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문천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송사)] [include(틀:송말삼걸)] ||<-2> '''{{{#ece5b6 송말삼걸(宋末三傑)[br]남송의 재상[br]신충열공(信忠烈公)[br]{{{+1 문천상}}}[br]文天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renminbao.com/2003-6-25-030625wentianxiang.jpg|width=100%]]}}} || || '''시호''' ||충열(忠烈)[* [[명나라]]에서 추증한 시호이다.] || || '''재상임기''' ||6년 || || '''작위''' ||신국공(信國公) || ||<|2> '''출생''' ||[[1236년]] [[5월 2일]] || ||[[강서성]] 노릉 길수현[br](現 장시성 지안시 지수이현) || || '''사망''' ||[[1283년]] [[1월 9일]] (향년 46세)|| ||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 || '''호''' ||문산(文山) || || '''[[주군|{{{#ece5b6 주군}}}]]''' ||[[이종(송)|송이종]] → [[도종(송)|송도종]] → [[공종(송)|송공종]] || || '''생몰''' ||1236년 ~ 1283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부터 1279년 광동 애산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장장 40여 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 또한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 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 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 >ㅡ 진정(金諍), 중국 과거 문화사 中 ㅡ 중국 [[남송]]의 정치가 겸 장군. 지고의 [[충신]]이자 망국 유신의 꺾이지 않는 절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이다. [[남송]] 최후의 [[승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장세걸]], [[육수부]]와 더불어 남송을 대표하는 세 명의 충신인 송말삼걸의 일원이다. 자는 송서(宋瑞) 또는 이선(履善), 호는 문산(文山). == 생애 == [[강서성]] 노릉 길수현[* 현 장시성 [[지안시]] 지수이현] 출신. 태어날 때 문천상의 아버지는 아기가 보라색 구름을 밟고 지나가는 꿈을 꾸었고 태어날 때 아이를 운손(雲孫)이라고 명명하고 후에 천상이라고 이름을 고쳐 지었다. 18세 때 여릉향교시험에서 1등을 하였고, 1256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때 시험관이 당시 황제인 이종에게 각별한 인재를 얻은 것을 경하했다고 한다. 그러나 4일 후 문천상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문천상은 3년 동안 삼년상을 치르고 이후에 다시 조정에 출사했다. 당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하북을 아우른 [[몽골]] 제국이 남진을 준비하던 상황이라, 바야흐로 남송은 위기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1259년 [[몽케]]가 직접 이끄는 몽골군이 사천을 침공해 합주가 포위되자 조정에서는 천도를 결정했으나,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 그후 복직했으나 재상 [[가사도]]와 견해가 맞지 않아 다시 물러났다.[* 나중에 대도로 압송될 때, 1259년 [[악주 전투]]에서 몽골군을 막아냈던 가사도를 칭송했던 것은 아이러니.] 강화에만 골몰하며 몽골과 남송 조정 양측을 기만하려던 가사도가 [[쿠빌라이 칸]]의 군대에게 패하고 피살당한 뒤, 몽골군이 맹공을 가해오자 지역의 유지였던 그는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가산을 모두 처분해 1만의 군사를 조직, 의병을 모아 싸웠다. 주변에서는 모두 남송은 끝장났다며 부질없는 짓 하지 말라 했지만 문천상은 의연하게 대답하였다. >나도 그걸 왜 모르겠나? 나라가 위급해 천하에 군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한 사람도 응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간지폭풍|내 비록 이 무모한 짓을 하다가 목숨을 잃어도 이로써 천하의 충신들과 의사들을 일어나게 할 수 있다면 한이 없겠네.]] 