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서상환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 {{{#fff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제1공화국의 국무위원)] ---- [include(틀:역대 검찰총장)] ---- [include(틀:역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764 0%, #003764 20%, #003764 80%, #003764)" '''[[법무부장관|{{{#ffffff 대한민국 제6대 법무부 장관}}}]][br]{{{#ffffff {{{+1 서상환}}}[br]徐相懽[* [[懽]](기뻐할 환)의 [[이체자]]인 [[歡]](기쁠 환)으로 표기한 [[https://www.moj.go.kr/minister/2090/subview.do?enc=Zm5jdDF8QEB8JTJGcHJvZmwlMkZtaW5pc3RlciUyRjclMkYxNTAlMkZhcnRjbFZpZXcuZG8lM0ZwYWdlJTNEOCUyNnNyY2hDb2x1bW4lM0QlMjZzcmNoV3JkJTNEJTI2|자료]]도 있다.]}}}'''}}}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상환.jpg|width=100%]]}}} || ||<|2> '''출생''' ||[[1888년]][* [[http://db.history.go.kr/id/im_107_20045|1887년생]]이라고도 한다.] [[9월 24일]] || ||[[경상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현]] 춘원면 대곡리[br](현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 [[http://db.history.go.kr/id/hd_007r_0020_0040|1919년 조선국권회복단 관련 신문조서]]] || ||<|2> '''사망''' ||[[1968년]] [[5월 25일]] (향년 79세) || ||[[부산시]] [[남부민동]] 자택[br](현 [[부산광역시]] [[서구(부산)|서구]] [[남부민동]]) || || '''묘소''' ||[[경상남도]] [[통영시]] [[인평동(통영)|인평동]] || || '''본관''' ||[[대구 서씨]][*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4세 상(相) 항렬.] || || '''호''' ||면산(勉山) || ||<|6> '''재임기간''' ||초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 ||[[1948년]] ~ [[1950년]] || ||제3대 [[대검찰청]] [[검찰총장]] || ||[[1950년]] [[6월 22일]] ~ [[1952년]] [[3월 5일]] || ||제6대 [[법무부 장관]] || ||[[1952년]] [[3월 5일]] ~ [[1954년]] [[6월 29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학력''' ||[[니혼대학]] 전문부 {{{-2 ([[법학과|법률과]] / 졸업)}}} || || '''경력''' ||경상남도 군정청 고문[br]경상남도 내무국장[br]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br]제3대 대검찰청 검찰총장[br]제6대 법무부 장관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법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의 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 5. 13 ~ 1959. 2. 18.) 준장과 [[서정화(1933)]] 전 내무부 장관 형제는 그의 종손자(從孫子)이며, [[서정귀]] 전 국회의원은 그의 재종손(再從孫)이다. [[서상호(1888)|서상호]] 전 국회의원은 그의 4촌 형이다. 독립유공자 [[박중한]]은 그의 손아랫처남이다. == 생애 == 서상환은 1888년 9월 24일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 대곡리(현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에서 아버지 서인순(徐璘淳, 1835. 4. 17 ~ 1899. 11. 12)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밀양 박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인 [[제주 고씨|장흥 고씨]](1833 ~ 1886. 5. 3) 고화진(高華鎭)의 딸은 슬하에 형 서상관(徐相灌, 1874. 1. 2 ~ 1923. 12. 22)을 둔 뒤 별세했다.] 아버지 서인순은 1883년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종9품)을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20_08A_01A_00720|역임했다]]. 이후 [[통영시|용남군]] 동면 서부동(현 [[통영시]] [[문화동(통영)|문화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6세까지 집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918년 7월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법률과]]를 [[http://db.history.go.kr/id/hd_007r_0020_0040|졸업했다]]. 그는 [[통영시|통영군]] 지역의 혁신 유림으로, 1915년 음력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 [[서상일]]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했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곧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해 3월 17일 박종환(朴鍾煥)의 집에서 김영중(金永仲), 유금룡(兪今龍), 공상로(孔庠魯), 김시조(金時朝), 이종준(李鍾俊)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경남 일대에서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33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고등법원에 이송되었다]]. 그 뒤 고초를 겪다가 상고 끝에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면소]]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42&evntId=0034980211&evntdowngbn=Y&indpnId=000002539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방면되었다]]. 1925년 고향 통영군에서 허기엽(許基燁)[* [[일제강점기]] 때 통영경찰서 고등계 형사로 6년 간 근무했고, 그 뒤 경상남도 의원 및 통영읍회 의원을 각각 한 차례씩 역임했다.