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미국의 주요선거)] ||<-4> {{{+1 {{{#fff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br]{{{#fff '''196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width=100%]]}}}{{{#!wiki style="margin:-10px 0px;" {{{-3 ▼}}}}}} || ||<-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4C9 35.5%, #BBB 35.5%, #BBB 44.1%, #E81018 44.1%)" [[휴버트 험프리|{{{#FFF '''험프리'''}}}]] {{{-2 '''191인 (35.5%)'''}}} {{{#!wiki style="float:right" ✔ {{{-2 '''(55.9%) 301인'''}}} [[리처드 닉슨|{{{#FFF '''닉슨'''}}}]]}}} }}}|| ||<-4> {{{#!wiki style="margin: -7px -12px"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2 [[1964년]] [[11월 3일]]}}}[br][[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1964 대선]]}}} ||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2 [[1968년]] [[11월 5일]]}}}[br]'''1968 대선'''}}} ||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2 [[1972년]] [[11월 7일]]}}}[br][[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1972 대선]]}}} || }}} || || {{{#0d164a '''선거 일시'''}}} ||<-3>[[11월 5일]] 5시 ~ [[11월 6일]] 6시 (UTC) || || {{{#0d164a '''투표율'''}}} ||<-3>60.9% || ||<-4> {{{#fff '''선거 결과'''}}} || || {{{#0d164a '''후보'''}}} || [[민주당(미국)|{{{#!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5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44C9; font-size: .8em" {{{#fff '''민주당'''}}}}}}]][br]{{{#!wiki style="margin:0 -10px;display:inline-table;text-align:left" '''{{{-2 대통령}}} [[휴버트 험프리]][br]{{{-2 부통령}}} [[에드먼드 머스키]]'''}}} || [[공화당(미국)|{{{#!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81018; font-size: .8em" {{{#fff '''공화당'''}}}}}}]][br]{{{#!wiki style="margin:0 -10px;display:inline-table;text-align:left" '''{{{-2 대통령}}} [[리처드 닉슨]][br]{{{-2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 || [[미국 독립당|{{{#!wiki style="display: inline; margin: -5px -10px;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00080; font-size: .8em" {{{#fff '''미국 독립당'''}}}}}}]][br]{{{#!wiki style="margin:0 -10px;display:inline-table;text-align:left" '''{{{-2 대통령}}} [[조지 월리스]][br]{{{-2 부통령}}} [[커티스 르메이]]'''}}} || ||<|2> {{{#0d164a '''선거인단'''}}}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4C9 calc(191*100%/538), #E81018 0%, #E81018 calc((191 + 301)*100%/538), #800080 0%, #800080 100%)" }}} || || 191명 || '''301명''' || 46명[* 노스캐롤라이나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기존 획득 예정 득표수보다 1표 증가] || ||<|2> {{{#0d164a '''전국 득표'''}}}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44C9 42.7%, #E81018 0%, #E81018 86.1%, #BBB 0%, #BBB 86.5%, #800080 0%, #800080 100%)" }}} || || 42.7%[br]31,271,839표 || '''43.4%[br]31,783,783표''' || 13.5%[br]9,901,118표 || ||<-4> {{{#!wiki style="margin: -16px -11px" || {{{#fff '''대통령 당선인'''}}} || {{{#fff '''부통령 당선인'''}}} ||}}}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68RNC좌우반전.jpg|width=100%]]}}} || ||<-4> [[공화당(미국)|{{{#fff '''공화당'''}}}]][br]{{{#!wiki style="margin: -5px -10px" || {{{#!wiki style="margin: -6px 0" {{{+2 [[리처드 닉슨|{{{#fff '''리처드 닉슨'''}}}]]}}}}}} || {{{#!wiki style="margin: -6px 0" {{{+2 [[스피로 애그뉴|{{{#fff '''스피로 애그뉴'''}}}]]}}}}}} ||}}} || [목차] [clearfix] == 개요 == [[1968년]] [[미국]]에서 제 37대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후보와 [[스피로 애그뉴]] 후보가 유효표의 43.4%, 선거인단의 301인을 확보하여 당선되었다. 선거인단 격차는 컸지만 닉슨과 험프리 양 후보 격차는 불과 0.7%p에 불과해 미국 역사상 가장 접전인 선거 중 하나였다. == 배경 ==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1964년 선거]]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대공황]] 직후의 선거보다도 큰 격차로 패배한 공화당은 [[충공깽]]의 상황에 빠졌다. 이 선거의 패배로 [[공화당(미국)|공화당]]은 존립의 위기에 서기도 했으나, [[리처드 닉슨]]이 구원 투수로 나섰다. [[배리 골드워터]]의 참패와 [[넬슨 록펠러]]의 재혼 스캔들은 닉슨의 가장 큰 경쟁자 두명을 추락시켰으며 닉슨은 1965년부터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주자 선두 자리를 지키게 된다. 또한, [[뉴딜연합]]이 1964년 [[민권법]] 제정으로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미국 최대 노조인 AFL-CIO의 판단 미스로 인하여 민권법 제정에 격노한 보수적인 노동조합원이 대거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옮겼고, 그 결과 1966년 중간선거에서는 예상과 달리 민주당이 크게 패배하고 만다. 상원은 공화당이 3석을 추가로 얻었고 하원은 '''47석'''을 추가 획득했는데 공화당이 획득한 지역구는 대부분 노동조합원, 농민 조합원들이 많이 거주하던 대평원 및 중서부 지역의 지역구였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지아와 매릴랜드 주지사에 각각 보수 강경파인 [[로널드 레이건]]과 [[스피로 애그뉴]][* 다만 스피로 애그뉴는 1966년 [[메릴랜드]] 주지사 선거에서 [[록펠러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인종분리주의자 민주당 후보 상대로 NACCP의 지지를 얻고 흑인 투표 70% 이상을 얻었을 정도이다. 애그뉴의 보수화는 1967년 메릴랜드 폭동 이후의 일이다.]가 당선되면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당 내 리더십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건 시대 이후 처음으로 [[아칸소주]][* [[넬슨 록펠러]]의 동생인 윈스롭 록펠러 당선]와 [[플로리다주]][* 클로드 R. 커크 Jr.[* 민주당 탈당파로 보수주의자였지만 경선에서는 뜬금없게도 록펠러를 지지한다. 1970년에는 [[루빈 애스큐]]에 밀려 낙선]당선]에서 공화당 주지사가 당선되어 남부의 민주당 조직력도 비록 조금씩이지만 흔들리기 시작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2TZ_5FmnSMs, width=100%)]}}} || || '''폭도에 의해 불타는 워싱턴 D.C.의 모습''' || 워싱턴 정계 뿐 아니라 미국 전체는 변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틀즈]], [[롤링 스톤스]]를 위시로 한 락밴드들은 음악적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반문화 운동을 주도하는 밴드로 거듭나고 있었다. 청년들 사이에서는 [[LSD]]를 포함한 마약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인문학적으로는 [[미셸 푸코]], [[루이 알튀세르]],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노엄 촘스키]] 등 급진 사상가들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960년대 중반은 서구 철학의 명저들이 많이 나온 시기였다. 이 시기의 대표 저작으로는 일차원적 인간(마르쿠제 / 1964년), 마르크스를 위하여(알튀세르, 랑시에르, 발리바르, 에스타블레, 마슈레 공저 / 1965년), 자본론을 읽자(알튀세르 / 1965년), 말과 사물(푸코 / 1966년), 그라마톨로지(데리다 / 1967년) 등이 있는데 모두 68혁명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7년에는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랑의 여름]]이라는 68혁명의 전조 격인 운동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악화되는 전황은 미국 청년들에게 [[린든 B. 존슨]]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었으며 존슨 행정부를 넘어 보수적인 문화를 강요하는 기성 세대와 문화를 거부하는 유행이 번졌다. 