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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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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高麗 | Goryeo (Koryŏ)[1]

파일:고려 의장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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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2]
▲ 14세기 중반 고려의 강역
1350년대 수복한 영토
1370년대 수복한 영토
(시대별 강역은 역사 단락 참조)
918년 7월 25일~1392년 8월 13일
(474년 19일)
시대 구분
건국 초기 (후삼국시대)
문벌귀족기
무신정권기
원 간섭기 (권문세족기)
말기 (반원개혁기)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태봉
조선
영토
한반도[3] 및 부속도서[4]
울릉도(930)
제주도(1105)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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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철원 ,(918 - 919),[5]
개경 ,(919 - 1232, 1270 - 1382, 1383 - 1390, 1391 - 1392),[6]
강도 ,(1232 - 1270),[7]
남경 ,(1382 - 1383, 1390 - 1391),[8]
서경 ,(921 - 1136),[9]
민족
고려인 (한민족)[10], 한족[11]
북방 민족 (말갈·여진·거란 등)[12]
언어
고려어 (중세 한국어), 한문
문자
한자, 구결
국교
대승 불교[13]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중앙 정치 제도
2성 6부제(918~1170)
무신중방(1170~1270)
첨의부 4사제(1270~1356)
2성 6부제(1356~1392)
국가원수
대왕(大王)[14]
황제(皇帝)
(천자)[15]
대왕(大王)

(제후)[16]
왕조
고려 왕조
국성
개성 왕씨 (開城 王氏)
계승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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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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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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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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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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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국 요동 지역

1. 개요
2. 국호
5. 행정
5.1. 중앙 행정
5.2. 지방 행정
5.3. 형벌 제도
7. 경제
9. 외교
13. 고려사 연구의 어려움
15. 같이 보기
15.1. 정치
15.2. 행정
15.3. 군사
15.4. 경제
15.5. 문화
15.6. 건축
15.7. 고려를 다룬 사서
15.8.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
15.9. 기타
1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려(高麗)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4년간 한반도에 위치했던 불교왕국이다.

918년 왕건이 주군이었던 태봉궁예역성혁명으로 몰아내면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다.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왕건이 936년에 통일했고, 이후 약 456년 동안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했는데 918~936년의 18년은 엄밀히 고려시대가 아닌 후삼국시대다. 그러므로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부터 고려가 멸망한 1392년의 역사니까 당연히 456년이다.

1392년에 이성계역성혁명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함경북도의 상당수 지역들을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들을 지배했다.[17]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족)와 북송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막아내며 훗날 요송과 더불어 균형적인 삼강 체제를 이룰만큼 강한 국력과 위세를 가진 120여년간의 황금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다 중기에 들어서며 내부적으론 문벌귀족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요와 북송을 차례로 쓰러트린 금나라(여진족)가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이후 몽골 제국과 30년간의 기나긴 전쟁 끝에 결국 입조하여 원의 제후국이 된다.

다만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몽골 제국에 멸망당하는 동안, 고려는 비록 조정은 강화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 정규군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을 하게 된다. 몽골군 초기 침입군의 총사령관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살리타이인데, 이 사람은 무칼리가 이끌던 잘라이르부 출신으로 이 부족은 당시 최강대국이자 몽골족 최대의 원수 금나라와 여러 차례 정면으로 충돌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스님인 김윤후에게 죽었다고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살리타이 본인도 금나라와의 전면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였던 초기 몽골에서 능력이 없었으면 그 정도 지위까지 가지도 못했을 테고. 이후에는 원정 병력의 정예도가 좀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걸 보면 전쟁 후반부에도 몽골 수뇌부는 베트남의 쩐흥다오를 포함하여 고려가 끈질기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전과 기록을 보면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무신정권의 방치 속에서 일어난 일방적인 초토화였는지 논란이 많다.

쿠빌라이의 해당 발언 또한 당시 쿠빌라이는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전이었고, 대칸의 자리를 두고 아릭 부케와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은 아릭 부케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전임자였던 뭉케 칸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릭 부케를 찍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쿠빌라이는 비몽골족 출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한화정책을 추진한 이면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외국의 사신이, 그것도 외국의 태자가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로서는 기뻐하는게 당연했다. 한마디로, 쿠빌라이의 저 말은 고려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거나 우대해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고려 태자에 대한 기특함에서 나온 거창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당시 고려는 적절한 외교술을 벌인 것으로 평가받는데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이 그러하다. 하지만 여몽전쟁 당시 고려가 정말로 제대로된 외교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의견 또한 많다. 임용한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당시 고려 조정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를 참조.

결과적으로 고려가 비록 큰 피해는 입었지만 나라의 멸망은 피하였고, 이후 몽골제국에 신속하여 속국·속령이 되었다. 원 간섭기 고려와 몽골의 종속 관계를 두고, 독립국으로 유지되는 한편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이중적인 현상 때문에 당시 고려의 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몽관계를 전통적 한중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조공책봉관계론'이 있으며, 김호동과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제국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여 각각 대몽골 울루스의 외연적 속국·카안 울루스의 내포적 속령으로 규정하거나 '투하령(고려왕부)'으로서 재래왕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으나 그 강역 자체를 고려국왕이 배타적으로 점유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견해는 학계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한편 샤오지칭(蕭啓慶)은 당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하에 놓인 보호국에 준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蕭啓慶(1983),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

이후 고려 후기 이 쇠퇴하자 공민왕반원정책을 펼치면서 기존의 몽골-고려의 종속적인 지배 구조를 재편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렸기 때문에,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

공민왕 이후 제대로 된 독립국으로 회귀한 뒤에도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시해, 권신 이인임의 전횡, 홍건적왜구의 대규모 침공 등으로 내우외환이 이어지다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원정군 사령관으로 보냈던 장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원정군 병력으로 개경을 함락하고 최영우왕을 몰아내면서 사실상 실세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왕실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1392년에 이성계 본인이 국왕에 등극하면서 왕씨 왕조는 멸망을 맞이했고 고려로 남아있었던 국호도 1393년에 조선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호인 고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을 실천하여 초기부터 거란에게 강경책을 구사하는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존속기간 내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요나라와의 총력전을 마다하지 않고 고구려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자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을 과감히 단행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무신들을 차별대우하며 문신들을 우대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도 많이 일어났고, 국가 역시 무신정변 이후로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고려는 초기 때부터 문신들을 우대하고 반대로 무신들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현종 시절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었다. 거란의 제3차 침입을 대비하던 도중에 일어났던 이 반란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을 빨게 만들어버렸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침임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3년차 1012년으로 그러니까 반란 2년 전이었다.

이때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에 이미 거란과 산발적으로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년 ~ 1011년, 3차는 1018년 ~ 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7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는 피해를 입긴 했지만 거란도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고려의 땅을 빼앗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조치는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뿔난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을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모두 들어줬다. 그러나 몇 달 안가 현종이 이자림[18]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서경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하면서 의외로 싱겁게 끝나게 된다. 이는 한 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운몽 연회의 고사를 차용한 것이었다. 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 비중이 적은 사건이다.

고려시대는 종교적으로는 통일신라의 대를 이어서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한반도의 전통문화와 현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치관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은 적다고 사료되지만. 한국 불교의 많은 의례들이 사실상 고려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불교 신자들의 수가 전체 인구중에 20%가 넘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영향력이 적다고도 할 수 없겠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교 즉, 성리학 또한 안향에 의해 고려 중기 때 도입된 사상이니 이 또한 고려의 영향력이 후세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고려라는 이름은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로는 고려인삼, 고려은단, 고려아연이나 자영업으로는 전국의 그 수많은 고려 삼계탕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에서 명실상부 조선, 신라와 함께 기업체나 가게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국명이다. 고려대학교, 북한의 고려항공고려호텔 역시 유명하다. 이것은 고려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체성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일명 '고려청자'라고 불리는 고려 시대 상감청자는 지금도 제작하는 도공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표 공예 장식품 중 하나로서 대접받고 있다.


2. 국호[편집]


언어별 명칭
한국어
고려(高麗)[19], 고려 왕조(高麗王朝)
중국어
高麗[20]/高麗王朝(정체), 高丽 /王氏高丽 (간체)
일본어
高麗(こうらい(고라이), 高麗(こま(고마)[21]
베트남어
Cao Ly
몽골어
Солонгос[22], Kuryo[23]
러시아어
Корё
페르시아어
گوریو
아랍어
كوريا, غوريو
영어
Koryŏ, Goryeo, Korea, Corea

국호는 고(구)려의 국호를 그대로 이었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것.

일각에서는 여전히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조건 어거지로만 보기도 뭐한 게 중국 쪽 일부에서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인식은 단순히 동북공정의 여파가 아닌 오래전부터 있던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 서희와 요나라 소손녕과의 회담에서도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통일 신라가 지배한 적이 없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의 영토 획득에 고려는 정당한 권리가 전혀 없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서희가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하여 평양을 수도 중 하나인 서경으로 삼은 나라이니 거란이야말로 그들이 동경요양부(옛 고구려의 요동성, 현 랴오양시)로 삼은 고구려의 옛 땅을 정당한 권리도 없이 점거한 것이라고 반론하여 소손녕의 오해를 정정하여 지적했다. 이후 소손녕 또한 서희의 말에 수긍한다. 와전되어 서희가 소손녕을 속였다고 보는데 서희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애초 고려의 국호 자체가 고구려 계승을 선포하며 만들어졌고, 서경은 분사제도로 고려의 수도 개경의 일부 관아들이 서경에도 설치되는 등 제 2의 수도로 대우를 받던 곳이다. 훈요 10조에도 서경의 특별 대우는 다른 누구도 아닌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직접 남긴 것이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소손녕은 유목민족인 거란족이었기 때문에 비록 거란족의 요나라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세워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걸 '보편적인 당대 중국인의 시각'으로 볼 수 없다. 화북은 커녕 연운 16주 같이 화북의 북쪽 매우 일부만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후 서긍을 포함한 송나라인들의 인식을 비추어볼 때 오히려 고구려의 정체성을 고려인들이 이었다는 인식이 한족 사회에선 지배적이었다.

애초 삼국이 현존하던 당대 중국에서는 삼한이라고 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족속으로 퉁쳐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당장 중국에서 죽은 고구려인들의 묘지 비문만 봐도 요동삼한인이라고 지칭해놓은 게 상당하다. 게다가 요나라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정통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송나라의 지식인인 소식은 정작 고려를 비칭할 때 고구려를 까는 것과 마찬가지의 단어인 맥적(맥족 도적)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송의 서긍이 고려를 직접 방문하고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는 고씨 왕조가 망했다가 왕씨 왕조가 들고 일어난 걸로, 즉 고구려에서 고려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그 외 원이 새로 일어난 명에 틸탈 털려 북원으로 전락하던 시기에도 "북원의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고려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라는 기록도 있다. 요양성은 옛 요동성을 가리키는데, 이에 의하면 원나라 장수와 고려 정부 모두 요동이 옛날에는 고려의 땅이었다고, 즉 '고구려=고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24] 한편, 좀 더 현실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자면 계승의식은 고구려를 표방했지만 실질적 세력권은 고구려의 옛 중심지를 점거하는 덴 성공했으나 북방영토는 대거 상실하고 그 대신 백제와 신라 영토의 비중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신라+백제를 다 품게 된 것. 이는 한족이란 개념이 하상주나 진이 아닌 한나라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해 더 자세하게는 고려/평가 항목 참조.

고구려의 국호는 초기엔 고구려, 구려, 고려 등의 여러가지로 불렸는데 장수왕 대부터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사용됐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고려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식 역사서가 편찬될 만큼 한문학이 발달된 시기라 후연, 후당, 후조 같이 자국을 고려(고구려)땅에서 일어난 나라라고 "후고려(後高麗)"라고 표현한 기록이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태자사낭공대사비나 대각국사문집.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후라는 앞글자는 건국한 땅의 옛국가에서 따온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 없는 표현이다.

현대에 고구려를 당대에 널리 사용되던 고려 대신 고구려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뒤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둘째로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궁예의 후고구려 역시 개국 당시의 처음 국호는 고려였다. 이후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긴 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궁예의 고려는 후고구려라고 호칭된다. 때문에 한국의 외국 이름인 'K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언급했듯이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이어진 KOREA라는 호칭의 근원이 고구려임은 변함이 없다. 코리아의 어원이 왕건의 고려라고 해도 그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전달된 국호이기 때문이다.

조선 초 기록인 《동국정운》 기준으로 '高麗'의 중세 한국어 발음은 '고ᇢ롕〮(예일: kwòwlyéy)'였다.[25] 고려시대 당시의 발음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3.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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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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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정[편집]



5.1. 중앙 행정[편집]


고려는 초기에는 태봉과 신라의 고유 관제를 바탕으로 광평성을 최고 중앙관부로 두었고, 이후 성종 때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차용한 2성 6부제와 더불어 송의 중추원(추밀원), 삼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26] 이에 태봉의 내의성, 내봉성, 광평성으로 이어지는 3성의 전통과 당의 3성제도를 결합하였다.

  • 내의성 → 내사문하성 → 중서문하성이되었으며,
  • 내봉성[27]/광평성 → 어사도성 → 상서성으로 이어졌다.
현재 연구자 및 교과서에 따라 3성 6부, 2성 6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명예직 (최고 직위)
    • 3사 - 태사, 태부, 태보 / 정1품
    • 3공 - 태위, 사도, 사공 / 정1품
    • 중서령 (내사령) - 중서문하성 소속, 인신지극, 수상을 역임한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부여 / 종1품
    • 상서령 - 상서성 소속, 왕족 종친(제왕)에게 수여 / 종1품

  • 중서문하성 소속 재신 (5재, 8인)
    • 문하시중 - 이상 종1품, 수상(총재), 실질적인 최고 관직
    • 문하평장사
    • 중서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 아상(2재) / 정2품
    • 참지정사 - 3재
    • 정당문학 - 4재
    • 지문하성사 - 5재 / 종2품

  • 중추원 소속 추신 (6추, 8인)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중추원부사 (부사) - 2인 / 정3품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 중추원직학사 (직학사) - 충렬왕 때 추가[28]

이상 5재 6추 16명을 양부 재상이라 부르며 이들이 고려 재추회의 (재상회의)에서 국정을, 도병마사 (후기에는 중추원)에서 군정을 주도하였다.

  • 상서성 소속
    • 상서령(尙書令: 종1품)
    •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명
    • 지성사(知省事: 종2품) 1명
    •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명
    •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종5품) 각 1명
    •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정6품) 각 1명
    • 도사(都事: 종7품) 2명

  •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달리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이 항상 보임하지는 않았던 관계로 판이부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수상 또는 총재라 일컬었다. 문하시중이 보임한 경우 판이부사를 겸하고 결원인 경우 차석의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맡았다.

  • 중서문하성은 종2품 이상의 재신과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3품 이하의 낭사(간관, 성랑)로 구성되었다. 문하시중 이하 지문하성사까지가 재신이며 간의대부 이하 정언까지를 말한다.

  • 상서성은 종1품 상서령 및 정2품 좌우복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신들이 6부 판사를 겸직하였고 정3품 6부 상서를 추신(추밀)들이 겸직한 경우가 많아 재추에 의한 정치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재추에 문벌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한 관료재신들이 있었으며 또한 6부 판서를 모두 재신이 겸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실제로는 왕권이 강했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상서성의 위상을 중서문하성의 아래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재신(재상)의 범위에 좌우복야, 지성사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추원(후에 추밀원)은 왕명의 출납 및 궁중의 숙위, 군기를 담당하였으며 종2품 이상의 추밀(추신)과 정3품 이하의 승선으로 구분되었다. 추밀(추신)은 재추16인에 포함되는 고려의 재상이었으며 추부에 있었고 정3품 이하의 승선(조선시대의 승지)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승선방에 입직하였다.