[[http://db.history.go.kr/id/an_061_0120|#]]]과 [[박종한]], 박종환, 김영중 등과 함께 남선해산물주식회사(南鮮海産物株式會社)를 경영하는 데에 [[http://db.history.go.kr/id/an_061_0150|참여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道評議員)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 교육이 불필요하며 조선어의 통역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박봉삼]] 등 10여 명이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개최했다가 김기정의 고소로 그해 5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덕윤]], 황봉석(黃奉石), 이태원(李泰源) 등 35명의 인사들은 5월 10일 모임을 갖고 구금 인사들에 대한 금전 모집,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 개최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를 막자, 황덕윤, 황봉석 등은 5월 13일에 다시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매를 인쇄해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 서상환은 여기에 호응해 시위에 가담했고, 수천 명의 군중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 파괴하고 구속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선두에서 앞장섰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또다시 체포된 그는 1927년 6월 5일 마산지방법원 충무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마산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62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588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이송되었다]]. 그 뒤 1년 반 동안 고초를 겪다가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2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543&evntId=0034985015&evntdowngbn=Y&indpnId=000001649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고]], 같은 달 20일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96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371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상고가 취하되어]] 곧 출옥하였다. 1934년 일본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귀국 후 1936년 1월 21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http://db.history.go.kr/id/gb_1936_01_30_a27120_00250|변호사 명부 등록을 거쳐]] 개인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8.15 광복]] 후 [[미군정기]]에 [[경상남도]] 군정청 고문, 경상남도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고, 1950년 6월부터 1952년 3월까지 [[대검찰청]]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검찰총장 재임 시절, 1951년 1월 1,901명에 대해 [[특별사면]], 1,259명에 대해 특별감형을 실시했으며, 1951년 7월 19일 국내재산 도피방지법 시행령을 제정하고, 1951년 9월 8일 [[국가배상법]]을 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1952년 3월부터 1954년 6월까지 제6대 [[법무부 장관]]을 [[https://www.moj.go.kr/minister/2090/subview.do?enc=Zm5jdDF8QEB8JTJGcHJvZmwlMkZtaW5pc3RlciUyRjclMkYxNTAlMkZhcnRjbFZpZXcuZG8lM0ZwYWdlJTNEOCUyNnNyY2hDb2x1bW4lM0QlMjZzcmNoV3JkJTNEJTI2|역임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8년 5월 25일 부산시 남부민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8052500329207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05-25&officeId=00032&pageNo=7&printNo=6962&publishType=00020|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서상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후손 == * 부인 [[밀양 박씨]](1890 ~ 1965. 4. 11) 박순일(朴順日)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외아들]] 서병태(徐丙太, 1908. 6. 9 ~ 1928. 3. 9)를 두었으나, 서병태는 결혼도 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조카 서병두(徐炳斗, 1899. 8. 10 ~ 1961. 2. 9)[* 창씨명은 오오야마 헤이토(大山炳斗), 족보명은 서병두(徐丙斗). 형 서상관의 아들.]의 막내 아들인 서정신을 봉사손으로 입양했다. * 손자 혁산(赫山) 서정신(徐廷信, 1940. 8. 8 ~ 2016. 3. 14)은 [[부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법무부차관]], [[대검찰청]] 차장검사,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했다. * 장증손자 서창민(徐昌民, 1968. 2. 15 ~ )[* 족보명 서창석(徐昌錫).]은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SBS]] 아나운서 공채 3기로 합격하여 활동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구 서씨]][[분류:통영시 출신 인물]][[분류:1888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검사장]][[분류:검찰총장]][[분류:법무부 장관]][[분류:니혼대학 출신]][[분류:이승만 정부/인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