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김재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전직 프로게이머, rd1=김재춘(프로게이머), other2=전 교육부 차관, rd2=김재춘(교수))] [include(틀:역대 국가정보원장)] ---- || {{{#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국군기무사령관, 명칭=육군방첩부대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377a 0%, #06377a 20%, #06377a 80%, #06377a)" '''[[중앙정보부장|{{{#ffffff 대한민국 제3대 중앙정보부장}}}]][br]{{{#ffffff {{{+1 김재춘}}}[br]金在春|Kim Jae-choo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97598F8-BF7F-4C4B-9DA7-56A6D8D13D53.jpg|width=100%]]}}} || ||<|2> '''출생''' ||[[1927년]] [[6월 4일]] || ||[[경기도]] [[김포시|김포군]] (現 [[경기도]] [[김포시]]) || ||<|2> '''사망''' ||[[2014년]] [[1월 2일]] (향년 86세) || ||[[서울특별시]]|| || '''본관''' ||[[의성 김씨]] || || '''호''' ||인산(仁山) || ||<|6> '''재임기간''' ||제12대 육군방첩부대장 || ||[[1961년]] [[6월 10일]] ~ [[1962년]] [[7월 12일]] || ||제3대 중앙정보부장 || ||[[1963년]] [[2월 21일]] ~ [[1963년]] [[7월 11일]]|| ||제9대 무임소 장관|| ||[[1963년]] [[7월 23일]] ∼ [[1963년]] [[9월 3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김희방 || || '''자녀''' ||슬하 5남 1녀 || || '''학력''' ||통위부 보병학교 {{{-2 (졸업)}}}[br]육군기갑학교 {{{-2 (졸업)}}}[br]육군대학 {{{-2 (졸업)}}}[br][[건국대학교]] {{{-2 (경제학 / 학사)}}}[br][[건국대학교/대학원|건국대학교 대학원]] {{{-2 (경제학 / 석사·박사)}}} || || '''종교''' ||[[불교]] || || '''의원 선수''' ||'''2''' || || '''의원 대수''' ||[[제8대 국회의원|'''8''']], [[제9대 국회의원|'''9''']] || || '''경력'''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br]육군 방첩부대장[br]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br]제3대 중앙정보부장[br]제9대 무임소 장관[br][[자유민주당(1963년)|자유민주당]] 최고위원[br]한국사회연구소 이사장[br]한국배합사료협회 회장[br][[국민대학교]] 경제학과 초빙교수[br]한국산업기술개발연구소 소장[br]제8대 국회의원 (김포군·강화군)[br]한국삼업조합연합회 회장[br]제9대 국회의원 (고양군·김포군·강화군)[br]한국축산단체연합회 회장[br]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전임교수[br]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 || ||<-2> '''군사 경력''' || || '''임관'''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 (5기)}}} || ||<|2> '''복무''' ||[[대한민국 육군]] || ||1944년 ~ 1963년 || || '''최종 계급''' ||소장 {{{-2 (대한민국 육군)}}} || || '''주요 보직''' ||육군 [[제6군관구사령부]] [[참모장]] || || '''참전''' ||[[6.25 전쟁]]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중앙정보부장]], [[정치인]], [[국회의원]]. == 생애 == [[1927년]] [[경기도]] [[김포시|김포]]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교('47년)해 이듬해인 48년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생도였을 당시 [[박정희]]는 중대장 겸 교관으로서 김재춘과 인연을 맺었다. [[6.25]] 때도 9사단에서 박정희의 부하로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1960년]] [[4.19]] 당시 김재춘은 6관구(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당시 이승만의 경무대로부터 시위 무력 진압 명령을 받는다. 고민에 빠진 그는 당시 군수사령부 사령관 박정희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김재춘 참모장: "사령관님, 실탄 지급해서 출동하라는 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박정희 사령관: "야! 그건 절대 안 돼! 실탄을 지급하는 순간 참변이야!" 직후 항명죄로 체포돼 형의 언도를 기다리는 동안 [[이승만]]이 하야했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는 6관구 참모장에 복귀해 [[박정희]]와 술잔을 기울이며 더욱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다. [[1961년]]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참모장으로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반란군은 제6군관구사령부를 지휘소로 정해두었는데 김재춘은 5.16 군사정변 당일 [[장도영]]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고 쿠데타 지휘부를 체포하러 출동한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 이하 [[헌병대]] 병력을 설득하여 체포를 저지하고 [[반란군]]으로 끌어들이는 공로를 세웠다[* 그냥 공로도 아니고 쿠데타는 보통 사상자가 최소 수십에서 수백은 무조건 발생하는데 양측 피해자가 아예 전무한건 전적으로 김재춘이 말빨로 체포 진압 병력들을 설득했던게 매우 컸다.]. 그 덕분에 5.16은 무혈 쿠데타가 되었다.[* 물론 미군의 개입을 막았던 [[윤보선]] 대통령이나 곳곳에서 다시 한 번의 동족 상잔은 피하자는 여러 사람들의 덕이 더 컸다.] 김재춘은 육군사관학교 5기생의 리더로서 [[김종필]], [[김형욱]]을 위시한 육사 8기생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후 [[국군기무사령부|방첩부대]]장을 역임한 후 곧바로 1계급 진급하여 [[소장]]으로 예편한 김재춘은 1963년 제3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했다. 김재춘의 위세는 2인자 김종필도 몇 수는 접어야 할 정도였으며 심지어 박정희 의장마저 한 수 접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와 혁명 동지들이 혁명 공약을 지켜 군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의명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육해공]] 참모총장들과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 장성들을 규합해 박정희에게 대통령 출마 포기를 협박해서 일시적으로나마 군정 연장을 포기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낸다. 