이후 복직되어 1276년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임조청정하던 태황태후 사씨로부터 우승상(右丞相) 겸 추밀사(樞密使), 도독제로군마(都督諸路軍馬)로 임명받았다. 이때 문천상이 빋은 관직을 요약하면 재상인 우승상, 군정을 주관하는 추밀사, 송나라의 지방단위인 각 로(路)의 군대와 군마를 도독하는 도독제로군마로 임명받은 것으로 엄연히 명분상 송의 모든 권력을 합법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원나라의 군대가 임안으로 쇄도하자 문천상은 장세걸과 함께 계속 전투를 벌일 계획을 제안했으나, 이 계획은 [[진의중]]에 의해 거부되었다. 당시 송나라 조정의 많은 관리들은 다가오는 원나라 군대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평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장세걸과 같은 전쟁을 지지하는 인물들은 저항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떠났다. 1276년 송의 [[황후 사씨(이종)|태황태후 사씨]]는 원나라의 장군이자 총사령관인 [[바린 바얀]]에게 문천상을 보내 평화를 교섭하도록 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기에 바얀을 만났을 때 그에게 몽골군의 의도를 묻고 원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조(원나라)가 송나라를 나라로 여긴다면, 군사를 다시 불러들여 조공을 하도록 교섭하겠소. 북조 군대가 무사히 자국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최선의 해결책이 될 것이소. 그러나 우리 [[종묘]]를 멸망시킬 작정이라면 점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군대는 재앙을 당할 수도 있으며, 당신의 승리는 확실하지 않소." 문천상이 항복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을 본 바얀은 그 자리에서 문천상을 체포하여 억류했다. 문천상은 분노했으나 태황태후와 다른 송나라 조정 관리들이 항복을 마무리하는 것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천상은 포기하지 않고 북으로 끌려가던 중 몽골군 진영에서 탈출하여 [[푸저우|복주]]에서 장세걸, 육수부, 진의중과 함께 도종의 맏아들 단종을 받들고 저항을 계속한다. 그러나 1278년 오파령 전투에서 패해 장홍범에게 붙잡혀 그 길로 대도([[북경]])에 압송되었다. 그리고 장세걸과 육수부는 애산으로 도주하던 중 사망한 단종을 대신하여 조병(남송 마지막 황제 [[소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저항을 계속하나 [[애산 전투|애산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원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힌 문천상이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데 과연 그 심정이 어땠을지...[* 일화에서는 재상이였던 [[진의중]]은 참파로 도망치던 와중 문천상에게 자신이 말했던 소신발언의 생각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천상이 이 참상을 보고 〈육희가(六噫歌)〉라는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폭풍이 일어나자 바닷물이 나는구나, 아!(颶風起兮海水飛噫) >문무(文武)가 다 없어지니 화덕(火德)이 쇠하는구나, 아!(文武盡兮火德微噫)[* 화덕을 이은 송(宋)나라가 쇠락하여 망함을 뜻함.] >새매는 공격하지만 베풀 곳이 없구나, 아!(鷹鸇相擊兮靡所施噫) >홍곡은 날고자 하나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鴻鵠欲擧兮將安歸噫) >강물에서 노를 치며 노래하고 가는 대로 내버려 둠이여, 아!(櫂歌中流兮任所之噫) >홀로 《[[춘추]](春秋)》를 안았거늘 날 알아주는 이 없네, 아!(獨抱春秋兮莫我知噫) 남송이 완전히 망한 뒤에도 이런 문천상의 명성을 잘 알았기에 바얀은 일부러 문천상을 죽이지 않고 수도 대도로 압송했다. 몽골은 송나라의 좌승상이었음에도 몽골군이 임안으로 진격할때 도망쳐 원나라의 신하가 된 [[유몽염]]을 감옥에 보내 문천상을 설득했으나 문천상은 즉시 그를 매우 꾸짖고 내쫒았다. 또 원나라는 문천상을 설득하기 위해 [[송공제]]를 보냈지만 문천상은 "폐하께서는 궁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나중에 그의 형인 문비도 같은 임무를 띠고 감옥으로 보내졌으나, 문천상은 "저희가 같은 부모님이 있어도 같은 하늘 아래서 봉사할 순 없습니다!"라고 형의 요구를 거절했다. 