이렇듯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주요 정치인들은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1968년 1~3월부터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를 중심으로 독일,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에 이어 미국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반문화, 혁명적 신좌파를 내세운 '''[[68혁명]]'''이 터지게 된다. 68혁명은 미국의 역사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현재 68혁명은 여러 면에서 다각적으로 평가받지만 이 당시 기성 세대들에게 68혁명은 공포 그 자체였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눌려있던 대학생들과 소수인종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동을 일으켜, [[디트로이트]],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인구가 많은 대도시는 모두 폭동의 물결에 휩쓸렸고 방화, 약탈, 약물 투약, 성범죄가 잇따랐다. 경찰은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대학생들과 흑인들을 무차별 폭행해 유치장에 넣었고 밤은 고사하고 대낮에조차 산책하는데 목숨 걸어야하는 상황이 닥칠 정도로 치안이 악화된다. 심지어 수도 [[워싱턴 D.C.]]에서까지 폭동이 일어나 시위대가 링컨 기념관, 오벨리스크, 국회의사당 등 주요 워싱턴 D.C.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했고 워싱턴 경찰은 국회의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완전무장한 경찰을 국회의사당에 배치시켜야했다.[* 국회의사당에 무장 경찰이 상주한 것은 딱 두번 있었는데, 한번이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때이고 나머지 한번이 바로 이때이다.] 미국 국민들은 평화와 안정, 법과 질서를 원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흑인과 대학생, 일부 여성, 진보층은 더 많은 사회적인 정의를 원하고 있었다. 이렇듯, 1968년 미국 대선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치루어진 대선으로 평가받았다. == 정당 별 상황 == === [[민주당(미국)|민주당]] === ==== 존슨의 탈락과 [[유진 매카시]] 돌풍 ==== [[민주당(미국)|민주당]]에서는 당초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재선이 가장 유력했다. 존슨 대통령은 이미 재선 대통령이었지만 초선 임기는 [[존 F. 케네디]]의 임기를 계승한 것이었으므로 3선이 가능했다. 여론조사에서도 1966년 2월 존슨의 대통령 재도전을 지지하는 여론이 52%였던 반면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여론은 27%에 그쳤다. 1966년, [[로버트 케네디]]는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에 사실상 존슨이 다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는 1966년 중간선거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출마하지 않는 이상 존슨의 재지명은 거의 확실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erlin_60337219_1275bf5e-2386-4aea-b711-e10f43a57209-superJumbo.jpg|width=100%]]}}} || || '''연설하고 있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매카시 뒤의 문구는 '''"우리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즉각 중단, 남베트남 지상전의 단계적 종료, 모든 정당이 참여할 수 있는 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합니다"'''이다.] || 존슨의 유일한 경쟁자는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었다. 유진 매카시는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는 등 당 내에서 유독 비둘기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고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했는데, 자연스럽게 구도는 베트남 전쟁 찬성파인 존슨 대 반대파인 매카시의 양강 구도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당의 지지, 노조의 지지, 현직 프리미엄을 한꺼번에 가진 존슨과, 불과 재선의 무명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68년 1월 7일 여론조사에서 존슨이 74.3%의 지지를 기록한 반면, 매카시는 16.7%의 지지를 기록, 사실상 대등한 상대라고 부를수도 없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30일 일어난 '''[[구정 공세]]'''는 존슨 대통령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의 종결이 임박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정작 그 직후 베트콩들이 대대적으로 남베트남을 공격하여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마저 베트콩에게 일시 함락되는 모습이 생중계되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급락했다. 뒤이어 일어난 [[68혁명]]으로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진보층의 베트남 전쟁 수행 지지율에 대한 여론은 아주 나빠졌다. 물론 구정공세 이후로도 표면상으로 존슨의 지지율은 높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1968년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놀랍게도 [[유진 매카시]]가 엄청난 선전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존슨은 49.62%, 매카시는 41.94%를 득표했다. 비록 매카시의 패배였으나 여론조사에서 매카시가 보인 엄청난 열세에 비하면 이는 놀라운 선전이었다. 무엇보다, 현역 대통령이 경선에서 이렇게 낮은 지지를 보인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위스콘신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이 불과 12%밖에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충격을 받은 [[린든 B. 존슨]]은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후인 3월 31일, 대권 재도전을 포기한다.[* 당시 존슨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피로감도 상당했다. 이때는 경선이 대선 후보를 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므로, 존슨이 모든 표를 끌어 모았다면 어찌 어찌 후보 재지명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사정에 겹쳐 당의 낮은 지지율에 낙담해 사실상 권력 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린든 B. 존슨은 자신의 측근이자 부통령인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대선 후보로 지지한다. 이로서 경선은 반전파의 유진 매카시 대 찬전파의 휴버트 험프리로 재편성되었다. 두 미네소타 출신 정치인의 대결이었다. ==== [[로버트 F. 케네디]]의 등장, 그리고 암살 ==== 본래 [[로버트 F. 케네디]]는 1968년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일찌감치 그는 1966년 차기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린든 B. 존슨]]의 압도적인 당권 장악력으로 인해 승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적인 지지도는 높았으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경선은 당원의 지지를 파악하는 요식 행위였고 실제로는 당의 실세[* 존슨 대통령, 험프리 부통령, 데일리 시카고 시장 등.]들의 영향을 받는 대의원단이 사실상 대선 후보를 결정했다.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가 경선에서 아무리 압도적인 득표를 얻어도 존슨이 출마하는 이상은 후보 지명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2일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존슨이 당하는 것을 본 로버트 케네디는 마음을 바꿔,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후인 3월 16일 기존의 입장을 180도 뒤집고 차기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유진 매카시]] 캠프는 경악했다. 매카시 캠프의 한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아침날에 막 일어났는데 누가 선물을 다 훔쳐간 셈"이라며 로버트 케네디의 기회주의적인 행보에 분통을 터트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obby 1968 1.webp|width=100%]]}}} || || '''흑인 거주지에서 유세하고 있는 로버트 F. 케네디''' || 로버트 케네디의 핵심 지지층은 흑인들이었다. 반면, 유진 매카시는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기회주의자 논란이 있었던데다, 백인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핸디캡이 있었다. 