  • 어사대는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사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낭사(郎舍)와 상호불가분한 관계에서 직무가 수행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임무에 봉박(封駁)·간쟁(諫諍)·시정논집(時政論執)·서경(署經) 등의 간관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사대의 관원에게는 불체포·불가범(不加犯)·면계(面戒: 면전에서 충고함.) 등의 특권과 여러 은전이 부여되었다. 또한 청요직(淸要職)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학식·출신성분·인품·외모 등의 여러 가지 자격과 조건이 요구되었다. 즉 역임자들은 과거 출신자로서 인품이 청렴강직하고, 외모가 뛰어난 문벌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어사대는 조선시대의 의금부와 사헌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이 있었으며 수상(총재)을 맡은 판이부사가 사를 맡았다. 이외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 원 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 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반원 자주 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 때 시중인 최영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하우시중이 된 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 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
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 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 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5.2. 지방 행정[편집]


사방 경계를 보면,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고려사』 권56, 지제10, 지리(地理)1 서문



파일:고려의 12목 위치 이미지.png


파일:고려 행정구역.svg

10세기 고려 12군의 위치(좌), 11세기 고려의 행정구역(우) 출처는 『대한민국 국가 지도집』, 국토지리정보원.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 (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였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원래 주요도시를 의미하는 州가 붙은 도시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이유로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역들의 州자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문종대에는 서울 강북 역시 남경으로 승격해 삼경의 한 축을 이루었다. 다만 서경의 지위는 동경, 남경과 같은 일반적인 '지방 3경'이 아닌 개경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 혹은 '또 다른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상도의 이중 수도 시스템에 비슷했다. 서경의 수도로서의 확고한 지위는 훈요십조, 분사제도, 서희의 발언, 서경별곡의 가사 등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다만 그럼에도 개경보다 왕이 머무는 기간이 짧았고 주요 정쟁도 개경에서 벌어졌으며 고려왕릉 한 기도 평양 근교에 없기 때문에 '제1의 수도' 개경의 지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개경에 비한 은근한 차별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묘청의 난. 하지만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그저 그런 '지방 3경'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 역시 다르게 생각해보면 동경, 남경보다 여전히 우월한 서경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경을 예로 들면 반란이 날 경우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나가떨어졌지만 서경은 같은 상황에도 3경 미만으로 격하당한 적이 없다. 묘청의 난 당시에도 따지고 보면 개경의 조정(중앙정부)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러낸 사건임에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사이에 선을 보다 확실하게 긋는 수준에 그쳤지 서경을 3경 미만의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29], 교주[30], 서해[31]이며 양계는 북계[32]와 동계[33]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 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 고려에서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해 수도로서의 서경을 존중하였지만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이전에 비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 강북)을 설치했다. 당시 동경이라 불렸던 경주는 몇 차례의 반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으나 고려가 황제국 지위를 유지하는 동안 전체적으로 동경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남경으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후에 조선 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대한민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은 이때까지는 어디까지나 개경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 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 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이후 대한민국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수도로서 기능하는 600년 전통의 대도시가 될 줄은 이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34]

특히 고려의 3경은 서경, 동경, 남경이 각각 고구려, 신라, 백제의 고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애초에 서경은 태조대에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 및 입지가 매우 우수해 집중적으로 육성시켰기에, 그리고 동경은 성종대에 서경 세력 견제와 신라의 고도에 대한 예우 및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기에 지정된 것이다. 문종대 남경 설치의 경우 사실 백제의 고도에 대한 예우 차원보다는 풍수지리 및 대도시가 들어서기 좋은 입지라는 이유가 더 크기는 했으나 <고려사 지리지> 내 양광도 남경유수관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남경이 백제의 고도 한성에 위치하였다는 인식 또한 당대 고려인들에게 분명히 존재했다. 비록 설치 시기는 상이하지만 이렇게 고려 왕조가 의도적으로 삼국의 고도에 3경을 설치했다는 사실에서 고려의 삼한일통 의식이 엿보인다.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고려가 삼경 중에서 특별히 서경을 우대했다. 서경의 경우 반란에도 강등당하지 않았고 1308년 동경과 남경이 강등당했을 때도 서경만은 강등을 면하였다. 하지만 묘청의 난 이후 개경-서경 사이에는 또 명확한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워 삼국을 모두 계승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를 더 특별 취급을 해주었고, 그럼에도 본인들은 또한 삼한일통에 기반한 초월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전의 고구려와 또 미묘하게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고려는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 국명 '고려'를 그대로 따왔지만 정작 본인들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는 고구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장수왕 이전의 국명인 고구려로 명명해 본인들과 또 미세한 선을 그었다. 게다가 삼국 중 신라본기가 가장 앞에 온다는 점은 덤.[35]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 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신라가 고려보다 엄청나게 중앙 집권 체제가 강했던 건 아니었고 한국사에서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었다. 그 이전 국가들은 시대적, 지리적 한계상 재지 세력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연맹왕국 단계를 넘어서도 봉건제적 요소가 꽤 남아있었다. 한반도는 산지가 70%를 넘는 지형이라 지리적 구분이 상당히 공고했다. 괜히 삼국이 수백 년을 싸워도 당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진 결판이 안 났고 그 와중에 가야, 마한의 소국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잔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이건 철저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의 선두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물론 그 중국 또한 각 왕조의 말기에 가면 통제를 잃고 지방에서 반란 터지고 난리 나는 건 똑같았다. 조선의 경우도 몽골군의 침략과 고려말의 대혼란으로 한반도 지방 세력들의 사회 공동체가 와해되고 기반이 완전히 박살난 뒤였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수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조선을 세운 전주 이씨 왕가도 원래는 전주 지역의 호족 가문이었으나 몽골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박살이 난 뒤에는 강원도로 이주했다가 함경도 끝단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 광범위한 이동성을 보인다. 고려 초중기 때만 해도 본관은 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연고, 신분, 세력 등을 드러내는 등 지역과 가문이 극도로 밀착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몽골군에 의해 대혼란이 찾아온 뒤로는 그러한 개념은 무너져 버린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기에, 할거하거나 독자정체성을 주창하며 일어난 지방세력이 전혀 없이, 쉽게 말해 후삼국시대가 재현되지 않았던 점도 이와 연관이 깊다고 보인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년 ~ 3년 전까지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 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 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 지식 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5도 양계 이외에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여진족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기미주현을 설치하여 고려와 인접했던 여진족들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실제로 고려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려 민호로 등록하고, 이 지역에 고려법을 적용하는 등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수천에서 만 명 이상 규모의 여진족들이 지금의 길주군 이북지역에서도 귀화하려고 했으나 고려에서는 길주 이북까지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귀화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와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설치하였고, 이후 결국 동북 9성의 반환과 금나라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고려 전기 서경의 지위는 다른 3경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높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 수도들이 존재했다.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 + 부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시기가 매우 짧아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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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성종 때의 10도 행정구역(좌), 5도 양계천리장성(우).

고려 후기의 행정 구역은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 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동계의 영동 지방과 교주도가 '교주강릉도'로 통합되고, 서해도의 상당 부분과 양광도의 남경(한양), 양주, 부평, 인주 등 서북부 지역이 경기에 편입됐다. 이로써 이어지는 조선8도와 유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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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형벌 제도[편집]


고려사 '혹리열전'의 서문을 보면 '고려는 나라를 관대하게 통치해 참혹한 형벌이 없었으나, 변란이 잦아진 이후로 일 처리에 밝은 관리를 임용하면서 잔혹(殘酷)한 풍조가 비로소 일어났다.'라고 밝히고 있고, 또 고려사 권 84, 지제 38, 형법(刑法)1의 서문을 보면 고려왕조 5백년 동안의 형법 제도에 '그러나 그 폐해를 살펴 보면, 법망을 제대로 펴지 못해 형벌이 느슨하고 사면이 잦은 까닭으로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 나와 제멋대로 행동해도 이를 금지할 도리가 없었으니,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폐해가 극심해졌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고려의 형벌제도가 고려왕조 5백 년 기간 내내 매우 너그러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권벌이라는 신료가 '또 전조(前朝)에서는 가법(家法)이 아름답지 못하여 동성(同姓)과 결혼하여 기강(紀綱)이 없었지만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취할 만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해 고려왕조가 형법과 사형에서 너그럽고 훌륭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려 인종 당시에 1개월간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제도들을 설명한 책인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 제16권 관부(官府) 영어(囹圄)편에서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라고 말해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대놓고 비하하는 짓을 했어도 고려가 형법과 사형 집행에서 매우 너그러운 사실은 분명히 인정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서 고려에서는 중죄인의 경우 '결박하여 앉힌 다음에 등을 계속 세게 눌러 가슴과 넓적 다리가 계속 닿게 해서 피부가 터진 다음에야 그만둔다.'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고려사에 적힌 형법의 종류에서 이런 형법은 없었고, 또 서긍이 자신의 책에서 우리나라를 대놓고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을 모두 감안하면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게 당시 기준으로는 혹형이라 볼수없었는게 피부 파열같은 경우에는 재생이 잘 되어서 이후 충분히 치료를 받는다면 이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을 만큼 충북히 회복가능하므로 십자가형이라던지 궁형같이 아예 병신으로 만드는 형벌보다 훨씬 신체에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십년전 학교 체벌만해도 몽둥이 몇대만 맞으면 피부가 터지는 수준이었다. 해당 형법이 없었다고 보는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라 딱히 기록이 없어서 였을 뿐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극에서도 흔히 나오는 주뢰, 압슬, 낙형 같은 조선시대에 비로소 나왔던 혹형이 나오는데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려사 형법지 '형장의 규격' 부분을 보면 고려시대 고문의 방법은 등에 때리는 곤장과 엉덩이에 때리는 곤장, 또 얇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태형, 이 3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나오고, 압슬의 경우 두산백과에서는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고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흔히 단근질로 이야기되는 낙형의 경우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낙형 편을 보면 조선시대때 시행된 고문으로 나올 뿐이다. 고려사 지의 '사형의 두 종류' 편을 보면 교수형과 참형밖에 없다고 나온다.

꽤나 현대적이었던 점도 있는데 재판은 3명 이상의 재판관이 모여 실시했고 사형에 처해야 할 건은 3번을 재판해서 결정했다. 또한 죄인을 다루는 것도 조심스러워, 임신한 여자를 투옥해야 할 경우에는 출산할 때까지 집행을 연기 또는 정지해 주고 사형수라도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7일 동안 감시를 붙여 풀어주었다.


6. 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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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의 [[고려군#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앵커@@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경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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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대외무역도.

숙종(肅宗) 7년(1102) 9월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사민(四民)이 각각 그 생업에 오로지 종사하게 되면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데, 지금 듣건대 서경(西京)의 습속이 상업(商業)에 종사하지 않아서 민(民)이 그 이익을 잃고 있다 하니, 유수관(留守官)은 그 아뢴 대로 화천별감(貨泉別監) 2명을 차정(差定)하여 날마다 시장의 가게[市肆]를 감독하게 하여 상인들로 하여금 모두 힘써 무역의 이익을 얻게 하라.”

라고 하였다.

고려사 숙종 7년 9월(음) - 유수관에게 화천별감을 파견해 상업을 장려하도록 하다

고려는 창업군주 태조(고려)왕건부터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가문 출신으로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보호, 육성했다. 태조 2년(919년)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市廛)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명 ~ 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개경서경, 동경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개경의 시전과 비슷한 관영 상가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열렸다.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조선 초기보다 훨씬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되었다. 조선의 경우엔 개국과 함께 억상 정책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지방에 장시가 열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수요가 없을 수가 없으므로 조선 초기를 지나 1470년경부터 전라도에서 다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기 시작해 조선 중후기에 다시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인종 1년)에 사신으로 개경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되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중략)…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장시를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고려 정부에서 찍어내는 화폐보다는 쌀과 포로 매매가 주로 이뤄졌다. 고려 시대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원(院)이 발달했는데, 이 원은 상인의 숙박 시설을 넘어 그 자체가 상업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한강광주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고려도경에서는 귀족들의 횡포와 사치로 인하여 백성들의 집은 하찮다고 묘사되어있다.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이는 고려사와 동일한 묘사이다. 몽골 귀족까지 합세한 원 간섭기고려 말 왜구의 침입까지 고려하면 고려 백성들의 삶은 오랜 기간 동안 그리 좋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이슬람 상인들까지도 거쳐갔다고 한다.

고려는 벽란도와 같이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하구를 국제무역로로 육성하였는데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순천관이 있었고, 외국상인들을 위한 오빈관 등 10개나 되는 외국인용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벽란도의 붐비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潮來復潮去 來船去舶首尾衡相連

아침에 여기서 떠나면 한낮이 못 되어 남만에 이른다네

朝發此樓底 未午棹入南蠻天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에서


또한 고려사절요에는 배들이 수없이 들어와 값진 보배가 넘쳐나서 중국과 교역하더라도 얻을게 없을 정도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다만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라스 전투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한 글자로 줄여서 부를 때 '려'로 불렀다. 백제나 신라처럼 끝글자인 려를 사용했다. 여제, 나제동맹처럼.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의 ㅕ가 탈락하면서, 현대 우리말에도 '고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처럼 송나라에, 특히 저장성, 푸젠성 같은 강남지역의 해안지역에 고려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군,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일본은 907년 견당사 파견을 중단한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왕건의 국서에 황제국 용어가 쓰였다며 국서를 거절했다. 하지만 현종대 여진해적들에게 잡혔던 일본인 포로를 송환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다자이후진해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교류가 진행되었다. 또한 고려는 대마도와 이키섬에 지방관들에게 관직을 주고 규슈지역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으며 왜구방지와 고려인의 해상활동을 보호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려와 여진족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 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있었으나,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금나라는 각장에 세금도 부과하고 유출금지 품목이나 동전유출도 금지하였다.

상술했듯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 (대식국, 大食國)인과의 교역도 종종 이루어졌는데, 당, 송 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다른 동아시아국가들로부터 왜(倭)라고 불린것과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했고, 바뀌는 데 시일이 걸렸으나,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슬람쪽과는 교역이 없었기에, 이슬람과 서양 쪽에 굳혀진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Empire of Dai Han 같은 이름을 열심히 밀었지만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쪽도 마찬가지라 중국조선족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이다. 정치적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불렀다.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 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이자 제1번국에 속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의 외교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정통성이 모자랐던 쿠빌라이 칸에게 태자 시절 원종(고려)이 스스로 들어가 신하를 자처했고, 이를 본 쿠빌라이가 "당나라도 무릎꿇리지 못했던 고(구)려가 스스로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면서 대외적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고,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원나라에서 고려의 대우가 제법 괜찮아졌다.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그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고려에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는 원말명초에 이르러서 악재로 되돌아왔는데, 몽골제국의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중심 중 하나였던 중앙아시아에서 흑사병이 발발, 그대로 원나라까지 들어와서 수백만명이 사망, 경제권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당연히 이는 상기한 보초가 휴지조각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원-고려-일본 가마쿠라 막부 등에 연쇄적인 경제 위기를 가져오고 홍건적왜구 등의 도적떼가 빈번하게 발생, 결과적으로 세 나라 전부 나라가 뒤집혀 명나라-조선-무로마치 막부로 국가가 교체된다.

이때의 트라우마로, 고려 말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상업관(억말론, 抑末論)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에 비판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출신으로 볼때 이들 대다수는 고려 귀족이었으므로, 고려가 상업으로 진흥되었다면 당연히 그 정책을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본건 전 세계 경제가 파탄나는 시점이었으니 당연히 위험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하기를 장려해 왕조 교체를 거치며 상업 정책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8.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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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외교[편집]


고려가 자리잡았던 10~13세기는 동아시아에는 다원적 천하질서가 자리잡았던 시대였다.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다원적 천하질서가 점차 붕괴되어 갔고 1227년 서하의 멸망, 1234년 금나라 멸망, 1270년 고려의 출륙과 개경 환도, 1271년 원의 건국으로 4세기에 걸친 다원적 질서는 종말을 고했다. 그 이전에는 송, 요/금, 서하, 고려, 일본, 대월, 대리국 등 모두 자국의 군주를 천자나 그에 준한 존재로 자칭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국제관계는 각 국의 독자성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의 질서가 다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국가 간의 차등적인 위상이 배제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례로 송과 요는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대적국의 위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상호 형제국으로 송이 형, 요가 아우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 대가로 송은 요에게 공물의 성격을 지난 막대한 세폐를 요에 헌납해야 했다. 이에 형식적 위상은 실제 힘의 차이에 따른 관계와 괴리되어 있었다. 단 송은 요에 비해 어디까지나 군사력에 한정되어 약했던 것이지 경제, 인구, 문화, 정통성 등 군사 이외의 다방면에서 요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 동북아의 패권국은 어디까지나 송이었지 요가 아니다. 그렇다고 군사력에서조차 요가 후대의 금/원과 같이 송을 압도하지도 못했다.

요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면 만주를 포함한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였으며 고려가 여요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고려가 요에 대해 취한 신하로서의 위치는 명목상에 불과했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 실제로 고려는 전쟁 이후 요와의 관계를 화친 관계로 규정했고 그것이 당시 실정에 부합하기도 했다. 실제 요, 금의 사신이 입경할 경우 왕이 북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고려사에 보면 북조의 사신을 맞는 예와 명의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화친관계란 양국 간의 전쟁 이후 맺어진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의미하며 주로 정치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평화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이다. (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 총서 고려시대사 참조.) 고려의 해동천자, 해동천하 개념의 확립은 여요전쟁 승리 후 북방 제번에 대한 통할력이 생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할 수 있다.

고려와 송 사이도 역시 국제 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되고 있었다. 송이 고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육로로는 요에 의해서 끊겨 있고 바다로만 오가는 사이었기도 하고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 가장 면적도 좁고 문약했기 때문이다. 외교의 단절 및 통교의 주도권은 항상 고려가 지니고 있었으며 송은 그를 저지할 힘도 명분도 부족했다. 고려의 송에 대한 관계는 통교 관계 이상이라 볼 수 없다. 통교관계는 무역, 통상, 무역교류 등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정부 대 정부의 성격은 약한 관계를 말한다. 송은 고려와의 외교 수준을 국신사로 정리하여 진행하였으며 이는 당대 요와의 관계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자체가 고립을 선택했고 그 바탕에는 자기 세계에 대한 자족적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고려, 송 등과의 경제적 교류는 있었다.

이러한 고려 해동천하는 10세기~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으며 1126년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정하면서 그 방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북방의 요와 송이 동시에 금에게 갈려나가면서 고려는 1125년까지 국서에 표현하지 않던 신 이란 표현을 112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요와 금을 비슷하게 보기 쉽지만 연운 16주 중 14주를 제외하고는 그 강역이 인구 희박 지대인 내몽골과 만주에 한정되어 있었던 요와 달리 금은 내몽골은 차지하지 못했지만 장강 이남의 화북을 점령했기에 금나라의 체급은 요나라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요나라 인구의 10배가 넘었던 북송과 달리 남송은 금나라 인구의 1.5배조차 되지 못했다.