투옥된 동안 문천상은 딸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고, 그의 온 가족이 원나라 황궁에 포로로 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문천상은 "편지를 받고 매우 고통스러웠다. 누구나 친척과 가족이 있지만, 이 상황에서 나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처형당할 때까지 옥에 갇혀 지냈는데, 애산 전투에서 흩어진 남송의 잔병들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글을 쓰라고 권유받았으나 과령정양(過零丁洋)이라는 시를 지어 이를 거절했다. 1283년, 쿠빌라이 칸과 대면한 자리에서 문천상은 무릎도 안 꿇으려 했지만 여럿이 달려들어 간신히 그를 주저 앉혔다. 문천상은 그 자리에서 >흥망성쇠는 천하의 법도이고, 망국의 군신은 자고로 주살을 면치 못하거늘 이 몸이 어찌 살길 바라겠는가? 나라에 충성하다 죽는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라고 말한다. 쿠빌라이 칸은 그래도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서 >흥망성쇠가 천하의 법도라면 얼마나 많은 제왕들이 있었는가? 세지도 못할 정도의 흥망성쇠가 무성하거늘 그대는 왜이리 고집을 부리는가? 라고 하였으나 다시 문천상은 >그 많은 열일곱 조대의 역사를 어찌 여기서 다 논한단 말이오, 대칸? 여기가 과거 시험장이라도 된단 말이오? 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쿠빌라이 칸이 다시 >[[남송|그대의 나라]]는 중흥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서도 왜 황제를 [[송단종|두번]][[송소제|이나]] 다시 세웠는가? 라고 묻자 문천상은 >아비가 병에 걸려 치유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서도 자식들은 치료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오? 나라도 마찬가지인 것이오. 멸망할 나라일지언정 마지막 하루까지 본분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겠소? 이 문천상도 그럴 뿐이니, 더이상 나를 욕보이지 말고 어서 죽이시오! 라고 결연히 외쳤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그 재능을 아깝게 여겨 마음을 돌려 보도록 계속 설득했는데, 이때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망국을 향한 자신의 충절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피력했다. 정기가는 진짜 [[위엄]]이 넘치는 명문으로 심지어는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기도 할 정도이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literature&no=2649|정기가]]][* 여담이지만 정기가에 '위엄장군두'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엄장군이 '''[[엄안]]'''이다. 장비가 엄안을 생포하고 항복을 요구하자 '촉에 단두장군(목 잘리는 장군)은 있어도 항장은 없다' 며 거절했던 일화를 인용한 것. ~~그 엄장군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항복했건만~~] 거의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쿠빌라이는 처형을 주저하며 시일을 끌었고, 신료들도 문천상에게 호의적인 여론이었으나, 당시 남송 잔당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고 반란군은 "문승상을 구출하기 위해" 대도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기에 이렇게 문천상이 살아있어 남송의 잔병들이 소요를 그치지 않는 것이 밝혀지자 어쩔 수 없이 처형하기로 중론을 모았다. 투옥 5년여만인 1283년 남쪽을 바라보고 연경(燕京)의 시시(柴市)에서 참형되니 '''향년 47세'''였다. 이때 쿠빌라이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얼마 안 있어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령[* 혹은 처형 명령을 내리면서 문천상이 죽기 직전에라도 항복하거나 살려달라고 하면 즉각 처형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함께 내렸다고도 한다.]을 내렸는데, 사자가 이르렀으나, 문천상은 이미 처형되어 죽어 있었다. 