평왕(平王) || || '''묘호''' ||'''[[현종]](玄宗)''' || || '''존호''' ||태상지도성황제(太上至道聖皇帝)[* [br] 개원신무황제(開元神武皇帝)[br]→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br]→ 태상지도성황제(太上至道聖皇帝)] || || '''시호''' ||지도대성대명효황제[br](至道大聖大明孝皇帝) || || '''한호''' ||천가한(天可汗) || || '''연호''' ||선천(先天, [[712년]] ~ [[713년]])[br]개원(開元, [[713년]] ~ [[741년]])[*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현종을 개원천자라 지칭하기도 했다.[[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11734&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Area1_fct%3A%EC%A4%91%EA%B5%AD&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B%8B%B9|#]]][br][[천보(연호)|천보]](天寶, [[742년]] ~ [[756년]])[* 천보 3년(742년)부터 n재를 사용하였다.] || || '''절일''' ||천추절(千秋節) → 천장절(天長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 [[성명]]은 이융기(李隆基)이다. [[예종(당)|예종]] 이단의 3남으로 [[아명]]은 이삼랑(李三郎)이었다.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로 줄여서 명황제(明皇帝)였으며, '''당명황'''(唐明皇)이라고도 불린다. 묘호는 [[현종]]으로 '검을 현'([[玄]])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현종의 큰아버지인 중종의 이름이 이현(李顯)이기에 현종(顯宗)이란 묘호를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송대 이후 중국에서는 당명황이라는 표기를 더 많이 썼는데, [[휘종(송)|송휘종]]대에 황제의 시조로 숭상되던 [[도교]]의 신 [[조현랑]](趙'''玄'''朗)의 이름을 [[피휘]]하여 [[묘호]]인 현종 대신 [[시호]]인 명황제로 지칭되었다. 또한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본명인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여이(愛新覺羅'''玄'''燁)을 피휘하기 위해 이렇게 지칭하는 것이 후대 제국 및 동아시아 다른 국가에도 확산 및 고착화되었다. == 생애 == === 즉위 이전 === 처음에는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할머니인 [[측천무후]]가 집권하고 있었던 무렵에 소년기를 보냈는데 그때부터 내심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 [[제국]]의 근위대인 남•북위군[* 남군 16위군과 북군 우림군 및 만기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 일부인 만기군을 슬슬 포섭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측천무후가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예종(당)|당예종]]의 지지 세력을 여럿 죽였기 때문이었다.[* 이융기의 생모인 덕비 두씨가 측천무후를 [[저주]]했다는 죄로 사사당했다.] 이후 큰어머니인 [[위황후]]와 그녀의 딸인 [[안락공주]]가 710년 6월 2일 큰아버지인 [[중종(당)|당중종]]을 독살하자[* [[독살]] 건은 현종이 [[쿠데타]]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 사실 이들의 [[권력]]은 중종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들 입장에서는 중종은 죽지 않는 것이 훨씬 낫긴 하나, 이들의 행적과 권력욕을 보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두뇌가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일화가 있다. 하지만 이미 측천무후를 겪은 적이 있었던 당나라의 [[군인]]들이 그보다 훨씬 못한 자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것이니 [[프로파간다]]를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 역시 충분히 있다.] 6월 20일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만기군을 움직이는 한편 우림군까지 장악한 다음,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당륭정변]]''') 이 과정에서 위씨와 무씨 [[가문]] 일파[* [[무삼사]] 사후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씨 가문은 위씨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사이가 안 좋았고, 측천무후 본인에게도 원한이 컸던 이융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측천무후의 친딸인 태평공주까지 정변에 동참한 걸 보면 무씨 가문과 측천무후의 자식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실제로 무씨 가문의 전횡은 말년의 측천무후의 심기를 어지럽힌 하나의 요인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측천무후는 차기 [[황제]]를 무씨에게 잇는게 좋지 않을까 고려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친정보다는 자기 혈족들에게 물려주는게 측천무후 개인에게도 더 나을 거라고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기 때문에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사실 당나라는 이씨들이 [[피]]를 흘려가며 다른 [[군벌]]들과 격전을 벌여 이기고 건국한 제국이었는데 이걸 아무 전공도 없는 무씨가 낼름 삼켜봤자 어떻게든 반발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당장 측천무후 본인부터가 원래 [[고종(당)|당고종]]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뿐, 당 제국의 건국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지분도 없었기도 하다.]를 대부분 참살하고, 정국을 수습하면서 아버지를 황위에 복위시키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공헌도로만 따지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태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미묘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적장자이자 큰형이었던 송왕 이성기가 스스로 양보함으로써[* 아마 증조할아버지대에 [[태종(당)|더 유능한 동생]]과 황위 다툼을 하다가 목이 날아간 종증조부 [[이건성]]의 사례를 본받은 듯 하다.] 