고려가 북방의 번국으로 여기던 여진이 금국으로 독립하면서 북방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번국의 상실은 해동천하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 칭신사대였으나 고려에서는 화친으로 표현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여 금과의 외교 관계 번반은 모두 이전 요와의 화친 격식에 준하여 성립되었고 금이 멸망할 때까지 지켜졌다. 금도 고려의 칭신사대가 꽤나 필요했었다. 당시 요, 송 등 중원에 자리잡은 왕조들을 그야말로 때려 잡고 잘나가던 시기에도 고려 전선에서는 꽤나 고전했었으니 고려에 대한 공포심이 생각보다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오죽하면 금의 황제가 부하들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정도. 물론 고려에 대한 공포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그보단 한반도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금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로도 금의 관심은 언제나 중원에 쏠려있었고, 만주 쪽은 자신들의 초기 근거지에 불과했다. 원의 발흥으로 위기가 시작되었던 때에도 끊임없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송과 혈전을 벌였을 정도니. 그러나 한때 번국이었던 여진에 대한 화친수용 및 칭신사대에 대해 고려 내부의 진통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예가 묘청의 난.

다원적 천하질서는 13세기 몽골의 발흥으로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명, 청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화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해동천하관을 붕괴시켰고 그에 따라 고유의 천하관을 포기한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조선도 철저한 사대관계를 따르기는 했지만, 왕의 묘호에 '조'나 '종'을 사용하는 등 소극적으로는 표시했었다. 하지만 구한말 이전에 단 한번도 외왕내제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대내적으로도 스스로를 해동천자라는 자주의식을 가지기보다는 명/청의 번방으로 인식했는데 이는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모화사상과 더불어 원나라 이후 다원적 질서의 종말 때문이기도 하다.

몽골 제국(원나라)과의 관계는 여몽관계, 원 간섭기 참고.


10. 외왕내제 여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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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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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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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려사 연구의 어려움[편집]


고려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후대의 조선시대와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그 사료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려는 조선만큼 인쇄술이 보편화되지 않아 서적 편찬량이 많지 않았는데 전란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겪어서 사료의 양에서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고려 초는 더 심해서, 몇백 년 전인 7세기 삼국통일 당시보다도 사료가 더 적은 편이다. 이 시기는 한중일 3국이 모두 엮여서 기록이 적은 삼국시대 중 유일하게 그나마 기록이 풍부한 시기다. 물론 고려 이전의 정말로 사료와 기록 그 자체가 매우 부족한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역으로 고려시대의 사료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남아있는 편이니 어디까지나 후대의 조선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인 평가라는 부분은 감안해야 한다.

고려시대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시대에 고려가 남긴 고려실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여진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요약본인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등 중국 정사의 외국열전 고려편이 중요 사료들로 꼽힌다. 이 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후대인 조선시대에 고려실록 등 고려시절 기록들을 바탕으로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인데 고려에도 원본인 고려실록과 다른 여러 기록들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 등의 전란 때 몇차례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있던 고려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모두 다 불타버렸다. 즉,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 등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의 고려의 기록들을 집대성해서 만든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총합 편찬한 유이한 정사(正史) 사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모두 사료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편파성이 있다. 일단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의 입장에서, 나머지 사료들은 5대 10국 시대의 각 국가들, 요나라, 금나라, 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의 역사를 총합적으로 서술한 예는 드물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대의 기록들을 제외한 멸망한 전 왕조에 대한 총합적인 역사서는 후대의 계승국들이 편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남긴 역사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인 부분으로, 고려시대에 그 이전 시대의 삼국을 바라본 역사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조차 이러한 편파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들을 서술했지만 엄연히 당대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하여 정리하고 편찬한 고려의 입김이 들어간 사서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삼국시대 당시 왕건역성혁명 이후 고려가 남긴 궁예에 대한 기록들에 대해서도 고려측의 역성혁명 정당화를 위한 왜곡과 편파성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학계의 비판적인 의견들[36]이 나올 정도로 이런 논란은 거의 대부분의 사서에서 항상 나오는 보편적인 논란들이다.

그나마 고려실록 등 고려측이 스스로 남긴 기록들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편파성을 최대한 줄인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는 실록에서의 세종의 여러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한 편이다. 물론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당대 조선측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고려사에서의 궁예에 대한 여러 논란들처럼 여러모로 다른 의견들도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다 원본인 고려실록을 바탕으로한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 분량 자체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했을 때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비교 대상인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방대한 양인 점은 고려해야 한다. 그외 고려가 스스로 남긴 다른 기록들이 고려와 그 이후에 겪은 여러 전란으로 크게 손실된 점 또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외국열전 고려편의 경우, 사신단의 교류와 고려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보고 들은 정보를 기록하여 5대 10국 시대의 군주와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 성격의 사료이기 때문에 주마간산, 수박 겉 핥기 수준이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위의 사료들은 모두 사서라면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철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 등 고려시대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고려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사 연구자 대부분은 당연하지만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그중 일부는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들까지 배우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다른 난관을 하나 뽑자면 고려 유적지 접근의 한계를 들 수 있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현재의 북한령이라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만월대고려왕릉 등 주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는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활성화되고 반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더뎌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나마 고려 왕조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은 기간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강화도는 임시 수도격이었기 때문에 본 수도였던 개성과 기간 면에서나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 고종홍릉인데 아무래도 고려 국력이 약했을 시기이고 또한 왕실보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세가 막강했던 시기라 개성의 무덤들이나 조선 및 신라의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식도 간소하고 초라한 편이다. 병풍석도 안 둘러져 있고 인물석도 솜씨가 매우 투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왕릉이란 요소를 제외하고 외관만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권세가 무덤보다도 허접한 편이다. 게다가 대상으로 삼은 홍릉이 남한 소재 고려왕릉 중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다른 무덤들은 더 심각한 편이다. 그런데 단순히 남한의 고려왕릉만이 그러한 게 아니라 북한에 소재한 대다수 왕릉 가운데에서도 왕건의 현릉, 공민왕의 현정릉, 그리고 주인이 불분명한 칠릉군의 몇 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문인석 등의 석상이 신라왕릉이나 조선왕릉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우 투박한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려왕릉에 대해 자세히 정리된 글에서 참고.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고려시대 연구는 조선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이 따르는 편이다.

한편 북한이 가난해지면서 평양개성 등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중국에 팔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14.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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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의 [[고려/창작물#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앵커@@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5. 같이 보기[편집]



15.1. 정치[편집]




15.2. 행정[편집]




15.3. 군사[편집]




15.4. 경제[편집]




15.5. 문화[편집]




15.6. 건축[편집]




15.7. 고려를 다룬 사서[편집]


: 중국 시각에서 고려역사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당대에 기록했기 때문에 후대에 기록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비하면 당시 고려사회가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어찌본다면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과 같은 위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15.8.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편집]




15.9. 기타[편집]




16. 둘러보기[편집]




[ 양서(梁書) ]
#181818,#e5e5e5 
||<tablewidth=100%><tablebgcolor=#7e0d0d><width=50%> {{{-1 {{{#fff 1·2·3·4·5·6·7권}}}}}} {{{-2 {{{#fff 「태조기(太祖紀)」}}}}}} ||<width=50%> {{{-1 {{{#fff 8·9·10권}}}}}} {{{-2 {{{#fff 「말제기(末帝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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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서(唐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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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fff 35권}}}}}} {{{-2 {{{#fff 「정회등전(丁會等傳)」}}} }}} ||<-2> {{{-1 {{{#fff 36권}}}}}} {{{-2 {{{#fff 「이습길등전(李襲吉等傳)」}}} }}} ||
||<-2><rowbgcolor=#fff,#191919> [[정회(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정회}}}]] · [[염보(오대십국시대)|{{{#999,#666666 염보}}}]] · [[부습|{{{#999,#666666 부습}}}]] · [[오진(오대십국시대)|{{{#999,#666666 오진}}}]] · [[왕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찬}}}]] · [[원상선|{{{#999,#666666 원상선}}}]] · [[장온(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온}}}]] · [[이소문|{{{#999,#666666 이소문}}}]] ||<-2> [[이습길|{{{#999,#666666 이습길}}}]] · [[왕겸(북주)|{{{#999,#666666 왕겸}}}]] · [[이경의|{{{#999,#666666 이경의}}}]] · [[노여필|{{{#999,#666666 노여필}}}]] · [[이덕휴|{{{#999,#666666 이덕휴}}}]] · [[소순(오대십국시대)|{{{#999,#666666 소순}}}]] ||
||<-4> {{{-1 {{{#fff 37권}}}}}} {{{-2 {{{#fff 「안금전등전(安金全等傳)」}}} }}} ||
||<-4><bgcolor=#fff,#191919> [[안금전|{{{#999,#666666 안금전}}}]] · [[안원신|{{{#999,#666666 안원신}}}]] · [[안중패|{{{#999,#666666 안중패}}}]] · [[유훈(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훈}}}]] · [[장경순(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경순}}}]] · [[유언종|{{{#999,#666666 유언종}}}]] · [[원건풍|{{{#999,#666666 원건풍}}}]] · [[서방업|{{{#999,#666666 서방업}}}]] · [[장준회|{{{#999,#666666 장준회}}}]] · [[손장((오대십국시대)|{{{#999,#666666 손장}}}]] ||
||<-2> {{{-1 {{{#fff 38권}}}}}} {{{-2 {{{#fff 「맹방립등전(孟方立等傳)」}}} }}} ||<-2> {{{-1 {{{#fff 39권}}}}}} {{{-2 {{{#fff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 ||
||<-2><rowbgcolor=#fff,#191919> [[맹방립|{{{#999,#666666 맹방립}}}]] · [[장문례|{{{#999,#666666 장문례}}}]] · [[동장(오대십국시대)|{{{#999,#666666 동장}}}]] ||<-2> [[장전의|{{{#999,#666666 장전의}}}]] · [[주우겸|{{{#999,#666666 주우겸}}}]] ||
||<-2> {{{-1 {{{#fff 40권}}}}}} {{{-2 {{{#fff 「곽언위등전(霍彦威等傳)」}}} }}} ||<-2> {{{-1 {{{#fff 41권}}}}}} {{{-2 {{{#fff 「이건급등전(李建及等傳)」}}} }}} ||
||<-2><rowbgcolor=#fff,#191919> [[곽언위|{{{#999,#666666 곽언위}}}]] · [[왕안구|{{{#999,#666666 왕안구}}}]] · [[대사원|{{{#999,#666666 대사원}}}]] · [[주한빈|{{{#999,#666666 주한빈}}}]] · [[공경(오대십국시대)|{{{#999,#666666 공경}}}]] · [[유기(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기}}}]] · [[주지유(오대십국시대)|{{{#999,#666666 주지유}}}]] ||<-2> [[이건급|{{{#999,#666666 이건급}}}]] · [[석군립|{{{#999,#666666 석군립}}}]] · [[고행규|{{{#999,#666666 고행규}}}]] · [[장정유|{{{#999,#666666 장정유}}}]] · [[왕사동|{{{#999,#666666 왕사동}}}]] · [[삭자통|{{{#999,#666666 삭자통}}}]] ||
||<-2> {{{-1 {{{#fff 42권}}}}}} {{{-2 {{{#fff 「안중회등전(安重誨等傳)」}}} }}} ||<-2> {{{-1 {{{#fff 43권}}}}}} {{{-2 {{{#fff 「두로혁등전(豆盧革等傳)」}}} }}} ||
||<-2><rowbgcolor=#fff,#191919> [[안중회|{{{#999,#666666 안중회}}}]] · [[주홍소|{{{#999,#666666 주홍소}}}]] · [[주홍실|{{{#999,#666666 주홍실}}}]] · [[강의성|{{{#999,#666666 강의성}}}]] · [[약언조|{{{#999,#666666 약언조}}}]] · [[송영순|{{{#999,#666666 송영순}}}]] ||<-2> [[두로혁|{{{#999,#666666 두로혁}}}]] · [[위설|{{{#999,#666666 위설}}}]] · [[노정(오대십국시대)|{{{#999,#666666 노정}}}]] · [[조봉|{{{#999,#666666 조봉}}}]] · [[이우(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우}}}]] · [[임환|{{{#999,#666666 임환}}}]] ||
||<-4> {{{-1 {{{#fff 44권}}}}}} {{{-2 {{{#fff 「설정규등전(薛廷珪等傳)」}}} }}} ||
||<-4><bgcolor=#fff,#191919> [[설정규|{{{#999,#666666 설정규}}}]] · [[최기|{{{#999,#666666 최기}}}]] · [[유악|{{{#999,#666666 유악}}}]] · [[봉순경|{{{#999,#666666 봉순경}}}]] · [[두몽징|{{{#999,#666666 두몽징}}}]] · [[이보은|{{{#999,#666666 이보은}}}]] · [[귀애|{{{#999,#666666 귀애}}}]] · [[공막|{{{#999,#666666 공막}}}]] · [[장문보|{{{#999,#666666 장문보}}}]] · [[진예(오대십국시대)|{{{#999,#666666 진예}}}]] · [[유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찬}}}]] ||
||<-4> {{{-1 {{{#ffffff 45권}}}}}} {{{-2 {{{#fff 「장헌등전(張憲等傳)」}}} }}} ||
||<-4><bgcolor=#fff,#191919> [[장헌(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헌}}}]] · [[왕정언|{{{#999,#666666 왕정언}}}]] · [[호장(오대십국시대)|{{{#999,#666666 호장}}}]] · [[최이손|{{{#999,#666666 최이손}}}]] · [[맹곡|{{{#999,#666666 맹곡}}}]] · [[손악|{{{#999,#666666 손악}}}]] · [[장연랑|{{{#999,#666666 장연랑}}}]] · [[유연호(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연호}}}]] · [[유연랑|{{{#999,#666666 유연랑}}}]] ||
||<-4> {{{-1 {{{#ffffff 46권}}}}}} {{{-2 {{{#fff 「원행흠등전(元行欽等傳)」}}} }}} ||
||<-4><bgcolor=#fff,#191919> [[원행흠|{{{#999,#666666 원행흠}}}]] · [[하노기|{{{#999,#666666 하노기}}}]] · [[요홍(오대십국시대)|{{{#999,#666666 요홍}}}]] · [[이엄(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엄}}}]] · [[이인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인구}}}]] · [[강사립|{{{#999,#666666 강사립}}}]] · [[장경달|{{{#999,#666666 장경달}}}]] ||
||<-4> {{{-1 {{{#ffffff 47권}}}}}} {{{-2 {{{#fff 「마욱등전(馬郁等傳)」}}} }}} ||
||<-4><bgcolor=#fff,#191919> [[마욱|{{{#999,#666666 마욱}}}]] · [[사공정|{{{#999,#666666 사공정}}}]] · [[조정은(오대십국시대)|{{{#999,#666666 조정은}}}]] · [[소희보|{{{#999,#666666 소희보}}}]] · [[약종지|{{{#999,#666666 약종지}}}]] · [[가복|{{{#999,#666666 가복}}}]] · [[마호(오대십국시대)|{{{#999,#666666 마호}}}]] · [[나관|{{{#999,#666666 나관}}}]] · [[순우안|{{{#999,#666666 순우안}}}]] · [[장격|{{{#999,#666666 장격}}}]] · [[허적(오대십국시대)|{{{#999,#666666 허적}}}]] · [[주현표|{{{#999,#666666 주현표}}}]] ||
||<-4> {{{-1 {{{#fff 48권}}}}}} {{{-2 {{{#fff 「장승업등전(張承業等傳)」}}} }}} ||
||<-4><bgcolor=#fff,#191919> [[장승업(후당)|{{{#000,#e5e5e5 장승업}}}]] · [[장거한(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거한}}}]] · [[마소굉|{{{#999,#666666 마소굉}}}]] · [[맹한경|{{{#999,#666666 맹한경}}}]] ||
||<-2> {{{-1 {{{#fff 49권}}}}}} {{{-2 {{{#fff 「모장등전(毛璋等傳)」}}} }}} ||<-2> {{{-1 {{{#fff 50권}}}}}} {{{-2 {{{#fff 「강연효등전(康延孝等傳)」}}} }}} ||
||<-2><rowbgcolor=#fff,#191919> [[모장(오대십국시대)|{{{#999,#666666 모장}}}]] · [[섭서|{{{#999,#666666 섭서}}}]] · [[온도(오대십국시대)|{{{#999,#666666 온도}}}]] · [[단응|{{{#999,#666666 단응}}}]] · [[공겸|{{{#999,#666666 공겸}}}]] · [[이업(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업}}}]] ||<-2> [[강연효|{{{#999,#666666 강연효}}}]] · [[주수은|{{{#999,#666666 주수은}}}]] · [[양립|{{{#999,#666666 양립}}}]] · [[두정완|{{{#999,#666666 두정완}}}]] · [[장건쇠|{{{#999,#666666 장건쇠}}}]] · [[양언옹|{{{#999,#666666 양언옹}}}]] ||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진서(晉書) ]
#181818,#e5e5e5 
||<tablewidth=100%><tablebgcolor=#a28eab><width=50%> {{{-1 {{{#ffffff 1·2·3·4·5·6권}}}}}} {{{-2 {{{#fff 「고조기(高祖紀)」}}} }}} ||<width=50%> {{{-1 {{{#ffffff 7·8·9·10·11권}}}}}} {{{-2 {{{#fff 「소제기(少帝紀)」}}} }}} ||
||<rowbgcolor=#fff,#191919> [[석경당|{{{#000,#e5e5e5 석경당}}}]] || [[석중귀|{{{#000,#e5e5e5 석중귀}}}]] ||
||<-2><bgcolor=#ddd,#212121> ||
||<-2> {{{-1 {{{#ffffff 12권}}}}}} {{{-2 {{{#fff 「후비전(后妃傳)」}}} }}} ||
||<-2><bgcolor=#fff,#191919> [[황후 이씨(후진)|{{{#999,#666666 이황후}}}]] · [[태비 안씨|{{{#999,#666666 안태비}}}]] · [[황후 장씨(후진)|{{{#999,#666666 장황후}}}]] · [[황후 풍씨|{{{#999,#666666 풍황후}}}]] ||
||<-2> {{{-1 {{{#ffffff 13권}}}}}} {{{-2 {{{#fff 「종실전(宗室傳)」}}} }}} ||
||<-2><bgcolor=#fff,#191919> [[석경위|{{{#999,#666666 석경위}}}]] · [[석훈(오대십국시대)|{{{#999,#666666 석훈}}}]] · [[석중윤|{{{#999,#666666 석중윤}}}]] · [[석중영|{{{#999,#666666 석중영}}}]] · [[석중신|{{{#999,#666666 석중신}}}]] · [[석중예|{{{#999,#666666 석중예}}}]] · [[석중진|{{{#999,#666666 석중진}}}]] · [[석중고|{{{#999,#666666 석중고}}}]] · [[석중예|{{{#999,#666666 석중예}}}]] · [[석연후|{{{#999,#666666 석연후}}}]] · [[석연보|{{{#999,#666666 석연보}}}]] ||
||<-2> {{{-1 {{{#ffffff 14권}}}}}} {{{-2 {{{#fff 「경연광등전(景延廣等傳)」}}} }}} ||
||<-2><bgcolor=#fff,#191919> [[경연광|{{{#999,#666666 경연광}}}]] · [[이언도|{{{#999,#666666 이언도}}}]] · [[장희숭|{{{#999,#666666 장희숭}}}]] · [[왕정윤|{{{#999,#666666 왕정윤}}}]] · [[사광한|{{{#999,#666666 사광한}}}]] · [[양한옹|{{{#999,#666666 양한옹}}}]] · [[양사권|{{{#999,#666666 양사권}}}]] · [[윤휘|{{{#999,#666666 윤휘}}}]] · [[이종장|{{{#999,#666666 이종장}}}]] · [[이종온|{{{#999,#666666 이종온}}}]] · [[장만진|{{{#999,#666666 장만진}}}]] ||
||<-2> {{{-1 {{{#ffffff 15권}}}}}} {{{-2 {{{#fff 「상유한등전(桑維翰等傳)」}}} }}} ||
||<-2><bgcolor=#fff,#191919> [[상유한|{{{#999,#666666 상유한}}}]] · [[조형(오대십국시대)|{{{#999,#666666 조형}}}]] · [[유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구}}}]] · [[풍옥(오대십국시대)|{{{#999,#666666 풍옥}}}]] · [[은붕|{{{#999,#666666 은붕}}}]] ||
||<-2> {{{-1 {{{#ffffff 16권}}}}}} {{{-2 {{{#fff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 ||
||<-2><bgcolor=#fff,#191919> [[조재례|{{{#999,#666666 조재례}}}]] · [[마전절|{{{#999,#666666 마전절}}}]] · [[장균(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균}}}]] · [[화온기|{{{#999,#666666 화온기}}}]] · [[안숭완|{{{#999,#666666 안숭완}}}]] · [[양언순|{{{#999,#666666 양언순}}}]] · [[이승약|{{{#999,#666666 이승약}}}]] · [[육사탁|{{{#999,#666666 육사탁}}}]] · [[안원신|{{{#999,#666666 안원신}}}]] · [[장랑(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랑}}}]] · [[이덕충|{{{#999,#666666 이덕충}}}]] · [[전무(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전무}}}]] · [[이승복(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승복}}}]] · [[상리금|{{{#999,#666666 상리금}}}]] ||
||<-2> {{{-1 {{{#ffffff 17권}}}}}} {{{-2 {{{#fff 「방지온등전(房知溫等傳)」}}} }}} ||
||<-2><bgcolor=#fff,#191919> [[방지온|{{{#999,#666666 방지온}}}]] · [[왕건립|{{{#999,#666666 왕건립}}}]] · [[강복|{{{#999,#666666 강복}}}]] · [[안언위|{{{#999,#666666 안언위}}}]] · [[이주(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주}}}]] · [[장종훈(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종훈}}}]] · [[이계충|{{{#999,#666666 이계충}}}]] · [[이경(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경}}}]] · [[주광보|{{{#999,#666666 주광보}}}]] · [[부언요|{{{#999,#666666 부언요}}}]] · [[나주경|{{{#999,#666666 나주경}}}]] · [[정종(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정종}}}]] ||
||<-2> {{{-1 {{{#ffffff 18권}}}}}} {{{-2 {{{#fff 「요의등전(姚顗等傳)」}}} }}} ||
||<-2><width=1000><bgcolor=#fff,#191919> [[요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요의}}}]] · [[여기(오대십국시대)|{{{#999,#666666 여기}}}]] · [[양문구|{{{#999,#666666 양문구}}}]] · [[사규(오대십국시대)|{{{#999,#666666 사규}}}]] · [[배호(오대십국시대)|{{{#999,#666666 배호}}}]] · [[오승범(오대십국시대)|{{{#999,#666666 오승범}}}]] · [[노도|{{{#999,#666666 노도}}}]] · [[정도광|{{{#999,#666666 정도광}}}]] · [[왕권(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권}}}]] · [[한운|{{{#999,#666666 한운}}}]] · [[이역(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역}}}]] ||
||<-2> {{{-1 {{{#ffffff 19권}}}}}} {{{-2 {{{#fff 「노질등전(盧質等傳)」}}} }}} ||
||<-2><width=1000><bgcolor=#fff,#191919> [[노질|{{{#999,#666666 노질}}}]] · [[이혜미(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혜미}}}]] · [[노첨|{{{#999,#666666 노첨}}}]] · [[최절|{{{#999,#666666 최절}}}]] · [[설융|{{{#999,#666666 설융}}}]] · [[조국진|{{{#999,#666666 조국진}}}]] · [[장인원(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인원}}}]] · [[조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조희}}}]] · [[이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하}}}]] · [[윤옥우|{{{#999,#666666 윤옥우}}}]] · [[정운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정운수}}}]] ||
||<-2> {{{-1 {{{#ffffff 20권}}}}}} {{{-2 {{{#fff 「장종간등전(萇從簡等傳)」}}} }}} ||
||<-2><bgcolor=#fff,#191919> [[장종간|{{{#999,#666666 장종간}}}]] · [[반환|{{{#999,#666666 반환}}}]] · [[방태|{{{#999,#666666 방태}}}]] · [[하건(오대십국시대)|{{{#999,#666666 하건}}}]] · [[장정온|{{{#999,#666666 장정온}}}]] · [[곽연로|{{{#999,#666666 곽연로}}}]] · [[곽금해|{{{#999,#666666 곽금해}}}]] · [[유처양|{{{#999,#666666 유처양}}}]] · [[이경(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경}}}]] · [[고한균|{{{#999,#666666 고한균}}}]] · [[손언도|{{{#999,#666666 손언도}}}]] · [[왕부증|{{{#999,#666666 왕부증}}}]] · [[비경(오대십국시대)|{{{#999,#666666 비경}}}]] · [[이언순|{{{#999,#666666 이언순}}}]] ||
||<-2> {{{-1 {{{#ffffff 21권}}}}}} {{{-2 {{{#fff 「황보우등전(皇甫遇等傳)」}}} }}} ||
||<-2><bgcolor=#fff,#191919> [[황보우|{{{#999,#666666 황보우}}}]] · [[왕청(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청}}}]] · [[양한장|{{{#999,#666666 양한장}}}]] · [[백봉진|{{{#999,#666666 백봉진}}}]] · [[노순밀|{{{#999,#666666 노순밀}}}]] · [[주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주환}}}]] · [[심윤|{{{#999,#666666 심윤}}}]] · [[오만(오대십국시대)|{{{#999,#666666 오만}}}]] · [[적장(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적장}}}]] · [[정복윤|{{{#999,#666666 정복윤}}}]] · [[곽린|{{{#999,#666666 곽린}}}]] ||
||<-2> {{{-1 {{{#ffffff 22권}}}}}} {{{-2 {{{#fff 「공숭필등전(孔崇弼等傳)」}}} }}} ||
||<-2><bgcolor=#fff,#191919> [[공숭필|{{{#999,#666666 공숭필}}}]] · [[진보극|{{{#999,#666666 진보극}}}]] · [[왕유(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유}}}]] · [[장계조|{{{#999,#666666 장계조}}}]] · [[정완|{{{#999,#666666 정완}}}]] · [[호요|{{{#999,#666666 호요}}}]] · [[유수청|{{{#999,#666666 유수청}}}]] · [[방고(오대십국시대)|{{{#999,#666666 방고}}}]] · [[맹승회|{{{#999,#666666 맹승회}}}]] · [[유계훈|{{{#999,#666666 유계훈}}}]] · [[정수익(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정수익}}}]] · [[정손|{{{#999,#666666 정손}}}]] · [[이욱(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욱}}}]] · [[정현소|{{{#999,#666666 정현소}}}]] · [[마중적|{{{#999,#666666 마중적}}}]] · [[진현(오대십국시대)|{{{#999,#666666 진현}}}]] ||
|| {{{-1 {{{#ffffff 23권}}}}}} {{{-2 {{{#fff 「범연광등전(范延光等傳)」}}} }}} || {{{-1 {{{#ffffff 24권}}}}}} {{{-2 {{{#fff 「안중영등전(安重榮等傳)」}}} }}} ||
||<rowbgcolor=#fff,#191919> [[범연광|{{{#999,#666666 범연광}}}]] · [[장종보|{{{#999,#666666 장종보}}}]] · [[장연파|{{{#999,#666666 장연파}}}]] · [[양광원|{{{#999,#666666 양광원}}}]] · [[노문진|{{{#999,#666666 노문진}}}]] · [[이금전|{{{#999,#666666 이금전}}}]] || [[안중영|{{{#999,#666666 안중영}}}]] · [[안종진|{{{#999,#666666 안종진}}}]] · [[장언택|{{{#999,#666666 장언택}}}]] · [[조택균|{{{#999,#666666 조택균}}}]] · [[장려(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려}}}]] · [[소한(오대십국시대)|{{{#999,#666666 소한}}}]] · [[유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희}}}]] · [[최정훈(오대십국시대)|{{{#999,#666666 최정훈}}}]] ||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한서(漢書) ]

