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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내티 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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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내티를 연고로 하는 내셔널 리그/중부 지구 소속의 MLB 프로야구단. 팀명인 Reds는 초창기 팀명 Red Stockings를 줄인 것이다.[6]
다만 여기서 말하는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1881년 창단)는 메이저리그 원년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1866년 창단)와 이름만 같고 다른 구단이다. '세계 최초의 프로야구팀'의 적통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유산을 이어받은 구단은 오히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된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도 신시내티가 아닌 애틀랜타를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팀으로 공인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시내티 레즈/역사 참조.
구단주의 재산이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주들 중 꼴찌이고 광역권의 인구도 두 번째로 적은 스몰마켓이다. 그러나 5번의 우승을 비롯해 빅 레드 머신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의 전성기가 있어, 스몰마켓치고는 강팀의 이미지를 가졌던 구단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추신수가 뛰며 관심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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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 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뉴욕 양키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등이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와는 오하이오 주 지역 라이벌. 인터리그에서도 매년 붙는다. 오하이오 지역 라이벌치고는 두 팀간의 선수 이동이 원활한 편이다. 2010년대만 보더라도 각 팀의 프론트라인급 선수인 추신수, 제이 브루스 등의 이동이 있었다.
'빅 레드 머신' 시절에 자주 부딪혔던 팀들과 라이벌 관계인데 특히 다저스와는 1970년대 '블루vs레드'의 두 상반되는 이미지로 경쟁했다.[7] 그리고 다저스를 제치고 서부지구를 우승하면 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동부의 해적들과 맞붙었고[8] 두 팀이 중부지구로 배정된 1994년 이후로는 그 경쟁의식이 더 심화되어 2000년대에는 드래프트 1순위를 놓고, 2010년대는 와일드카드 시리즈 두 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그 외에 월드 시리즈에서는 유독 양키스와의 만남이 많았고, 인터리그 매치업에서도 간간이 양키스와 맞붙는다.
추신수의 인터뷰나 증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덕아웃 분위기는 약간 오글거릴 정도로 진지하고 끈끈한 편이다. 조이 보토가 추신수에게 '우리는 왜 야구라는 스포츠를 선택해서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9] 라 물어보면 브랜든 필립스가 '야구만큼 다른 스포츠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또 야구만큼 잘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으니까.' 라 대답하는 식.
2019년까지, MLB 30개 전 구단 중 일본인 선수를 한 번도 데려온 적 없는 유일한 팀이었다.(마이너리그 제외) 일본 선수들이 MLB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지 오래 된 만큼 모든 구단이 일본인을 다 한번씩은 영입해 보았는데, 역사가 깊은 구단이면서도 여태껏 일본인 선수가 한번도 거쳐가지 않은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 물론 일본인 이외에 한국인은 3명이나 거쳐간 만큼 딱히 아시안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케이스. 그러다 2019년 오프시즌에 아키야마 쇼고 포스팅에 성공 100년 역사상 첫 일본인 선수를 맞이한 구단이 되었다.[10]
팀컬러가 빨간색이지만, 세인트 패트릭 데이처럼 특별한 날에는 녹색 유니폼을 입기도 한다.
이 팀의 구단주를 역임했던 마지 쇼트(1928~2004)는 팀의 역사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숱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흑인에 대한 온갖 비하 발언에서부터 흑인 직원을 무리하게 해고하면서 당한 논란, 일본인이나 아시아인이 쓸데없이 미국에서 업적을 쌓고 있다라는 발언, 그리고 심각한 게 1996년 5월에 ESPN과 가진 인터뷰에서 난데없이 아돌프 히틀러 찬양 발언을 해버렸다.
결국 이런 온갖 논란으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의하여 1999년에 반강제적으로 6700만 달러에 팀을 팔았고 이후 2004년에 골초였던 탓에 폐에 병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가 설립한 재단이 신시내티 대학교에 200만 달러를 기부받아 야구장을 짓고 마지 쇼트 스타디움이라 명명했는데, 2020년에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반 인종차별 시위가 벌어지면서 이 야구장 역시 항의를 받았고, 결국 신시내티 대학측은 야구장 이름을 수정하기로 함과 동시에 도서관 자료실에서도 마지 쇼트의 기록을 삭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업가로서 재능이나 레즈 구단 역사에서 인재였으나, 저런 온갖 망언을 하두 많이 저지른 자업자득이었다.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 문서 참조.
||1. 개요[편집]
신시내티를 연고로 하는 내셔널 리그/중부 지구 소속의 MLB 프로야구단. 팀명인 Reds는 초창기 팀명 Red Stockings를 줄인 것이다.[6]
다만 여기서 말하는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1881년 창단)는 메이저리그 원년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스(1866년 창단)와 이름만 같고 다른 구단이다. '세계 최초의 프로야구팀'의 적통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유산을 이어받은 구단은 오히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된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도 신시내티가 아닌 애틀랜타를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팀으로 공인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시내티 레즈/역사 참조.
