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옹주]][[분류:1520년 출생]][[분류:1544년 사망]][[분류:출산 중 죽은 인물]] [include(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0%, #94153e 20%, #94153e 80%, #751232)" '''조선 중종의 왕녀[br]{{{+1 효정옹주 | 孝靜翁主}}}'''}}} || || '''출생''' ||[[1520년]] [[12월 18일]]^^([[음력]] [[10월 29일]])^^ || || '''사망''' ||[[1544년]] [[3월 22일]]^^([[음력]] [[2월 19일]])^^[br]{{{-1 (향년 24세)}}} || || '''묘소''' ||{{{#808080 양주 구나올(楊州 口羅兀)}}}^^[[실전#s-2|{{{#808080 실전}}}]]^^[*선원록 [[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62804|#]]] ||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순환(順環[*훈음 순할 __순__ 둥근 옥 __환__][*선원록][* 7살이 되던 해, 실록에 효정옹주의 이름을 順環이라 기록한 것을 보면 태어났을 때는 이름을 舜環으로 지었다가 나중에 順環으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舜環[*훈음2 무궁화 __순__ 둥근 옥 __환__][*태지석 출처 - 《‘淸原地城胎室’을 중심으로 한 胎室硏究》]) || || '''부모''' ||부왕 - [[중종(조선)|중종]][br]생모 - [[숙원 이씨(중종)|숙원 이씨]] || || '''배우자'''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 {{{-3 1521 ~ 1548}}}) || || '''자녀''' ||'''슬하 1남''' 아들 - 조천계(趙天啓, {{{-3 1539 ~ ?}}}) || || '''봉호''' ||'''효정옹주(孝靜翁主)'''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2uuVaG2g298)] [[조선]] [[중종(조선)|중종]]의 서5녀. 후궁 [[숙원 이씨(중종)|숙원 이씨]]의 차녀이고, [[동복형제|동복]] 언니로 [[정순옹주(중종)|정순옹주]]가 있다. [[불륜]]의 피해자이며, 현대에 옮겨놓으면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한 에피소드를 차지할 비운의 인물이다. == 생애 == === 어린 시절 === 1520년(중종 15) 태어난 효정옹주는 그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숙원 이씨의 사인은 [[산욕열]]이었다.] 중종은 자식들에게 모두 후한 은전을 베풀었고, 이로 인하여 물자를 낭비하고 죄를 지어도 묻지 않는 등 대간들의 비판을 받았던 아버지였으니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효정옹주는 애틋한 자식이었을 것이다. 1529년(중종 24)부터 중종은 혼기가 임박한 효정옹주의 집을 짓게 하였는데, 1532년(중종 27) 재변(災變)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헌부에서 집 짓는 일을 중단하자고 건의가 있었다. 중종은 장마 전에 보수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공사에 필요한 인원 일부를 남기고 철수했다.[* 중종실록 73권, 중종 27년 5월 17일 갑자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705017_001|#]]] 이때 중종이 지어준 옹주의 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실록에 옹주의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숙원 이씨의 본가가 향교동에 있었다는 언급이 있으므로 아마도 향교동에 있었거나 가까운 근방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억울한 죽음]] === 효정옹주는 순창부사 조침의 아들 조의정을 [[부마]]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고, 1544년(중종 39) 2월 15일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출산 나흘 뒤인 2월 19일 [[산욕열]]에 걸린 옹주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중종은 즉시 의원과 [[의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효정옹주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중종은 효정옹주의 위독함을 늦게 알린 정황이 수상하다며 조의정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중종실록 102권, 중종 39년 2월 19일 무자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902019_004|#]]] 당시 실록을 보면 조의정을 두고, "의정은 연소하고 성질이 광패하여 비첩(婢妾)을 사랑하다가 여러 차례 견책을 받았으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옹주가 죽기 4-5년 전부터 첩실을 두고 음란한 짓을 하므로 중종도 이 사실을 알고 조의정을 여러 번 문책했었다.[* 하지만 옛날부터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중종의 입장에서는 효정옹주와 조의정을 이혼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조의정을 죽여서 딸을 과부로 만들 수도 없으니 꾸짖고 녹을 주지 않는 것 이상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오죽하면 중종은 "부녀자로서 질투가 없는 것은 진정이 아니다" 라고 말했지만[*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여자가 하지 말아야 할 7가지 중에 질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죽하면 질투 좀 하라고 말할 정도로 중종의 눈에 딸이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효정옹주는 질투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조의정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일설에는 옹주의 외모가 너무나도 박색이어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인지 확인 가능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효정옹주의 사망으로 상황이 변했다. 