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서광범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갑신정변)] ---- || '''{{{#191919,#ddd 서광범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김홍집 내각)]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법부대신)]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학부대신)] ---- [include(틀:급진개화파)] ---- [include(틀:개화당)] ----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서광범.png|width=100%]]}}} || || '''이름''' ||'''서광범(徐光範)''' || || '''미국식 이름''' ||케네스 서 (Kenneth Suh)[* 초기엔 케네디 서(Kennedy Suh)였다.] || ||<|2> '''출생''' ||[[1859년]] [[11월 8일]] || ||[[평안도]] [[평양시|평양부]] || ||<|2> '''사망''' ||[[1897년]] [[7월 17일]] (37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미국)][*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서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 || '''본관''' ||[[대구 서씨]][*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5세 광(光) 항렬.] || || '''자''' ||서구(敍九) || || '''아호''' ||위산(緯山) || || '''시호''' ||익헌공(翼獻公)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 [[개화파]] 사상가. == 생애 == === 갑신정변 이전 === 1859년 11월 8일 평안도 평양부 평안감사 사택에서 이조참판을 지냈던 아버지 서상익(徐相翊, 1835. 5. 6 ~ 1892. 12. 25)과 생원 박제완(朴齊完)의 딸인 어머니 [[반남 박씨]](1834 ~ 1865. 8. 25)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정조(조선)|정조]] 때의 [[문관]]으로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정약용]]의 앞날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인물이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의 아버지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 1656. 3. 24 ~ 1719. 8. 3)의 [[현손]]이다. --생물학적으론 [[서용보]]의 동생인 서응보(徐應輔)가 서광범의 친증조부이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 소년기에 [[안동 김씨]] 김병지(金炳地, 1830. 2. 19 ~ 1881. 10. 20)[* 세도가였던 [[김조순]]의 손자이자 김조순의 차남 김원근(金元根, 1786. 12. 29 ~ 1832. 12. 27)의 장남.]의 장녀와 [[결혼]]했으나 부인이 [[요절]]하면서 [[광산 김씨]]와 [[재혼]]하였다. 첫 부인이 안동 김씨였던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김옥균]][* 김옥균과 서광범의 첫 부인 안동 김씨는 22촌 지간이다. 김옥균은 [[김상용]]의 10대손이고 김병지는 [[김상헌(조선)|김상헌]]의 9대손이다.]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가 [[친척]]인 [[박규수]]의 집을 함께 출입하게 되면서 동시에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0년([[고종(대한제국)|고종]] 17년)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 3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0_014116|급제해]]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홍문관 부응교, [[세자]] 시강원 사서·세자 시강원 사서 겸 필선 남학 교수(南學敎授), 부응교 등을 지냈다. 1882년 4월 김옥균을 수행하여 일본 [[도쿄시|도쿄]]로 건너갔는데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7월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으며 8월에 참찬관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9월에는 임오군란 뒤 일본 정부에 대한 [[배상금]] 청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자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 때 박영효의 권고로 수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잔류해 별도의 시찰단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함께 남아 일본을 돌아보고 1883년 3월에 귀국하였다. 1883년 규장각대교(待敎)에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을 겸하였다. [[보빙사]](報聘使)가 최초로 [[미국]]에 파견될 때 보빙전권대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미국에 갔고 [[뉴욕시|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와도 면담하였다. 이후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884년 1년여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당연하게도 [[서양]]의 선진 문물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여러 차례의 외유를 통해 개화와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84년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와 내무참의(內務參議), 8월에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 병조참의,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 갑신정변 === 1884년 말 서광범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겨우 3일만에 실패했고 서광범은 주동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과 함께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와 변복하고 [[인천광역시|인천]]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 집에 은신하였다가 겨우 일본으로 탈출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시대의 한계상 갑신정변 실패 후 서광범의 가족은 [[연좌제]]로 [[몰살]]당했다. 아버지 서상익은 한성부 [[감옥]]에 투옥되어 8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굶어 죽었고 아내 역시 10년간 투옥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처형당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전제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당시 조선에서는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시 심한 경우 그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거나 [[항렬]]자까지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균(均)'자 항렬은 '규(圭)', 홍영식([[남양 홍씨]])의 '식(植)'자 항렬은 '표(杓)'[* 그러므로 홍영식과 100년 뒤에 태어난 [[홍준표]]는 서로 같은 항렬이다.], 서광범([[대구 서씨]])의 '광(光)'자 항렬은 '병(丙)', 서재필(대구 서씨)의 '재(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게 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그 뒤에도 조선 조정에서는 서광범을 죽이려고 일본에 [[암살]]자를 파견했고 조선 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기]]감을 느낀 서광범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1885년 5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은 [[안전]]했는데 뉴욕, [[뉴저지]] 주, [[워싱턴 D.C.