처형 후에도 쿠빌라이는 '그야말로 진정한 사내 대장부였다' 라며 애석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처형당할 때 형리를 둘러보며 '''"내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다."'''라고 말했는데, 이 문구는 '''吾事畢矣(오사필의)'''라 하여 사자성어로 남아있다.[* 나 吾, 일 事, 마칠 畢, 어조사 矣. 여기서 어조사 의는 '~었다.'로 해석하면 된다.] 문천상이 처형당한 후 사람들은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그가 남긴 최후의 시인 절필시(切筆詩)를 발견했다고 한다. >孔曰成仁,孟曰取義。 >惟其義盡,所以仁至。 >讀聖賢書,所學何事? >而今而後,庶幾無愧。 >[[공자]]가 말씀하시길 인을 완성하라 하셨고, [[맹자]]가 말씀하시길 의를 취하라 하셨다. >오로지 극진한 의를 행함으로써, 인에 이르는 것이리라. >성현의 글을 읽을때 그 배운 바가 무엇이겠는가? >지금 이후로부터 (나는) 거의 부끄러움을 면하겠노라. 며칠 뒤에 그의 아내 구양씨(歐陽氏)가 그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였다고 한다. 문천상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을 막론하고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이후 장의보(張毅甫)라는 자가 문천상의 시신을 업고 길주(吉州)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렀다. 마침 임모(林某)라는 자가 혜주(惠州)에서 문천상의 어머니의 관(棺)을 메고 같은 날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그의 충효(忠孝)에 감응한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 '''정기가(正氣歌)''' == >天地有正氣 >천지유정기 (하늘과 땅에 올바른 기운이 있어) >雜然賦流形 >잡연부유형 (엇섞여 유동적인 형체에 부여되니) >下則爲河嶽 >하즉위하악 (땅에서는 강과 산이 되고) >上則爲日星 >상즉위일성 (하늘에서는 해와 별이 되었네) >於人曰浩然 >어인왈호연 (사람들이 [[호연지기]]라고 부르는 것이) >沛乎塞蒼冥 >패호색창명 (아주 많아지면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우노라) >皇路當淸夷 >황로당청이 (왕도가 맑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含和吐明廷 >함화토명정 (조화로움을 머금고 밝은 조정에 펼쳐지나) >時窮節乃見 >시궁절내견 (시절이 곤궁할 때는 절개를 보여) >一一垂丹靑 >일일수단청 (하나하나 역사에 드리웠도다) >在齊太史簡 >재제태사간 ([[제나라|제]]에 있어서는 태사의 죽간)[* 춘추시대 제나라의 최저(崔杼)가 군주인 [[제후장공]]을 죽이자 사관은 '최서가 주군을 시해했다'고 죽간에 기록했고, 최저가 그 사관을 처형하자, 그 사관의 동생이 똑같이 '최저가 주군을 시해했다'고 죽간에 기록하자 또 그를 죽였다. 사관의 막내동생까지도 위 두 형들과 똑같은 행동을 벌이자 최저는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고 한다.] >在晋董狐筆 >재진동호필 ([[진(춘추오패)|진]]에 있어서는 동호[* [[진영공]]을 살해한 이는 조돈의 종제인 조천인데, 종제가 임금을 살해했음에도 벌하지 않자 조돈이 군주를 죽였다라고 썼다.]의 붓) >在秦張良椎 >재진장량추 ([[진(통일왕조)|진]]에 있어서는 [[장량(전한)|장량]]의 [[창해 역사|철퇴]]) >在漢蘇武節 >재한소무절 ([[한나라|한]]에 있어서는 [[소무]]의 부절[* 소무는 흉노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그가 사신으로 왔다는 징표인 부절을 버리지 않았다. 황제의 어명을 받았다는 징표를 위험한 상황에서도 버리지 않았다는 절의를 묘사한 것.]이 있었네) >爲嚴將軍頭 >위엄장군두 (장군 [[엄안]]의 머리가 되고) >爲嵇侍中血 >위혜시중혈 (시중 [[혜소]]의 피[* 혜소는 [[팔왕의 난]] 당시 [[혜제(서진)|혜제]]를 호위했는데, 패전을 당해서 다른 신하들이 모두 도망간 와중에도 혜소 혼자서 혜제를 지키다가 사마영의 군사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혜소의 피가 혜제의 옷에 튀었는데, 이후 시종들이 핏자국을 닦아내려 하자 혜제는 '이는 충신의 피이다'라며 거절했다.]가 되기도 했으며) >爲張睢陽齒 >위장수양치 (수양성을 지키던 [[장순]][* [[안사의 난]]에서 수년간 수양성을 지켜서 [[안록산]]을 저지한 장군, 죽을때 이를 너무 심하게 갈아서 이가 없었다고 한다.]의 이빨이 되고) >爲顔常山舌 >위안상산설 (상산 태수 안고경의 혀[* 역시 안사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당나라의 인물. 