그러나 1968년 5월 7일, 패배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인디애나]] 주 프라이머리에서 42%를 얻어 존슨과 험프리의 지지를 받은 로저 브래니진(31%)과[* 인디애나 주의 "Favorite Son"이다. 쉽게 말하자면, 주에서 지지를 많이 받는 의원을 프라이머리에 내보내 대의원을 확보한 다음에 전당대회 투표에서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도록 하여 대의원단 획득 수에서 이점을 취하려는 일종의 꼼수이다.] 매카시(27%)를 모두 큰 차이로 꺾고 1위로 올라섰다. 1968년 4월 마틴 루터킹의 사망은 로버트 케네디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한때 마이너리티 집단이었던 아일랜드계에서 [[존 F. 케네디|대통령을 냈듯]] 언젠가 당신 흑인들도 [[버락 오바마|여러분들의 대통령을 갖게 될것]]"이라는 연설을 해 흑인들로부터 광적인 지지를 받았고 열성 지지자들에 의해 옷까지 찢겨가며(...) 유세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두가지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첫번째로 로버트 케네디가 모든 경선에서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실제 지명을 받았을 확률은 낮았다는 점이다. 상술했다시피 경선 결과보다 간선 대의원이 더 큰 영향을 미쳤는데 로버트 케네디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극혐했던 존슨이 케네디를 놔둘 리 없었다. 두번째로 안그래도 부족한 경선 대의원단이 유진 매카시에 의해 분열되고 있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 매카시의 지지율이 회복된 반면 케네디의 지지율은 떨어졌다. 로버트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에 찬성했으나 이후 월남전 여론이 나빠지자 입장을 바꿨고 이로 인하여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배수진을 쳐 캘리포니아 주 프라이머리에서 매카시에게 밀리면 경선 후보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부진하긴 했으나, 열성적인 유세로 46% 대 42%로 매카시를 꺾고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로버트 케네디가 캘리포니아에서 승리를 확인한 직후 '''암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유력 주자를 잃은 민주당은 혼란에 빠졌고 민주당 지지자들과 흑인들은 슬픔에 빠졌다. 로버트 케네디의 지지자들은 그의 동생 [[테드 케네디]]나 로버트 케네디의 측근 [[조지 맥거번]]을 대타 후보로 내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고 테드 케네디는 경선 참여를 거부했으며 맥거번은 뒤늦게 경선에 참여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기에는 시간이 형편 없이 부족했다. 이로 인하여 경선이 종료된 시점에서 매카시는 38.7%, 로버트 케네디는 30.6%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며, 매카시가 남은 경선 일정에서 승리하여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전당대회의 폭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68 DNC 2.webp|width=100%]]}}} || || '''아수라장이 된 민주당 전당대회''' || 1968년 7월 6일 경선 종료 시점에서 유진 매카시는 310.5명의 대의원을 얻었고 로버트 케네디는 239.5명을 얻었다. 휴버트 험프리는 중간 중간의 간선제에 가까운 경선에서 승리해 매카시보다 아주 약간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고 그 누구도 당선에 필요한 절대적인 득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험프리는 사실상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 득표에서는 2% 정도만을 얻어 39%의 매카시에 비해 형편 없이 밀렸다. 여론조사는 험프리 지지 51%, 매카시 지지 39%로 전쟁 찬성파이자 존슨의 지지를 받는 [[휴버트 험프리]]와 전쟁 반대파 [[유진 매카시]]가 팽팽하게 맞붙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경선으로 선출되지 않는 간선 대의원들이 린든 B. 존슨의 영향으로 사실상 모두 험프리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좌익 대학생들의 여론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험프리가 경선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지명권을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민주당에서는 이런 일이 잦았다. 당장 1956년 대선에서도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은 경선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거의 70%에 가까운 대중득표가 에스테스 키포버에게 돌아갔으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은 스티븐슨이었다.] 격분한 대학생 시위대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시카고 전당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시카고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경찰서, 시청, 전당대회장 등 시카고의 거의 모든 시설들이 성난 대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당황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경찰을 불러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전당대회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전당대회장에 "Happy Days are Here Again"[*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선거송이다.]이 울려퍼지는 동안 유진 매카시와 조지 맥거번을 지지하는 대학생들은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고 전당대회장은 피와 최루가스로 물들었다. 전당대회 대의원 표결 결과, 휴버트 험프리는 1759.25표를 얻었고 유진 매카시는 601표, 조지 맥거번은 146.5표에 불과했다. 부통령을 뽑는 표결에서도 험프리의 측근 중 하나였던 [[에드먼드 머스키]]가 1942.5표를 얻어 압승한다. 대학생 시위대들은 후보직 수락 연설을 하는 험프리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이 모습은 언론 카메라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 되었고 험프리의 지지율은 형편 없이 떨어졌다. === [[공화당(미국)|공화당]]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IXON 1968 2.jpg|width=100%]]}}} || || '''경선 유세에서 환호하며 V자 사인을 긋고 있는 닉슨''' || 민주당의 혼란에 비해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이 1965년부터 꾸준한 선두를 보이며 사실상 닉슨으로 여론이 일치단결되어있었다. 몇명의 경쟁자가 있었으나 이들은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차례 차례 스러져갔다. 닉슨에 처음으로 대항한 것은 미시간 주지사이자 당내 온건파를 대변한 [[조지 W. 롬니]]였다. [[밋 롬니]]의 아버지이기도 한 조지 롬니는 [[유진 매카시]]의 공화당 버전으로 간주되었고, [[베트남 전쟁]] 추가 개입을 반대했으며,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1966년 11월의 한 조사에서 롬니는 39%의 지지를 얻어 31%의 닉슨을 제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롬니는 그가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도록 외교관과 군인에 의해 "세뇌"되었다고 말하는 말실수를 해 지지율이 떨어졌다. 또 닉슨은 롬니가 [[테드 크루즈|멕시코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생적 미국인이 아닐 수 있는데 그렇다면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롬니의 지지율은 결국 떨어졌고 그는 프론트러너 자리에서 탈락한다. 두번째 경쟁자는 [[넬슨 록펠러]] [[뉴욕주|뉴욕]] 주지사였다. 롬니,에드워드 브룩을 비롯한 당내 온건파의 지지를 받은 록펠러 주지사는 닉슨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4월 30일, 록펠러는 매사추세츠 경선에서 닉슨을 꺾었지만, 결국 1964년의 재혼 스캔들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외도가 나 부인을 버리고 연하의 여비서와 결혼한 넬슨 록펠러의 여성 문제는 그의 지지율 상승을 어렵게 만들었다. 록펠러는 매사추세츠 주의 경선을 제외한 나머지 경선에서 모두 부진했고 닉슨이 다시 우위를 잡았다. 마지막 경쟁자는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다. 롬니, 록펠러와 달리 레이건은 보수강경파였고 공화당 강성 지지층에게 지지를 받아 여러 경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대중 득표에서 닉슨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사실 홈스테이트인 [[캘리포니아]] 빨, 대부분 지역 경선에서는 닉슨이나 닉슨 지지 "Favorite son"이 승리했다.]