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사보이아 공국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이탈리아의 역사)] ---- ||<-3> {{{#fff {{{+1 '''사보이아 공국'''}}}[br]'''Ducato di Savoia'''}}} || ||<-2> [[파일:사보이아 공국 국기.svg|width=100%]] || [[파일:사보이아 공국 문장.svg|width=60%]] || ||<-2> {{{#fff '''국기'''}}} || {{{#fff '''국장'''}}} || ||<-3> '''[[F.E.R.T.|FERT, FERT, FERT]][* [[https://en.m.wikipedia.org/wiki/FERT|여러가지 의미]]가 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 ||<-3> '''{{{#fff 상징}}}''' || || '''{{{#fff 국가}}}''' ||<-2>[[사보이아 행진곡]][br](Marzo di Savoia) || ||<-3> {{{#fff '''위치'''}}}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DuchyofSavoy1600.png|width=100%]]}}} || ||<-3> [[1416년|{{{#fff '''1416년'''}}}]] {{{#fff '''~'''}}} [[1847년|{{{#fff '''1847년'''}}}]] || ||<-3> {{{#fff '''역사'''}}} || ||<-2> {{{#fff '''성립 이전'''}}} || {{{#fff '''왕정 선언 이후'''}}} || ||<-2> [[사보이아 백국|{{{#fff '''사보이아 백국'''}}}]] || [[사르데냐 왕국|'''{{{#fff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 ||<-3> '''지리''' || || '''위치''' ||<-2>[[이탈리아]] 북서부 || || '''수도''' ||<-2>[[샹베리]](1416~1563)[br][[토리노]](1563~1798, 1814~1847)[br][[칼리아리]](1798~1814) || ||<-3> '''인문환경''' || || '''언어''' ||<-2>[[라틴어]][* 1561년까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 || '''종교''' ||<-2>[[로마 가톨릭]]|| || '''민족''' ||<-2>[[이탈리아인]] || ||<-3> '''정치''' || || '''정치체제''' ||<-2>[[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2>[[공작(작위)|공작]] || || '''국성''' ||<-2>[[사보이아 가문]] || || '''주요 공작''' ||<-2>[[아메데오 8세]](1416~1440)[br][[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553~1580)[br][[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1580~1630)[br][[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675~1730) || || '''{{{#fff 언어별 명칭}}}''' || ||<:><^|1>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이탈리아어]] ||Ducato di Savoia || || [[라틴어]] ||Ducatus Sabaudiae || || [[피에몬테어]] ||Ducà 'd Savòja || || [[프랑코프로방스어]] ||Ducato di Savouè || || [[프랑스어]] ||Duché de Savoie || || [[독일어]] ||Herzogtum Savoyen || || [[스페인어]] ||Ducado de Saboya || || [[영어]] ||Duchy of Savoy || || [[에스페란토]] ||Duklando Savojo || || [[중국어]] ||萨伏依公国 || || [[일본어]] ||サヴォイア公国 ||}}}}}}}}}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남동부 [[사부아]]와 [[이탈리아 반도]] 북서부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에 위치했던 [[공국]]이다.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와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및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간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여 [[영토]]를 넓혔다. 훗날 [[사보이아 가문]]이 [[사르데냐 왕국]]을 선언하면서 본거지였던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clearfix] == 역사 == [[대립교황]] 펠릭스 5세로도 유명한 [[아메데오 8세]](Amedeo VIII di Savoia)가 14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공작(작위)|공작]]으로 서임되면서 [[사보이아 백국]]은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사보이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왕국]]이 아닌 라인강 상류 관구(Oberrheinischer Reichskreis)에 속했으며 제국의회에 표결을 할 권리가 부여되었으나 이 권한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메데오 8세는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사보이아 가문의 마지막 방계였던 피에몬테의 루도비코[* Ludovico di Savoia-Acaia 1364~1418. 아메데오 8세에게는 매부가 되며, [[토리노 대학교]]의 설립자이다.]가 사망하자 [[피에몬테]]를 사보이아 공국으로 재합병시킨 후 1424년 피에몬테 공후국을 창설하여 가문의 계승자에게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을 명예 칭호로 주어 관리를 맡겼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칙령을 발표하여 행정을 개혁하였고 자코모 자케리오(Giacomo Jaquerio)와 같은 예술가를 초빙하여 문화 부흥을 장려하였다. 하지만 아메데오 8세의 무기력한 후계자 [[루도비코(사보이아)|루도비코]]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메데오 9세]]는 [[베르첼리]](Vercelli)의 빈민들에게 복지를 베풀고 교회에만 헌신한 나머지 정치적으로는 부인인 프랑스의 욜랑드에게 휘둘려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필리베르토 1세]], [[카를로 1세]],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 같은 어린 공작들이 연달아 즉위하고 일찍 사망하면서 사보이아 공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1496년,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가 불과 7세의 어린 나이에 침대에서 떨어져 사망하자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의 종조부 [[필리포 2세]]가 공국을 승계받았다. 하지만 필리포 2세는 법적 계승자가 아닌 가장 가까운 남계 후손의 자격으로 상속한 터라 정통성을 두고 여러 세력이 시비를 걸어와 정치적인 위기는 계속되었다. 정통성 시비를 차단하기 위하여 필리포 2세는 죽기 전 후계자 [[필리베르토 2세]]를 카를로 1세의 딸 사보이아의 이올란다와 결혼시켜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이올란다는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일찍 사망했다. 