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722년 출생]][[분류:1776년 사망]][[분류:풍산 홍씨]][[분류:조선의 문관]][[분류:조선의 외척]][[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노론]][[분류:독살형된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객사한 인물]]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영조-정조))] [include(틀:노론)] ||<-2> '''[[정승|{{{#f0ad73 조선 정승}}}]][br]{{{+1 홍인한}}}[br]洪麟漢''' || ||<|2> '''출생''' ||[[1722년]]([[경종(조선)|경종]] 2)|| ||[[한성부]]|| ||<|3> '''사망''' ||[[1776년]] [[8월 18일]] 이후[br](음력 [[정조(조선)|정조]] 즉위년 7월 5일 이후)|| ||[[전라도]] [[강진군|강진현]][* 완도군은 1896년에 생겨난 행정구역이다.] [[고금도]][br](現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사사형]]|| || '''[[본관|{{{#f0ad73 본관}}}]]''' ||[[풍산 홍씨]]|| || '''[[자(이름)|{{{#f0ad73 자}}}]]''' ||정여(定汝)|| || '''[[붕당|{{{#f0ad73 붕당}}}]]''' ||[[노론]], 북당, 탕평당|| || '''가족''' ||{{{-3 아버지}}} 홍현보 / {{{-3 어머니}}} 풍천 임씨[br]{{{-3 친어머니}}} 성주 이씨[br]{{{-3 형제}}} [[홍봉한]](이복형), 여동생 외 3명[br]{{{-3 아내}}} 평산부부인 신씨[br]{{{-3 자녀}}} 7명|| [목차] [clearfix] == 개요 == [[풍산 홍씨]] 가문 출신으로 이복형 [[홍봉한]]을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 [[정후겸]]과 손을 잡아 [[영조]] 마지막 3년 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정조(조선)|정조]]의 즉위를 막으려다 결국 사사되었다. == 생애 == 1722년 홍현보와 그 후처(첩이 아니다)인 성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주 이씨였다. 첫 [[관직]]인 통덕랑은 [[음서]]를 통해 합격했으나 재직 중인 1753년에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급제했다. [[풍산 홍씨]]라는 명문가 출신에다가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숙부라는 든든한 뒷배를 무기삼아 [[승승장구]]하여 급제한 1753년에 가주서와 정언, 1754년에 교리로 있다가 파직되었다.[* 조영순(趙榮順)이란 자를 [[변호]]하려다 물러났다 한다.] >홍인한이 감사(監司)로 있을 때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끝날 즈음이 되면 기생의 잘못을 트집 잡아 곤장을 쳐서 피를 본 뒤에야 통쾌해하였다. 그래서 음악을 연주할 때면 뜰 한쪽에 반드시 형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으니, 이는 [[석수(후조)|석수]](石邃)가 미녀들을 치장하여 잔치를 즐기고는 결국 삶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체로 여자에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남자에게 재주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하늘이 쓸데없이 그들을 낸 것이 아닌데 포악하게 대한다면 어찌 천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 있는 사람을 무시하면서 잘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유독 기생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더구나 일부러 곤장을 쳐서 통쾌해하는 것은 시랑보다 더 포악한짓이니, 그가 역적으로 몰려서 패망한 것은 당연하다. 《[[청성잡기]]》 [[홍봉한]]은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힘이 커지자 [[동맹]]을 제안하려 했으나 파직되었으며 김귀주 등 청명당의 공격이 더욱 강해지면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삭출되었다. 그러다가 1년 뒤 당색으로 인사를 행했다는 이유로 [[김종수]], [[김치인]] 등이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홍봉한이 승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귀주의 경주 김씨 가문 위주의 청명당과 홍봉한의 일부 탕평당의 세가 약화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세손인 [[정조(조선)|정조]]가 홍봉한을 비롯한 풍산 홍씨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눈치와 수완이 좋았던 홍인한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양자(가족)|양자]]이자 떠오르는 실세인 [[정후겸]]에게 접근했다. 신예였던 정후겸 역시 홍인한의 정보력과 인맥 등이 필요했기에 둘의 동맹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렇게 이복형 홍봉한을 대신해 정후겸과 연합을 맺고 조정의 [[권력]]을 잡았으나 딱히 홍봉한을 배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홍인한이 홍봉한을 제치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나빴다고 [[해석]]이 되지만 딱히 형제간의 의견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봉한 역시 정조가 즉위한 이후 자신의 이복동생인 홍인한을 살리려고 애썼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오히려 공공의 적이였던 [[김귀주]]와 [[김관주]]의 경주 김씨가 몰락했다. 