큰 무리없이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송왕[* 훗날 영왕으로 바뀜.] 이성기와 신왕 이성의는 각각 근면성실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이융기가 황제에 오른 뒤에도 우애가 지극했다고 하는데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식사와 생활은 물론이고, 기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형제들과 같이 잠을 잤을 정도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림자]] 형제로 [[태종(당)|당태종]]은 같은 뿌리를 두고 엮어 자라는 [[대나무]]와 같다고 하여 '죽의'(竹義)라고 그 우애를 정의하기도 했다. 특히 송왕 이성기가 741년(개원 29년) 숨을 거두자 [[고력사]]에게 시를 짓게 할 정도로 애도했다고 하며 양황제(讓皇帝)로 추숭까지 시켜주었다. 동생들인 기왕 이융범과 설왕 이융업은 태평공주 [[숙청]]([[선천정변]])에 동참한 즉위 [[공신]]급이었으며, 이융범은 선비와 예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융업은 725년(개원 13년) 처형인 위빈과 황보순이 현종의 중병 중 길흉을 논하다가 발각되어 위빈은 몽둥이로 맞아 죽고 황보순은 좌천되었다. 물론 우애를 깨지는 않은 정도였다. 현종은 이융업을 손수 위로하며 >"내가 만약 형제를 시기하고 막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천지신명이 벌을 내릴 것이다." 이라고 다짐했고, 이후로도 이융업이 아프자 현종은 손수 [[간호]]를 하다가 촛불이 바람에 날려 [[수염]]을 태워먹은 적이 있었는데 >"아우가 낫는다면 수염이 문제냐" 면서 대범하게 넘겼다고 한다. 맏형 이성기의 양보로 황태자가 된 이융기는 이후 고모인 태평공주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는데 황태자로서 길게 있을 경우, 위험할 수 있다고 여긴 부황 예종이 얼마 안 가 태자 이융기에게 [[양위]]하여 27세의 젊은 나이에 당나라의 제6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맏형 이성기는 피리, 동생 이융범은 비파에 능했다고 한다.] === 재위 기간 === ==== 정적 제거 ==== 그러나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한때 동지였던 고모 [[태평공주]]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여야 했다. 태평공주는 여러 번 현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즉위 다음해인 713년 태평공주와 그 일파까지 싸그리 제거하며,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 연거푸 군사반란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선천정변]]''') 이후 유능한 재상들을 등용하고 [[측천무후]] 시기부터 진행되던 사회변화[* 균전제가 붕괴하여 율령제도 변화했다.]에 맞추어 제도를 개혁하며, 군사력을 재건하고 대외 영향력을 확대하여 당 제국의 영향력을 최전성기로 끌어올렸다. [[문제(수)|수문제]] 당시의 인구수를 넘은 때도 바로 당현종 재임기로, 현종의 재위 말기인 754년에 당 제국 인구는 약 906만 9천 호[* 약 5,288만 명으로 추정.]였는데, 이는 [[양제(수)|수양제]] 재위 3년차(606) 때 인구 약 890만 7천 호[* 약 4,600만 명으로 추정.]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 [[개원지치|개원성세]] ==== 이 시기 현종을 보좌한 유능한 재상으로는 [[요숭]], [[송경]], [[장가정]], [[장열]], [[이원굉(당나라)|이원굉]], [[두섬]], [[한휴]], [[장구령]][* 당시에서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고, 안녹산의 야심을 간파했다. 참고로, 이 순서는 재상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시대순이다.'''(...)] 등이 있는데, 요숭과 송경은 개원지치의 초창기를 빛낸 명재상으로서 [[정관지치]]를 보좌한 방현령ㆍ두여회와 비견될 만하여 '방두'(房杜)라는 표현과 함께 '요송'(姚宋)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였다.[* 요숭은 제한이 "공은 당대의 문제를 구해낼 수 있는 재상이다."라고 하니까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을 어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무진장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이란 뜻의 '''구시지상'''이다.] 한휴는 현종에게 자주 간언하여 좌우의 지지 세력들이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나서부터 폐하는 단 하루도 즐겁게 지내신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잔소리꾼[* 이때 현종의 대답은 전형적인 [[명군]]의 발언이었다. '''"짐은 말라 야위었으나 천하의 신민들은 반드시 살이 올랐을 것이다. 내가 한휴를 기용한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일 따름이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이 발언이 나온 건 개원 21년(733)이었다.]이었다. 그 외에 유명한 정치가로는 유능한 재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정국을 길게 주도했던 [[원건요]],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우문융이 있었다.[* 단, [[뇌물]]을 밝히는 게 심해서 우문융은 재상직에는 올랐으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 단순히 이러한 유능한 재상들의 목록만 놓고 본다면 '부하를 잘 둬서 명군'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의 강력한 황권을 생각한다면 저러한 부하들은 현종을 보좌하는 자들이었고, 결국 정책을 실시하는 주체는 황제 현종이었다. 즉, 개원성세를 실현해 당나라가 직면했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최종적인 공로는 현종에게 있었던 셈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화적법>'''이다. 