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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정

덤프버전 :

강태정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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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청보 핀토스|청보 핀토스]] 등번호 72번}}}
(1985)

강태정
(1986~1987)


팀 해체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91번}}}


강태정
(1988)


윤현수
(1996)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71번}}}
강만식
(1996~1997)

강태정
(1998)


유지훤
(1999~2003)



파일:야구인 강태정.jpg

이름
강태정(姜泰貞)
출생
1945년 1월 23일
사망
2021년 12월 12일 (향년 76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삼덕초 - 대구중 - 대구상고 - 건국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제일은행 (1963~1966)
육군 (1967~1970)
한국전력 (1971~1972)
지도자
대구상업고등학교 감독 (1973)
건국대학교 감독 (1974~1980)
한국화장품 감독 (1981~1985)
청보 핀토스 수석코치 (1986)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7~1988)
OB 베어스 수석코치 (1998)[1]
OB 베어스 2군 감독 (1998)[2]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사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야구 감독.


2. 선수 경력[편집]


대구상고를 졸업 후, 실업야구팀 제일은행과 한국전력에서 활동했으나 부상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28세라는 젊은 나이로 모교인 대구상고 감독으로 부임했다. 1973년 장효조를 앞세워 전국 대회 3관왕에 오르며 일약 전도유망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강태정은 선수들에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권장하고 순발력을 키우는 훈련을 강조하며, 그 결과 벌떼처럼 모두 뛰는 발야구와 매 경기 라인업을 바꿀 수 있는 토털 베이스볼을 구사하며 야구계에 이름을 날렸다.

그 뒤 건국대 감독을 거쳐, 프로 출범 시 여러 구단의 감독 내지는 코치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감독으로 줄곧 재직했다. 만학도로 건국대학교 감독으로 스카우트된 것을 계기로 이 대학 체육학과에 편입하면서 중단됐던 대학(경북대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해 학사 학위를 받고, 1976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강단에도 몇 번 섰다고 한다.

이렇듯 실업무대를 꼿꼿이 지켜오던 강태정은 1986년 청보 핀토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하면서 결국 프로에 첫 발을 들였다. 당시 감독으로 임명된 허구연의 현장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임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허구연이 성적 부진으로 중도 경질되면서 감독대행으로 1986년 잔여 시즌을 소화하고, 1987년 정식 감독에 취임하였다.

1987년부터 이해창 등 발 빠른 선수들을 앞세워 특유의 발야구 위주로 공격 전술을 개편하며 상대 야수진을 흔들었고,[3] 양상문, 임호균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투수진을 보강하며 시즌 초반 4승 1패로 돌풍을 일으키는가 싶었으나... 이후 밑천이 바닥나며 바로 꼴찌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초에 새로 창립한 라면회사인 청보식품의 홍보효과를 노리고 야구단을 창단했는데, 청보식품은 예상과 달리 라면시장에서 크게 고전했고 최하위를 헤매는 야구단의 역홍보효과까지 겹치며 이래저래 어려운 상황에 모기업인 풍한방직마저 경영난에 빠져 법정관리에 들어간 사태로 인해 선수단이 동요한 것이 가장 컸다고 한다.

결국 청보는 1987 시즌을 끝으로 태평양화학에 매각되며 태평양 돌핀스로 간판을 바꿔달았고, 강태정은 일단 감독으로 유임되었지만 1988년 시즌 초반 1승 13패라는 최악의 기록을 남기며 결국 중도해임 되었다. 하지만 감독 재임 시절 유신고 출신 고졸신인 박정현을 대학과의 스카웃 전쟁 끝에 영입하고, 고교 졸업 후 오갈데 없는 신세였던 경북고 출신 투수 최창호를 받아들여 연습생으로 키우는 등, 이듬해 태평양이 투수왕국으로 발돋움 하는 터전을 일구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 뒤 OB의 수석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하고, 일구회 회장을 지냈다. 2000년대 들어서는 SBS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다. 경상도 사투리로 엄청 버벅거려서 듣기엔 불편했지만 주로 아마 야구 중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4. 사망[편집]


2021년 12월 12일 저녁에 지병이었던 암으로 투병하던 중 향년 76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16일 오후 뒤늦게 알려졌다. 코로나19 확산 상황이 너무나 위중한 탓에 대외적으로 부고를 알리지 못하고 야구 원로인 모임인 일구회 회원들에게만 부고가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윤동균 일구회 회장, 이해창 前 선수, 김광수 전 야구코치 등 일부 야구인들이 빈소를 찾았다고 한다.

[1] ~6월 21일[2] 6월 22일~[3] 당시 팀 도루 1위였다. 청보 발야구의 선봉장 이해창은 1987년 도루왕 타이틀을 손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