구단주의 재산이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주들 중 꼴찌이고 광역권의 인구도 두 번째로 적은 스몰마켓이다. 그러나 5번의 우승을 비롯해 빅 레드 머신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의 전성기가 있어, 스몰마켓치고는 강팀의 이미지를 가졌던 구단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추신수가 뛰며 관심을 받았었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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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모저모[편집]
라이벌 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뉴욕 양키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등이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와는 오하이오 주 지역 라이벌. 인터리그에서도 매년 붙는다. 오하이오 지역 라이벌치고는 두 팀간의 선수 이동이 원활한 편이다. 2010년대만 보더라도 각 팀의 프론트라인급 선수인 추신수, 제이 브루스 등의 이동이 있었다.
'빅 레드 머신' 시절에 자주 부딪혔던 팀들과 라이벌 관계인데 특히 다저스와는 1970년대 '블루vs레드'의 두 상반되는 이미지로 경쟁했다.[7] 그리고 다저스를 제치고 서부지구를 우승하면 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동부의 해적들과 맞붙었고[8] 두 팀이 중부지구로 배정된 1994년 이후로는 그 경쟁의식이 더 심화되어 2000년대에는 드래프트 1순위를 놓고, 2010년대는 와일드카드 시리즈 두 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그 외에 월드 시리즈에서는 유독 양키스와의 만남이 많았고, 인터리그 매치업에서도 간간이 양키스와 맞붙는다.
추신수의 인터뷰나 증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덕아웃 분위기는 약간 오글거릴 정도로 진지하고 끈끈한 편이다. 조이 보토가 추신수에게 '우리는 왜 야구라는 스포츠를 선택해서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까?'[9] 라 물어보면 브랜든 필립스가 '야구만큼 다른 스포츠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또 야구만큼 잘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으니까.' 라 대답하는 식.
2019년까지, MLB 30개 전 구단 중 일본인 선수를 한 번도 데려온 적 없는 유일한 팀이었다.(마이너리그 제외) 일본 선수들이 MLB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지 오래 된 만큼 모든 구단이 일본인을 다 한번씩은 영입해 보았는데, 역사가 깊은 구단이면서도 여태껏 일본인 선수가 한번도 거쳐가지 않은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 물론 일본인 이외에 한국인은 3명이나 거쳐간 만큼 딱히 아시안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케이스. 그러다 2019년 오프시즌에 아키야마 쇼고 포스팅에 성공 100년 역사상 첫 일본인 선수를 맞이한 구단이 되었다.[10]
팀컬러가 빨간색이지만, 세인트 패트릭 데이처럼 특별한 날에는 녹색 유니폼을 입기도 한다.
이 팀의 구단주를 역임했던 마지 쇼트(1928~2004)는 팀의 역사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숱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흑인에 대한 온갖 비하 발언에서부터 흑인 직원을 무리하게 해고하면서 당한 논란, 일본인이나 아시아인이 쓸데없이 미국에서 업적을 쌓고 있다라는 발언, 그리고 심각한 게 1996년 5월에 ESPN과 가진 인터뷰에서 난데없이 아돌프 히틀러 찬양 발언을 해버렸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녀는 부랴부랴 나는 나치에 동조하는 게 아니며 독일(독일계 3세였다.)에 남은 사촌오빠들이 2차대전 당시 강제징집당해 전쟁터에서 전사하였기에 그런 나치를 좋게 볼 수 없다 뭐다 변명을 해야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에게 2만 5천 달러 벌금과 1년 직무정지형을 당해야했다. 이로 인한 GM모터스로부터도 고소당해 소유했던 셰보레(Chevrolet) 딜러십을 팔아야 했다.“모두가 히틀러는 처음에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도를 넘었지요(Everybody knows he was good at the beginning, but he just went too far).”
결국 이런 온갖 논란으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의하여 1999년에 반강제적으로 6700만 달러에 팀을 팔았고 이후 2004년에 골초였던 탓에 폐에 병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가 설립한 재단이 신시내티 대학교에 200만 달러를 기부받아 야구장을 짓고 마지 쇼트 스타디움이라 명명했는데, 2020년에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반 인종차별 시위가 벌어지면서 이 야구장 역시 항의를 받았고, 결국 신시내티 대학측은 야구장 이름을 수정하기로 함과 동시에 도서관 자료실에서도 마지 쇼트의 기록을 삭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업가로서 재능이나 레즈 구단 역사에서 인재였으나, 저런 온갖 망언을 하두 많이 저지른 자업자득이었다.
3.1. 홈 구장[편집]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 문서 참조.
3.2. 영구결번[편집]
1. 프레드 허친슨 (Fred Hutchinson)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명투수 출신인 젊은 감독으로 1961년에 팀을 월드시리즈에 올려놓는 등 명장으로 가는 도중, 폐암으로 겨우 45세였던 1965년에 타계했다. 이를 기려 영구결번. 이후 허친슨을 기려 불굴의 정신력과 투혼을 보여주는 선수들에게 허치 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5. 자니 벤치 (Johnny Bench) : 1970년대를 대표하는 명 포수이자, 빅 레드 머신의 주축 선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포수 중에 가장 높은 득표율로 입성한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는 벤치의 결번이지만, 1940~1942년에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비운의 포수 윌러드 허시버거[11] 의 영구결번이기도 했다.