이 법은 추수기에 중앙 정부에서 강남 등 곡창 지역의 곡식을 시가의 2~3할 정도 더 높게 처서 사들여(화적) 이를 각지의 군진들에 직접 공급하고, 빈번이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수도권 관중 지역[* 당나라는 수도를 장안에 잡고도 자주 부수도(동도)인 낙양으로 정부가 움직이곤 했는데, 이는 관중 지역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축량천자'''(逐糧天子)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에도 공급하는 제도로, 기존의 지조[* 농민들이 직접 부담.]와 영전[* 군사들이 [[둔전]]을 행함.]을 대체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식의 괜찮은 제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데 성공한 공적은 결국 현종에게 있었다. ==== 천보난치 ==== 그러나 이런 태평성대가 계속되며 재위 중반을 향해가자 명군이었던 현종도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명재상들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부하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내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당 제국은 [[모병제]]로 유지하는 대규모의 군진과, 이를 지역별로 엮어서 통솔하는 '''절도사'''직을 신설했고 천보 연간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절도사직 10개가 설치되면서 군사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736년에 그 유명한 [[이임보]]가 재상의 일원이 되어 명신 [[장구령]][* [[고제(전한)|한고조]]를 보좌했던 [[장량(전한)|장량]]의 후손이었다. 또한 생전에 [[안녹산의 난]]을 우려하여 안녹산에 대해 현종에게 경고를 보낸 인물이기도 했다.]을 몰아내 버리면서 불길한 징조가 감돌았다. 그리고 737년, 현종은 수왕 이모를 태자로 세우려는 [[정순황후 무씨|무혜비]]와 이임보의 공작에 넘어가 '''황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사사시키고''' 738년에 3남인 충왕 이형(훗날의 [[숙종(당)|당숙종]])으로 황태자를 교체했다.[* 무혜비와 이임보의 의도와 달리 이영이 사사되고난뒤 서장자인 1남 경왕 이종(화비 유씨 소생)이 있었으나 신하들중에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서 충왕 이형이 사실상 장자취급이었고 현종의 최측근인 환관 [[고력사]]의 지지로 충왕 이형이 태자가 된다.] 게다가 즉위 초기의 현종은 상당히 검소한 황제였었지만, 이 시기 즈음부터는 검소함이 사라지고 화려한 황제의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보통 기점으로 잡는 건 741년에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꾼 이후로, 이 때문에 현종 후반의 치세를 개원성세에 대비하여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외 정복전쟁에서는 유명한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군인 [[고선지]]가 서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72개 국가를 정복하는 등 당나라의 팽창주의를 이어가면서 영토가 크게 넓어져 당나라가 아시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재정도 나아졌으나, 잦은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인력이 목숨을 잃고 국고가 궁핍해진 데다가 농촌이 황폐화되었다. 아바스 칼리파조와 같은 강대한 [[이슬람]] 세력의 등장, 이들과 충돌한 천보 10재[* 당현종 천보(天寶)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쳤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결론적으로 당숙종의 건원(乾元) 원년부터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 이후로 [[안사의 난]]이 연달아 발발하면서 대규모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참고로 [[탈라스 전투]]로 인해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파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로인해 지금껏 잠들어있었던 유럽은 깜짝 놀라기 시작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탈라스 전투]] 항목 참조. 다만 당 제국은 탈라스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고선지의 후임 안서절도사인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정복하는 등 안서도호부의 강역을 더욱 더 확대함으로써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했다. 《[[자치통감]]》에도 서역에 미치는 당나라의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나와 있다.] 내치 측면에서는 [[고종(당)|고종]] 이후 [[측천무후]]의 치세를 거치면서 몰락했던 [[관롱집단]]이 유명한 간신 이임보를 필두로 내세워 다시 정국을 장악했으며, 빈천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과거제로 입문하여 개원성세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관료들은 세력을 상실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752년 [[이임보]]가 사망한 이후, 총애하던 [[후궁]] 무혜비 사후 맞아들인 [[양귀비]]로 인해 양씨 일가가 전횡하게 되었고, 이에 권력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조정 신료들과 절도사 사이 및 여러 절도사들 간의 모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안녹산]]과 [[안사순]][* 여기서 안사순은 안녹산과 사촌관계였는데, 안녹산이 역적인 반면 안사순은 [[설눌]] 밑에서 토번군을 격파한 이래 하서절도사를 지낸 데 이어 삭방절도사로 재직하던 와중 [[정천리]]와 협공하여 이헌충을 격파하는 등 당나라의 국경 수비에 주력하고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알리는 등 당나라의 충신이었으나, 안사의 대란이 일어나자 조정으로 소환되어 호부상서가 되었고 이후 가서한의 무고로 동생 안원정과 함께 억울하게 죽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 평정 뒤 명장 곽자의의 주청으로 누명을 벗었다.], [[가서한]]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았고, 양국충과 안녹산이 서로 대립했던 것이 그것이다. 