하지만 공화당 지도부와 중진 의원들은 레이건이 너무 보수적이기 때문에 당선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획득 대의원단 수도 닉슨에 비해 모자랐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록펠러레이건.jpg|width=100%]]}}} || || '''1967년 10월 20일 타임지 표지''' || 그러나 이념으로는 공화당 내 상극인 록펠러와 레이건은 각각 닉슨의 온건파,보수파 대의원을 잠식해서 1차 투표에서 닉슨의 지명을 막으려고 [[적의 적은 나의 친구|연대했다]]. 더 나아가 록펠러 대통령/레이건 부통령 티켓 혹은 그 반대도 논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전당대회에서 후보 지명에 필요한 과반을 근소하게 넘는 대의원을 확보한다. 결국, 닉슨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 이후 닉슨은 부통령 후보로 [[존 린지]] [[뉴욕|뉴욕시장]], 레이 셰이퍼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로버트 핀치 [[캘리포니아]] 부지사, 찰스 퍼시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 등을 고려했으나, 이들은 모두 록펠러 공화당원~온건파 공화당원이었기에 당내 보수파와 남부인들을[* 특히 [[스트롬 서먼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연방상원의원]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전국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법과 질서" 주장으로 보수파에게 호소력이 있으면서도 온건파도 소외시키지 않는 현직 메릴랜드 주지사 [[스피로 애그뉴|스피로 T. 애그뉴]]가[* 애그뉴도 원래는 록펠러 공화당원이었으나, 록펠러의 대선 불출마 선언 번복과 주지사 임기 중 우클릭으로 전당대회 시점에는 닉슨 지지자가 되었다.[[https://www.washingtonpost.com/news/retropolis/wp/2018/08/08/nattering-nabobs-of-negativism-the-improbable-rise-of-spiro-t-agnew/|#]]] 최종적으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 최종 후보 == ===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 === ||<-2><#0044C9> {{{+2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0044C9,#0044C9> {{{#fff '''대통령 후보 지명자'''}}} ||||<#0044C9> {{{#fff '''부통령 후보 지명자'''}}}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험프리 머스키 1968.jpg|width=100%]]}}} || ||<-4><#0044C9,#0044C9> {{{#!wiki style="margin: -5px -10px" || {{{#!wiki style="margin: -6px 0" {{{+1 [[휴버트 험프리|{{{#fff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주니어'''}}}]]}}}[br]제38대 미국 부통령}}} || {{{#!wiki style="margin: -6px 0" {{{+1 [[에드먼드 머스키|{{{#fff '''에드먼드 식스터스 머스키'''}}}]]}}}[br]메인 주 연방 상원의원}}} ||}}} || ||<-2> [[파일:Humphrey_Muskie_'64.sv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zhLcNXLzlNA, width=100%)]}}} || || '''험프리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 >'''{{{#0044C9 Some People Talk Change, Others Cause It[br]어떤 사람들은 변화를 말하지만, 누군가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 >1968 험프리-머스키 티켓 슬로건 1968년 8월 29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휴버트 험프리는 메인 주의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낮은 지지율과 전당대회에서의 폭력 사건으로 인하여 선거전 초반 휴버트 험프리는 리처드 닉슨에게 큰 차이로 뒤진 채 캠페인을 시작한다. 휴버트 험프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매우 미묘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말을 피하며 [[위대한 사회]] 정책 지속과 빈곤과의 전쟁 유지를 지지했는데 이는 험프리가 인기 없는 대통령 [[린든 B. 존슨]]의 연장선상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도록 했다. 험프리는 뒤늦게 "베트남 전쟁 폭격 반대"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닉슨과 달리 단계적 철수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휴전을 통해 전쟁을 잠깐 중지시킬 수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험프리의 애매모호한 입장은 험프리의 지지율을 계속 떨어지게 만들었다. === 공화당: [[리처드 닉슨]] === ||<-2><#E81018> {{{+2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E81018,#E81018> {{{#fff '''대통령 후보 지명자'''}}} ||||<#E81018> {{{#fff '''부통령 후보 지명자'''}}}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닉슨 애그뉴 1968.jpg|width=100%]]}}} || ||<-4><#E81018,#E81018> {{{#!wiki style="margin: -5px -10px" || {{{#!wiki style="margin: -6px 0" {{{+1 [[리처드 닉슨|{{{#fff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br]제36대 미국 부통령}}} || {{{#!wiki style="margin: -6px 0" {{{+1 [[스피로 애그뉴|{{{#fff '''스피로 시어도어 애그뉴'''}}}]]}}}[br]제55대 메릴랜드 주지사}}} ||}}} || ||<-2> [[파일:Nixon_Agnew_1968_campaign_logo.svg|width=2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Gmw4el10KPI, width=100%)]}}} || || '''닉슨 후보의 후보직 승낙 연설''' || >'''{{{#E81018 Nixon's the One![br]닉슨이 바로 적임자다!}}}''' >---- >1968 닉슨-애그뉴 티켓 슬로건 1968년 8월 8일 마이애미 비치에서 치러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닉슨은 록펠러, 레이건, 롬니 등의 경쟁자를 재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강경보수파 메릴랜드 주지사 [[스피로 애그뉴]]는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된다. 리처드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으며 196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었으며, 민주당의 분열상과 전당대회의 혼란에 대비되어 선거전 초반 험프리에 비해 큰 우위를 보인다. [[리처드 닉슨]]은 온건보수파와 강경보수파를 아우르는 후보로, 버싱(Busing) 정책[* 흑백 학군 통합을 위해 흑인 아이들을 통학 버스에 태워 백인 거주지의 학교로 보내는 정책을 의미한다. [[조 바이든]]이 젊은 상원의원이었던 시절 이 정책에 반대했는데 이 때문에 2020년 민주당 경선에서 [[카멀라 해리스]]에게 극딜을 받은 바 있다.]과 [[흑표당]] 등 과격한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는 반대했으나 민권법 통과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은 68혁명으로 무너진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울 것이며, [[린든 B. 존슨]]이나 [[휴버트 험프리]]와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해 "명예로운 평화"를 이룰 것이라고 공약했다. === 미국 독립당: [[조지 월리스]] === ||<-2><#800080> {{{+2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독립당 후보자'''}}} || ||<#800080,#800080> {{{#fff '''대통령 후보 지명자'''}}} ||||<#800080> {{{#fff '''부통령 후보 지명자'''}}} || ||<-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월리스 르메이 1968.jpg|width=100%]]}}} || ||<-4><#800080,#800080> {{{#!wiki style="margin: -5px -10px" || {{{#!wiki style="margin: -6px 0" {{{+1 [[조지 월리스|{{{#fff '''조지 콜리 월리스 주니어'''}}}]]}}}[br]제45대 앨라배마 주지사}}} || {{{#!wiki style="margin: -6px 0" {{{+1 [[커티스 르메이|{{{#fff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br]미국 공군참모총장}}} ||}}} || ||<-2> [[파일:Wallace_Lemay_bumper_sticker.sv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Afw5hjvBUM, width=100%)]}}} || || '''월리스 후보의 털사 유세 연설''' || >'''{{{#800080 Stand Up for America[br]미국을 위해 궐기하자}}}''' >---- >1968 월리스-르메이 티켓 슬로건 1968년 대선에서 두각을 드러낸 또다른 후보자는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였다. 조지 월리스는 1964년 민주당 경선에 출마해 메릴랜드 주 프라이머리에서 놀라운 성과를 드러낸 바 있었다. 1963~1968년 사이 이루어진 많은 민권 조치는 [[조지 월리스]]를 비롯한 극우적인 남부 민주당원들을 격노하게 했고 특히 [[휴버트 험프리]]의 민주당 후보 지명은 그들에게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휴버트 험프리는 [[린든 B. 