중종은 정원에 전교를 내리면서 조의정의 죄를 밝히고 추고하게 했다. 반대로 조의정의 공초 내용을 보면 시종일관 본인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이 사건을 대조해보면 이렇다. * 여종 풍가이를 첩으로 삼고, 분수에 넘치게 대우했다. * 옹주가 먼저 풍가이는 첩으로 삼을 만 하다고 말했고, 풍가이를 대할 때 다른 여종들을 부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또 옹주가 스스로 첩 삼는 것을 허락하여 조금도 투기하지 않았으므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더욱 잘해주었다. * 풍가이를 집에 몰래 숨겨두었다. * 풍가이는 임인년[* 1542년(중종 37)을 말한다. ]에 벌을 받고 함흥으로 가게 되었는데 중도에서 도망하여 순창의 농막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 집에 몰래 숨긴 적은 없다. * 옹주의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야 알렸다. * 옹주는 출산하고 건강 상태도 좋고 밥도 잘 먹었다. 그런데 19일부터 기침이 잦고 구토를 하므로 백방으로 약을 구해서 썼다. * 옹주의 유모와 여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 옹주의 유모는 "금년에 액운이 있어 다른 곳에서 거처해야겠다" 하였으므로 말릴 수 없었고, 여종들을 내보낸 건 부마의 집은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지난 5월에 파직되어 녹을 받지 못해서 절약하느라 그랬다. * 옹주가 출산할 때 외조모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 전혀 그렇지 않으며, 집안의 노비들을 불러서 물어보면 모두 진실을 알 것이다. * 옹주가 절명해서 숨길 수 없어 그제야 죽음을 알렸다. * 대궐에서 의녀를 보낸다고 해서 옹주랑 같이 기다렸다. 옹주가 갑자기 죽어서 증명할 길이 없다. * 풍가이가 벌을 받게 되자 다른 여종과 바꿔치기해서 숨겼다. * 옹주가 먼저 풍가이를 첩으로 삼으라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해서 바꿔치기를 했다. 나중에 상황봐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 승전내관을 사칭해서 어명을 위조하고 채압(彩鴨)[* 채색한 암수 한 쌍의 오리 모양 조각상으로 [[일본]] 사신이 바친 물건이다.]을 가져갔다. * 옥계수[* [[세종(조선)|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해군(1435)|영해군]]의 손자이자, 길안도정 이의의 아들로 이름은 이필숙이다. 참고로 [[황진이]] 때문에 들어봤을 "청산리 벽계수야"의 그 벽계수랑 형제 관계다.]랑 어려서부터 친했는데, 그의 집에 갔다가 채압을 보고 신기해서 빌려달라고 했더니 안 빌려줬다. 그래서 장난 한 번 쳐봤다. * 예전에 임금이 문책하는 글을 써서 내렸는데 버려두고 나가버렸다. * 그때 그 글은 절대 버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간직하면서 펼쳐보면서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다. 중종의 의지는 강력했다. 결국 조의정은 고신을 빼앗기고 원하는 곳에 부처하게 하였으며,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고 풀려났다.[* 장 100대는 죽을 확률이 매우 높은 처벌이다. 유배는 여인이기 때문에 돈을 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중종은 풍가이를 사형시키려고 하였으나 조의정의 지시로 첩 노릇을 했다는 점 때문에 정상참작되어 사형을 면한 것이다. 특히 풍가이는 미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뭔가 비범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국문이 진행되면서 많은 신하가 풍가이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손가락이 하나 없어서 이유를 물어보니 "어머니가 아플 때 끓여서 약에 타서 먹였다"고 이야기하자[* 이것은 보통 효도의 일종으로 여겨져서 이 정도의 행적이면 국가공인(?) 효자가 되어 정문, 복호를 받을 수 있었다.] 풍가이를 감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들끓었다.[* 유교 문화에서는 [[군사부일체]], 즉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윗사람에게 불충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풍가이의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 곧 효정옹주를 향한 충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나 풍가이도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백을 하지 않는 바람에 이 확신이 굳어진 면이 있다.] === 복수혈전 ===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은 직후에 상궁 은대(銀臺)에게 납치당하였다.[* 상궁 은대는 숙원 이씨의 여동생, 즉 효정옹주의 [[이모]]였다. 이전에도 효정옹주의 동복 언니인 [[정순옹주(중종)|정순옹주]]의 남편 여성위가 첩을 두자 그 여자를 때려죽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같이 죽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아, 궁중 내의 해결사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거나 중종의 지시가 있었을 수 있다. 