당의 유명한 문인 [[안진경]]의 사촌동생이다. 안록산에게 포로로 잡혀 안록산을 욕하다가 혀가 뽑혀 죽었다.]가 되기도 하였네) >或爲遼東帽 >혹위요동모 (어떤 때는 요동 땅의 [[관녕]]의 모자[* [[조조]]와 [[조비]]가 계속 초빙했으나 한나라의 유민으로 행세하며 출사하지 않았으며 늘 소박한 옷차림과 모자 하나만 쓰고 지냈다.]가 되어) >淸操厲氷雪 >청조여빙설 (맑은 지조는 얼음이나 눈보다 매서웠다네) >或爲出師表 >혹위출사표 (또 어떤 때는 [[제갈량]]의 [[출사표]]가 되어) >鬼神泣壯烈 >귀신읍장렬 (귀신도 장렬함에 울어대었고) >或爲渡江楫 >혹위도강즙 (어떤 때는 강 건너 삿대가 되니)[* 동진의 조적이 북벌을 위하여 장강을 건널 때 노를 두들기며 반드시 중원을 회복하겠다며 강물에다 맹세한데서 유래] >慷慨呑胡羯 >강개탄호갈 (의기가 북받친 서러움이 오랑캐를 삼킬만했고) >或爲擊賊笏 >혹위격적홀 (혹은 역적을 치는 홀이 되어) >逆竪頭破裂 >역수두파열 (역적의 머리를 깨뜨렸다네)[* 당나라의 [[주차(당나라)|주차]]가 난을 일으켰을 때 [[단수실]]이 홀(笏)로 주차를 때려 주차는 이마에 피를 흘리며 도망갔다고 한다.] >是氣所磅礡 >시기소방박 (이 바른 기운 세상에 가득하여) >凜烈萬古存 >늠렬만고존 (늠름하고 장렬함이 만고에 전해진다) >當其貫日月 >당기관일월 (그 올바른 기운 해와 달을 꿰뚫으니) >生死安足論 >생사안족론 (삶과 죽음을 어찌 논할 것인가?) >地維賴以立 >지유뢰이립 (땅을 묶는 밧줄은 이에 의지해 우뚝 서고) >天柱賴以尊 >천주뢰이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은 이에 힘입어 높아진다) >三綱實係命 >삼강실계명 (삼강이 실로 이로써 맥을 유지하고) >道義爲之根 >도의위지근 (도의가 이를 뿌리를 삼았도다) >嗟予遘陽九 >차여구양구 (슬프구나, 내가 어지러운 때 만나) >隸也實不力 >예야실불력 (매인 듯 힘쓰지 못한 것이리오?) >楚囚纓其冠 >초수영기관 (남쪽의 갇힌 사람 갓에 끈 매고) >傳車送窮北 >전거송궁북 (수레에 실려 북쪽 끝에 이르러 보니) >鼎鑊甘如飴 >정확감여이 (끓는 솥 달기 엿보다 더하건만) >求之不可得 >구지불가득 (찾아도 얻을 길이 없구나) >陰房闃鬼火 >음방격귀화 (어두운 방에 귀신불만 깜벅거리는데) >春院閟天黑 >춘원비천흑 (봄 동산 하늘은 어둠에 잠기었구나) >牛驥同一皂 >우기동일조 (소와 기린이 한 마굿간에 서고) >鷄栖鳳凰食 >계서봉황식 (닭은 봉황에 깃들여 같이 먹다가) >一朝蒙霧露 >일조몽무로 (하루 아침 안개 이슬 맞고 보면) >分作溝中瘠 >분작구중척 (도랑 속의 뼈다귀 신세 돼버리니) >如此再暑寒 >여차재서한 (이렇게 두 번 더웠다 추운 동안) >百沴自闢易 >백려자벽역 (온갖 요사한 기운 스스로 물러갔구나) >嗟哉沮洳場 >차재저여장 (아아, 슬프구나, 이 진탕 속이) >爲我安樂國 >위아안락국 (나의 즐거운 나라가 되었네) >豈有他繆巧 >기유타무교 (어찌 별다른 잔재주 있어) >陰陽不能賊 >음양불능적 (음양이 도둑질 못한 것일까) >顧此耿耿在 >고차경경재 (돌아보아 이 속에 깜박이는 불빛) >仰視浮雲白 >앙시부운백 (우러러 저기 떠도는 흰 구름) >悠悠我心悲 >유유아심비 (한없는 내 마음 속 슬픔) >蒼天曷有極 >창천갈유극 (푸른 하늘인들 다하랴만은) >哲人日已遠 >철인일이원 (어진 이들 가신 날은 이미 멀어도) >典刑在宿昔 >전형재숙석 (그 본 때는 아직 엊그제로다) >風檐展書讀 >풍첨전서독 (처마 밑에서 책 펴 읽고 나니) >古道照顔色 >고도조안색 (옛 길이 내 낯을 비추는구나) == 기타 == * 오늘날 [[악비]]와 더불어 충절의 표상으로 숭앙받고 있으며, 남송 정권에게 있어 그 양끝에 있었던 이 둘은 남송에게는 실로 과분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를 존중해줬던 송나라이기에 악비와 문천상같은 걸출한 영웅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고 할 수 있겠다. 정작 다른 통일왕조들은 내부가 썩어 자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수민족의 독립의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도리어 한족의 민족영웅을 격하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 때문에 평가가 모호해진 점은 악비와 비슷하다. * 사실 송나라 말기의 주요 [[악당]]으로 꼽히는 인물들은 보통 북송의 [[진회]]나 남송의 [[가사도]] 정도인데, 진회의 경우 악비를 비롯한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어쨌건 송에 대한 충성심만은 나무랄 데가 없었고 재상으로써 저지른 정치적 과오 역시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줄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군사력에서 우위를 가진 유목제국에 가까웠던 금나라에 비해 정주제국 송나라의 우위는 문화/경제력에 있으므로 섣부르게 전면전을 거는 군사적 모험을 하지 말고 지구전으로 국력을 축적하며 상대가 빈틈을 내보이는 기회를 기다리자는 복안 자체는 충분히 합리적이다. 