존슨]]의 측근이었을 뿐더러 '''1948년'''부터 연방민권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대표 "민권 파이터"였다. 존슨 행정부에서 이행된 여러 민권 법안들도 험프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험프리가 아니더라도, 남부 민주당원들에게는 [[유진 매카시]], [[로버트 F. 케네디]] 모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1968년 2월 조지 월리스는 일찌감치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1968년 8월 대선 후보가 험프리로 확정되자 독자 출마를 확정하고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지 월리스]]는 1940년대 GATT 체결로 인하여 미국의 공업이 쇠퇴하고 있으며 신흥 공업 국가들에게 공장을 빼앗기고 있는데도 케네디와 존슨, 닉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가 미국 노동자를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조지 월리스의 보호주의 공약은 많은 노동조합원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전미 최대의 노조인 AFL-CIO는 노동조합원들의 월리스 지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수를 거듭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월리스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월리스의 또다른 지지층은 백인 중산층이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법과 질서'''였다. 1968년 [[68혁명]]으로 인해 악화된 치안을 바로잡아야한다는 공감대가 미국 중산층들에게 형성되었고, 당시 보수 미디어들은 치안 악화의 주범으로 폭력적인 흑인 민권운동을 지목했으므로 인종차별주의자 후보인 조지 월리스가 미국 중산층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은 매우 당연했다.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 조지 월리스는 군대를 철수할게 아니라 오히려 늘려서 북베트남과 베트공을 굴복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급진 공약 때문에 조지 월리스를 [[도널드 트럼프]]의 원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조지 월리스가 꼽은 부통령 후보자는 [[커티스 르메이]]였다. 커티스 르메이는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대규모 폭격을 지시한 공군참모총장이다. 또다른 후보군으로는 [[할랜드 샌더스]](...), [[존 에드거 후버]], [[존 웨인]](...), [[에즈라 태프트 벤슨]][*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농무부장관], [[해피 챈들러]] 등이 거론되었다. 이 중 관심을 표한 것은 벤슨과 르메이였고 후버는 편지를 받았지만 무시했다.[* 존 에드거 후버는 본래 [[KKK]]를 비롯한 남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웃기는 애들이라며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엄격하게 다루었다. 1960년대 후버가 은근히 백인우월주의 집단을 밀어준 것은 민권 세력을 더 큰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조지 월리스는 해피 챈들러를 부통령 후보로 고려했으나, 그가 [[재키 로빈슨]]의 브루클린 다저스 입단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알자 부통령 후보군에서 탈락시켰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모르몬]]교도인 것이 나타나 탈락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커티스 르메이]]였다. 커티스 르메이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월리스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커티스 르메이는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로 인식될까봐 지명을 거부하려 했으나 월리스가 진지하게 설득하여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 선거 진행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68 대선 여론조사.png|width=100%]]}}} || === 초기 닉슨의 우세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gp_i_60eEQ, width=100%)]}}} || || '''리처드 닉슨의 선거 광고 - "Convention"'''[* 미국 역사상 최악의 네거티브 광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자신을 법과 정의의 후보로, 험프리를 혼란의 후보로 묘사한 닉슨의 선거전은 큰 효과를 발했다.] ||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휴버트 험프리]]가 여론조사에서 [[리처드 닉슨]]과 경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193~60년대는 민주당의 우위가 이어지는 시기였기에 닉슨은 험프리에 비해 밀려있었다. 그러나 1968년 8월 민주당의 시카고 전당대회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험프리는 단숨에 30%대 후반의 지지율에서 '''20%대 후반'''으로 10%p에 가까운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8월 전당대회 직후 갤럽의 여론조사는 '''닉슨 45%, 험프리 29%, 월리스 18%'''로 닉슨과 험프리의 지지율 격차가 19%p인 반면 월리스와 험프리의 격차가 9%p밖에 되지 않아, 사실상 대선이 2위 싸움이 되었음을 시사하였다. 닉슨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에 투표했지만 1964년 민권법으로 인해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꾸었고 1966년 중간선거에서 이미 한번 그 위력을 입증한 바 있는 백인 중산층 노동자들에게 구애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닉슨은 민권법에 대해 불만이 많은 남부 지지층을 타겟팅하여 비(非) 딥사우스, 즉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켄터키, 플로리다 등의 남부 주에서 승리하고자 하였고, 공화당 소속이었음에도 일부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 특히 미란다 대 애리조나 판결은 닉슨 유세의 단골 소재였다.] [[얼 워런]] 대법원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닉슨은 동시에 잠재적인 온건파 유권자들을 포용하려는 제스처도 취했다. 그는 최초의 흑인 상원의원인 에드워드 브룩[* 후일 [[존 B. 앤더슨]]의 대선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다.]과 함께 유세를 진행하였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정부 세금 혜택을 부여하겠다고 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NIXON 1968.jpg|width=100%]]}}} || || '''리처드 닉슨의 오픈카 유세''' || 닉슨의 또다른 핵심 공약은 베트남이었다. 닉슨은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므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휴버트 험프리]]에 비해 우위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닉슨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하겠다는 주장을 해 일부 대학생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물론 이는 모병제가 시행된다면 고소득층 대학생들이 합법적으로 군대를 뺄 수 있게되므로 반전 좌익 운동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닉슨의 철저한 계산 하에 제시된 공약이었지만, 닉슨은 안보, 외교, 경제 등 거의 모든 사안에 있어 험프리에 앞서나갔다. 험프리는 "행복의 정치"를 슬로건으로 하여 당장은 여론조사에서 뒤지더라도 [[해리 S. 트루먼]]과 마찬가지로 깜짝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닉슨에 비해 우위를 보이는 것이 얼마 없었으므로 [[리처드 닉슨]]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을 거듭했으나 오히려 역효과만을 발휘했고 1968년 9월 말까지 험프리의 열세가 지속된다.[* 단, 험프리가 닉슨에 대한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낙선했다는 인식과 달리 네거티브는 닉슨도 험프리에 못지 않게 활용했다. 특히 위의 "Convention" 광고는 아직도 네거티브 선거 광고의 전설로 꼽힌다.] === [[조지 월리스]]의 부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_4u-m-IR_uE, width=100%)]}}} || || '''조지 월리스의 CBS 인터뷰''' || 8월 전당대회 이후 부상한 또다른 세력은 [[조지 월리스]]의 [[남부 민주당원]] 세력이었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이면서 뉴딜을 계승하였으므로 전통적인 [[뉴딜연합]] 지지층을 기반으로 다층적인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반면, 존슨의 후계자인 [[휴버트 험프리]]는 강경한 민권파이자 북부 미네소타 주 출신, 거기다 베트남 전쟁 찬성파로 지지 기반이 매우 약했으므로 존슨의 기존 지지층은 험프리[*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을 필두로 한 민주당 당권파와 노동조합 간부들], 매카시-케네디[* 대학생 및 지식인 계층(매카시), 흑인 및 대도시 거주자(케네디)], 월리스[* 남부의 보수적인 농민들과 중서부 노동조합원들]로 쪼개졌다. 