||<tablewidth=100%><tablebgcolor=#fa8072><width=50%> 1·2권 「고조기(高祖紀)」 ||<width=50%> 3·4·5권 「은제기(隱帝紀)」 ||
||<rowbgcolor=#fff,#191919> 유고 || 유승우 ||
||<-2><bgcolor=#ddd,#212121> ||
||<-2> 6권 「후비전(后妃傳)」 ||
||<-2><bgcolor=#fff,#191919> 이황후 ||
||<-2> 7권 「종실전(宗室傳)」 ||
||<-2><width=1000><bgcolor=#fff,#191919>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勛) · 유신 · 유빈 ||
||<-2> 8권 「왕주등전(王周等傳)」 ||
||<-2><bgcolor=#fff,#191919> 왕주 · 유심교 · 무한구 · 장관 · 이은 · 유재명 · 마만 · 이언종 · 곽근 · 황보립 · 백재영 · 장붕 ||
||<-2> 9권 「사홍조등전(史弘肇等傳)」 ||
||<-2><bgcolor=#fff,#191919> 사홍조 · 양빈 · 왕장 · 이홍건 · 염진경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 유수 ||
|| 11권 「이숭등전(李崧等傳)」 || 1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
||<rowbgcolor=#fff,#191919> 이숭 · 소봉길 · 이린 · 용민 · 유정 · 장윤 · 임연호 || 두중위 · 이수정 · 조사관 ||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주서(周書) ]
#181818,#e5e5e5 
||<tablewidth=100%><tablebgcolor=#70745f><width=33%><rowcolor=#373a3c> {{{-1 {{{#ffffff,#191919 1·2·3·4권}}}}}} {{{-2 {{{#fff,#191919 「태조기(太祖記)」}}} }}} ||<-2><width=33%> {{{-1 {{{#ffffff,#191919 5·6·7·8·9·10권}}}}}} {{{-2 {{{#fff,#191919 「세종기(世宗紀)」}}} }}} ||<width=33%> {{{-1 {{{#ffffff,#191919 11권}}}}}} {{{-2 {{{#fff,#191919 「공제기(恭帝紀)」}}} }}} ||
||<rowbgcolor=#fff,#191919> [[곽위|{{{#000,#e5e5e5 곽위}}}]] ||<-2> [[시영|{{{#000,#e5e5e5 시영}}}]] || [[시종훈|{{{#000,#e5e5e5 시종훈}}}]] ||
||<-4><bgcolor=#ddd,#212121> ||
||<-4><width=1000><color=#373a3c> {{{-1 {{{#ffffff,#191919 12권}}}}}} {{{-2 {{{#fff,#191919 「후비전(后妃傳)」}}} }}} ||
||<-4><bgcolor=#fff,#191919> [[성목황후 시씨|{{{#000,#e5e5e5 성목황후}}}]] · [[숙비 양씨(후주)|{{{#999,#666666 양숙비}}}]] · [[귀비 장씨(후주)|{{{#999,#666666 장귀비}}}]] · [[덕비 동씨(후주)|{{{#999,#666666 동덕비}}}]] · [[정혜황후 유씨|{{{#999,#666666 정혜황후}}}]] · [[선의황후 부씨|{{{#999,#666666 선의황후}}}]]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13권}}}}}} {{{-2 {{{#fff,#191919 「종실전(宗室傳)」}}} }}} ||
||<-4><bgcolor=#fff,#191919> [[곽동|{{{#999,#666666 곽동}}}]] · [[곽신|{{{#999,#666666 곽신}}}]] · [[시종의|{{{#999,#666666 시종의}}}]] · [[시희회|{{{#999,#666666 시희회}}}]]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14권}}}}}} {{{-2 {{{#fff,#191919 「고행주등전(高行周等傳)」}}} }}} ||
||<-4><bgcolor=#fff,#191919> [[고행주|{{{#999,#666666 고행주}}}]] · [[안심기|{{{#999,#666666 안심기}}}]] · [[안심휘|{{{#999,#666666 안심휘}}}]] · [[안심신|{{{#999,#666666 안심신}}}]] · [[이종민(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종민}}}]] · [[정인회(오대십국시대)|{{{#999,#666666 정인회}}}]] · [[장언성|{{{#999,#666666 장언성}}}]] · [[안숙천|{{{#999,#666666 안숙천}}}]] · [[송언균|{{{#999,#666666 송언균}}}]]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15권}}}}}} {{{-2 {{{#fff,#191919 「왕은등전(王殷等傳)」}}} }}} ||
||<-4><bgcolor=#fff,#191919> [[왕은(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은}}}]] · [[하복진|{{{#999,#666666 하복진}}}]] · [[유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사}}}]] · [[왕진(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진}}}]] · [[사언초|{{{#999,#666666 사언초}}}]] · [[사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사의}}}]] · [[왕령온|{{{#999,#666666 왕령온}}}]] · [[주밀|{{{#999,#666666 주밀}}}]] · [[이회충|{{{#999,#666666 이회충}}}]] · [[백문가|{{{#999,#666666 백문가}}}]] · [[백연우|{{{#999,#666666 백연우}}}]] · [[당경사|{{{#999,#666666 당경사}}}]]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16권}}}}}} {{{-2 {{{#fff,#191919 「조휘등전(趙暉等傳)」}}} }}} ||
||<-4><bgcolor=#fff,#191919> [[조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조휘}}}]] · [[왕수은|{{{#999,#666666 왕수은}}}]] · [[공지준|{{{#999,#666666 공지준}}}]] · [[왕계홍|{{{#999,#666666 왕계홍}}}]] · [[풍휘|{{{#999,#666666 풍휘}}}]] · [[고윤권|{{{#999,#666666 고윤권}}}]] · [[절종완|{{{#999,#666666 절종완}}}]] · [[왕요(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요}}}]] · [[손방간|{{{#999,#666666 손방간}}}]] ||
||<-2><rowcolor=#373a3c> {{{-1 {{{#ffffff,#191919 17권}}}}}} {{{-2 {{{#fff,#191919 「풍도전(馮道傳)」}}} }}} ||<-2> {{{-1 {{{#ffffff,#191919 18권}}}}}} {{{-2 {{{#fff,#191919 「노문기등전(盧文紀等傳)」}}} }}} ||
||<-2><rowbgcolor=#fff,#191919> [[풍도(오대십국시대)|{{{#000,#e5e5e5 풍도}}}]] ||<-2> [[노문기|{{{#999,#666666 노문기}}}]] · [[마예손|{{{#999,#666666 마예손}}}]] · [[화응|{{{#999,#666666 화응}}}]] · [[소우규|{{{#999,#666666 소우규}}}]] · [[경범|{{{#999,#666666 경범}}}]]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19권}}}}}} {{{-2 {{{#fff,#191919 「왕박등전(王朴等傳)」}}} }}} ||
||<-4><bgcolor=#fff,#191919> [[왕박(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박}}}]] · [[양응식|{{{#999,#666666 양응식}}}]] · [[설인겸|{{{#999,#666666 설인겸}}}]] · [[소원(오대십국시대)|{{{#999,#666666 소원}}}]] · [[노손(오대십국시대)|{{{#999,#666666 노손}}}]] · [[왕인유|{{{#999,#666666 왕인유}}}]] · [[배우(오대십국시대)|{{{#999,#666666 배우}}}]] · [[단희요|{{{#999,#666666 단희요}}}]] · [[사도후|{{{#999,#666666 사도후}}}]] · [[변울|{{{#999,#666666 변울}}}]] · [[왕민|{{{#999,#666666 왕민}}}]]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20권}}}}}} {{{-2 {{{#fff,#191919 「상사등전(常思等傳)」}}} }}} ||
||<-4><bgcolor=#fff,#191919> [[상사(오대십국시대)|{{{#999,#666666 상사}}}]] · [[적광업|{{{#999,#666666 적광업}}}]] · [[조영(오대십국시대)|{{{#999,#666666 조영}}}]] · [[이언군|{{{#999,#666666 이언군}}}]] · [[이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이휘}}}]] · [[이건숭|{{{#999,#666666 이건숭}}}]] · [[왕중예|{{{#999,#666666 왕중예}}}]] · [[손한영|{{{#999,#666666 손한영}}}]] · [[허천(오대십국시대)|{{{#999,#666666 허천}}}]] · [[조봉|{{{#999,#666666 조봉}}}]] · [[제장진|{{{#999,#666666 제장진}}}]] · [[왕환(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환}}}]] · [[장언초|{{{#999,#666666 장언초}}}]] · [[장영(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영}}}]] · [[유인섬|{{{#999,#666666 유인섬}}}]]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21권}}}}}} {{{-2 {{{#fff,#191919 「왕준등전(王峻等傳)」}}} }}} ||
||<-4><bgcolor=#fff,#191919> [[왕준(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준}}}]] · [[모용언초|{{{#999,#666666 모용언초}}}]] · [[염홍로|{{{#999,#666666 염홍로}}}]] · [[최주도|{{{#999,#666666 최주도}}}]] ||
||<-4><color=#373a3c> {{{-1 {{{#ffffff,#191919 22권}}}}}} {{{-2 {{{#fff,#191919 「유호등전(劉皞等傳)」}}} }}} ||
||<-4><bgcolor=#fff,#191919> [[유호(오대십국시대)|{{{#999,#666666 유호}}}]] · [[장항(오대십국시대)|{{{#999,#666666 장항}}}]] · [[장가복|{{{#999,#666666 장가복}}}]] · [[우덕진|{{{#999,#666666 우덕진}}}]] · [[왕연(오대십국시대)|{{{#999,#666666 왕연}}}]] · [[신문병|{{{#999,#666666 신문병}}}]] · [[호재(오대십국시대)|{{{#999,#666666 호재}}}]] · [[유곤#s-4|{{{#000,#e5e5e5 유곤}}}]] · [[가위(오대십국시대)|{{{#999,#666666 가위}}}]] · [[조연의|{{{#999,#666666 조연의}}}]] · [[심구|{{{#999,#666666 심구}}}]] · [[이지손|{{{#999,#666666 이지손}}}]] · [[손성(오대십국시대)|{{{#999,#666666 손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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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열전(列傳) ]