너무나 정론이다 보니 박정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여러 조건을 붙인 상태에서 군 복귀 성명까지 발표해야 했다. 중앙정보부장에 오르자 중정을 만든 [[김종필]]과 그의 수족을 모두 자른다. 직후 박정희와 독대를 해 비선 조직 재건동지회를 몰래 만든 책임과 창당 비자금 마련을 위한 [[증권파동]]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김종필]]을 [[유배|외유]]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김종필도 군말없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한다. 김재춘은 중정부장을 맡은 와중에 박정희로부터 이상한 명을 받는다. 가칭 '범 국민당'을 조직하는 [[김재순]]과 [[박준규(1925)]]를 도와 창당 작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선거 컨설턴트 이재만이란 사람에게 '군정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출마를 하라'는 조언을 받은 상태였다. 이재만은 공화당은 그대로 두고 제 2의 여당을 만들어 재야 세력 중 중진들이나 새 인물들을 포섭해 곧 있을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라는 조언을 했다. 사실 김재춘은 박정희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신당 발기 준비를 김재춘에게 맡겨 슬슬 중정부장을 내려놓게 하려는 면도 있었다. 범국민당 창당의 산파 역을 맡게 된 그는 그러나 당시 재야 세력들의 창당 붐으로 범국민당 인사 영입은 물론 창당 준비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원래의 공화당은 [[윤치영]]을 당의장으로 영입하는 등 안좋은 여론 속에서도 착착 나아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정계 구축을 완성했고 범국민당과 김재춘은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그즈음 심란한 김재춘에게 더욱 심란한 일이 벌어졌다. 소위 '7.6 친위 쿠데타 미수 사건('63)'이라 명명된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등 [[하나회|영남 출신 육사 11기들]]이 부패한 혁명위원들을 몰아내고 박정희 의장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시도였다. 김재춘은 그들을 달래고 모르는 척 봐줬는데 이는 16년 뒤 [[12.12 군사반란]]이라는 어마어마한 대형 [[산불]]로 재발하였다. 이 때 사건을 담당한 방첩대장이 [[정승화]] 준장(육사 5기)으로, 16년 후인 79년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12.12 군사반란으로 체포돼, 모진 고문 및 17계급 강등과 불명예 제대라는 인격 모독을 당해야 했다.[* 육사 개교 후 최초의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육사 11기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육사 1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육사 선배들을 무시했던 반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하는 친위 그룹으로서 자리매김했다. 박 대통령이 금일봉도 많이 내렸다고. 육사 11기가 군내 최대 사조직이 되고 실전 경험을 갖춘 [[갑종간부후보생]] 출신 간부들도 하나둘 군을 떠나면서 12.12 군사반란의 토대는 착착 놓여지고 있었다.] 김재춘은 끝내 중앙정보부장직을 내려놓고 범국민당을 공화당과 백지 합당시키라는 박정희의 명령에 거역한다. 끝내 자유민주당(1963)을 창당시켜 [[송요찬]] 전 내각수석[* 당시 송요찬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구속된 상태였다. 송요찬은 소위 4대 의혹 사건 때 재무부 장관 [[천병규]]와 싸우고 사표를 던진 이후 박정희 욕을 계속 해왔었다.]을 대통령 후보로 내려고 했다. 결국은 후임 중정부장인 [[김형욱]]에게 납치돼 [[이후락]]에게 외국으로 나가라는 굴욕적인 말을 듣고 자유민주당의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브라질]]로 떠난다. 재밌는 건 이 때 정적 [[김종필]]과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만나 마치 절친처럼 회포를 나누기도 했다. 김종필 역시 브라질에 유배를 와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김재춘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었지만. 이후 김재춘은 권력의 핵심에서 사라진다. 1964년 [[6.3 항쟁]]에 연루돼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중당(1967년)|민중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으나 결국 1972년 5월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유탁]]과 민주공화당 복수 [[공천]]을 받아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시|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1967년)|신민당]] [[오홍석]] 후보와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정치 규제를 당하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군 보좌역으로 지지를 했는데 이 일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과천시의 농지를 [[정부과천청사]] 부지로 강제로 뺏기다시피 하는 굴욕을 당했다. 2014년 1월 2일 향년 86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2&aid=0000042892&viewType=pc|*]] == 여담 == *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정승화]],[[채명신]]과 동기이다. * [[9사단]] 장교로서 [[6.25]]에 참전했으며 무려 [[현리 전투]] 패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 중 하나이다. 