매카시가 경선에서 미끄러지고 험프리가 전당대회에서 곤혹을 겪자 이중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조지 월리스]]였다. 조지 월리스는 민주당의 기존 핵심 지지층인 노동조합원과 농민, 중산층 노동자들에게 어필하며 지지율을 급상승시켰다. 조지 월리스의 선거 전략은 그 누구도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824년의 선거 이후, 양당제 체제인 미국에서는 모든 후보가 과반의 선거인단을 얻어 당선되었으나, 만약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 이 법에 따르면 한 주는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지며 각 주 하원의원의 투표를 통해 어떤 주가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를 결정한다. 월리스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26개 주를, 공화당은 19개 주를 통제하고 있었고 5개 주는 양당의 하원의원 수가 동일해서 누구를 뽑을지 알 수 없었는데 민주당의 26개 주 중 '''13개 주'''가 남부 주였다. 남부에서 민주당은 버지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를 통제했고 월리스는 이를 통해 험프리를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닉슨이 승리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중서부 주에서 월리스가 승리할 확률은 낮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중서부 주는 경합주였으므로 일리노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등 노동조합원들이 다수 거주하는 중서부 공단 지역에서 충분한 표를 확보하는 것이 월리스의 또다른 전략이었다. 험프리와 닉슨 모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중서부에 집중하는 동안, 월리스는 손쉽게 남부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어 충분한 선거인단을 쓸어간다는 것이었다. 월리스의 선거전은 68혁명의 혼란 속에 높은 지지를 얻어 1968년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닉슨 43%, 험프리 28%, 월리스 21%'''로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조지 월리스의 캠페인은 1968년 9월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쇠락했다. [[커티스 르메이]]를 부통령 후보로 택했던 탓이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나는 매캐한 숯덩이가 된 일본인을 위해 울지 않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 등의 망언으로 당시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한국에서는 반일 감정 때문에 인터넷에서 르메이를 고평가하는 흐름이 있지만 미국에서는 대놓고 대 민간인 폭격을 지시하고 이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당시에나 지금이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통령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이 전쟁의 학살에 무감각하게 되는 것은 큰 문제로 여겨졌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는 '''핵무기'''를 쏴서 공산주의자들을 굴복시켜야한다는 극우적인 수사로 대중의 기피를 샀다. 언론은 르메이와 월리스를 '''폭탄 형제들'''이라고 불렀고 대중 사이에서는 월리스가 당선된다면 르메이 부통령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이라는 현실적인 위협이 대두되었다. 결국 월리스의 지지율은 어마어마하게 떨어졌고 본래 우세를 점했던 노스/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주에서 닉슨에 밀린 것은 물론 북부에서의 지지율도 13%에서 8%로 반토막이 났다. 여성 지지층들도 월리스에게서 등을 돌렸고[* 한 여론조사에서, 르메이 부통령 후보 선정 직후 월리스의 남성 유권자 지지율은 20%였으나 여성 지지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월리스의 지지율은 21% 고점을 찍은 후 1968년 10월 경 15%대로 다시 내려갔다. === 휴버트 험프리의 10월 서프라이즈 === [[휴버트 험프리]]는 8월 전당대회의 충격으로 닉슨에 비해 20%p 가까이 여론조사에서 뒤진 채 캠페인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험프리에게는 핵심 지지층이 부족했다. 보수적인 중산층을 끌어들인 닉슨이나 남부 노동자, 농민을 타겟팅한 월리스에 비해 험프리의 지지층은 매우 분산되어있었고 진보를 지지해야할 좌익 운동권 세력은 험프리를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험프리가 연설하는 곳마다 반전 시위대의 야유가 뒷따랐다. ||<#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HH LBJ.jpg|width=100%]]}}} || || '''휴버트 험프리와 린든 B. 존슨''' || 설상가상으로 [[린든 B. 존슨]] 대통령도 험프리를 돕지 않았다. 존슨이 왜 험프리를 돕지 않았냐에 대해서는 입장이 갈린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존슨은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자신의 지지율을 의식해 험프리를 지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험프리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반대로 존슨의 전기 작가였던 로버트 댈럭(Robert Dallek)은 존슨이 험프리를 불신했으며 그가 당선되면 곧바로 베트남 전쟁이 종결될 것을 두려워해 의도적으로 그의 캠페인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명확한 사실은 존슨이 10월까지 험프리를 명확하게 지지하지 않았으며, 9월 10일에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해 험프리 캠페인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는 점이다. 9월에 접어들자, 험프리의 목표는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패배를 당하지 않을만큼의 높은 표를 얻고 대선에서 2위의 결과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험프리의 당선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9월 중순 이후 판세는 점차 험프리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정치 초보 [[스피로 애그뉴]]는 말실수를 거듭해 [[리처드 닉슨]]을 돕지 않은 반면[* 부통령 후보가 말실수를 해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구도는 이후 [[밥 돌]], [[댄 퀘일]], [[사라 페일린]]에서도 반복되는 공화당의 유구한 전통(?)이다.] 능수능란한 정치인 [[에드먼드 머스키]]는 훌륭한 어조로 닉슨을 공격해 지지율을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일부 반전 시위대까지 포용했다. [[조지 월리스]]의 지지층은 [[커티스 르메이]] 부통령 후보 지명 이후 떨어져나갔고 [[휴버트 험프리]]의 낮은 지지율에 우려하여 닉슨의 어부지리 당선을 막기 위해 험프리로 결집했다. 흑인 지지층 또한 닉슨의 [[남부전략]]과 월리스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에 반발해 확고한 민권 지지 정치인인 험프리에게 결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닉슨을 지지한 [[재키 로빈슨]]] ||<#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95hiihBZvY, width=100%)]}}} || || '''휴버트 험프리의 선거 광고 - "Ahead of His Time"''' || 9월 30일은 캠페인의 전환점이었다. 휴버트 험프리는 [[솔트레이크 시티]] 유세에서 '''북베트남 폭격 반대'''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반전좌파의 지지세를 규합했다. 이 발언은 너무나 효과적이라서 즉시 30만 달러가 기부되었으며 [[유진 매카시]]의 선거운동원들이 줄지어 험프리를 지지했다. 더 나아가 닉슨은 "단계적 베트남 철수"에 명확한 계획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험프리의 폭격 반대 공약은 험프리에게 불리한 이슈였던 베트남을 오히려 유리한 이슈로 바꿔놓았다. 닉슨은 9월 30일 폭격 반대 발언 이후 노골적으로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를 삼가고 "법과 질서"를 핵심 어젠다로 내세웠다. [[린든 B. 존슨]]은 격분했다. 존슨은 측근 중의 측근인 험프리마저 자신을 배반했다며 보좌진들에게 불 같이 화를 냈고 며칠간 그를 만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험프리가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안 존슨은 소극적으로 험프리의 북베트남 폭격 반대에 말과 행동을 맞춰줬다. 9월 30일 후 15~20%p 격차로 뒤쳐져있던 험프리의 지지율은 놀라운 속도로 올랐다.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험프리는 9월 말 29%의 지지를 보였을 뿐이지만 10월에는 '''36%''', 11월 초에는 '''42%'''로 올랐고 '''닉슨과의 격차가 오차범위 내로 좁혀졌다.''' 