이때 이임보는 지금까지 장성 안쪽의 내지 절도사직을 문신이 아닌 장군이 담당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아예 막고 있었는데[* 그 이전 이민족 출신이 절도사를 담당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강족 출신으로, 고구려 출신 번장 [[고선지]]에게 욕을 한 것으로 유명한 [[마영찰|부몽영찰]]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오히려 지방 절도사들의 군사력이 급성장한 탓에 마치 중세 봉건제 제국처럼 흘러가게 되었고, 중앙군은 부패해지면서 빈약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임보 사후 동북변의 절도사직을 셋이나 역임하던 [[안녹산]]이 국경의 정예 병력들을 장악하면서 독자적인 군대가 되었고 755년 [[안사의 난|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군사반란을 일으켜]] 수도 [[시안(도시)|장안]]까지 침공했다. 노쇠한 현종은 사천을 향해 퇴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임보가 권력을 잡은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퇴각을 하던 중에 이게 다 [[양귀비]]와 [[양국충]] 때문이라고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서('''마외병변'''), [[양국충]]은 그들에게 살해되고 [[양귀비]]는 군인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귀비와 양국충이 목숨을 잃자 일단 사태는 수습되어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지만 현종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천에 퇴각해 있는 동안에 다른 영지에서 분조를 이끌고 있었던 황태자가 군인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숙종(당)|숙종]]이 되었다. 자칫하면 황제와 황태자 간의 내전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였지만, 현종에게도 공연히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총기는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양귀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황태자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인정하고 사천에서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 [[퇴위]] 후 === 이후 당숙종의 연합군은 반란군을 공격하여 진압하고, 장안을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757년 장안에 입성했다. 이후 당현종은 장안성의 별궁인 흥경궁에 은거했으며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며느리인 장 황후와 환관 이보국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현종을 강제로 감로전으로 유폐시켜 버리고 그의 부하인 [[고력사]]마저 유폐시켜버렸다. 현종은 그들의 처사에 분노했으나 아들인 당숙종이 병으로 않아 눕고 있었으며[* 특히 숙종은 아버지 현종의 병문안을 자주 갔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병문안도 황녀들이 대신 갔을 정도로 병세가 심해졌다.] 현종 자신도 고령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못했기에 대항할만한 힘이나 군대가 없었다.[* 현종도 정치력이 뛰어나고 나름 전쟁터에서 실전으로 단련된 군인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든 데다가 계속된 정치투쟁으로 이때 건강이 얼마나 악화되었던지 숙종의 선처로, 각지에서 바친 진상물로 만든 산해진미들 중에서 현종이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해서 보내 주었지만 현종은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곁에는 이제 궁인들과 가끔가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혈족들밖에 없었다. 결국 762년 5월 2일에 현종은 옥피리를 불고는[* 이는 현종이 악기를 잘 다루었고 취미로 악기 연주를 자주 했기 때문이었다.] 궁인들에게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하여 궁녀들이 목욕을 시켜주었고, 다 마쳤을때 갑자기 쓰러졌는데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 78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늙은 황제는 죽는 순간까지도 [[양귀비]]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지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게, [[안사의 난]] 진행 과정을 보면 '''별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것 같지 않은'''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장안성 탈환 이후 [[안녹산]]에게 붙었던 군인들에 대한 처벌 내용을 보면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는 현종에게 숙종이 그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내용'''이 《[[자치통감]]》에 쓰여 있다. 물론 안사의 난 때문에 양귀비가 죽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런 강력한 현종의 영향력에 두려움을 품은 숙종 즉위파가 두 황제 사이를 갈라놓아 결국 현종의 최측근인 [[고력사]]를 비롯, 여러 부하들이 유폐되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흥경궁에서 태극궁으로 거처가 옮겨져 유폐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가 붕어했다. 