다만 무조건 자기만 맞다고 반대파를 때려잡으면서 유능한 군사지휘관까지 숙청해버렸으니 복안이 맞고 그르고를 떠나 선을 넘었다는 것.) 또한 가사도의 경우도 좀 많이 찌질하고 무능한데다 권력을 잡기 위해 속임수도 아랑곳하지 않던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지는 않았고, 그 능력 역시 재정을 정비하고 부패한 관료나 군인들을 처벌하며 학자들을 등용하였으며, 태학생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등 내정에서는 나름 괜찮은 성과를 낼 정도는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주변인들의 평가 역시 정치적 앙숙이었던 [[문천상]]에게 [[악주 전투]] 당시에 용맹하게 잘 싸웠다는 점은 인정받았다거나, 심지어 적국의 수장인 [[쿠빌라이 칸]]에게 "나도 저런 부하 하나 갖고 싶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강서안무사로 재직 중에는 [[남송]]의 [[명장]] [[맹공]]이 죽기 한 해 전 그의 후임 [[경호제치사]]로 추천받았고, 또한 [[쿠빌라이 칸]]이 가사도로 인해 투항했다고 주장하는 [[남송]]의 항장들 앞에서 가사도를 추켜세웠으며, [[염희헌]]이 악주 전투를 회상하였을 당시 쿠빌라이에게 "폐하께옵서 신료들 앞에서 '나는 어찌하면 가사도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사옵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그리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문약하고 무력한 송나라"라는 역사적 편견때문에 악비나 문천상같은 인물의 영웅적 면모를 두고 "송나라에게는 과분한 인물들이었다"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 송나라의 멸망기를 보면 송말삼걸과 같은 비범한 포스를 보인 히어로도 있고, 왕조가 300년간 우대하고 양성한 사대부의 상당수 및 20만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더이상 승리의 희망조차 갖기 힘든 최후의 전투까지 나라를 버리지 않고 함께한데다 국내의 악역을 손꼽으려 해도 나름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 진회나 가사도정도밖에 내세울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최소한 송나라는 자국 내 인재들의 충성을 받아냈다는 점에서는 최후까지 아쉬움 없는 멸망의 미학을 관철한 셈이다. 다른 중국 왕조의 사례들과 비교해보자. [[춘추전국시대]]나 [[오호십육국]] 시대 같은 분열의 시기야 말할 필요도 없고,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수립했지만 [[조고]]라는 간신으로 인해 고작 3대만에 말아먹은 [[진나라]], 권모술수를 통한 권력 장악에 유능했던만큼 자국을 거덜내고 말아먹는데도 유능했던 [[한나라]]의 [[십상시]], 멀쩡히 조정이 임명한 절도사인 [[안록산]]과 [[사사명]]의 반란으로 거덜나기 시작한 당나라, [[오삼계]]라는 탁월한 배신자를 배출한 [[명나라]]에 비하면 송나라는 멸명의 순간까지 최소한 자국의 중신들에게 배신당하지는 않았다. 항복한 중신들 상당수도 대부분 저항하다가 더 이상 방법이 없고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리고 원의 항복 권고를 받고 나서야 항복했다. * 현대 중국에서 그는 애국주의, 정의, 폭정에 대한 저항의 대중적인 상징이다. 후대에의 대표적인 예로 [[1908년]] 하이펑 현에 있는 문천상의 역사적인 사당에서 [[천중밍]]은 30명 이상의 마을 청년들을 설득하여 국가 혁명을 위한 비밀 지원을 맹세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용모가 준수했으며, 집에 많은 처첩과 악사들을 거느렸고 멱을 감으며 [[장기(보드 게임)|장기]]를 두는 취미를 가졌을만큼 불굴의 충신이라는 이미지와 언뜻 안 어울려 보이는 호화현란한 사생활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임안으로 몽골군이 육박한 와중에도 친구들과 뼈있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실속 없는 엄숙주의를 배격하면서도 공사구분이 대단히 명확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긴 재상이요 충신이라 하여 항상 도도하고 고결한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의 자연스러운 본디 모습은 도리어 이상할 것 없다. 