|워싱턴]] 등을 전전해 주로 미국 동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사탕수수]] 농장, [[커피]] 농장, [[오렌지]] 농장에서 잡역부로 생계를 유지했다.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취득 당시에 법원에서 행한 선서에서 ‘이후 [[고종(대한제국)|조선 국왕]]에 대한 충성을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기함’을 서약했다. [[미국 시민권#s-3|미국 시민권 선서]] 참조. 서재필도 비슷한 시기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서광범과 비슷한 선서를 했을 것이다.] 미국 연방 정부의 교육국 인종학과에서 [[번역]]관 겸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미국 정부 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 교육론(Education in Korea)>과 <조선 민담(Korean Stories)>을 게재해 발표하였다. 1894년 인사 개편으로 해고되어 교육국의 사환을 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이 때 그의 명성을 알아본 일본인 개화 인사의 주선으로 워싱턴에 있는 [[신지학 협회|신지학회]](神智學會)와도 관련을 맺어 신지학회의 지역 지부 건물의 관리인으로 재직하였다. === 갑오개혁 === 1894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와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에 법무대신으로 참여하였다. 2차 [[갑오개혁]]과 1895년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특히 [[재판(법률)|재판]] 제도 및 형벌의 개혁, 근대적 법학 [[교육]] 실시 등을 제안하였다.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조선)|김윤식]], 김홍집과 함께 [[단발령]]을 도입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 당시에 재판장을 맡기도 했으며 이 재판에서 그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사실상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를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린건 [[선구자]]적인 면모가 드러난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는 참으로 불합리적이다. 다만 [[쉴드]]를 굳이 쳐주자면 조선은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 국가이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저항권]]이란 [[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있거나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국민]]에게 인정되는 권리인데 당연히 조선시대에는 그런 개념 따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전제군주제 자체가 이미 민주적 기본 질서를 침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 사실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도 후세에 붙여진 것 뿐이고 당시에는 수많은 [[반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즉, 당시 [[법]] 체계하에서는 전봉준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는 것.[* [[5.18 민주화운동]]은 반란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는데 5.18 민주화운동의 경우에는 당시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항권 행사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반란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받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19세기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차원이 다른데, 이 시기는 [[민주주의]]가 등장했던 서구권에서조차 [[헤이마켓 사건]]이나 [[성 피털루 들판의 학살]]같은 공권력에 의한 폭동적 진압이 버젓이 행해지던 때였다.] [[역사]]를 실증학적이 아닌 해석학적으로 보자면 근대적 농민 운동이라는 타이틀 역시 현재에는 통용될 수 있는 말이기는 하다. === 도미와 최후 === 1895년 10월 제4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에 기용되었다가 친러, 친일 양쪽의 이해 관계에 의해 12월 11일 주미 특명전권공사로 일종의 좌천이 되었다. 이 때 미국의 [[로어노크 칼리지]]는 [[김규식]]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으므로 그는 특별히 [[로어노크 칼리지]]의 [[졸업식]] 행사에 참석했고 대학에서도 주미국 조선 공사인 그에게 명예 법학 [[석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되지 못했고 조선으로 귀국하지도 못했다. 1896년 6월 20일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에 임명되지만 돌아오지 않고 다시 미국 망명 생활을 시작했는데 시민권이 있으니 망명이라기보다는 걍 눌러앉았다고 봐야 한다. 1897년 7월 17일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고 [[유골]]은 1898년 봄 본국으로 송환되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리 비정동(碑井洞) 산31(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89-10) 야산에 [[유교]]식으로 다시 장사지냈다. 현재는 해당 위치에 서울 강남 개발을 통해 음식점이 들어서있으며 묘는 몇 번의 이장 끝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198 야산에 안장되었다. == 여담 == * 비교적 일찍 요절해서 그런지 역사책에서는 [[갑신정변]] 부분에서만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지만 알고 보면 현대에도 꽤나 영향력을 끼친 사람인데 조선에서 최초인 1881년부터 [[양복]]을 입은 사람이며 국내 최초의 [[성경]] 번역자이다. *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당시 [[유럽]], [[북아메리카|북미]], [[인도]] 등지에서 유행하던 신흥 [[종교]]인 [[신지학 협회]]에 귀의했다. * 집안배경이 화려하다. 7대조가 [[영조]]의 장인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이고, 상술했듯 증조부가 영의정 서용보였다. 어머니 반남 박씨는 [[순조]]의 외삼촌인 박종보의 증손녀다. 매형인 홍순형은 [[헌종(조선)|헌종]]의 계비 [[효정왕후]]의 조카였고, 매제 조한국은 [[흥선대원군]]의 외손자였다. 갑신정변 때 같이 거사에 가담했던 [[서재필]]은 서종제와 서종제의 아들 서명백(徐命伯)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먼 친척(13촌 조카)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상술한 것 처럼 가문 [[항렬]]자가 갈려버렸는데, 서재필이 서광범보다 한 항렬 아래라서 두 항렬자가 연속으로 갈렸다.] == 대중매체에서 ==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백윤식|백윤식]]이 연기했다. *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박용진(동명이인)|박용진]]이 연기했다. 개화파의 행동대장으로 나오며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군이 처들어오자 직접 칼을 들고 무쌍을 찍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주] [[분류:급진개화파]][[분류:조선의 문관]][[분류:김홍집 내각]][[분류:1859년 출생]][[분류:1897년 사망]][[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대구 서씨]][[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인물]][[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보빙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