||<rowbgcolor=#000> 132·133권 「세습열전(世襲列傳)」 || 134·135·136권 「참위열전(僭位列傳)」 ||
||<rowbgcolor=#fff,#191919> 이무정 · 고만흥 · 한손 · 이인복 · 고계흥 · 마은 · 유언 · 전류 || 양행밀 · 이변 · 왕심지 · 유수광 · 유엄 · 유숭 · 왕건 · 맹지상 ||
||<-2><rowbgcolor=#000> 137·138권 「외국열전(外國列傳)」 ||
||<-2><bgcolor=#fff,#191919><width=1000> 거란 · 토번 · 회골 · 고려 · 발해 · 흑수말갈 · 신라 · 당항 · 곤명부락 · 우전 · 점성 · 장가만 ||
※ 138권 ~ 150권은 志에 해당. 구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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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1·2권 「양본기1·2(太祖紀一二)」
3권 「양본기3(梁本紀三)」
주황
주우정
4·5권 「당본기1·2(唐本紀一二)」
6권 「당본기3(唐本紀三)」
7권 「당본기4(唐本紀四)」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 이종가
8권 「진본기1(晉本紀一)」
9권 「진본기2(晉本紀二)」
석경당
석중귀
10권 「한본기(漢本紀)」
유고 · 유승우
11권 「주본기1(周本紀一)」
12권 「주본기2(周本紀二)」
곽위
시영 · 시종훈
}}}
[ 열전(列傳) ]
13권 「양가인전(梁家人傳)」
문혜황후 · 원정황후 · 진소의 · 이소용 · 장덕비 · 곽비 · 주전욱 · 주존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자
14권 「당태조가인전(唐太祖家人傳)」
유부인 · 정간황후 · 신민경황후 ·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미 · 이존패 · 이존례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존기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계요
15권 「당명종가인전(唐明宗家人傳)」
화무헌황후 · 소의황후 · 위황후 · 왕숙비 · 공황후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익 · 이종찬 · 이종장 · 이종온 · 이종민
16권 「당폐제가인전(唐廢帝家人傳)」
유황후 · 이중길 · 이중미
17권 「진가인전(晉家人傳)」
황후 이씨 · 안태비 · 풍황후 · 석경위 · 석경윤 · 석경휘 · 석중신 · 석중예(重乂) · 석중예(重睿) · 석중고 · 석연후 · 석연보
18권 「한가인전(漢家人傳)」
이황후 · 유빈 ·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勳) · 유신
19권 「주태조가인전(周太祖家人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곽동 · 곽신 · 곽수원 · 곽손
20권 「주세종가인전(周世宗家人傳)」
시수례 · 정혜황후 · 선의황후 · 부황후 · 시종의 · 시희성 · 시희함 · 시희양 · 시희근 · 시희회

21권 「양신전·1(梁臣傳一)」
22권 「양신전·2(梁臣傳二)」
경상 · 주진 · 방사고 · 갈종주 · 곽존 · 장존경 · 부도소 · 유한 · 구언경
강회영 · 유심 · 우존절 · 장귀패 · 왕중사 · 서회옥
23권 「양신전·3(梁臣傳三)」
24권 「당신전·1(唐臣傳一)」
양사후 · 왕경인 · 하괴 · 왕단 · 마사훈 · 왕건유 · 사언장
곽숭도 · 안중회
25권 「당신전·2(唐臣傳二)」
26권 「당신전·3(唐臣傳三)」
주덕위 · 부존심 · 사건당 · 왕건급 · 원행흠 · 안금전 · 원건풍 · 서방업
부습 · 오진 · 공겸 · 장연랑 · 이엄 · 이인구 · 모장
27권 「당신전·4(唐臣傳四)」
28권 「당신전·5(唐臣傳五)」
주홍소 · 유연랑 · 강사립 · 강의성 · 약언조
두로혁 · 노정 · 임환 · 조봉 · 이습고 · 장헌 · 소희보 · 유찬 · 하찬
29권 「진신전(晉臣傳)」
30권 「한신전(漢臣傳)」
상유한 · 경연광 · 오만
소봉길 · 사홍조 · 양빈 · 왕장 · 유수 · 이업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31권 「주신전(周臣傳)」
32권 「사절전(死節傳)」
왕박 · 정인회 · 호재
왕언장
33권 「사사전(死事傳)」
장원덕 · 하노기 · 요홍 · 왕사동 · 장경달 · 적진종 · 심빈(1) · 왕청 · 사언초 · 손성
34권 「일행전(一行傳)」
정요 · 석앙 · 정복윤 · 이자륜
35권 「당육신전(唐六臣傳)」
36권 「의아전(義兒傳)」
장문울 · 양섭 · 장책 · 조광봉 · 설이구 · 소순
이사소 · 이사본 · 이사은 ·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37권 「영관전(伶官傳)」
38권 「환관전(宦官傳)」
주잡 · 경신마 · 경진 · 사언경 · 곽종겸
장승업 · 장거한
39권 「왕용등전(王鎔等傳)」
40권 「이무정등전(李茂貞等傳)」
왕용 · 나소위 · 왕처직 · 유수광
이무정 · 한건 · 이인복 · 한손 · 양숭본 · 고만흥 · 온도
41권 「노광조등전(盧光稠等傳)」
42권 「주선등전(朱宣等傳)」
노광조 · 담전파 · 뇌만 · 종전 · 조광응
주선 · 왕사범 · 이한지 · 맹방립 · 왕가 · 조주 · 풍행습
43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44권 「유지준등전(劉知俊等傳)」
씨숙종 · 이언위 · 이진 · 배적 · 위진 · 공순 · 손덕소 · 왕경요 · 장은
유지준 · 정회 · 하덕륜 · 염보 · 강연효
45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4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장전의 · 주우겸 · 원상선 · 주한빈 · 단응 · 유기 · 주지유 · 육사탁
조재례 · 곽언위 · 방지온 · 왕안구 · 안중패 · 왕건립 · 강복 · 곽연로
47권 「화온기등전(華溫琪等傳)」
화온기 · 장종간 · 장균 · 양언순 · 이주 · 유처양 · 이승약 · 장희숭 · 상리금 · 장정온 · 마전절 · 황보우 · 안언위 · 이경 · 이경암
48권 「노문진등전(盧文進等傳)」
노문진 · 이금전 · 양사권 · 윤휘 · 왕홍지 · 유심교 · 왕주 · 고행주 · 백재영 · 안숙천
49권 「적광업등전(翟光鄴等傳)」
적광업 · 풍휘 · 황보휘 · 당경사 · 왕진 · 상사 · 손방간
50권 「왕준등전(王峻等傳)」
51권 「주수은등전(朱守殷等傳)」
왕준 · 왕은 · 유사 · 왕환 · 절종완
주수은 · 동장 · 범연광 · 누계영 · 안중영 · 안종진 · 양광원
5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53권 「왕경숭등전(王景崇等傳)」
두중위 · 이수정 · 장언택
왕경숭 · 조사관 · 모용언초
54권 「풍도등전(馮道等傳)」
55권 「유구등전(劉昫等傳)」
풍도 · 이기 · 정각 · 이우 · 노도 · 사공정
유구 · 노문기 · 마윤손 · 요의 · 유악 · 마호
56권 「화응등전(和凝等傳)」
화응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57권 「이숭등전(李崧等傳)」
이숭 · 이린 · 가위 · 단희요 · 장윤 · 왕송 · 배호 · 왕인유 · 배우 · 왕연 · 마중적 · 조연의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58권 ~ 60권은 考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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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0%"
[ 세가(世家) ]
61권 「오세가(吳世家)」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왕건
맹지상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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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0%">
[ 본기(本紀) ]
1·2권 「양본기1·2(太祖紀一二)」
3권 「양본기3(梁本紀三)」
주황
주우정
4·5권 「당본기1·2(唐本紀一二)」
6권 「당본기3(唐本紀三)」
7권 「당본기4(唐本紀四)」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 이종가
8권 「진본기1(晉本紀一)」
9권 「진본기2(晉本紀二)」
석경당
석중귀
10권 「한본기(漢本紀)」
유고 · 유승우
11권 「주본기1(周本紀一)」
12권 「주본기2(周本紀二)」
곽위
시영 · 시종훈
}}}
[ 열전(列傳) ]
13권 「양가인전(梁家人傳)」
문혜황후 · 원정황후 · 진소의 · 이소용 · 장덕비 · 곽비 · 주전욱 · 주존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자
14권 「당태조가인전(唐太祖家人傳)」
유부인 · 정간황후 · 신민경황후 ·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미 · 이존패 · 이존례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존기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계요
15권 「당명종가인전(唐明宗家人傳)」
화무헌황후 · 소의황후 · 위황후 · 왕숙비 · 공황후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익 · 이종찬 · 이종장 · 이종온 · 이종민
16권 「당폐제가인전(唐廢帝家人傳)」
유황후 · 이중길 · 이중미
17권 「진가인전(晉家人傳)」
황후 이씨 · 안태비 · 풍황후 · 석경위 · 석경윤 · 석경휘 · 석중신 · 석중예(重乂) · 석중예(重睿) · 석중고 · 석연후 · 석연보
18권 「한가인전(漢家人傳)」
이황후 · 유빈 ·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勳) · 유신
19권 「주태조가인전(周太祖家人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곽동 · 곽신 · 곽수원 · 곽손
20권 「주세종가인전(周世宗家人傳)」
시수례 · 정혜황후 · 선의황후 · 부황후 · 시종의 · 시희성 · 시희함 · 시희양 · 시희근 · 시희회

