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미일수호통상조약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include(틀:미일관계)] ||<-2> [[파일:미국 국기(1858-1859).svg|width=100%]] || [[파일:에도 막부 국기.svg|width=100%]] || ||<-2> '''[[미국|{{{#fff 미합중국}}}]]''' || '''[[에도 막부|{{{#fff 에도 막부}}}]]'''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9386e, #000 40%, #000 60%, #b0313f)" '''{{{#fff 미일수호통상조약 | 美日修好通商條約}}}''' }}} || ||<-3> '''{{{#FFFFFF 언어별 공식 명칭}}}''' || ||<-1> '''{{{#ffffff 영어}}}''' ||<-2>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United States and Japan || || '''[[일본어|{{{#fff 일본어}}}]]''' ||<-2> [ruby(日米修好通商条約, ruby=にちべいしゅうこうつうしょうじょうやく)]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양 국가들은 증기 통신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The nations of the West hope that by means of steam communications all the world will become as one family. >---- > '''타운센드 해리스, [[http://archive.is/7Ex4P|홋타 마사요시와의 대담, 1857년 12월 12일]]'''[* 해당 인용구는 [[문명 5/기술]]에서 증기기관 기술의 인용구로 쓰이기도 하였다.] 1858년 7월 29일 일본 [[에도 막부]]가 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쿠로후네 사건]]으로 맺은 불평등조약이며, 안세이(안정) 5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여 근대화를 시작했다. 이후 일본도 한반도로 들어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운요호 사건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과정과 유사하다. == 내용 ==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하코다테]], [[니가타]], [[요코하마]], 효고(현재 [[고베]]), [[나가사키]] 등 5개항의 개항 * 무역에 대한 일본 관원의 불간섭[* 이를 통해 무역의 전면 자유화를 이끌어낸다.] * 일본 내에서 미국의 [[치외법권|영사 재판권]] 인정 * 협정 관세 원칙 막부 로주수좌 아베 마사히로와 그 뒤를 이은 홋타 마사요시는 막부 내부 및 여러 지방 번주들과의 논의를 거친 끝에 조약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조정 평공가 세력이 막부와 인척관계를 맺어 막부를 지지한 고셋케 세력을 누르고 [[고메이 덴노]]를 설득, 덴노는 칙허 불허 입장을 밝혔다. 홋타 마사요시가 천황의 칙허를 받기 위해 교토로 상경해 조정을 설득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사이 [[이이 나오스케]]가 이끄는 대 조정 강경파인 난키파가 막부 권력을 장악, 조정을 무시하고 조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을 맺음은 [[존왕양이]] 사상을 내건 막부 타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안세이의 대옥사]], [[사쿠라다문밖의 변]] 등을 거쳐 막부로부터 조정 및 웅번들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 결국 막부가 몰락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99년 7월 17일 미일통상항해조약이 시행되며 효력을 잃었다. 일본 교과서에서도 [[불평등조약]]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실상은 계약 자체는 당시 세계 정세에서도 딱히 불평등한 요소는 없었다. 불평등해지는 것은 조약을 체결하고 8년 후인 1866년에 관세 비율의 조항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부터 인데, 그 원인은 [[시모노세키 전쟁]]처럼 [[존황양이]]파 세력이 벌인 양이 운동으로 외국 선박을 공격하고 외국인에 대한 테러 때문에 막부가 그 책임을 지고, 미국에게 유리하게 관세 비율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금과 은의 시세차이로 일본의 금이 해외로 대량 빠져나가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분류:1858년 협정]][[분류:에도 시대]][[분류:내전 시대]][[분류:미일관계]]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