제나라의 명재상 [[관이오|관중]] 역시 제환공 급으로 사치도 누리고 결혼도 3번이나 했다.] * 문천상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명장 [[맹공]]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덕분에 유일하게 그가 존경하면서도 동경하는 인물이 [[맹공]]이었다고 한다. 훗날 의병을 이끌고 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맹공의 묘에 찾아가 잠들어 있던 맹공의 묘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을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왔다. 당신을 생각하면 남송을 끝까지 지킬수 있을 것 같다." * [[조선]]의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문천상이 정말로 완벽한 충신이었다면 왜 원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힌 뒤 [[애산 전투]]의 결과를 들었을 때 자결하지 않고 그 뒤로도 5년을 더 살아있었느냐고 비판했다.[* 실제로 유몽인 본인은 [[광해군]]에게 그리 중용되지 못했음에도 [[인조반정]]을 거부하고 광해군의 충신으로 남아 사형당했다.] * 장각이 중경 지역에서 몽골군과 투쟁을 벌이고 강에 빠져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에 측간에서 자살한 것을 치하하였다.[* 도제치사 장각을 지었다고 한다.] * 문천상에게는 문벽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원나라에 투항하였고 훗날 문천상을 설득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문천상은 그를 별로 질책하지 않았다. 문벽이 투항할 당시에는 형세가 이미 기울어진 판국이라 결사항전 해봤자 백성들만 보복 학살을 당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후사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이 항복한 여문환에게는 그를 역신이라는 말까지 쓰며 강력히 비난했다고 한다.] * 문천상은 두 아들이 일찍 죽자 동생의 세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그들의 후예가 현재 [[장시성]], [[후난성]], [[하이난성]], [[광둥성]], [[푸젠성]], [[홍콩]] 및 해외 지역에서 문씨 가문의 분파를 이었다. 문천상의 사촌동생 문천서(文天瑞)는 문천상이 죽고 몽골의 추적을 피해 오늘날의 [[홍콩]] 인근으로 도주했는데 그의 후예가 홍콩의 오래된 유력 가문 중 하나인 신계 문씨(新界 文氏)가 되었다고 한다. * 문천상의 사당은 중국 각지에 존재하며 대만 [[신베이시]] 솽시구에는 대만에서 유일하게 송말삼걸을 모시는 '삼충묘'도 있다. 그외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도 현지 [[화교]]들이 세운 그의 사당들이 존재한다. == 창작물에서 == * [[코에이]]의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남송측의 핵심 장수로 등장한다. 원조비사에서는 시나리오 3에서 [[강남(중국)|하남]]의 재야장수로 등장하며, 정치력 B 전투력 D 지도력 B 매력 B로 전형적인 책사형 장수로 고려를 선택하여 남송을 정복했을 때 훌륭한 정치고문으로 삼을 수 있다.[* 시나리오 3에서 나오는 이성계의 경우 전투력 A로 핵심 전투 장수라 정치고문으로 쓰기엔 아깝다.] 징기스칸 4같은 경우 몽골측이 남송을 멸망시키면 쿠빌라이와 바얀의 능력치가 전부 +5되어 엄청난 [[먼치킨(클리셰)|먼치킨]]으로 거듭나지만 반대로 남송에서 대도를 빼앗으면 문천상의 모든 능력치가 +5씩 올라가게 된다. (이 때문인지 시나리오 2에서는 정치력 100인 인물이 없고, 가장 정치력이 높은 문천상의 정치력이 '''94'''다.) 덧붙여 시나리오 시작부터 충성도가 100인 유일한 인물. ai가 남송을 맡을 경우 수명 짧은 [[송도종]]이 일찍 죽으면 보통 능력치가 제일 좋은 문천상이 남송의 황제가 된다(...) * [[김용(1924)|김용]]의 소설 [[의천도룡기]]에서 [[장삼봉]]이 [[조민(사조삼부곡)|조민]]이 [[무당파]]에 쳐들어왔을 때 그의 싯구를 읊으면서 젊었을 때 그를 흠모하여 만나고 싶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송나라/인물]][[분류:1236년 출생]][[분류:1283년 사망]][[분류:지안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