그리고, 현종 사후 13일 뒤에 아들 숙종도 붕어하면서 당 제국의 정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는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대외 정복전쟁 == 대외적으로 현종은 기존의 부병제를 기반으로 하는 당나라의 군제가 [[측천무후]]의 집권기에 파탄을 맞자, '[[직업군인]]제'인 [[모병제]] 중심으로 개혁하는 데 성공하여 개원 말엽(730년대)에는 부병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당 제국은 이러한 모병제를 중심으로 양성된 대규모 정예군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대외적으로 정복전쟁을 재개하면서 주변국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 대[[돌궐]] 전쟁 === 당현종은 위황후 일파가 일으킨 혼란을 수습하자마자 당나라의 숙적인 [[돌궐 제2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묵철가한]]이 화친을 요청했으나 현종은 이를 거부했고, 북벌을 진행했으나 토번 제국의 공격과 거란 전선에서의 대패로 인해 대돌궐 북벌은 실패했다. 그러나 돌궐 제국 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전령을 들은 현종은 이에 돌궐 산하의 부족들을 초유하는 등 적극 개입했고, 결국 묵철가한은 [[발야고]](바이르쿠)의 패잔병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렇게 [[측천무후]]의 치세부터 [[예종(당)|예종]]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돌궐]] 제2제국의 가한으로 군림하며 돌궐을 전성기에 올려놓고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묵철가한]](카파간 카간)이 무척이나 허무한 암살[* 《신당서》에 따르면 홀로 있을 때 자장(군진에 소속된 장교 중 소장급으로, 요즘으로 따지면 '''잘해야 중대장ㆍ대대장쯤 되는 지위이다.''') 학령전과 우연히 만나 참수당했다고 하며, 《통감》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바이르쿠를 완파하고 승리감에 취해 경비병없이 홀로 돌아가다가 바이르쿠의 패잔병 일부와 우연히 조우하여, 공격받아 전사하고 그 수급이 자장 학령전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정말 이것이 '''[[측천무후]]와 대등한 위치에 서서 하북을 총공깽으로 몰아넣으며 유목민족 전체를 아우르던 위대한 가한의 죽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무하다.]을 당함으로써(716) [[돌궐 제2제국]]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고, 바이르쿠ㆍ위구르ㆍ통라([[동라]])ㆍ[[습족|습]]ㆍ부쿠([[복골|복고]]) 등 돌궐에 정복되었던 5개 부족이 한꺼번에 당 제국에 귀부해오면서 북방 국경선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후 대처에서 미숙함을 보이면서 뒤를 이은 [[비가가한]](빌게 카간)과 [[궐특근]](퀼 테긴)에 의해 돌궐 제2제국이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했지만 묵철가한의 전성기와 같은 압도적인 위용은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서 현종은 상당히 여유있게 돌궐 정복전에 착수할 수 있었다. 물론 개원지치 시절엔 그래도 돌궐이 여전히 당 제국 못지않은 군사적인 강력함을 내뿜고 있었던 시기라서 기본적으로는 돌궐 수하의 부족들을 귀부시키고 돌궐을 선제공격하거나, 돌궐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등 승리하고 패배하고를 반복하는 소모전이 반복되었다. 723년에는 돌궐과 화친했는데, 여기서 현종은 그 신하인 매록철을 매수했다. 비가가한이 734년에 암살당하면서[* 빌게 카간은 독살당하기 전 매록철을 죽이고, 붕어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돌궐 제2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742년에 돌궐 제2제국에 내전이 발발하자 현종은 [[발실밀|바스밀]](발실밀), [[카를룩]](갈라록), [[위구르 제국|위구르]](회홀)를 적극적으로 초유하여 동맹으로 삼았고 그 다음엔 삭방절도사 [[왕충사]]가 이끄는 당군이 돌궐 근처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뒤 위구르, 카를룩, 바스밀 부족과 함께 돌궐을 공격했다. 결국 돌궐은 위구르에게 패배한 뒤, 당 제국의 절도사인 왕충사의 당군이 잔당을 마저 공격하면서 돌궐은 완전히 몰살당하게 되었고 당나라는 돌궐 정복에 성공하게 되었다. === 대[[토번 제국|토번]] 전쟁 === 이 시기의 [[토번 제국]]은 당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매우 강성했으며, [[측천무후]] 즉위 시기였던 696년 [[가르친링]]이 소라한산 전투에서 무주군을 대패시킨 뒤 [[무주(당나라)|무주]]에 이렇게 제안하였다. >'''안서 4군을 우리에게 넘기고, 서돌궐을 반 잘라서 나누는 것이 어떠한가?''' 그 정도로 토번의 위세가 강성하였으나, 무측천은 가르 가문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거절한다. 그 이후 699년 가르친링이 [[토번 제국]] 내부의 반란[* 토번의 첸뽀 [[치둑송첸]]이 왕권 강화를 위해 가르 가문과 톤미 가문을을 숙청하였다.]으로 인해 숙청당하면서[* 가르친링과 그의 동생 [[가르다고리]]가 자결한 뒤,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찬파]]와 가르친링의 아들 [[가르궁린]]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무측천으로부터 논씨 성을 하사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찬파는 죽고 가르궁린은 당나라의 명장으로 활약했다.], 토번은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후 국망포지가 당나라를 공격하나 당휴경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개원 초기(710년대) 토번은 상당히 강성했던데다가 경운 2년(예종 시기. 710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공주[* 이렇게 정략적인 이유로 외국에 시집보내는 공주를, 중국에서는 [[화번공주]]라 불렀다.]의 [[탕목읍]]으로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 지역을 그냥 줘 버리는[* 이 건의는 '''[[토번]]의 뇌물을 먹은''' 양주 도독 양구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삽질을 한 결과 다수의 기병을 충원하는데 성공한 토번군이 714년 대규모로 침공해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에 상당히 다혈질이던 당현종은 기존의 농우 일대의 병력에 추가해 병력 100,000명과 군마 40,000필을 추가로 징병하고, '''토번으로 친정'''하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그만뒀다.], [[설눌]]이 이를 격파했다. 