단,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사단장과 불화로 대구 육군군사학교 교장으로 좌천돼 그 때만은 함께 하진 않았다. * [[노태우]]가 그의 [[전속부관]]을 한 적이 있다. * 손녀사위가 [[한진그룹]] 회장인 [[조원태]]이다. * [[1994년]] [[MBC]] 정치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에 출연해, 군사정변 초반의 여러 정황들을 직접 증언했다. *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과 헌병대 병력은 김재춘과 반란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라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제6군관구사령부에 도착하고도 김재춘의 설득에 넘어가 오히려 쿠데타에 가담했다. 사실 김재춘은 원래 [[인간]] 관계가 폭넓고 원만해서 [[군대]] 내부에 적이 없다시피 했는지라 반란군과 진압군의 중재가 가능한 인물이었다. 만일 김재춘이 지략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쿠데타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거나 실패했을 확률이 컸다. * [[김형욱]] 전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혁명 당일 김재춘은 신들린 연기로 이광선 대령의 헌병 병력을 "전군이 들고 일어나서 참가하는 [[혁명]]이다. 괜히 대들었다가 죽지 말고 같이 동참해 달라"며 설득하였고 그래도 불안했는지 부대 내 제사공장으로 유인 후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려는 놈들은 즉시 갈겨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때 김형욱은 김재춘이 확실히 보통은 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후 [[제6군관구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들이닥치자 김재춘은 안전 장치가 풀린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했고 투스타와 원스타였던 둘이 기세에 눌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한다.] * 중앙정보부장 시절 JP의 친구이자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고문이었던 [[김용태(1926)|김용태]]의 아내를 중앙정보부로 연행해 고문을 하다 유산에 이르게 한 적 있다. 김용태의 회고에 의하면 훗날 자신이 어느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는데 어떤 남자가 이발소로 들어오다 황급히 나가길래 이발사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바로 김재춘 이었다고 한다. * 아호인 '인산'에서 이름을 따 [[고향]] 김포와 [[서울특별시|서울]] [[강서구(서울특별시)|강서구]] 일대에 대규모 [[농장]], [[목장]], [[사료]] [[공장]] 등을 갖춘 '인산농원'이라는 농기업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박정희가 [[미사일]] 등 신무기 연구 개발 기지를 [[과천시|과천]]에 짓기 위해 김재춘으로 하여금 인산농원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땅을 구입하도록 했다. 국가재정으로 직접 땅을 사면 [[미국]]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신무기 기지 계획이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바뀌면서 김재춘은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봤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로 하여금 과천 부지를 사들이도록 해 [[서울대공원]]을 지었다. *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진위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8년 6월의 역대 정보부장/안기부장 모임에서의 일. >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 [[13대 국회|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 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팩트폭력|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 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 인사) >---- >동아일보 1992년 10월 10일자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글) 112회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0100020921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0-10&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966&publishType=00020#|<전두환 '대권 각본' 밀어붙이다>]] == 대중매체에서 == * 1989년 [[MBC]] 드라마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 -배우 [[김창봉]]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 - 배우 [[송기윤]]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 - 배우 [[정상철]]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 - 배우 [[송기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선여부 || 비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시|김포군]]-[[강화군]]) || [include(틀:민중당(1967년))] || '''33,874 (45.01%)''' || '''당선(1위)''' || '''초선''' ||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시|고양군]]) || [include(틀:민주공화당)] || '''48,532 (39.11%)''' || '''당선(1위)''' || '''재선'''[*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와 동반당선]||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시|고양군]]) || [include(틀:무소속)] || 23,797 (16.20%) || 낙선(3위) || || == 둘러보기 == [include(틀:제8대 국회의원/경기도)] [include(틀:제9대 국회의원/경기도)] [각주] [[분류:의성 김씨]][[분류:1927년 출생]][[분류:2014년 사망]][[분류:김포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제8대 국회의원]][[분류:제9대 국회의원]][[분류:민중당(1967년) 국회의원]][[분류:민주공화당(1963년) 국회의원]][[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건국대학교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특임장관]][[분류:중앙정보부장]]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