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쥘 마자랭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프랑스의 공작]][[분류:프랑스 왕국의 정치인]][[분류:유럽의 섭정]][[분류:프랑스의 추기경]][[분류:1602년 출생]][[분류:1661년 사망]][[분류:이탈리아계 프랑스인]][[분류:아브루초 주 출신 인물]][[분류: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출신]] [include(틀:역대 프랑스 왕국 수석국무장관)] [[파일:E556D5A4-85F6-4EDF-99E3-9BE2E556E3CC.jpg]] [목차] == 개요 == Jules Mazarin (1602년 7월 14일 ~ 1661년 3월 9일) [[프랑스]]의 [[추기경]]이자 [[정치가]]. 초대 레텔[* 레텔은 [[프랑스]] 북부 [[아르덴]](=[[아르덴#s-2|데파르트망]])에 있는 7,600명의 작은 도시이다.] 공작(Duke of Rethel). [[명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계자로 유명하다. == 생애 == [[이탈리아]] 중부 페시나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프랑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으로 본명은 '줄리오 마차리니'(Giulio Raimondo Mazzarini)였다. [[로마]]의 [[예수회]] 교회에서 수학했다.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아서 교황의 특사로 파견된 전력도 있다. 이 특사 파견에서 당시 프랑스 측의 실권자였던 리슐리외의 호감을 사게 되었고, 1639년 결국 프랑스로 귀화하게 된다. 이후 1642년 리슐리외가 죽을 때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프랑스의 재상이 되었다. 외교에 능해서 리슐리외에게 발탁되었던 그의 능력답게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30년 전쟁]]의 종결을 알린 [[베스트팔렌 조약]]을 프랑스 측에 유리하게 맺어서 숙적 [[합스부르크 가문]]을 누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부르봉 왕조]]의 확립을 위해 나서다가 파리 [[고등법원(프랑스)|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하는 '''프롱드의 난'''을 겪게 되지만 이를 진압하였고, 1651년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로부터 [[루이 14세]]의 섭정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어 1661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의 위치에 있게 된다. 그리고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도 유리하게 이끌어감에 따라 피레네 조약을 승인하게 하고, 루이 14세와 에스파냐의 왕녀 [[마리아 테레사(스페인)|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을 성립하게 만들었다. 리슐리외와 함께 프랑스 [[절대왕정]]을 만든 인물이라 보면 되겠다. == 이야깃거리 == * 문화 후원에도 나서서 마자랭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 현재 [[모나코]] 공국의 공들은 쥘 마자랭이 받은 레텔 공작 가문의 후손이다.[* 마자랭 본인은 가톨릭 성직자였으니 당연히 후손이 없었고, 작위는 조카딸인 [[오르탕스 만치니]]가 이어받았다. 참고로 이 사람은 [[영국]] [[찰스 2세]]의 정부다(...)] 1777년 제6대 여공작 루이즈(Louise d'Aumont)가 모나코 공 [[오노레 4세]]와 결혼했고, 그 후손이 모나코 공가다. * 돈을 열심히 챙겨두어서 죽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이 무려 '''3,500만 리브르'''였다. 전임인 리슐리외가 죽을 때 가지고 있던 2,000만 리브르를 능가하는 액수였고, 당시 프랑스 연간예산의 50%에 가까운 액수였다. 심지어 프롱드의 난이 끝나던 때에는 800만 리브르였는데, 난이 진압된 이후 섭정에 올라서 죽기 직전까지 3,500만 리브르로 늘린 것이다. 마자랭을 믿고 있었던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비자금 액수를 보고받고 할 말을 잃었다고.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