그 뒤 [[실뤄라]]가 감숙성 일대를 공략하여 당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나 [[소숭]]의 이간계[* 토번 조정에 당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로 인해 제거당하고 말았다.[* 토번 측 기록에는 낙향했다고 되어 있지만 《자치통감》에는 암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군제 재정비를 끝낸 당 제국은 점차 [[토번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는 동시에 역공을 퍼붓으면서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으며, 729년 안서-하서-농우 지역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이었던 석보성을 삭방절도사 이의[* 농서 이씨 황족이었지만 현종의 형제는 아니었다.]가 완전히 점령했다. 기세가 한풀 꺾인 토번은 당 제국과의 전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요청했다. 이후 737년에 다시 토번과 전쟁이 발발했고, 요충지인 석보성을 741년에 토번에 다시 빼앗겼지만, 당 제국은 또다른 요충지인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했다.[* 이는 검남절도사 [[장구겸경]]에 의한 것이었다. 토번 제국과 남조국 간의 연계를 차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749년 [[가서한]]이 석보성을 재정복한 데 이어[* 성을 지키는 토번군은 수백 명인 반면 당군은 사상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 753년에는 이전 토번에 넘겨주었던 하서구곡 지역을 수복하는 등 [[안사의 난]] 이전까지는 토번 제국을 상대로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 대[[거란]] 전쟁과 대[[발해]] 전쟁 === 당현종은 이이제이책을 실행해 적절히 거란의 내정에 개입하여 거란을 군사적, 정치적으로 분열시키고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730년 당나라의 압제를 받아오던 거란 추장 [[가돌우]]가 병력을 일으켜 당나라의 꼭두각시 놀음을 하던 거란 출신 송막 도독을 잡아 죽이고, 거란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 돌궐과 동맹을 맺고 [[해족]]과 손을 잡은 뒤 당나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장수규와 이의 등에게 패배하여 이후 가돌우는 장수규의 이간계에 의해 살해당하고 당나라는 동북방의 거란 방면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거란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 [[발해]]와의 전쟁도 발발하면서 전선이 양면으로 확대되어 버렸는데, 732년 [[무왕(발해)|발해 무왕]]이 보낸 [[장문휴]]의 발해 군대에게 등주를 공격당해 자사 위준이 살해당했다.[* 등주는 그 이후 실업자가 늘어나는 등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에 분노한 현종이 [[갈복순]][* 현종이 [[당륭정변]]을 일으켰을 때부터 함께 했다. 참고로, 이 갈복순은 명장 [[곽자의]]의 외사촌이었다고 한다.]을 보내 이를 막게 했으나 발해군은 이미 후퇴한 뒤였다. 그 뒤 반격에 나섰으나 [[마도산 전투]]에서 당군이 발해군에게 패배하면서 실패했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연전연승으로 정복을 해나가던 당현종에게 있어서 첫 번째 패전이라 할 수 있었다. === 대[[남조]] 전쟁 === 현종이 [[피라각]]의 이하(洱河) 주변 6조 통일을 지원하는 등 당 제국과 남조국 간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는 큰 마찰이 없는 편이었으나 각라봉의 즉위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각라봉]]이 당 제국에 빼앗긴 국경 일부를 공격하여 탈환하자 현종은 이를 구실로 하리광으로 하여금 남조국을 정복하도록 했다. 하리광은 당군을 이끌고 남조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다시금 정복에 나섰다. 그리고 [[당-남조 전쟁#s-1|천보전쟁]] 이전 당나라는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숙적인 돌궐 제2제국은 이미 내란으로 소멸했고, 740년에는 [[장구겸경]]이 토번으로부터 요충지인 안융성을 탈환한 데 이어 749년 가서한이 석보성을 탈환하는 등 대토번 전선에서 우세를 보였던 데다가 토번과 남조 간의 연합 가능성을 차단했으며, [[거란]]을 확실히 제압함으로써 동북방의 패권을 장악하는 등 모든 정세가 당현종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현종은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다가 이후 당나라에서 남조국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나온 운남 태수 장건타가 남조국을 잔인하게 지배하면서 각종 세금을 착취하자 결국 참다못해 폭발한 각라봉이 반란을 일으켜 장건타를 죽이면서 다시금 전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당군이 곧 남조국을 침략해올 것에 겁이 난 각라봉은 이에 대해 현종에게 사죄했으나, 검남절도사 선우중통[* 이름은 '향'이고, '중통'은 자이다.]은 이를 무시한 채 남조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남조의 끈질긴 저항으로 남조 정복은 실패했고, 선우중통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선우중통은 남조 정복 실패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했고,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져 결국 절도사직에서 파면되었다.] 그 후 간신 [[양국충]]이 두 차례에 걸쳐 남조국을 침공했으나, 남조군의 저항으로 인해 정복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군이 강압에 못이겨 출전했고, 남방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두 차례의 전쟁 중 두 번째로 발생한 전쟁에서는 양국충이 이밀로 하여금 남조를 공격하게 했으나 패배했고, 이밀도 죽고 말았다. 양국충은 이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했다.] 