뿐만 아니라 험프리 지지를 꺼리던 많은 명사들도 험프리 지지를 선언했다.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록그룹 [[사이먼 앤 가펑클]], 배우 [[폴 뉴먼]]은 물론이고, 선거 며칠 전에는 '''[[유진 매카시]]의 지지를 얻어내는데도 성공한다!''' 이렇게 험프리의 참패로 끝날 것이라는 초기의 예상은 뒤집히고 누가 이길 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닉슨이 불과 '''1%p'''의 여론조사 우위를 보인채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 닉슨의 평화협상 사보타주 === 물론 닉슨도 험프리의 "10월 서프라이즈"를 지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우선 닉슨은 자신의 약점이었던 TV 토론회를 거절했다. [[휴버트 험프리]]는 몇번이나 닉슨에게 TV 토론을 제의했지만, 만약 TV 토론을 한다면 닉슨은 자신이 대선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TV 토론 제의를 지속적으로 거부하였다.[* 다만, 험프리 역시 TV 토론의 강자는 아니었다. 험프리는 1972년 민주당 경선 TV 토론회에서 [[조지 맥거번]]에게 일격을 당해 결국 경선에서 패배한 바 있다. 닉슨이 TV 토론을 거부한 것은 철두철미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존 F. 케네디]]와 관련된 나쁜 기억에 의한 심리적인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정적으로 '''닉슨은 험프리의 당선을 막기 위해 존슨과 험프리가 진행한 베트남 평화 협상을 [[사보타주]]하였다.''' 존슨은 험프리의 베트남 평화 공약을 못마땅해했지만, 그의 당선을 돕기 위해 10월 31일 "할로윈 평화조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조약이 공개된다면 험프리는 반전좌파의 더욱 열렬한 지지를 받을 것이 유력했고 그렇다면 험프리에게 표를 주기를 주저하던 진보좌파 세력이 험프리로 결집해 닉슨의 낙선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평화협상은 철저한 비밀이었지만, 닉슨은 이를 [[헨리 키신저]]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는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험프리 캠프의 외교 중책이었던 [[새뮤얼 헌팅턴]]에게 개인적으로 닉슨을 혐오한다고 말했으며 헌팅던의 부하이자 후일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조좌관이 되는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에도 접근했다. 이런 방식으로 키신저는 민주당 인사들을 안심시킨 다음 민감한 베트남 평화협상 정보를 빼내 닉슨에게 알려주었다.[* 이런 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키신저와 닉슨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닉슨이 그런 키신저를 계속 측근으로 유임시킨 것은 단순히 키신저가 해임되면 보복으로 자신의 사보타주를 알려 탄핵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리처드 닉슨은 [[존 코널리]], 존 얼리크만, H. R. 홀더만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정치인들을 불신하거나 증오했다.] ||<#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닉슨 키신저.webp|width=100%]]}}} || ||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 || 닉슨은 측근 H. R. 홀더먼(H. R. Haldeman)에게 평화 협상을 방해하라고 지시했다.[* 홀더먼은 닉슨의 더러운 손이 되어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한 온갖 정치 공작에 가담했다. 결국,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후 법의 심판을 받고 1년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며 정치 생활이 끝장났다.] 홀더먼은 [[응우옌반티에우]] 남베트남 총통에게 '''"닉슨이 당선된다면 더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해줄태니 일단 기다려라"'''라고 알려주었고, 부패한 정치가 응우옌반티에우는 이 말에 넘어가 존슨-험프리와의 평화 협상을 '''전격 중단'''한다![* 참고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리처드 닉슨은 파리 평화조약을 통해 남베트남 원조를 반토막내며 응우옌반티에우의 뒷통수를 쳤다(...). 물론 닉슨도 양심은 있어서 응우옌반티에우의 신변 보장은 해줬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자 그런것에 신경 쓸 여지도 없어졌고, 응우옌반티에우는 남베트남이 멸망하자 돈과 보석을 가득 실은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가 평생 베트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닉슨의 행위는 '''민간인'''이 정부의 외교 협상에 끼어들 수 없으며 끼어든다면 반역으로 간주하는 "로건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닉슨은 당시 어떤 공직에도 있지 않았다. ||<#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나체놀트.jpg|width=100%]]}}} || || '''평화협상 방해공작에 참여한 [[https://www.politico.com/magazine/story/2018/12/30/anna-chennault-obituary-vietnam-back-channel-nixon-1968-223299|안나 셔놀트]]'''[* 남베트남과의 연락책을 맡은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공화당원.(사진 가운데) [[클레어 셔놀트]]의 부인이었다.] || 린든 B. 존슨은 닉슨의 비행기를 [[도청]]하고 있었고 국가안전보좌관실로부터 관련 정보를 보고받고 있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험프리에게 닉슨의 비열한 사보타주를 귀띔해주었지만, 존슨과 험프리 모두 이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존슨은 이 사실이 대중에게 공개된다면, 유력 대통령 후보가 당선을 위해 대놓고 반역을 저지른 것이 되므로 미국의 국제적인 위신이 크게 추락해 베트남과 관련된 그 어떤 협상도 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했다. 험프리는 존슨이 닉슨을 도청한 사실이 알려지면 닉슨이 이를 통해 오히려 역공을 펼칠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안전하게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후일 험프리는 자신이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선거 결과 == ||<-4> '''{{{+1 {{{#fff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2> '''대통령 후보''' || '''득표수''' ||<|2> '''비고''' || ||<-2> '''부통령 후보''' || '''득표율''' || ||<-2> '''정당''' || '''선거인단''' || '''당락''' || ||<|3><#0044C9> [[민주당(미국)|[[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width=45]]]] || [[휴버트 험프리|{{{#000 휴버트 험프리}}}]][br](Hubert Humphrey) || 31,271,839 ||<|2> 2위 || || [[에드먼드 머스키|{{{#000 에드먼드 머스키}}}]][br](Edmund Muskie) || 42.72% || || [include(틀:민주당(미국))][* [[앨라배마주]]에서는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44C9; font-size: .9em" [[앨라배마주 전국민주당|{{{#ffffff '''앨라배마주 전국민주당'''}}}]]}}}으로 출마] || 191인 || 낙선 || ||<|3><#E81018> [[공화당(미국)|[[파일:F4527307-6210-4C4F-BF18-51E4D94F8A0E.png|width=45]]]] || '''[[리처드 닉슨|{{{#000 리처드 닉슨}}}]][br](Richard Nixon)''' || '''31,783,783''' ||<|2> '''1위''' || || '''[[스피로 애그뉴|{{{#000 스피로 애그뉴}}}]][br](Spiro Agnew)''' || '''43.42%''' || || [include(틀:공화당(미국))] || '''301인''' ||<#ffcc00> {{{#000 '''당선'''}}} || ||<|3><#800080> {{{+1 '''AIP'''}}} || [[조지 월리스|{{{#000 조지 월리스}}}]][br](George Wallace) || 9,901,118 ||<|2> 3위 || || [[커티스 르메이|{{{#000 커티스 르메이}}}]][br](Curtis LeMay) || 13.53% ||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800080; font-size: .9em" [[미국 독립당|{{{#ffffff '''미국 독립당'''}}}]]}}}[* [[앨라배마주]] [include(틀:민주당(미국))] 지지/일부 주에서는 [include(틀:무소속)] 출마] || 46인[* [[노스캐롤라이나]]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선거인단 1인 추가 획득] || 낙선 || ||<|2><#808080> {{{+2 {{{#fff -}}}}}} || 그 외 후보 || 511,944 ||<|2> 낙선 || || [include(틀:무소속)] || 0.70% || || '''계''' || 총 투표수 || 73,199,998 || [include(틀:공화당(미국))][br]탈환 || ||<-2> {{{#fff '''전국 득표'''}}} ||<-2> {{{#fff '''선거인단'''}}} || ||<-2> {{{#!wiki style="color:#fff; display: inline-block; width: 200px; height: 200px; border-radius: 50%; text-align: center; padding-top: 35px; background: conic-gradient(#0044C9 42%, #E81018 42%, #E81018 85%, #800080 85%, #800080 99%, #bbb 98.20%);" }}} ||<-2> {{{#!wiki style="color:#fff; display: inline-block; width: 200px; height: 200px; border-radius: 50%; text-align: center; padding-top: 35px; background: conic-gradient(#0044C9 35.5%, #E81018 35.5%, #E81018 91.4%, #800080 91.4%);" }}} || ||<#0044C9> '''험프리''' ||<#E81018> '''닉슨''' ||<#0044C9> '''험프리''' ||<#E81018> '''닉슨''' || || 42.72% || '''43.42%''' || 35.50% || '''55.94%''' || 선거 결과는 놀라울정도로 경합이었다. 