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신성 로마 제국)] [[독일어]]: [[제국의회|Reichstag]] [[라틴어]]: Comitium Imperiale [[프랑스어]]: Diète d'Empire [[파일:신성로마제국 제국의회.jpg|width=300]] [목차] == 개요 ==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는 제국의 종합적인 국무를 감독, 제국의 [[영방국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해소를 위해 창설된 기관이다. 그 외에, 제국의회는 그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신성 로마 제국]]의 [[입법]]을 담당했다. == [[9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 [[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의 모임에서 발단했던 제국의회는 초기에는 중대 결정들을 내리기 위한 비정기적 모임에 불과했다. 기록에 따르면 [[카롤루스 대제]]가 [[802년]]-[[803년]], [[작센]] 전쟁 도중에 [[아헨]] 지방에서 공표했던 "작센 법"에 기반하고 있을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1158년]]의 제국의회는 제국의 [[헌법]]을 지방귀족들에게 유리하게 바뀌는 데 일조를 한다. [[황제]]의 권력은 이때부터 크게 약화된다. [[1356년]] [[금인칙서]] (Bulla aurea)[* [[카를 4세]]가 [[뉘른베르크]]와 [[메스]]에서 공표한 [[신성 로마 제국]]의 기반이 되는 [[헌법]].]가 제국의회를 통해 발표되면서 제국의회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15세기]] 말까지, 제국의회는 비공식적인 성격을 띄었고, [[공작(작위)|공작]]들이 궁중에 모이는 것(Hoftag, 궁중회의)에 불과했다. == [[15세기]] 말부터 == [[1495년]] 제국개혁(Reichreform)으로 제국의회는 정기적으로 열리게 된다. [[1495년]]부터 [[1663년]]까지 각 의회 끝에 내용을 총정리한 문서(Reichsabschield, 폐회 선언)를 발행했다. 초기에는 [[아우크스부르크]], [[보름스]], [[슈파이어]] 등 황제가 단기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자유도시|제국령 도시]]에서 열렸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황제]]의 권력이 크게 약해지면서, 권력의 우위의 항구화를 꿈꾼 [[귀족]] 들의 결정으로, 제국의회는 [[1663년]]부터 [[레겐스부르크]]에 소재하게 된다. 제국의회의 제도는 논란을 일으키는데, [[영방국가]]들의 [[제후]]들은 제국의 사안을 논하는데 평등한 지위를 요구했던 반면, [[황제]]와 7명의 [[선제후]]가 암묵적으로 더 강한 발언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조직의 구성 == 의회는 세 개의 [[선거인단]]으로 나뉘어진다. 일곱 [[선제후]][* [[마인츠 선제후국|마인츠 대주교]], [[쾰른 선제후국|쾰른 대주교]], [[트리어 선제후국|트리어 대주교]],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왕]]. 다만 보헤미아 왕국은 [[후스 전쟁]] 같은 내부 분란으로 제 코가 석자라 제국의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보헤미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격으로 참석했지 보헤미아 왕으로서는 선제후 투표권만 행사했고 이조차도 17세기 이후에는 동수를 막겠다고 투표를 자진포기하기도 했다.]들의 선제후 인단 (Kurfürstenrat), 각 [[영방국가]]의 300명의 [[제후]]들로 이루어진 제후인단 (Fürstenrat)과 [[자유도시|제국령 도시]]들의 도시 인단(Reichstädte). 이 중 제후인단의 경우, 제후인단 내에서 3가지 계층으로 소분류된다. 일류로 각자 하나의 투표권을 갖는 [[성직자]] ([[대주교]], [[주교]], 큰 규모의 [[수도원]]의 수도원장 등), 이류로 고위 귀족과 지방 영주 (후일 [[선제후]]가 될 [[바이에른]] 공작, [[뷔르템베르크]]의 영주 등), 마지막으로 제국에 직속된 중소 귀족들 ([[백작]], [[남작]], [[성주]] 등). [[티롤]] 같은 지역에서는 [[부르주아]] 혹은 [[농민]] 출신의 대표자를 선출해 내세우기도 했다. 50개 정도 되었던 [[자유도시|제국령 도시]]는 [[영주]]에 직속된 도시(Landstädte)들과 달리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대부분 [[토호|지방 유력자]]들로 구성된 독자적인 [[의회]]를 꾸리고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 [[1358년]] [[발트 해]]와 [[독일]] 북쪽의 [[자유도시]]들의 정치적/경제적 동맹. [[15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7세기]] 말에 소멸했다.])에 가입하는 등 자주권을 가지고 행동했다. [[황제]]를 비롯한 모든 의회의 대표자들은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럼 각 선거인단은 따로 해당 법안에 대해 논의했고, 각 선거인단은 법안의 개정판을 발표할 수 있었다. 세 선건인단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만 의회는 개정안 중 하나를 최종적으로 비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비준한 법안을 의사록(Reichsabschield)이라 부른다. == 주요 제국의회 연대기 == || [[754년]] || 키에르지 || [[피피누스 3세]] || 최초의 Hoftag || || [[803년]] || [[아헨]] || [[카롤루스 대제]] || 최초의 형식적인 Hoftag || || [[806년]] || 티옹빌 || [[카롤루스 대제]] || [[프랑크 왕국]]의 분열 || || [[1356년]] || [[뉘른베르크]] || [[카를 4세]] || [[금인칙서]] 공표 || || [[1495년]] || [[보름스]] ||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 제국 개혁 || || [[1555년]] || [[아우크스부르크]] || [[카를 5세]][* 카를 5세의 이름으로 열렸으나 실제 회의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주도했다.]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 [[1613년]] || [[레겐스부르크]] || [[마티아스(신성 로마 제국)|마티아스]] || [[개신교]] 제후 동맹 || == 관련 문서 == * [[삼부회]] * [[코르테스]] [[분류:나라별 의회]] [[분류:신성 로마 제국]] [[분류:독일의 역사]]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