그 사이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웃의 프랑스는 [[루이 12세]]가 [[나폴리 왕국]]과 [[밀라노 공국]]을 거의 정복하였고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에게 사방으로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다. 1504년, 필리베르토 2세가 사망하자 이복 동생이 [[카를로 2세]]로 즉위했으나 계속된 정치적인 혼란을 수습하기에는 유약한 통치자였다. 밀라노 공국을 영구적으로 합병할 기회를 노리던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다시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고, 1536년에 사보이아 공국을 침공하여 [[밀라노]] 공략의 전초 기지로 삼으려 했다. 수도 [[샹베리]]와 핵심도시 [[토리노]]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카를로 2세는 베르첼리에서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점령당한 사보이아 공국 영토에는 프랑스 행정관들이 파견되어 프랑스의 간접 통치가 실시되었다. 사실상 공국을 빼앗긴 카를로 2세는 [[발레다오스타]], [[니차]], [[쿠네오]], [[베르첼리]]만 유지한 채 겨우 연명하다 1553년, 베르첼리에서 사망했다. 사보이아 공국은 카를로 2세의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물려받았으나, 프랑스가 사보이아 공국을 점령한 이상 영지 없이 유명무실한 작위만 달고 있는 신세에 불과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그는 사촌[*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황후 [[포르투갈의 이자벨]]은 친자매 사이였다.]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하여 생캉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1559년 [[이탈리아 전쟁]]을 끝낸 카토캉브레지 조약에 따라 사보이아 공국을 돌려받았다. 공국을 돌려받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생존을 위해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구사했으며, 그 일환으로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와의 사이를 돈독히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믿을 수 없는 이웃이라고 생각하여 1563년, 프랑스의 침입에 노출된 샹베리에서 [[알프스 산맥]] 뒤편에 있어 비교적 방어에 용이한 토리노로 [[천도]]했다. 그리고 토리노 천도 2년 전인 1561년에 공국의 [[공용어]]도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면서 지금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공국이 [[이탈리아/역사|이탈리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뒤를 이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프랑스 왕국|프랑스]],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과 번갈아 동맹을 맺어가며 [[몬페라토 변경백국]], [[제노바 공화국]]을 상대로 확장을 하려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살루초 변경백국은 손에 넣었으나 이 과정에서 과거 조상들이 손에 넣었던 사부아 인근의 [[앵(프랑스)|브레스]](Bress) 지역을 프랑스에게 양도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팽창 정책은 프랑스와 스페인 관계에서 불안정성을 불러왔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치세에는 [[30년 전쟁]]의 연장으로 프랑스와 스페인군이 사보이아 공국 영내에서 교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프랑스는 론 강 유역의 토리노와 이탈리아 반도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피네롤로]]를 빼앗았고, 사보이아 공국은 이곳을 되찾기 위해 수 십년을 허비했다. [[프란체스코 자친토]]는 어린 나이에 열병에 걸려 일찍 사망했고, 동생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역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 때문에 어머니인 [[크리스틴 마리|프랑스의 크리스틴 마리]]가 섭정을 했으나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대해질 것을 우려한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숙부 마우리치오 추기경과 사보이아-카리냐노 공작 토마소 프란체스코[* 훗날 [[카를로 펠리체]]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사르데냐 왕으로 즉위한 [[카를로 알베르토]]의 조상이다. 더불어 [[사부아 공자 외젠]]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가 피에몬테 내전을 일으켰다. 이 내전은 1642년에야 끝이 났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1655년 [[발도파]]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니스|니차]](Nizza)를 발전시키고 알프스 산맥을 통해 프랑스로 갈 수 있는 도로를 건설하여 상공업 진흥에 힘썼다.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의 편을 들어 참전했으나 [[사부아 공자 외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사부아 공자 외젠은 6촌 관계였다.]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군대가 밀라노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 이에 [[프랑스군]]이 니차를 함락시켰고 이어서 토리노를 포위하였지만, [[토리노 공방전|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끝났고, 사보이아 공국은 [[시칠리아 왕국]]을 보상으로 받았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을 자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를 탈환하기는 했으나 [[카를 6세]]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시칠리아를 반강제적으로 내주고 대신 [[사르데냐]]를 얻었다. 이후 사보이아 왕가는 사르데냐 왕을 칭하였다. 이후 사보이아 공국은 1847년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사보이아와 사르데냐를 하나의 영토로 완전히 통합시킬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편의상 [[사르데냐 왕국]]으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많다. == 역대 군주 == [include(틀:역대 사보이아 공작)] [[분류:가톨릭 국가]][[분류: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분류:이탈리아의 역사]][[분류:공국(공작)]][[분류:프랑스의 역사]][[분류:프랑스-이탈리아 관계]][[분류:19세기 멸망]][[분류:사보이아 가문]][[분류:사보이아 공작]]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