선거 다음날 아침까지 누가 당선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뒤늦게 많은 언론사들이 닉슨의 당선을 확정지었다. 최종적인 양 후보간의 격차는 '''0.7%p, 약 50만 표''' 정도밖에 안되었다. 1968년 대선은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1880년]](0.11%p 차, 역대 최소),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1960년]],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1884년]],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2000년]] 대선에 이어 5번째로 양 후보간 격차가 작은 선거였다. 선거인단 격차는 301명 대 191명으로 득표율 격차를 고려한다면 제법 컸다. 그러나 이는 제3지대 후보자 조지 월리스가 46명이나 되는 선거인단을 가져갔고, 여러 경합주에서 닉슨이 아슬아슬하게 이겼기 때문이다. [[일리노이]](2.93%p 차 닉슨 승), [[캘리포니아]](3.18%p 차 닉슨 승), [[오하이오]](2.28%p 차 닉슨 승)은 닉슨의 승리를 견인했다. 이 주의 선거인단을 합치면 92명이 되는데, 만약 험프리가 아주 약간만 더 득표해 이 주에서 모두 이겼다면, 닉슨 209명, 험프리 283명으로 험프리가 되려 선거인단에서 크게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제3지대 후보자인 [[조지 월리스]]는 '''13.5%'''를 득표해, [[로버트 라폴레트]] 이후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제3지대 후보자가 되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로 가장 많은 주를 승리했다. 총 5개의 딥사우스 주 (아칸소, 루이지애나, 조지아, 앨러배마, 미시시피)에서 승리했고 45인의 선거인단을 얻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불충실한 선거인단]]을 얻어 최종적으로 4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다만, 당초 승리할 것으로 예상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주에서는 패배해 양 후보 모두의 선거인단 과반 확보를 저지한다는 목표는 좌절되었다. 닉슨이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긴 했으나 그의 득표율인 '''43.4%'''는 미국 역사상 [[에이브러햄 링컨]](39.8%), [[우드로 윌슨]](41.4%), [[빌 클린턴]](43.0%) 다음으로 낮은 당선자 득표율이다.[* 좀 더 위로 올라가면 [[존 퀸시 애덤스]](30.9%)가 최저 기록이긴 하나 존 퀸시 애덤스는 [[헨리 클레이]]와의 야합으로 당선된 사례라 애매한 감이 있다.] 예상 외로 부진한 닉슨은 격분했고 이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1972년 대선]]에서의 더 큰 압승을 갈구하게 만들어, [[워터게이트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 지역별 결과 === ||<#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68년 대선 지역별 결과(4).svg|width=100%]]}}} || ||<-4> {{{#fff '''권역별 후보 득표'''}}}[* [[미국 상무부]] 휘하 연방 인구조사국 지정 권역에 따른 구분[[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egions_of_the_United_States#Interstate_regions|#]]] || ||<#EEE> '''지역 구분''' ||<#0044C9> '''험프리''' ||<#E81018> '''닉슨''' ||<#800080> '''월리스''' || ||<#EEE> '''서부[*West 알래스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아이다호, 몬태나, 네바다, 뉴멕시코, 오레건, 유타, 워싱턴, 와이오밍][br]12,589,737''' || 5,497,551[br](43.67%) ||<#E81018> '''6,126,437[br](48.66%)''' || 895,558[br](7.11%) || ||<#EEE> '''중부[*Midwest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자스,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오하이오,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br]22,205,555''' || 9,701,398[br](43.69%) ||<#E81018> '''10,392,363[br](46.80%)''' || 1,2,064,312[br](9.30%) || ||<#EEE> '''남부[*South 앨라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루이지애나, 매릴랜드,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br]18,996,117''' || 6,275,790[br](33.04%) ||<#E81018> '''6,955,332[br](36.61%)''' || 5,739,552[br](30.21%) || ||<#EEE> '''동부[*Northeast 코네티컷, 워싱턴 D.C., 매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br]19,408,589''' ||<#0044C9> '''9,797,100[br](50.48%)''' || 8,309,651[br](42.81%) || 1,201,696[br](6.19%) || ||<#EEE> '''전국[br]81,531,584''' || 31,271,839[br](42.72%) ||<#E81018> '''31,783,783[br](43.42%)''' || 9,901,118[br](13.53%) || ||<-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타 권역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EEE> '''태평양[*Pacific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하와이][br]9,611,708''' || 4,360,545[br](45.37%) ||<#E81018> '''4,556,032[br](47.40%)''' || 637,412[br](6.63%) || ||<#EEE> '''대평원[*Prairies 콜로라도, 아이오와, 캔자스, 미주리, 몬태나,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br]6,129,021''' || 2,449,179[br](39.96%) ||<#E81018> '''3,138,492[br](51.21%)''' || 525,950[br](8.58%) || ||<#EEE> '''딥사우스[*DeepSouth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br]4,719,124''' || 1,188,764[br](25.19%) || 1,127,147[br](23.88%) ||<#800080> '''2,388,054[br](50.60%)''' || ||<#EEE> '''뉴잉글랜드[*NewEngland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br]4,824,622''' ||<#0044C9> '''2,755,453[br](57.11%)''' || 1,855,223[br](38.45%) || 202,063[br](4.19%) || }}}}}}}}} || ===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 === ||<-4><#0d164a>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투표자 집단 별 선거 결과'''[*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Hubert_Humphrey_1968_presidential_campaign#Results|#]], [[https://en.wikipedia.org/wiki/1968_United_States_presidential_election#National_voter_demographics|#]]][* "NBC"라고 각주가 적힌 것만 NBC의 조사이며 나머지는 모두 갤럽의 조사임.] || ||<|2> '''집단''' ||<#0044C9> '''험프리''' ||<#E81018> '''닉슨''' ||<#800080> '''월리스''' || || 43% || '''43%''' || 14% || ||<-4><#0d164a> '''인종''' || || '''백인''' || 38% || '''47%''' || 15% || || '''비백인''' || '''85%''' || 12% || 3% || || '''흑인''' || '''97%''' || 2% || 1%[* 196~70년대 [[https://www.nytimes.com/1974/05/12/archives/blacks-for-wallace-in-the-nation.html|조지 월리스를 위한 흑인]](...)이라는 조직이 있어 흑인들 사이에서 1%정도 월리스 지지율이 나왔다고 한다.] || ||<-4><#0d16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