21권 「양신전·1(梁臣傳一)」
22권 「양신전·2(梁臣傳二)」
경상 · 주진 · 방사고 · 갈종주 · 곽존 · 장존경 · 부도소 · 유한 · 구언경
강회영 · 유심 · 우존절 · 장귀패 · 왕중사 · 서회옥
23권 「양신전·3(梁臣傳三)」
24권 「당신전·1(唐臣傳一)」
양사후 · 왕경인 · 하괴 · 왕단 · 마사훈 · 왕건유 · 사언장
곽숭도 · 안중회
25권 「당신전·2(唐臣傳二)」
26권 「당신전·3(唐臣傳三)」
주덕위 · 부존심 · 사건당 · 왕건급 · 원행흠 · 안금전 · 원건풍 · 서방업
부습 · 오진 · 공겸 · 장연랑 · 이엄 · 이인구 · 모장
27권 「당신전·4(唐臣傳四)」
28권 「당신전·5(唐臣傳五)」
주홍소 · 유연랑 · 강사립 · 강의성 · 약언조
두로혁 · 노정 · 임환 · 조봉 · 이습고 · 장헌 · 소희보 · 유찬 · 하찬
29권 「진신전(晉臣傳)」
30권 「한신전(漢臣傳)」
상유한 · 경연광 · 오만
소봉길 · 사홍조 · 양빈 · 왕장 · 유수 · 이업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31권 「주신전(周臣傳)」
32권 「사절전(死節傳)」
왕박 · 정인회 · 호재
왕언장
33권 「사사전(死事傳)」
장원덕 · 하노기 · 요홍 · 왕사동 · 장경달 · 적진종 · 심빈(1) · 왕청 · 사언초 · 손성
34권 「일행전(一行傳)」
정요 · 석앙 · 정복윤 · 이자륜
35권 「당육신전(唐六臣傳)」
36권 「의아전(義兒傳)」
장문울 · 양섭 · 장책 · 조광봉 · 설이구 · 소순
이사소 · 이사본 · 이사은 ·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37권 「영관전(伶官傳)」
38권 「환관전(宦官傳)」
주잡 · 경신마 · 경진 · 사언경 · 곽종겸
장승업 · 장거한
39권 「왕용등전(王鎔等傳)」
40권 「이무정등전(李茂貞等傳)」
왕용 · 나소위 · 왕처직 · 유수광
이무정 · 한건 · 이인복 · 한손 · 양숭본 · 고만흥 · 온도
41권 「노광조등전(盧光稠等傳)」
42권 「주선등전(朱宣等傳)」
노광조 · 담전파 · 뇌만 · 종전 · 조광응
주선 · 왕사범 · 이한지 · 맹방립 · 왕가 · 조주 · 풍행습
43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44권 「유지준등전(劉知俊等傳)」
씨숙종 · 이언위 · 이진 · 배적 · 위진 · 공순 · 손덕소 · 왕경요 · 장은
유지준 · 정회 · 하덕륜 · 염보 · 강연효
45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4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장전의 · 주우겸 · 원상선 · 주한빈 · 단응 · 유기 · 주지유 · 육사탁
조재례 · 곽언위 · 방지온 · 왕안구 · 안중패 · 왕건립 · 강복 · 곽연로
47권 「화온기등전(華溫琪等傳)」
화온기 · 장종간 · 장균 · 양언순 · 이주 · 유처양 · 이승약 · 장희숭 · 상리금 · 장정온 · 마전절 · 황보우 · 안언위 · 이경 · 이경암
48권 「노문진등전(盧文進等傳)」
노문진 · 이금전 · 양사권 · 윤휘 · 왕홍지 · 유심교 · 왕주 · 고행주 · 백재영 · 안숙천
49권 「적광업등전(翟光鄴等傳)」
적광업 · 풍휘 · 황보휘 · 당경사 · 왕진 · 상사 · 손방간
50권 「왕준등전(王峻等傳)」
51권 「주수은등전(朱守殷等傳)」
왕준 · 왕은 · 유사 · 왕환 · 절종완
주수은 · 동장 · 범연광 · 누계영 · 안중영 · 안종진 · 양광원
5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53권 「왕경숭등전(王景崇等傳)」
두중위 · 이수정 · 장언택
왕경숭 · 조사관 · 모용언초
54권 「풍도등전(馮道等傳)」
55권 「유구등전(劉昫等傳)」
풍도 · 이기 · 정각 · 이우 · 노도 · 사공정
유구 · 노문기 · 마윤손 · 요의 · 유악 · 마호
56권 「화응등전(和凝等傳)」
화응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57권 「이숭등전(李崧等傳)」
이숭 · 이린 · 가위 · 단희요 · 장윤 · 왕송 · 배호 · 왕인유 · 배우 · 왕연 · 마중적 · 조연의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58권 ~ 60권은 考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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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世家) ]
61권 「오세가(吳世家)」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왕건
맹지상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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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宋史)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2e8b57><width=33%> 1·2·3권 「태조기(太祖紀)」 ||<-2><width=33%> 4·5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 6·7·8권 「진종기(眞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광윤 ||<-2> 조광의 || 조항 ||
|| 9·10·11·12권 「인종기(仁宗紀)」 ||<-2> 13권 「영종기(英宗紀)」 || 14·15·16권 「신종기(神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정(趙禎) ||<-2> 조서 || 조욱 ||
|| 17·18권 「철종기(哲宗紀)」 ||<-2> 19·20·21·22권 「휘종기(徽宗紀)」 || 23권 「흠종기(欽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후 ||<-2> 조길 || 조환 ||
|| 24·25·26·27·28·29·30·31·32권 「고종기(高宗紀)」 ||<-2> 33·34·35권 「효종기(孝宗紀)」 || 36권 「광종기(光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구 ||<-2> 조신 || 조돈 ||
||<-2> 37·38·39·40권 「영종기(寧宗紀)」 ||<-2> 41·42·43·44·45권 「이종기(理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조확 ||<-2> 조윤 ||
||<-2> 46권 「도종기(度宗紀)」 ||<-2> 47권 「영국공기(瀛國公紀)」 ||
||<-2><rowbgcolor=#fff,#191919> 조기(趙禥) ||<-2> 조현 · 조하(趙昰) · 조병 ||
||<-4><width=1000> ||
※ 48권 ~ 209권은 志에 해당. 210권 ~ 241권은 表에 해당. 송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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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2e8b57><width=33%> 1·2·3권 「태조기(太祖紀)」 ||<-2><width=33%> 4·5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 6·7·8권 「진종기(眞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광윤 ||<-2> 조광의 || 조항 ||
|| 9·10·11·12권 「인종기(仁宗紀)」 ||<-2> 13권 「영종기(英宗紀)」 || 14·15·16권 「신종기(神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정(趙禎) ||<-2> 조서 || 조욱 ||
|| 17·18권 「철종기(哲宗紀)」 ||<-2> 19·20·21·22권 「휘종기(徽宗紀)」 || 23권 「흠종기(欽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후 ||<-2> 조길 || 조환 ||
|| 24·25·26·27·28·29·30·31·32권 「고종기(高宗紀)」 ||<-2> 33·34·35권 「효종기(孝宗紀)」 || 36권 「광종기(光宗紀)」 ||
||<rowbgcolor=#fff,#191919> 조구 ||<-2> 조신 || 조돈 ||
||<-2> 37·38·39·40권 「영종기(寧宗紀)」 ||<-2> 41·42·43·44·45권 「이종기(理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조확 ||<-2> 조윤 ||
||<-2> 46권 「도종기(度宗紀)」 ||<-2> 47권 「영국공기(瀛國公紀)」 ||
||<-2><rowbgcolor=#fff,#191919> 조기(趙禥) ||<-2> 조현 · 조하(趙昰) · 조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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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권 ~ 209권은 志에 해당. 210권 ~ 241권은 表에 해당. 송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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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242·243권 「후비전(后妃傳)」
소헌태후 · 효혜황후 · 효명황후 · 효장황후 · 숙덕황후 · 의덕황후 · 명덕황후 · 원덕황후 · 장회황후 · 장목황후 · 장헌명숙황후 · 장의황후 · 장혜황후 · 소정귀비 · 곽황후 · 자성광헌황후 · 온성황후 · 소절귀비 · 소숙귀비 · 양덕비 · 풍현비 · 선인성렬황후 · 흠성헌숙황후 · 흠성황후 · 흠자황후 · 임현비 · 혜목현비 · 소자성헌황후 · 소회황후 · 현공황후 · 현숙황후 · 의숙귀비 · 현인황후 · 교귀비 · 명달황후 · 인회황후 · 헌절황후 · 헌성자열황후 · 반현비 · 장현비 · 양덕비 · 유완의 · 장귀비 · 성목황후 · 성공황후 · 성숙황후 · 채귀비 · 이현비 · 자의황후 · 황귀비 · 공숙황후 · 공성인열황후 · 사도청 · 전황후 · 양숙비
244·245·246·247권 「종실전(宗室傳)」
조정미 · 조덕소 · 조덕방 · 조원좌 · 조원희 · 조원분 · 조원걸 · 조원악 · 조원칭 · 조원엄 · 조원억 · 조우 · 조윤양 · 조호 · 조군 · 조필 · 조오 · 조사 · 조무 · 조해 · 조추 · 조기(趙杞) · 조허 · 조체 · 조악 · 조식 · 조진(趙榛) · 조심 · 조훈(趙訓) · 조부 · 조거 · 조기(趙愭) · 조개(趙愷) · 조순 · 조횡 · 조자칙 · 조자숭 · 조자력 · 조자지 · 조자주 · 조자숙 · 조사이 · 조희언 · 조희역 · 조사오 · 조사요 · 조사궁 · 조사천 · 조불군 · 조불기 · 조불우 · 조불백 · 조선준 · 조선예 · 조여술 · 조숙근 · 조숙향 · 조언담 · 조언숙 · 조언유
248권 「공주전(公主傳)」
진(秦)국대장공주 · 위(魏)국대장공주 · 노국대장공주 · 진(陳)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빈국대장공주 · 양국대장공주 · 옹국대장공주 · 위(衛)국대장공주 · 형국대장공주 · 장혜국공주 · 승국대장공주 · 주진국대장공주 · 진로국대장공주 · 곤국대장공주 · 연서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위초국대장공주 · 위국대장공주 · 한위국대장공주 · 주국장공주 · 당국장공주 · 담국장공주 · 서국장공주 · 진국공주 · 진국장공주 · 가덕제희 · 영덕제희 · 순숙제희 · 안덕제희 · 무덕제희 · 수숙제희 · 안숙제희 · 숭덕제희 · 가국공주 · 문안공주 · 화정공주 · 제안공주 · 안강군주 · 기국공주 · 주한국공주
249권 「범질등전(范質等傳)」
250권 「석수신등전(石守信等傳)」
범질 · 왕부 · 위인포
석수신 · 왕심기 · 고회덕 · 한중윤 · 장령탁 · 나언괴 · 왕언승
251권 「한령곤등전(韓令坤等傳)」
252권 「왕경등전(王景等傳)」
한령곤 · 모용연쇠 · 부언경
왕경 · 왕안 · 곽종의 · 이홍신 · 무행덕 · 양승신 · 후장
253권 「절덕의등전(折德扆等傳)」
254권 「후익등전(侯益等傳)」
절덕의 · 풍계업 · 왕승업 · 이계주 · 손행우
후익 · 장종은 · 호언가 · 설회양 · 조찬 · 이계훈 · 약원복 · 조조
255권 「곽숭등전(郭崇等傳)」
곽숭 · 양정장 · 송악 · 상공 · 왕언초 · 장영덕 · 왕전빈 · 강연택 · 왕계도 · 고언휘
256권 「조보전(趙普傳)」
257권 「오정조등전(吳廷祚等傳)」
258권 「조빈등전(曹彬等傳)」
조보(趙普)
오정조 · 이숭구 · 왕인섬 · 초소보 · 이처운
조빈(曹彬) · 반미 · 이초
259권 「장미등전(張美等傳)」
장미 · 곽수문 · 윤숭가 · 유정양 · 원계충 · 최언진 · 장정한 · 황보계명 · 장경
260권 「조한등전(曹翰等傳)」
조한 · 양사 · 당진(黨進) · 이한경 · 유우(劉遇) · 이회충 · 미신 · 전중진 · 유정한 · 최한
261권 「이경등전(李瓊等傳)」
이경(李瓊) · 곽경 · 진승소 · 이만초 · 백중찬 · 왕인호 · 진사양 · 초계훈 · 유중진 · 원언 · 기정훈 · 장탁 · 이만전 · 전경함 · 왕휘
262권 「이곡등전(李穀等傳)」
이곡 · 잠거윤 · 두정고 · 이도(李濤) · 왕역간 · 조상교 · 장석 · 장주 · 변귀당 · 유온수 · 유도 · 변광범 · 유재(劉載) · 정우(程羽)
263권 「장소등전(張昭等傳)」
264권 「설거정등전(薛居正等傳)」
장소(張昭) · 두의(竇儀) · 여여경 · 유희고 · 석희재 · 이목
설거정 · 심륜 · 노다손 · 송기 · 송웅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이방(李昉) · 여몽정 · 장제현 · 가황중
전약수 · 소역간 · 곽지 · 이지 · 신중보 · 왕면 · 온중서 · 왕화기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장굉 · 조창언 · 진서 · 유식(劉式) · 유창언 · 장계 · 이유청
시우석 · 장손 · 양수일 · 조용 · 주영 · 왕계영 · 왕현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도곡 · 호몽 · 왕저 · 왕우(王祐) · 양소검 · 어숭량 · 장담 · 고석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안간 · 극가구 · 조봉 · 소요 · 고방 · 풍찬 · 변후 · 왕명 · 허중선 · 양극양 · 단사공 · 후척 · 이부(李符) · 위비 · 동추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마영종 · 두한휘 · 장정한 · 오건유 · 채심정 · 주광 · 장훈 · 석희 · 장장영 · 육만우 · 해휘 · 이도(李韜) · 왕진경 · 곽정위 · 조연진 · 보초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양업 · 형한유 · 조광실 · 장휘 · 사초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이진경 · 양미 · 하계균 · 이한초 · 곽진(郭進) ,우사진, · 이겸부 · 요내빈 · 동준회 · 하유충 · 마인우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왕찬 · 장보속 · 조빈(趙玭) · 노회충 · 왕계훈 · 정덕유 · 장연통 · 양형 · 사규 · 전흠조 · 후지 · 왕문실 · 적수소 · 왕신(王侁) · 유심경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유복 · 안수충 · 공수정 · 담연미 · 원달 · 상사덕 · 윤계륜 · 설초 ,정한 조도, · 곽밀 ,부사양 이빈(李斌), · 전인랑 · 유겸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유보훈 · 등중정 · 유반 · 공승공 · 송당 · 원곽 · 번지고 ,곽재, · 장병(臧丙) · 서휴복 · 장관 · 진종신 · 장평 · 왕계승 · 윤헌 · 왕빈(王賓) · 안충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장감(張鑒) · 요탄 · 삭상 · 송태초 · 노지한 · 정문보 · 왕자여 · 유종 · 변곤 · 허양 · 배장 · 우면 ,장적, · 난숭길 · 원봉길 · 한국화 · 하몽 · 신지례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마전의 · 뇌덕양 · 왕초(王超)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왕계충 · 부잠 · 대흥 · 왕한충 · 왕능 · 장응 · 위능 · 진흥 · 허균 · 장진 · 이중귀 · 호연찬 · 유용 · 경전빈 · 주인미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전소빈 · 왕영 · 양경(楊瓊) · 전수준 · 서흥 · 왕고 · 이중회 · 백수소 · 장사윤 · 이기 · 왕연범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여단 · 필사안 · 구준
이항 · 왕단 · 상민중
왕흠약 · 임특 · 정위 · 하송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진요좌 · 송상
진집중 · 유항 · 가창조 · 양적 · 풍증
노종도 · 설규 · 왕서(王曙) · 채제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양려 · 송식 · 양사종 · 이창령 · 조안인 · 진팽년
임중정 · 주기 · 정림 · 강준 · 범옹 · 조진(趙稹) · 임포(任布) · 고약눌 · 손면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고경 · 범정소 · 갈패
조이용 ,손계엄, · 장기(張耆) · 양숭훈 · 하수은 · 적청 ,장옥 손절, · 곽규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오육 · 송수 · 이약곡 · 왕박문 · 왕종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이자 · 정감 · 하후교 · 성도(盛度) · 정도 · 장관 · 정전 · 명호 · 왕요신 · 손변 · 전황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전석 · 왕우칭 · 장영(張詠)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장우석 · 소신 · 왕수(王洙) · 서언 · 유식(柳植) · 섭관경 · 풍원 · 조사민 · 장석 · 장규 · 양안국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윤수 · 손보 · 사강 · 엽청신 · 양찰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한비 · 사항 · 장무직 · 양호 · 양휘지 · 여문중 · 왕저 · 여우지 · 반신수 · 두호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공도보 · 국영 · 유수 · 조수고 · 곽권 · 단소련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팽승 · 혜영 · 매지 · 사마지 · 이급 · 연숙 · 장당 · 유기(劉夔) · 마량 · 진희량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적비 · 낭간 · 손조덕 · 장약곡 · 석양휴 · 조사형 · 이수 · 장동 · 이사형 · 이부(李溥) · 호칙 · 설안 · 허원 · 종리근 · 손충 · 최역 · 전유 · 시창언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양해 · 왕연(王沿) · 두기 · 양전(楊畋) · 주담 · 서적(徐的) · 요중손 · 진태소 ,마심 두증, · 이허기 · 장부 · 유헌경 · 진종역 · 양대아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변숙 · 매순 · 마원방 · 설전 · 구감 · 양일엄 · 이행간 · 장빈 · 진염 · 이유 · 장병(張秉) · 장택행 · 정향 · 곽진(郭稹) · 조하(趙賀) · 고적(高覿) · 원항 · 서기 · 장지 · 제곽 · 정양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왕진 · 어주순 · 가암 · 이경(李京) · 여경초 · 오급 · 범사도 · 이현 · 하중립 · 심막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장온지 · 위관 · 등종량 · 이방(李防) · 조상 · 당숙 · 장술 · 황진(黃震) · 호순지 · 진관(陳貫) · 범상 · 전경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주위 · 양정(梁鼎) · 범정사 · 유사도 · 왕제 · 방해 · 조영숙 · 유원유 · 양고 · 조급 · 유식(劉湜) · 왕빈(王彬) · 중간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양억 · 조형 · 유균 · 설앙
사필 · 손하 · 주태부 · 척륜 · 장거화 · 악황목 · 시성무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교유악 · 왕척 · 장옹 · 동엄 · 위정식 · 노염 · 송단 · 능책 · 양담 · 진세경 · 이약졸 · 진지미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상관정 · 노빈 · 주심옥 · 배제 · 이계선 · 장단 · 장후 · 장길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왕연덕 · 상연신 · 정덕현 · 우연덕 · 위진(魏震) · 장질 · 양윤공 · 진희 · 사덕권 · 염일신 · 근회덕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이적 · 왕증 · 장지백 · 두연
안수 · 방적 · 왕수(王隨) · 장득상 · 여이간 · 장사손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한기 · 증공량 · 진승지 · 오충 · 왕규
부필 · 문언박
범중엄 · 범순인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한억
포증 · 오규 · 조변 · 당개
소항 · 풍경 · 전유연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장방평 · 왕공진 · 장변 · 조개(趙槩) · 호숙
구양수 · 유창(劉敞) · 증공
채양 · 여진 · 왕소(王素) · 여정 · 팽사영 · 장존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정해 · 진양(陳襄) · 전공보 · 손수 · 풍직 · 여회 · 유술 · 유기(劉琦) · 전의 · 정협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하담(何郯) · 오중복 · 진천 · 왕렵 · 손사공 · 주맹양 · 제회 · 양회 · 유상 · 주경(朱京)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울소민 · 고화 · 주미 · 염수공 · 맹원 · 유겸 · 조진(趙振) · 장충 · 범각 · 마회덕 · 안준 · 상보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석보 · 장자 · 허회덕 · 이윤칙 · 장항 · 유문질 · 조자
유평 · 임복 · 왕규 · 무영 · 상역 · 경부 · 왕중보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경태 · 왕신(王信) · 장해 · 장충 · 곽은 · 장절(張岊) · 장군평 · 사방 · 노감 · 이위 · 왕과 · 곽자 · 전민 · 시기서 · 강덕여 · 장소원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왕안석 · 왕안례 · 왕안국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이청신 · 안도 · 장조(張璪) · 포종맹 · 황리 · 채정(蔡挺) · 왕소(王韶) · 설향 · 장절(章楶)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상질 · 등관 · 이정(李定) · 서단 · 건주보 · 서탁 · 왕광연 · 왕도 · 왕자소 · 하정신 · 진역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임전 · 이참 · 곽신창 · 부구 · 장경헌 · 두변 · 장괴 · 손유 · 허준 · 노사종 · 전상선 · 두순 · 두상 · 사린 · 왕종망 · 왕길보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손장경 · 주항 · 이중사 · 나증 · 마중보 · 왕거경 · 손구 · 장선 · 소심 · 마종선 · 심구 · 이대림 · 여하경 · 조무택 · 정사맹 · 장문 ,진순유 악경 유몽, · 묘시중 · 한지 · 초건중 · 장힐 · 노혁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등원발 · 이사중 · 육선 · 조설 · 손로 · 유사웅 · 목연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양좌 · 이태(李兌) · 심립 · 장섬 · 장도 · 유충 · 유근 · 염순 · 갈궁 · 장전 · 영인 · 이재 · 요환 · 주경(朱景) · 이종 · 주수륭 · 노사굉 · 단후 · 양중원 · 여양굉 · 반숙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서희 ,이직(李稷), · 고영능 · 심기(沈起) · 유이 · 웅본 · 소주 · 도필 · 임광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충세형
사마광 · 여공저
범진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소식
소철
여대방 · 유지 · 소송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왕존 · 손고(孫固) · 조첨 · 부요유