실록에서 "은대는 금중(禁中, 궁궐)에 세력을 두고 중외(中外)에 위세를 부려서" 라고 언급하는 걸 보면 평범한 일개 궁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풍가이를 납치한 은대는 자물쇠를 채운 곳에 풍가이를 10여일 동안 가두고 굶겼다. 장 100대는 장을 맞은 즉시 치료를 받아야만 살 수 있을만큼 극심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이는 타살 증거를 남기지 않고 풍가이를 죽일 의도였다.--계획살인-- 하지만 풍가이는 목숨이 질긴지 10여 일이 지난 후에도 생존해있었고, 이에 은대는 풍가이의 [[엉덩이|장 맞은 부위]]를 더 매질했다. 결국 풍가이는 이를 버티지 못하고 20여 일만에 죽었다.[* 사실 풍가이도 엄밀히 말하면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그녀는 일개 노비로서 주인이 자신을 첩으로 삼고자 할 때 거부할 권리조차 없는 입장이었는데, 그게 또 죄가 되어 가혹한 매를 맞고 죽은 것. 이후 중종이 풍가이를 이렇게 죽인 은대를 비호해 준 것을 보아, 진짜 나쁜 놈인 조의정은 차마 손댈 수가 없어서 대신 힘없고 만만한 풍가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분풀이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조의정은 당시 명문가에다 효정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어서 중종이 사형같이 큰 형벌을 함부로 내릴 순 없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은대의 처벌을 촉구하였다. 무엇보다 이미 은대가 지난 날 [[정순옹주(중종)|정순옹주]]의 남편 여성위 송인의 첩과 아이를 때려죽인 일이 드러났으니 가중 처벌을 해도 모자랐다. "은대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숙원 이씨(중종)|본주]]의 동생이니, 그 동생의 집 종을 때린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흉패한 일도 아니다" 라면서 중종은 처벌하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계속된 촉구에 어쩔 수 없었다.[* 은대를 처벌하라는 요청이 56번이나 이어졌고, 사헌부와 사간원이 동시에 찾아와 그만두겠다고 하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큰 처벌은 내리지 않고 결국 은대를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버린다. 이후 은대는 중종 사후 [[문정왕후]]에 의해 1년 만에 사면된다. >대왕 대비가 경상도 죄인의 석방 여부에 대한 계본을 원상 이기에게 내리며 이르기를, >“전 상궁 은대(銀臺)가 먼 곳에 귀양가 있다. 나인이 귀양간 일은 조종조에 없었던 일인데, 김안로(金安老)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다. 중종께서 처음에는 죄주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대간이 여러 날 두고 복합(伏閤)하므로 귀양보낼 것을 명한 것이다. 그간에 사면령이 여러번 있었으니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니, 이기가 회계하기를, >"위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여자가 죽을 죄로 멀리 외방에 귀양가는 법은 율문에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당초 의득(議得)할 적에 신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여기서 이기가 말하는게 정말 간신같다-- >---- >《[[명종실록]]》 명종 즉위년 10월 17일 한편 조의정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효정옹주의 집이 가난해져서 지원을 하기는 했다는 거 보면 중종은 딸의 제사에 대해서'''만''' 지원했고, 인종이나 명종 등 같은 중종의 자식들(효정옹주의 형제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혀서 몰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 여담 == * 효정옹주의 시아버지 조침(趙琛)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조효정(趙孝貞), 조충정(趙忠貞), 그리고 옹주의 남편 순원위 조의정으로 이 중 맏아들 조효정의 증손녀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인조)|귀인 조씨]]이다. * 효정옹주의 며느리인 강씨의 조카가 [[광해군]]의 후궁인 [[귀인 윤씨]]이다. 그리고 귀인 윤씨의 증조할머니가 효정옹주의 시누이이기도 하다. * [[천일야사]]에서는 풍가이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친하게 지냈으나 풍가이에게 진심으로 우정을 보인 그녀와는 달리 풍가이는 내심 고귀한 왕녀로 태어나 모든 걸 가진 옹주를 질투하며, 그녀의 성정을 파악하고 이용대상으로만 본 걸로 묘사되었다. 옹주의 남편 조의정이 자신에게 눈독들이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그를 유혹하고 어느 날 옹주에게 그와 정을 통하는 장면을 노출시켜 옹주의 권유대로 조의정의 첩이 되자 옹주가 과거에 자신에게 선물했던 노리개를 옹주 앞에서 내동댕이치는 등으로 배신하고 모욕해대며 조의정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군다. 그리고 옹주가 출산 후 건강악화로 홀로 외롭게 죽어가는 동안 조의정과 깔깔대며 놀아나는 악녀로 묘사된다. == 가족 관계 == * '''부왕''' : [[중종(조선)|중종]](中宗, 1488 ~ 1544) * '''생모''' : [[숙원 이씨(중종)|숙원 이씨]](淑媛 李氏, ? ~ 1520) * 언니 : [[정순옹주(중종)|정순옹주]](貞順翁主) 이정환(李貞環, 1517 ~ 1581) * '''남편''' :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 1521 ~ 1548) * '''아들''' : 조천계(趙天啓, 1539 ~ ?) * 며느리 : 강위(姜偉)의 딸 [[진주 강씨]] * 양손자 : 조령(趙玲, 156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