그 뒤 더 이상 참다못한 남조와 토번이 대당연합군을 결성하게 되었다. == 평가 == >개원 연간에는 천명을 받들고 천하를 얻어, 옛일을 오랫동안 교훈으로 삼았다. 경사스러운 기운이 화통하고 밝았으며, 침울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정치에 조금씩 권태를 느꼈고, 요사스러운 이들이 조정으로 모여들어 관직을 맡았다. 선철들의 말로 ‘처음에는 누구나 잘한다.’고 이야기한다. >---- > 《[[구당서]]》, 현종 논찬 >현종은 직접 난을 평정하여[* [[당륭정변]] 및 [[선천정변]]] 가히 귀감이 되었고 또한 여자들을 무너뜨렸다('''무위지화'''의 종식). 바야흐로 정사에 정신을 가다듬어, 개원 연간에는 어느 정도 태평에 이르렀으니('''개원성세'''), 얼마나 위대한가! 사치에 자극을 받자, 천하의 욕망을 궁구하여도 즐길 거리로 삼기에는 부족하였으니, [[양귀비|두터운 사랑]]에 빠지고 경계함을 잊어버려('''천보난치'''), 몸을 숨기고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지만('''안사의 대란''') 뉘우치지 않았다. 그 처음과 끝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습성이 서로 멀리 갔다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가히 삼가지 않았구나! 가히 삼가지 않았구나! >---- > 《[[신당서]]》, 현종 논찬 >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명황[* 송대 이후의 중국에서는 묘호가 아닌 시호를 따온 '''당명황'''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린다. 이는 송태조 조광윤, 송태종 조광의 형제의 시조인 [[조현랑]]이 황제로 추존되어 '현' 자가 [[피휘]]되었기 때문이다.]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사의 난|안녹산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 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 ---- > [[현진건]], 《무영탑》 中 '''[[개원의 치|개원성세]]라는 전성기를 이끌면서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여 대당제국의 영토를 팽창시키고, [[중앙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함'''과 동시에 '''[[안사의 난]]이라는 거대한 내전을 발발하게 하여 제국의 몰락까지도 초래한 황제'''라서 '''여러모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곤 한다.''' 역시 인생은 말년까지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현한 황제였다.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거의 그를 상징하는 요소이며 그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거리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360640.com/451.png|width=100%]]}}} ||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다가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인데, 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도덕적 역사관이기도 하지만, 사실과는 좀 다르다. 재위 후기의 현종에게서 [[암군]]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잘 따져보면 정치적인 영역에 가깝다. 실제로는 바닥까지 몰락했던 [[관롱집단|관롱 귀족 집단]]이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여 국정을 전횡하는 것을 다름 아닌 그가 방관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현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군제와 경제 개혁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이에 반대하는 군인과 귀족들이 정국을 장악했는데 그게 과연 먹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현종의 개혁에 강하게 반발하며 저지에 나섰고 개혁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과거제 출신 관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현종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변화들을 학자들이 상징적으로 평가한 것이 '[[양귀비]]와 놀아나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간신 [[이임보]]의 사후 양국충이 집권하면서 이들 관롱 귀족 세력은 다시 힘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양국충은 가문이 빈천한 과거 급제자 출신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아 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과거 출신 관료들이 외척인 양국충의 지원으로 기용되었다는 게 약점이 되었기에 양씨 가문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개원지치]] 즈음에 군진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절도사 제도의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실 '''막대한 수의 [[직업군인]]을 지방의 군사 지휘자가 단독으로 통솔하여''' [[군벌]]이 되기 쉬운 태생적 단점을 가진 절도사 제도는 엄중한 통제가 필요한 제도였으나, 천보 시대부터 관리가 극도로 소홀해진 것이 문제였다. 즉 이 시기부터 [[당나라]]는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아니라 완전히 '''분권적 봉건제 제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즉 [[절도사]]는 자신의 영지내에서 독자적인 군대를 이끌고 군주처럼 왕 노릇을 하는 군사조직이 되었다. 이처럼 엄청나게 양성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직업군인들은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팽창시키다가 나중에 가면 교만해져 중앙 정치까지 개입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대규모 내전을 일삼게 된다. 