양도 · 왕암수 · 정옹 · 손영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원강 · 허장 · 등윤보 · 임희 · 장지기 · 육전 · 오거후 · 온익
손각 · 이상(李常) · 공문중 · 이주 · 선우신 · 고림 · 이지순 · 왕적 · 마묵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유안세 · 추호 ,전주 왕회(王回) 증탄, · 진관(陳瓘) · 임백우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진차승 · 진사석 · 팽여려 · 여도 · 장정견 · 공결 · 손악 · 진헌 · 강공망 · 진우 · 상안민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손고(孫鼛) · 오시 · 이소기 · 오사례 · 왕한지 · 황렴 · 주복 · 장순민 · 성도(盛陶) · 장형 · 안복 · 손승 · 한천 · 공정신 · 정목 · 석단 · 교집중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부즙 · 심기(沈畸)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이린 · 서승규 · 유효충 · 여승 · 나거통 · 제득일 · 이한징 · 형신류 · 허조 · 호중요 · 진긍 · 홍문무 · 역연경 · 동도명 · 곽종 · 고흔 · 주태 · 성상 · 진사도 · 방강 · 방천우 · 유빈 · 번경온 · 영서민 · 기위 · 하보지 · 이빈(李玭) · 후의 · 왕광제 · 강백 · 구승순 · 상진 · 두의(杜誼) · 요종명 · 등중화 · 모안여 · 이방(李訪) · 주수창 · 후가 · 신적중 · 학인 · 지점 · 등종고 · 심선 · 소경문 · 태형 · 앙흔 · 조백심 · 팽유 · 모순 · 양경(楊慶) · 진종 · 곽의 · 신세녕 · 구여령 · 왕주(王珠) · 안후 · 장백위 · 채정(蔡定) · 정기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척동문 · 진단 · 충방 · 만적 · 이독 · 위야 · 형돈 · 임포(林逋) · 고역 · 서복 · 공민 · 하군 · 왕초(王樵) · 장유(張愈) · 황희 · 주계명 · 대연 · 진열 · 손모 · 유역 · 강잠 · 연서 · 장찰 · 유여상 · 양효본 · 등고보 · 우문지소 · 오영(吳瑛) · 송강어옹 · 두생 · 순창선인 · 남안옹 · 장여 · 서중행 · 소운경 · 초정 · 왕충민 · 유면지 · 호헌 · 곽옹 · 유우(劉愚) · 위섬지 · 안세통 · 유정식 · 소곡 · 서적(徐積) · 증숙경 · 유영일
460권 「열녀전(列女傳)」
주아 · 학절아 · 진당전 · 여양자 · 동팔나 · 한희맹 · 모석석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조수기 · 왕처눌 · 묘훈 · 마소 · 초지란 · 한현부 · 사서 · 주극명 · 유한 · 왕회은 · 조자화 · 풍문지 · 홍온 · 소징은 · 정소미 · 조자연 · 하란서진 · 시통현 · 견서진 · 초연 · 지언 · 회병 · 허희 · 방안시 · 전을 · 지연 · 곽천신 · 위한진 · 왕노지 · 왕자석 · 임령소 · 황보탄 · 왕극명 · 사의도인 · 손수영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두심기 · 하영도 · 왕계훈 · 유지신 · 유문유 · 유미 · 곽숭인 · 양경종 · 부유충 · 시종경 · 장요좌 · 왕이영 · 이소량 · 이용화 · 이준욱 · 조일 · 고준유 · 상전범 · 장돈례 · 임택 · 맹충후 · 위연 · 전침 · 형환 · 반영사 · 오익 · 이도(李道) · 정흥예 · 양차산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두신보 · 왕인예 · 왕계은 · 이신복 · 유승규 · 염승한 · 진한 · 주회정 · 장귀숭 · 장계능 · 위소흠 · 석지옹 · 등수은 · 양수진 · 한수영 · 남계종 · 장유길 · 감소길 · 노수근 · 왕수규 · 이헌 · 장무칙 · 송용신 · 왕중정 · 이순거 · 석득일 · 양종길 · 유유간 · 이상(李祥) · 진연 · 풍세녕 · 이계화 · 고거간 · 정방 · 소이섭 · 뇌윤공 · 염문응 · 임수충 · 동관 · 양사성 · 양전(楊戩) · 소성장 · 남규 · 풍익 · 마거위 · 진원 · 감변 · 왕덕겸 · 관례 · 동송신
470권 「영행전(佞幸傳)」
미덕초 · 후막진리용 · 조찬 · 왕보 · 주면 · 왕계선 · 증적 · 장설 · 왕변 · 강특립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채확 · 형서 · 여혜경 · 장돈 · 증포 · 안돈 · 채경 · 조양사 · 장각(張覺) · 곽약사 · 황잠선 · 왕백언 · 진회 · 묵기설 · 한탁주 · 정대전 · 가사도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장방창 · 유예 · 묘부 · 두충 · 오희 · 이전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이경(李景)
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정조전여조이조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마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박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요사(遼史)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width=33%> 1·2권 「태조기(太祖紀)」 ||<width=33%> 3·4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 5권 「세종기(世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아보기 || 야율요골 || 야율올욕 ||
|| 6·7권 「목종기(穆宗紀)」 || 8·9권 「경종기(景宗紀)」 ||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술률 || 야율명의 || 야율문수노 ||
||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지골 || 야율사랄 ||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3><width=1000> ||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width=33%> 1·2권 「태조기(太祖紀)」 ||<width=33%> 3·4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 5권 「세종기(世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아보기 || 야율요골 || 야율올욕 ||
|| 6·7권 「목종기(穆宗紀)」 || 8·9권 「경종기(景宗紀)」 ||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술률 || 야율명의 || 야율문수노 ||
||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지골 || 야율사랄 ||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3><width=1000> ||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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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71권 「후비전(后妃傳)」
소탁진 · 소아리신 · 소월리타 · 소암모근 · 술률평 · 소온 · 소철갈지 · 견비 · 소황후 · 소작 · 소보살가 · 소누근 · 소달리 · 소삼천 · 소관음
소탄사 · 소탈리라 · 소사고 · 소비비 · 소귀가
72권 「종실전(宗室傳)」
73권 「야율갈로등전(耶律曷魯等傳)」
야율배 · 야율이호 · 야율준 · 야율오로알
야율갈로 · 소적로 소아고지 · 야율사열적 야율로고 야율파덕 · 야율욕온 · 야율해리(海里)
74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75권 「야율적렬등전(耶律覿烈等傳)」
야율적랄 · 소흔독 · 강묵기 · 한연휘 · 한지고
야율적렬 · 야율탁진 · 왕욱 · 야율도로군
76권 「야율해리등전(耶律解里等傳)」
야율해리(解里) · 야율발리득 · 야율삭고 · 야율노불고 · 조연수 · 고모한 · 조사온 · 야율구리사 · 장려
77권 「야율옥질등전(耶律屋質等傳)」
78권 「야율이랍갈등전(耶律夷臘葛等傳)」
야율옥질 · 야율후 · 야율안단 · 야율와 · 야율퇴욱 · 야율달열
야율이랍갈 · 소해리 · 소호사 · 소사온 · 소계선
79권 「실방등전(室昉等傳)」
80권 「장검등전(張儉等傳)」
실방 · 야율현적 · 여리 · 곽습 · 야율아몰리
장검 · 형포박 · 마득신 · 야율도로군 · 야율팔가
81권 「야율실로등전(耶律室魯等傳)」
82권 「야율융운등전(耶律隆運等傳)」
야율실로 · 왕계충 · 소효충 · 진소곤 · 소합탁
야율융운 · 야율발고철 · 소양아 · 무백 · 소상가 · 야율호고
83권 「야율휴가등전(耶律休哥等傳)」
84권 「야율사등전(耶律沙等傳)」
야율휴가 · 야율사진 · 야율해저 · 야율학고
야율사 · 야율말지 · 소간 · 야율선보 · 야율해리
85권 「소달름등전(蕭撻凜等傳)」
소달름 · 소관음노 · 야율제자 · 야율해리(諧理) · 야율노과 · 소류 · 고훈 · 해화삭노 · 소탑열갈 · 야율살합
86권 「야율합주등전(耶律合住等傳)」
야율합주 · 유경 · 유육부 · 야율요리 · 우온서 · 두방 · 소화상 · 야율합리지 · 야율파적
87권 「소효목등전(蕭孝穆等傳)」
소효목 · 소포노 · 야율포고 · 하행미
88권 「소적렬등전(蕭敵烈等傳)」
소적렬(蕭敵烈) · 야율분노 · 소배압 소항덕 · 야율자충 · 야율요질 · 야율홍고 · 고정 · 야율적록(的琭) · 대강예
89권 「야율서성등전(耶律庶成等傳)」
90권 「소아랄등전(蕭阿剌等傳)」
야율서성 · 양석 · 야율한류 · 양길 · 야율화상
소아랄 · 야율의선 · 소도외 · 소탑랄갈 · 야율적록(敵祿)
91권 「야율한팔등전(耶律韓八等傳)」
92권 「소탈랄등전(蕭奪剌等傳)」
야율한팔 · 야율당고 · 소출철 · 야율결 · 야율복리독
소탈랄 · 소보달 · 야율후신 · 야율고욱 · 야율독매 · 소한가 · 소오야
93권 「소혜등전(蕭惠等傳)」
소혜 · 소우로 · 소도옥 · 야율탁진
94권 「야율화가등전(耶律化哥等傳)」
야율화가 · 야율알랍 · 야율속살 · 소아노대 · 야율나야 · 야율하로소고 · 야율세량
95권 「야율홍고등전(耶律弘古等傳)」
야율홍고 · 야율마륙 · 소적렬(蕭滴冽) · 야율적록 · 야율진가노 · 야율특마 · 야율선동 · 소소삽 · 야율대비노
96권 「야율인선등전(耶律仁先等傳)」
야율인선 · 야율량 · 소한가노 · 소덕 · 소유신 · 소악음노 · 야율적렬 · 요경행 · 야율아사
97권 「야율알특랄등전(耶律斡特剌等傳)」
야율알특랄 · 해리 · 두경용 · 야율인길 · 양적 · 조휘 · 왕관 · 야율희손
98권 「소올납등전(蕭兀納等傳)」
소올납 · 야율엄 · 요신 · 야율호려
99권 「소암수등전(蕭巖壽等傳)」
100권 「야율당고전(耶律棠古等傳)」
소암수 · 야율살랄 · 소속살 · 야율달불야 · 소달불야 · 소홀고 · 야율석류
야율당고 · 소득리저 · 소수알 · 야율장노 · 야율출자
101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102권 「소봉선등전(蕭奉先等傳)」
야율적랄 · 야율아식보 · 소을설 · 소호독
소봉선 · 이처온 · 장림 · 야율여도
103·104권 「문학전(文學傳)」
105권 「능리전(能吏傳)」
소한가노 · 이한 · 왕정 · 야율소 · 요휘 · 야율맹간 · 야율곡욕
대공정 · 소문 · 마인망 · 야율탁로알 · 양준욱 · 왕당
106권 「탁행전(卓行傳)」
107권 「열녀전(列女傳)」
소차랄 · 야율관노 · 소포리불
야율상가 · 소의신 · 소와리본 · 소뇌란
108권 「방기전(方技傳)」
109권 「영관·환관전(伶官宦官傳)」
직로고 · 왕백 · 위린 · 야율적로 · 야율을불가
나의경 · 왕계은 · 조안은
110·111권 「간신전(奸臣傳)」
야율을신 · 장효걸 · 야율연가 · 소십삼 · 소여리야 · 야율합로 · 소득리특 · 소와도알 · 소달로고 · 야율탑불야 · 소도고사
112·113·114권 「역신전(逆臣傳)」
야율할저 · 야율찰할 · 야율누국 · 야율중원 · 야율활가 · 소한 · 야율첩랍 · 야율랑 · 야율유가 · 야율해사 · 야율적랍 · 소혁 · 소호도 · 소첩리득 · 고첩 · 야율살랄죽 · 회리보 · 소특열
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 서하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금사(金史)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b82647><width=33%> 1권 「세기(世紀)」 ||<-2><width=33%> 2권 「태조기(太祖紀)」 ||<width=33%> 3권 「태종기(太宗紀)」 ||
||<rowbgcolor=#fff,#191919> 여진 ||<-2> 완안아골타 || 완안오걸매 ||
|| 4권 「희종기(熙宗紀)」 ||<-2> 5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6·7·8권 「세종기(世宗紀)」 ||
||<rowbgcolor=#fff,#191919> 완안합랄 ||<-2> 완안적고내 || 완안오록 ||
|| 9·10·11·12권 「장종기(章宗紀)」 ||<-2> 13권 「후폐제기(後廢帝紀)」 || 14·15·16권 「선종기(宣宗紀)」 ||
||<rowbgcolor=#fff,#191919> 완안마달갈 ||<-2> 완안과승 || 완안오도보 ||
||<-2> 17·18권 「애종기(哀宗紀)」 ||<-2> 19권 「세기·보(世紀補)」 ||
||<-2><rowbgcolor=#fff,#191919> 완안영갑속 ||<-2> 완안승과 · 완안와리타 · 완안호토와 ||
||<-4><width=1000> ||
※ 20권 ~ 58권은 志에 해당. 59권 ~ 62권은 表에 해당. 금사 문서 참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b82647><width=33%> 1권 「세기(世紀)」 ||<-2><width=33%> 2권 「태조기(太祖紀)」 ||<width=33%> 3권 「태종기(太宗紀)」 ||
||<rowbgcolor=#fff,#191919> 여진 ||<-2> 완안아골타 || 완안오걸매 ||
|| 4권 「희종기(熙宗紀)」 ||<-2> 5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6·7·8권 「세종기(世宗紀)」 ||
||<rowbgcolor=#fff,#191919> 완안합랄 ||<-2> 완안적고내 || 완안오록 ||
|| 9·10·11·12권 「장종기(章宗紀)」 ||<-2> 13권 「후폐제기(後廢帝紀)」 || 14·15·16권 「선종기(宣宗紀)」 ||
||<rowbgcolor=#fff,#191919> 완안마달갈 ||<-2> 완안과승 || 완안오도보 ||
||<-2> 17·18권 「애종기(哀宗紀)」 ||<-2> 19권 「세기·보(世紀補)」 ||
||<-2><rowbgcolor=#fff,#191919> 완안영갑속 ||<-2> 완안승과 · 완안와리타 · 완안호토와 ||
||<-4><width=1000> ||
※ 20권 ~ 58권은 志에 해당. 59권 ~ 62권은 表에 해당. 금사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3·64권 「후비전(后妃傳)」
명의황후 · 사황후 · 절황후 · 공정황후 · 위순황후 · 소숙황후 · 익간황후 · 정선황후 · 정선황후 · 경희황후 · 성목황후 · 광의황후 · 흠헌황후
선헌황후 · 소숭비 · 흠인황후 · 도평황후 · 도단부인 · 대부인 · 도단폐후 · 흠자황후 · 정의황후 · 소덕황후 · 이원비 · 효의황후 · 소성황후
흠회황후 · 이원비 · 도단왕후 · 왕황후 · 명혜황후 · 도단황후
65·66권 「시조이하종실전(始祖以下宗室傳)」
완안알로 · 완안배로 · 완안사고덕 · 완안사이보 · 완안사리홀 · 완안호고출 · 완안발흑 · 완안숭성 · 완안핵손 · 완안마파 · 완안알대 · 완안알새 · 완안알자 · 완안앙 · 완안조 · 완안외가 · 완안호십문 · 완안합주 · 완안괵보 · 완안충 · 완안제 · 완안출로 · 완안호석개 · 완안종현 · 완안달라 · 완안변 · 완안고 · 완안혁 · 완안아희
67권 「석현등전(石顯等傳)」
68권 「완안환도등전(完顔歡都等傳)」
석현 · 환난 · 산달 · 오춘 · 납배 · 마산 · 둔은 · 유가 · 아소 · 회리보
완안환도 · 완안야가
69권 「태조제자전(太祖諸子傳)」
70권 「완안살개등전(完顔撒改等傳)」
완안종준(宗儁) · 완안종걸 · 완안종간 · 완안종민 · 완안원
완안살개 · 완안습불실 · 석토문
71권 「완안알로등전(完顔斡魯等傳)」
72권 「완안누실등전(完顔婁室等傳)」
완안알로 · 완안알로고발근 · 완안파로화 · 오찰홀 · 완안도모
완안누실 · 완안은출가 · 완안습고내
73권 「완안아리합만등전(完顔阿離合懣等傳)」
74권 「완안종한등전(完顔宗翰等傳)」
완안아리합만 · 완안알종도 · 완안종웅 · 완안희윤
완안종한 · 완안종망
75권 「노언륜등전(盧彥倫等傳)」
노언륜 · 모자렴 · 이삼석 · 공경종 · 이사기 · 심장 · 좌기궁 · 우중문 · 조의용 · 강공필 · 좌필
76권 「태종제자등전(太宗諸子等傳)」
완안포로호 · 완안호로 · 완안아로 · 완안알야 · 완안알본
77권 「완안종필등전(完顔宗弼等傳)」
78권 「유언종등전(劉彥宗等傳)」
완안알철 · 장방창 · 유예 · 완안창
유언종 · 유규 · 시립애 · 한기선
79권 「역경등전(酈瓊等傳)」
역경 · 이성 · 공언주 · 서문 · 시의생 · 장중부 · 장중언 · 우문허중 · 왕륜
80권 「희종제자등전(熙宗諸子等傳)」
완안제안 · 완안도제 · 사묘아리 · 완안돌합속 · 오연포로혼 · 적잔휘 · 대달불야 · 포속월 · 완안아리보
81권 「골모파등전(鶻謀琶等傳)」
골모파 · 적고질 · 아도한 · 협곡사노 · 아륵근몰도로 · 황괵적고본 · 포찰호잔 · 협곡오리보 · 왕백룡 · 고표 · 온체한포리특 · 백덕특리보 · 야율회의 · 소왕가노 · 전호 · 정진
82권 「곽약사등전(郭藥師等傳)」
곽약사 · 야율도산 · 오연호리개 · 오연오리보 · 소공 · 완안습불주 · 흘석렬호랄 · 야율서 · 곽기충 · 오손와륜 · 안잔문도 · 복산혼탄 · 정건충
오고론삼합 · 이랄온 · 소중공 · 소중선 · 고송 · 완안광영 · 완안원수 · 완안신사아보 · 완안광양
83권 「장통고등전(張通古等傳)」
84권 「완안고등전(完顔杲等傳)」
장통고 · 장호 · 장현소 · 장여필 · 야율안례 · 납합춘년 · 기재
완안살리갈 · 누완온돈사충 · 완안분도 · 고정 · 백언경 · 장경인
85권 「세종제자전(世宗諸子傳)」
완안영중 · 완안영도 · 완안영공 · 완안영덕 · 완안영성 · 완안영승
86권 「이석등전(李石等傳)」
이석 · 완안복수 · 독길의 · 오연포리흑 · 오연포할노 · 오연사랄 · 이사웅 · 이방고초올 · 패출로정방 · 완안영덕 · 포찰알론 · 협곡사랄
87권 「흘석렬지녕등전(紇石烈志寧等傳)」
88권 「흘석렬양필등전(紇石烈良弼等傳)」
흘석렬지녕 · 복산충의 · 도단합희
흘석렬양필 · 완안수도 · 석거 · 당괄안례 · 이랄조삼
89권 「소보형등전(蘇保衡等傳)」
소보형 · 적영고 · 위자평 · 맹호 · 양숙 · 이랄조 · 이랄자경
90권 「조원등전(趙元等傳)」
조원 · 이랄안 · 고기덕 · 마풍 · 완안올불갈 · 유휘유 · 가소충 · 이랄알리타 · 아륵근언충 · 장구사 · 고간 · 고방기 · 정위인
91권 「완안살개등전(完顏撒改等傳)」
완안살개 · 방적 · 온체한이실만 · 신토만 · 이랄성 · 석말변 · 양중무 · 포찰세걸 · 소회충 · 이랄안답 · 패출로아로한 · 조흥상 · 석말영 · 경사휘
92권 「모석등전(毛碩等傳)」
모석 · 이상달 · 조망지 · 대회정 · 노효검 · 노용 · 이시 · 도단극녕
93권 「현종제자등전(顯宗諸子等傳)」
완안종 · 완안괴 · 완안종이 · 완안종헌 · 완안개 · 완안홍유 · 완안홍정 · 완안홍희 · 완안홍연 · 완안홍휘 · 완안특린 · 완안거 · 완안선 · 완안조 · 완안종각 · 완안수충 · 완안현령 · 완안수순 · 독길사충 · 완안승유 · 복산계 · 말연사예탑 · 완안종호
94권 「협곡청신등전(耶律化哥等傳)」
협곡청신 · 완안양 · 협곡형 · 완안안국 · 요리패질
95권 「이랄리등전(移剌履等傳)」
이랄리 · 장만공 · 포찰통 · 점할알특랄 · 정휘 · 유위 · 동사중 · 왕울 · 마혜적 · 마기 · 양백통 · 이방고감
96권 「황구약등전(黃久約等傳)」
황구약 · 이안 · 이유 · 왕분 · 허안인 · 양양 · 노백달
97권 「배만형등전(裴滿亨等傳)」
배만형 · 알륵충 · 장대절 · 장형 · 한석 · 등엄 · 거구 · 하양정 · 염공정 · 초욱 · 유중수 · 이완 · 마백록 · 양백원 · 유기 · 강원필 · 이랄익
98권 「완안광등전(完顏匡等傳)」
99권 「도단일등전(徒單鎰等傳)」
완안광 · 완안강
도단일 · 가현 · 손탁 · 손즉강 · 이혁
100권 「맹주등전(孟鑄等傳)」
맹주 · 종단수 · 완안여산 · 노탁 · 완안백가 · 출호균수 · 장휘 · 고횡 · 이복형
101권 「완안승휘등전(完顔承暉等傳)」
102권 「복산안정등전(僕散安貞等傳)」
완안승휘 · 말연진충 · 복산단 · 경단의 · 이영 · 패출로덕유 · 오고론경수
복산안정 · 전탁 · 완안필 · 몽고강 · 필란아로대
103권 「완안중원등전(完顏仲元等傳)」
완안중원 · 완안아린 · 완안정 · 오고론장수 · 완안좌 · 완안교주 · 석말중온 · 오고론례 · 포찰아리 · 오둔양 · 완안포랄도 · 협곡석리가 · 술갑신가 · 흘석연환단 · 완안아리불손 · 완안철가 · 납란호포랄
104권 「납탄모가등전(納坦謀嘉等傳)」
납탄모가 · 추곡 · 고림 · 맹규 · 오림답여 · 곽오 · 온체한달 · 왕확 · 이랄복승 · 오둔효충 · 포찰사충 · 흘석렬호실문 · 완안우 · 알륵합타 · 포찰이랄도
105권 「정채등전(程寀等傳)」
정채 · 임웅상 · 공번 · 범공 · 장용직 · 유구 · 왕소 · 양백웅 · 소공 · 온체한체달 · 장한 · 임요총
106권 「장위등전(張暐等傳)」
107권 「고여려등전(高汝礪等傳)」
장위 · 가익겸 · 유병 · 출호고기 · 이랄탑불야
고여려 · 장행신
108권 「서정등전(胥鼎等傳)」
109권 「완안소란등전(完顏素蘭等傳)」
서정 · 후지 · 파호로 · 사안석
완안소란 · 진규 · 허고
110권 「양운익등전(楊雲翼等傳)」
111권 「고리갑석륜등전(古里甲石倫等傳)」
양운익 · 조병문 · 한옥 · 풍벽 · 이헌보 · 뇌연 · 정진
고리갑석륜 · 완안와가 · 살합련 · 강신 · 오림답호토 · 완안사열 · 흘석렬아오탑
112권 「완안합달등전(完顏合達等傳)」
113권 「완안새불등전(完顏賽不等傳)」
114권 「백화등전(白華等傳)」
완안합달 · 이랄포가
완안새불 · 완안백살 · 적잔합희
백화 · 사묘애실 · 석말세적
115권 「완안노신등전(完顏奴申等傳)」
116권 「도단올전등전(徒單兀典等傳)」
117권 「도단익도등전(徒單益都等傳)」
완안노신 · 최립 · 이기 · 섭대기 · 적잔위흔
도단올전 · 석잔여로환 · 포찰관노 · 완안승립
도단익도 · 점가형산 · 왕빈 · 국용안 · 시청
118권 「묘도윤등전(苗道潤等傳)」
묘도윤 · 왕복 · 이랄중가노 · 무선 · 장보 · 장진 · 정안민 · 곽문진 · 호천작 · 장개 · 연령
119권 「점갈노신등전(粘葛奴申等傳)」
점갈노신 · 유천기 · 완안대루실 · 완안중루실 · 완안소루실 · 오고론호 · 장천강 · 완안중덕
120권 「세척전(世戚傳)」
석가노 · 배만달 · 홀도 · 단도공 · 오고론포로호 · 당괄덕온 · 오고론점몰갈 · 포찰아호질 · 오림답휘 · 포찰정수 · 도단사충 · 도단역 · 오림답복
오고론원충 · 당괄공 · 오림답림 · 단도공필 · 단도명 · 단도사희
121·122·123·124권 「충의전(忠義傳)」
호사보 · 특호 · 복홀득 · 점할한노 · 조규 · 온체한포도 · 와리야 · 납란작적 · 위전 · 완안선양 · 협곡수중 · 석말원의 · 백덕매화상 · 오고손올둔 · 고수약 · 화속가안례 · 왕유한 · 이랄고여열 · 송의 · 오고론영조 · 오고론중온 · 구주 · 이연 · 이덕기 · 왕의 · 왕회 · 제응양 · 출갑법심 · 고석 · 오승가 · 오고론덕승 · 장순 · 마양 · 백덕와가 · 오둔추화상 · 종탄 · 패출로복수 · 오방걸 · 납합포랄도 · 여해열알출 · 시무선 · 온체한로아 · 양지승 · 가방헌 · 이랄아리합 · 완안육근 · 흘석렬학수 · 포찰누실 · 여해열자록 · 조익 · 후소숙 · 왕좌 · 황괵구주 · 오림답걸주 · 타만사열 · 이방고포로호 · 올안외가 · 올안외출호 · 점할정 · 도단항 · 완안진화상 · 양옥연 · 오고론흑한 · 타만호토문 · 희여작 · 애신 · 우현 · 장방헌 · 유전 · 마경상 · 상형 · 출갑탈로회 · 양달부 · 풍연등 · 오고손중단 · 오고손노신 · 포찰기 · 채팔아 · 온돈창손 · 완안강산 · 필자륜 · 곽하마
125·126권 「문예전(文藝傳)」
한방 · 채송년 · 오격 · 마정국 · 임순 · 조가 · 곽장천 · 소영기 · 호려 · 왕경 · 양백인 · 정자담 · 당회영 · 조풍 · 주앙 · 왕정균 · 유앙
이경 · 유종익 · 여중부 · 이순보 · 왕욱 · 송구가 · 방주 · 이헌능 · 왕약처 · 왕원절 · 손국강 · 마구주 · 이분 · 원덕명 ,子 호문,
127권 「효우·은일전(孝友隱逸傳)」
온체한알로보 · 진안 · 유유 · 맹흥 · 왕진 · 유정 · 저승량 · 왕거비 · 조질 · 두시승 · 학천정 · 설계원 · 고중진 · 장잠 · 왕여매 · 송가 · 신원 · 왕여가
128권 「순리전(循吏傳)」
노극충 · 우덕창 · 범승길 · 왕정 · 장혁 · 이첨 · 유민행 · 부신징 · 유환 · 고창복 · 손덕연 · 조감 · 포찰정류 · 여해열수우 · 석말원 · 장구
조중복 · 무도 · 흘석렬덕 · 장특립 · 왕호
129권 「혹리·영행전(酷吏佞幸傳)」
고염산 · 포찰합주 · 소이 · 장중가 · 이통 · 마흠 · 고회정 · 소유 · 서지국
130권 「열녀전(列女傳)」
사리질 · 강주주 · 완안아로진 · 풍묘진 · 포찰명수 · 섭순영 · 장봉노
131권 「환관·방기전(宦官方技傳)」
양충 · 송규 · 반수항 · 유완소 · 장종정 · 이경사 · 기천석 · 장원소 · 마귀중 · 무정 · 이무 · 호덕신
132권 「역신전(逆臣傳)」
병덕 · 당괄변 · 오대 · 대흥국 · 도단아리출호 · 복산사공 · 도단정 · 이노승 · 완안원의 · 흘석렬집중
133권 「반신전(叛臣傳)」
장각 · 야율여도 · 이랄와간
134·135권 「외국열전(外國列傳)」
서하 · 고려 ,왕해,





