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보이보디나 공국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현재 [[세르비아]]의 지역에 대해서는 [[보이보디나]] 문서를 참고할 것. [include(틀:세르비아의 역사)] [include(틀:오스트리아의 역사)] [include(틀:오스트리아 제국 구성 제후국)] ||<-3> {{{+1 '''세르비아-티미슈 공국[* 공국에 해당하는 표기는 슬라브어권 고유의 귀족 직함인 [[보이보드]] 및 반(ban)으로 표기했다.]'''}}}[br]{{{-1 '''보이보트샤프트 제르비엔 운트 테메저 바나트, Woiwodschaft Serbien und Temeser Banat'''}}},,([[독일어|{{{#d53439 독일어}}}]]),,[br]{{{-1 '''보이보드스트보 스르비야 이 타미슈키 바나트, Vojvodstvo Srbija i Tamiški Banat'''}}},,([[세르보크로아트어|{{{#d53439 세르보크로아트어}}}]]),,[br]{{{-1 '''보이보디나 서르베아스커 쉬 바나툴 티미샨, Voivodina sârbească şi Banatul timişan'''}}},,([[루마니아어|{{{#d53439 루마니아어}}}]]),,[br]{{{-1 '''세르브 버이더샤그 이시 테메시 반샤그, Szerb Vajdaság és Temesi Bánság'''}}},,([[헝가리어|{{{#d53439 헝가리어}}}]]),, || ||<-2><#fff,#191919> [[파일:보이보디나 공국 국기.svg|width=100%]] || [[파일:보이보디나 공국 국장.svg|width=55%]] || ||<-2><#d53439> {{{#fff '''국기'''}}} ||<#d53439> {{{#fff '''국장'''}}} || ||<-3><#ffcc33> '''[[1849년|{{{#000 1849년}}}]] ~ [[1860년|{{{#000 1860년}}}]]''' || ||<-3><#fff,#191919> [[파일:Woiwodschaft Serbien und Temeser Banat(kaiserlich und königlich).png|width=300]] || ||<#ffcc33> {{{#000 '''위치'''}}} ||<-2>중동부 유럽 [[보이보디나]] || ||<#ffcc33> [[수도(행정구역)|{{{#000 '''수도'''}}}]] ||<-2>[[티미쇼아라|테메슈바르]] || ||<#ffcc33> {{{#000 '''정치 체제'''}}} ||<-2>[[전제군주제]] || ||<#ffcc33> {{{#000 '''국가 원수'''}}} ||<-2>[[공작(작위)|공작]] || ||<#ffcc33> [[공용어|{{{#000 '''공용어'''}}}]] ||<-2>[[독일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 ||<#ffcc33> {{{#000 '''역사'''}}} ||<-2>1849년 공국으로 승격[br] 1860년 자치권을 잃어버리고 공국 폐지 후 [[헝가리 왕국]]에 편입 || ||<#ffcc33> {{{#000 '''통화'''}}} ||<-2>굴덴 || ||<#ffcc33> {{{#000 '''성립 이전'''}}} ||<-2>[[헝가리 왕국#s-2.3|헝가리 왕국]] || ||<#ffcc33> {{{#000 '''해체 이후'''}}} ||<-2>[[헝가리 왕국#s-2.3|헝가리 왕국]] || [목차] [clearfix] == 개요 == 19세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세르비아인|세르비아계 주민]] 사이에서도 민족주의 의식이 확산되었고, 근대 국가 성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848년에는 반동적인 [[빈 체제]]에 항거하여 빈과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헝가리인]]이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은 [[도나우 강]] 남쪽 본국에서 건너온 의용병들의 지원에 힘입어,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다수 거주 지역에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공국[* 위에 상술했듯이 보이보디나 자체가 [[세르비아어]]로 '공국'에 해당하는 뜻이니 [[겹말]]인 셈이지만, 보이보디나를 일종의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보이보디나 공국이라 표현했다.]'의 성립을 선포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은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가]] [[카이저|황제]]에게 협력하여 헝가리인의 독립 운동 진압을 돕는 대신 [[헝가리 왕국]]에서 분리 독립하여, 합스부르크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공국을 공인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기원이 되었다. [[파일:보이보디나_공국_1848.png|width=430]] 1848년 보이보디나 공국의 영역[*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강역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1848년 헝가리 혁명]]은 이듬해인 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내 [[루마니아인|소]][[슬로바키아인|수]][[세르비아인|민족]]들의 저항과 결정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 왕국 통치권을 회복했다. 한편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보이보디나에 이웃한 [[루마니아인|루마니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바나트 지역과 함께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된 자치지역인 세르비아 보이보디나-바나트가 성립 되었다. [[파일:오스트리아제국_1848.png]] 보이보디나-바나트 및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들[* 지도의 20번이 보이보디나-바나트다. 16번이 헝가리 왕국, 18번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이다.] 보이보디나-바나트의 성립은 당연히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과 함께 헝가리인을 견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보이보디나-바나트는 이후 헝가리 왕국 내 소수민족의 [[토사구팽|이용가치가 없어지면서 소멸할 운명이었다.]] 자치지역이 성립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독일 통일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패배하였다.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 경영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헝가리 왕국과 [[대타협]]을 맺음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중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는 헝가리 왕국내 소수민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이중제국의 성립으로 보이보디나-바나트와 에르데이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에 따라,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종교와 문화, 정치참여에서 전방위적인 탄압을 당했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세월이 지난 1914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에게는 다시 한번 헝가리로부터 [[제1차 세계 대전|독립의 기회가]] [[민족자결주의|찾아왔다.]] 전쟁 말, 종전을 1달여 앞둔 1918년 10월 경에 이미 전쟁 수행에 한계에 이른 이중 제국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슬로베니아인]]은 이중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로의 합류를 선언했고, [[협상국]]의 도움을 받아 재건된 세르비아군은 헝가리 남부로 진격하여 보이보디나를 점령했다. 이후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이보디나 일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으로 갈라져 편입되었다. [[분류:오스트리아 제국 구성 제후국]][[분류:헝가리의 역사]][[분류:공국(공작)]][[분류:19세기 멸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