다만, 홍봉한은 이때 고령에다가 실각하면서 조정 내에서의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영조]] 시대 마지막 3년은 사실상 홍인한과 정후겸 두 사람이 주물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조가 너무 늙어서 세손 [[정조(조선)|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할때 반발하며 세손을 감시하고 가짜 [[뉴스]]와 익명서까지 넣으며 방해했다. 특히 홍인한은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령을 내리자 극구 반대하며 나섰고 영조가 전교를 쓰라는 명령을 내리자 승지 앞을 막아서며 어명을 듣지 못하게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처절하리만치 정조의 승계를 방해했다. 정조가 세손시기 쓴 존현각 일기에는 홍인한에 대한 적대감과 그의 패악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1434A_0020_010_0010&viewSync=|#]] 심지어 세손이었던 정조가 대리청정에 준하는 명을 사양하겠다는 소를 올리며 도움 요청 및 부탁을 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심상운(沈翔雲)]]이라는 자파 인물에게 [[상소]]까지 올리게 하며 저지하려 했지만 막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가 승하하면서 정조는 수순대로 즉위했다. 그토록 방해했던 정조의 즉위 이후 홍인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정조는 척신 척결 작전을 시작했으나 그들 중 정후겸만이 유배형을 받았고 화완옹주는 이미 사저에 나갔다며 딱히 큰 벌을 받지 않았다. 대간은 홍인한에 대해 쉬쉬했으나 정조가 강한 입장을 보이자 토죄 상소가 몇 건 올라왔고 결국 홍인한은 위리안치된다. 이후 [[윤약연]] 등이 홍인한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다른 [[신하]]들이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결국 홍인한은 [[고금도]]에서 1776년 7월 5일에 사사된다. 처형당할 당시 영조가 승하한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의미는 홍인한이 정조가 즉위한지 3개월도 안 돼서 제거당했다는 것이다. 사실 승하하기 직전 당시 영조의 [[나이]]는 역대 [[조선]] 국왕들 중에서 후에 즉위하는 [[국왕]]들을 다 합쳐도 최장수+최장기 집권이었기에 언제 죽을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후계자]]인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큰 [[죄]]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홍인한의 행위는 매우 무례하여 반역이나 다름없기에 정조의 원한을 크게 살만했다.] 죄목은 [[홍국영]]을 해치고 [[역모]]에 가까운 죄를 저지른 혐의였다. 1832년에 손자 홍백영(洪百榮)[*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이 할아버지인 홍인한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처벌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순조]]가 무마시켰다.[*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2023_002|《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9010_002|《조선왕조실록》의 기록 2]].] 그러나 1855년 [[철종(조선)|철종]]이 혐의가 뚜렷하지 않다며 복권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삼사의 반대를 받았고 명은 취소되었으나 1858년 10월 25일 원자가 태어난 분위기 때 다시 복권되었다.[* 이 때는 의외로 [[신 안동 김씨]]를 비롯한 신하들의 반대가 거의 없었다.] == 가족관계 == * 조부 : 홍중기(洪重箕) * 부 : 홍현보(洪鉉輔, 1680 ∼ 1740) * 모 : 풍천 임씨[* 임방의 딸] * 생모 : 성주 이씨[* 이세황의 딸] * 이복 형 : [[홍봉한]] * 조카 : 홍낙윤(洪樂倫) * 조카 : [[혜경궁 홍씨]] * 조카사위 : [[사도세자]] * 외종손 : [[의소세손]] * 외종손 : [[정조(조선)|정조]] * 본인 '''홍인한''' * 친동생 : 홍준한(1731 ~ ?) * 친동생 : 홍용한(1734 ~ 1809) * 여동생 : 풍산 홍씨 * 부인 : 평산부부인 신씨[* 신방의 딸] * 장남 : 홍낙원(洪樂源) * 손자 : 홍경모(洪敬謨) * 차남 : 홍낙술(洪樂述) * 삼남 : 홍낙진(洪樂進) * 사남 : 홍낙손(洪樂遜) * 오남 : 홍낙준(洪樂浚) * 딸 : 풍산 홍씨 * 8촌형 홍창한 * 9촌조카 홍낙춘 * 10촌 종손 [[홍국영]] 집안이 아주 빵빵한데, 영조 말기에 들어서 권세를 부렸던 [[홍봉한]]이 형이고, 당연히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가 조카이며, [[현조|5대조]]인 [[홍주원]][* [[선조(조선)|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와 혼인하였다.]의 아들 대에서 갈라진 [[홍국영]]이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조선의 역대 집권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