군사제도를 '[[직업군인]] 제도'인 [[모병제]]로 완전히 바꾸고, 당나라의 군사력을 강력하게 증강시키면서 영토팽창주의를 고수하여, [[고선지]]가 72개가 넘는 국가들을 정복하고 아시아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태종 시대에 최전성기를 달리면서 세계 1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나라의 군사력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는 것까진 좋았는데 정작 현종은 이렇게 하늘을 찌르듯 강력해진 군사력을 제대로 통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 힘이 막강해진 군인들과 절도사들이 더 이상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중앙 조정에 반항하며 내전을 일으키거나 황제의 명령없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개인 군대를 이끌고 타국을 정복하러 나가는 등 완전히 [[병영국가]]화가 되어갔다. 대표적인 [[안녹산]]의 경우, 평로절도사로 14년, 범양절도사로 12년, 하동절도사로 5년을 재임했고, '''이들 셋을 겸임하는 상태'''로 있었는데, '''절도사의 원래 정해진 임기가 2년'''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건 월권 행위에다가 절도사들의 군사력이 너무나 막강해져서 더 이상의 관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안사의 난]]이 발발했을 때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녹산이 통제하던 정규 병력만 해도 당시 당나라의 지방 절도사들이 관리하던 총병력 중 37.8%였으며 수만 명에 달하는 사병까지 확보하고 있었기에 군벌에다 통제 불능의 세력이 되었다. 결국 이런 거대한 병력을 통제하고 있었던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거대한 제국 전역에서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수많은 절도사들까지 너도 나도 할 것없이 반란을 일으키다보니 제국 전체를 휩쓰는 거대한 내전으로 흘러가면서 대책이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결국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는 피폐해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현종은 황후와 형제에게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아버지로써는 최악의 황제였는데 반란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 이영, 광왕 이거, 악왕 이요 등, 자기 아들 셋을 가차없이 죽여버렸고, 아들인 수왕 이모의 왕비이자 며느리인 양옥환을 빼앗아 자신의 첩인 귀비로 삼는 등, 중국 역사에서 [[후조]]의 황제인 [[석호]]와 더불어 최악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심지어 후임 황제인 당숙종이 피폐해진 이유 역시 선제 현종에 의해 형제들이 학살당하는 꼴을 보거나 피폐해진 삶을 봐서 그렇다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숙종 역시 아버지처럼 후처와 측근의 참소만 믿고 그에게 효성을 다한 차남 이단을 죽여버린 막장부모였다는 것이다. 종합하면 현종은 좋은 남편, 좋은 형, 좋은 동생이었지만 아들들에겐 나쁜 아버지였다. == 기타 == * 황자였을 시절, 장안성 동쪽 춘명문 부근의 융경방(隆慶坊)에 저택이 있었는데, 황제로 즉위한 후 방의 이름을 흥경방(興慶坊)으로 [[피휘|고치고]] 여러 차례의 공사 끝에 방 전체를 흥경궁(興慶宮)이라는 이름의 궁궐로 만들었다. 732년에는 장안성 북쪽의 [[대명궁]]과 남쪽의 곡강지 인근에 있었던 이궁인 부용원 및 그 중간에 있는 흥경궁을 연결하는 협성(夾城)을 장안성 동쪽 성벽에 잇댄 이중 성벽으로 완성해 황제 전용 통로로 사용했다. 현종 때의 특기할 사항 중 하나는 천보 3년(744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친 것이다. 즉 천보 3년 이후부터는 천보 3재, 4재... 이런 식으로 써야만 했다. 그래도 지엄한 천자의 명령인지라 당나라 전역은 물론 이웃국가 [[신라]]에서도 '''천보 ~재'''라고 표기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천보 11재(752년)라고 적힌 습자용 목간이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714443|#]] * 표기가 '재' 에서 '년' 으로 회복된 건 현종의 아들 숙종 때인 건원 원년(758년) 2월로, 그동안 천보(天寶), 지덕(至德), 건원(乾元)의 3개 연호가 20년 가까이 사용되었다. 현종은 78세까지 [[장수]]했기에, 차기 황제가 될 [[숙종(당)|아들]], [[대종(당)|손자]], [[덕종(당)|증손]], [[순종(당)|현손]]을 생전에 모두 봤다. 현종의 현손인 순종이 태어난 해가 761년, 바로 현종이 죽기 1년 전이었다. 등극하기 전에는 격구의 대표 선수였다고 한다. [[http://kezs.egloos.com/1964288|#]]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 이란계 백인 민족으로 상업에 능했다고 한다.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소수 민족인 야그노브인이 이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으로 추정되는 조야나희와의 사이에서 [[혼혈]]인 수안공주를 두었다. 별개로 지지했던 양귀비와 안녹산이 [[비만]]으로 알려져서 '뚱보 취향의 황제'라고도 불린다(...). * 정이 많은 황제로 불리곤 한다. 중국의 황제들은 후궁을 들이면서 이들을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키거나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적절치는 않았다고 해도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양귀비 이전에 지지했던 [[매비 강씨]]와의 눈물나는 일화는 현종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 [[한국의 성씨]]인 [[인천 이씨]]가 이 사람과 연관이 있다.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6대조 [[할아버지]]인 허기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왔다가, 안사의 난 당시 피난가는 현종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현종이 허기에게 국성인 이씨를 하사했다고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 ---- [include(틀:당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