[1] Korea의 어원.[2] 고려가 멸망하기 3년 전인 창왕 1년(1389)에 발급된 보물 제2062호 '최광지 홍패(崔匡之 紅牌)'에 찍힌 문양을 바탕으로 복원한 그림. 이 그림속 국새는 현존하는 단 2개뿐인 고려시대 국새 문양이다.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고 적혀있으며, 이 홍패 덕분에 위 사진의 국새 문양이 복원될 수 있었다.[3] 정확히는 함경북도 등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한반도 일대이다.(1896년 13도 체계를 기준으로 평안북도함경남도 그리고 함경북도의 지역들은 고구려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시대 때 4군 6진을 개척하고 나서야 다시금 한민족의 영토로 완전히 재편입되었다) 후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 동한만 이남에 이르는 영역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고려의 정확한 영토 경계에 대해선 아직 연구 중이다. 또한 동북 9성의 해석에 따라 동북지방에 대한 시기별 비정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단,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지도에서 보는것과 같이 함경북도까지 고려의 통제력과 행정력이 미쳤다고 보지는 않는다.[4] 공민왕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 지역 일부를 일시적으로 점유하였지만 기간이 매우 짧고 점유 범위 또한 국소적으로 매우 작았다.[5] 본궐은 태봉국 철원성.[6] 전반부 본궐은 만월대. 임시로 연경궁, 수창궁이 쓰였다. 후반부 본궐은 만월대를 흡수한 연경궁, 공민왕 대엔 수창궁.[7]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 본궐은 고려궁지.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부수도가 되었고 충렬왕 34년엔 강화현으로 격하되어 부수도의 지위도 잃었다.[8] 우왕공양왕대 각각 5개월 정도 고려의 정식 수도였다. 원간섭기 이후로 남경에서 한양부로 격하되긴 했으나 이러한 기반 덕에 바로 뒤이은 조선이 한양부를 수도 한성부로 삼을 수 있었다.[9] 본궐은 장락궁.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태조 ~ 인종 중반 기간 동안 서경의 지위는 고려의 '부수도'가 아닌 '또 다른 수도'였다.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수도가 아닌 부수도로 격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지방 행정 부분 참조.[10]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주류 민족. 통일신라기에는 후삼국으로 분열할 만큼 종족 정체성이 유동적이었으나, 고려 후기에 고구려인 (+ 발해인), 신라인, 백제인 등의 독자적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탐라인은 별도로 빈공과를 쳐야 했다.[11]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 정강의 변, 몽골-남송 전쟁 등의 영향으로 한족들이 유입되어 한민족에 흡수되었다. 고려에 귀화해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한족으로는 쌍기, 주저, 채인범 등이 있다.[12] 말갈족은 대부분이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였을 때 들어왔다. 이후에도 여진족이나 거란족 중 일부가 전쟁 포로나 망명의 형태로 고려인으로 통합되었다.[13]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건국 초기부터 유학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성종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하기도 하였으며 원 간섭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고려 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14] 모든 고려 군주의 공식 존호는 '대왕(大王)'이었다. 광종 재위 중 몇년 간 짧게나마 황제(皇帝)호로 바뀌었다가 대왕호로 돌아왔다. 그외 고려대왕은 만승(萬乘), 성황(聖皇), 황왕(皇王), 신성제왕(神聖帝王) 등 황제 체제의 미칭을 변용하였다.[15] 광종의 칭제건원 당시 일시적 사용.[16] 원 간섭기 이래 인해 황제의 제후라는 위상이 국내적으로 구현됐으며 이에 따라 성립 이후에도 명에 칭신하고 제후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17] 함경북도 지역들은 세종대왕4군 6진 개척으로 조선의 영토로 확실히 편입되기 이전에는 특정 국가들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던 야인들의 영역이었다.[18] 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였다.[19]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르는 것.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했다. 조선 전기의 한글 문헌에서는 '고려'로 발음이 언급되는 바,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려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훗날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지게 된다.[20] 현대의 발음은 '가오리'지만 당송대의 중고한어 발음으로는 까우례(kɑu liᴇ) 또는 까우레이(kɑu lei)다.[21] 고구려 역시 고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고마 신사', 코마가와역 등.[22] Solongos, 중세 몽골어로는 ᠰᠣᠯᠤᠩᠭᠤᠰ, Solungɣus. 현대 몽골인들은 한국을 설렁거스(Солонгос)라고 부른다. Solongo는 몽골어로 '무지개'라는 뜻이 있으며, Solon (누런족제비)+go(~를 가진 사람)+s(복수형)를 합쳐 족제비 가죽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P. 펠리오(1878-1945)는 설렁거스의 어원을 원과 고려가 족제비 가죽을 많이 거래했던 역사적 기록에 주목하여 후자로 보았으나, 의미적으로 무지개가 아름답기 때문인지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전자의 설이 많이 퍼져있다. 몽골 국립 할하 몽골어 학회에서는 Solongos가 '해 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없는 낭설이다.[23] 현대 몽골어로는 현대 한국과 구별하여 고려를 Kuryo라고도 한다.[24] 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는 형태였지만 당시엔 대부분 망하고 없었다.[25] 현대식 한글로 표기하면 '고우려이' 정도. 다만 이 당시 'ㅕ'는 지금의 (jʌ) 대신 (jə) 소리를 냈다.[26] 송이 중추원, 삼사 등의 기관을 부설한 까닭은 송은 3성 6부제가 원활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기도 하다.[27] 정확히는 상서성의 상서이부(尙書吏部)에 해당한다.[28] 같은 시기 삼사의 판사, 좌사, 우사도 추가되었다.[29] 양주시, 광주시.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30] 오늘날의 강원도 영서.[31] 오늘날의 황해도.[32] 오늘날의 평안도.[33] 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34] 지정학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예측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일단 수도 개경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도시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내 천도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래서 큰 강을 끼고 있는데다 평야지대에 있어 대도시로서의 입지조건에 적합한 서경으로의 천도가 우선 제기되었으나 고구려 때와는 달리 요동반도를 차지하는 데 실패해 서경의 안보를 보장해 줄 적당한 완충지대를 가질 수 없었다(만약 기병부대가 의주쪽의 저지대만 통과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후는 거의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서경까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 이걸 병력을 때려박아 틀어막기에는 또 항상 대륙세력보다 고려의 인구가 훨씬 적었다). 결국 그 다음 후보로 국토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또한 큰 강을 끼고 있는 입지의 대도시였던 남경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고려 후기의 혼란통에 천도론은 흐지부지되었다가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나서야 천도를 감행하게 된다. 이후 남경의 입지는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천도론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35] 사실 이건 당시 전해지던 건국연대상 신라가 가장 이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36]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06) , (김주성,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 (최웅,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