8. 조 모건 (Joe Morgan) :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리더. 역대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 빅 레드 머신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1970년대 팀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 (지금은 은퇴했지만) ESPN의 선데이 나잇 베이스볼을 중계한 해설위원으로도 유명하다.
10. 스파키 앤더슨 (Sparky Anderson) :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감독으로 팀 최고의 전성기를 지휘한 명장.
11. 배리 라킨 (Barry Larkin) : 어릴 때부터 동경해온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에서만 19년을 뛰면서 빅 레드 머신 시대 이후의 신시내티를 이끌었던 팀의 리더이자, 1990년대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격수. 201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2012년 8월 25일 영구결번되었다.
13. 데이브 콘셉시온 (Dave Concepción) :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주장이자 유격수로 맹활약한 선수. 9번의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인기도 좋았고, 5번의 골드글러브에서 알 수 있듯이 수비력도 좋았던 선수.
14. 피트 로즈 (Pete Rose) : 1963년 데뷔 이후 1978년까지 19시즌을 뛰었고 타출장 0.307 / 0.379 / 0.425 에다가 통산 4,256안타 152홈런 1,036타점을 기록했다. 여러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신인왕 출신에, 신시내티 유니폼을 입고 12차례 올스타(1965, 1967-1971, 1973-1978)에 뽑혔다. 1973년에는 MVP에 선정됐다. 그러나 1989년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팀 경기에 베팅을 한 것이 걸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영구 제명된 것 뿐만 아니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첫턴에 100% 입성할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후보 자격마저도 박탈되었다. 커미셔너의 강경한 입장과 미국 내 여론 때문에 구단에서도 제명된 이후 구단과의 관계도 끝난 줄 알았으나 2015년 신시내티 레즈 팬들이 선정한 '프랜차이즈 4'[12] 에 뽑히며 팬들의 지지가 보이자 구단에서 2016년 구단 명예의 전당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18. 테드 클러주스키 (Ted Kluszewski) : 1950년대 신시내티를 이끈 강타자로서 4번의 올스타와 1번의 홈런왕에 선정되었었다. 영구결번이 되기에는 전성기가 너무 짧았으나 타격 코치로서 1970년대 신시내티 최고의 전성기를 창조해낸 공로로 영구결번되었다.
20. 프랭크 로빈슨 (Frank Robinson) :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성기 주역이었지만, 그 전에 신시내티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영구결번. 다만, 신시내티에서는 버림받았기 때문에 볼티모어의 레전드로 더 기억된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
24. 토니 페레즈 (Tony Pérez) :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1루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1루수다.[13] 쿠바 국적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
42. 재키 로빈슨 (Jackie Robinson) : 전 구단 영구결번.
웨이트 호이트 (Waite Hoyt) :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1920년대 뉴욕 양키스에서 전성기를 보냈던 투수다. 뉴욕 자이언츠에서 데뷔했지만 곧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 됐고, 약간의 가능성을 내보인 뒤 에이스급 투수 마이크 맥날리, 올스타급 포수 월리 섕 등과 함께 뉴욕 양키스로 옮겨갔고 그 이전에 같은 팀에서 트레이드 되었던 베이브 루스와 함께 1920년대를 지배하며 그 곳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30대 이후 기량이 떨어졌다는 판단 하에 살인타선의 일원이던 쾨니히와 함께 트레이드 된 뒤 이후 거의 매년 트레이드 되었다. 은퇴후 신시내티의 라디오 해설자로 1942년부터 1965년까지 활동했다.
조 넉스홀 (Joe Nuxhall) : 올스타 투수 출신. 잠시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와 LA 에인절스[14] 에서 활동할 때를 제외하면 평생 신시내티에 몸을 바친 홈보이 출신. 사실은 다른 걸로 더 유명한데..역대 최연소 선수 출신으로 유명하다. 무려 15살에 메이저리그에 데뷰. 당시 2차대전 중이라 선수가 적어서 가능했던 것. 물론 등판한 뒤 상대한 스탠 뮤지얼에게 학살당하고 20대 초반까지 메이저리그를 못 밟아 봤다. 1967년부터 2004년까지 주로 아래의 마티 브레너먼과 함께 호흡을 맞추어 라디오 중계를 해왔다.
마티 브레너먼 (Marty Brennaman) : 조 눅스홀과 1974년부터 호흡을 맞춰 라디오 캐스터로 활동해왔다. 현재는 아들인 톰 브레너먼도 대를 이어 함께 팀의 라디오 방송을 함께 했었다.[15]
이상은 구단 해설자로 기념하는 사람들로서 선수 시절 활약에도 불구하고, 선수 시절 번호가 결번된 것이 아니라 그냥 기념만 하고 있다.
현역 선수들 중 가장 영구 결번될 확률이 높은 선수는 선수 생활 전체를 한 팀에서 보내고 있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출루왕 조이 보토(19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