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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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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원나라 이전
2.2. 몽골제국-원나라
2.3. 고려-조선
3. 여담

交鈔, 약칭으로는 초(鈔)라고 한다.


1. 개요[편집]


중국 원나라 당시에 원나라 조정에서 직접 발행하던 지폐로, 북송 대에 처음 발행했던 교자의 직속 후신이지만, 교자보다 훨씬 오랫동안 사용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일정 기간 이상 정기적으로 유통되던 지폐의 예시로서는 제일 이른 사례들 중에 하나로 꼽힌다.

또한 패권국기축통화를 잘못 다루다가 인플레이션과 재정붕괴를 불러 결과적으로 제국의 붕괴를 불러온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2. 역사[편집]



2.1. 원나라 이전[편집]


중국에서는 북송시대에 일정량의 구리와 교환할 수 있는 교자(交子)라는 지폐가 있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지폐로서 그 편리성 때문에 상업이 발달했던 북송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문제는 북송 조정이 요나라, 금나라, 서하 등의 침략을 막기위한 군비 및 공물[1]을 마련하기 위해 구리가 없는데도 이런 종이 지폐를 남발하시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 현대로 치면 수입은 없는데 카드를 계속 긁은 것이다. 이는 송휘종 당시 가장 심했기 때문에, 물가 폭등을 불렀고 북송 경제가 붕괴되어 군사력도 엉망진창이 되었고, 그 틈에 신흥 금나라에 수도 카이펑이 유린당하고, 황제 및 비빈이 포로로 잡혀가는 정강의 변을 부르기도 했다.

이어 금나라도 비슷한 제도를 사용했는데, 해릉왕 당시에 화폐 제도를 정비하고 지폐외에도 동화와 은화를 발행했다. 금나라 조정도 곧 몽골-금 전쟁에 휘말리면서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지폐를 남발하게 되고 결국 경제가 붕괴되어 멸망하고 만다.


2.2. 몽골제국-원나라[편집]


원래 몽골제국은 약탈 및 물물교환의 원시적 경제를 가진 국가였으나, 상업이 발달한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을 정복하면서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몽골 제국에 출사한 거란야율초재는 오고타이에게 지폐 사용을 건의했고, 1236년 최초로 몽골제국은 교초를 발행했다. 야율초재는 금나라가 교초를 남발하다가 망한 것을 상기시켜 발행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어 몽골제국의 여러 귀족들이나 번왕들도 자체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어 몽골제국이 중화제국을 자처하며 원나라로 발돋움했고, 쿠빌라이는 수도 대도에서 모든 지폐를 통일해 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諸路通行中統元寶交鈔), 약칭 "중통초"를 발행했다. 교초란 바로 이 중통초를 말한다. 이는 원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은의 양(365만관)에 맞게 약 7만3천정만 발행되었다. 이론상 이 지폐를 가져오면 그 액면가대로 원나라 조정이 보유한 은과 교환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는 남송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정복한 남송의 영역에서 남송의 지폐인 회자를 이 중통초로 교환해주었다. 교환비는 남송의 동화 3관에 중통초 1관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원나라의 행정능력은 살아있었고, 쿠빌라이는 도로와 운하등의 물류망을 정비하고 각지에 창고를 건설하여 물가 폭등을 방지하여 지폐유통은 안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남송정벌전이 격화되고, 남송을 정벌한 후에는 일본원정 (1274년)을 벌였는데, 이때부터 원나라는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통초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중통초의 가치는 떨어졌다. 원나라 조정은 중통초의 가치가 떨어지자 (즉, 재정이 모자르게 되자) 민간이 보유한 은을 중통초와 강제교환을 법제화한 법령을 만들었으나, 당연히 중통초의 가치가 현격이 낮아졌음을 알게 된 민간은 보유한 은을 꼭꼭 숨기게 되었다. 1287년 원나라 조정은 어쩔수 없이 새로운 지폐를 발행했고, 이는 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鈔)라고 한다. 이것은 중통초 액면가의 1/5가치였다. 이것으로 중통초는 사실상 반으로 가치가 하락했다고 한다.

쿠빌라이 이후에 원나라의 행정능력은 더욱 격감하여 라마승들의 국정 농단 및 황실의 사치에 시달리게 되고 쿠빌라이칸 이후 원나라 황제들이 계속 단명하면서 이후 25년간 9명의 황제가 즉위하여 일관된 정책을 펼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리더쉽이 흔들리자,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 개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원나라 조정은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게 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더 교초를 남발하게 되었다. 원나라는 재정위기, 인플레이션을 타개하기 위해 계속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나, 재정적자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전혀 타개책이 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원나라 말기에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 수백배 물가 폭등을 불렀다. 즉 그만큼 교초의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때문에 조정이 구리나 은으로 지급보증을 해주던 교초 발행은 중단되고 원나라는 1365년 교초제도를 폐지했다. 원나라는 교초를 폐지한 정확히 3년 후에 남부에서 발흥한 명나라에 수도 대도을 내주고 막북으로 쫓겨나게 된다.

원나라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막대한 재정적자를 야기했는데, 이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교초남발을 하다보니 원나라 행정의 마비를 불렀고, 원나라의 멸망을 불렀다.

명나라도 홍무제 시절에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라는 지폐를 발행했다가, 영락제시절 물가폭등을 보이자 그 부작용을 보고 더이상 지폐발행을 중단하고 다시는 지폐를 발행하지 않게 된다.[2] 이어 중국에서 지폐는 청나라 말기가 되어서야 다시 발행되게 된다.


2.3. 고려-조선[편집]


원 간섭기 고려와 원 본국이 교류할 때 교초가 약간 사용된 적이 있다. 원에서 고려 왕실에 사여품을 내릴 때나 원의 고관들이 고려에 방문했을 때 지불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 내에서 교초가 유통된 기록은 전혀 없다. 고려인들이 교초를 사용한 경험은 고려인들이 원으로 가서 생활하거나 교역할 때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제한적 사용 때문에, 고려의 재정 역시 교초가 비중이 높았을거란 증거는 없다.

일부에서는 조선이 원나라의 사례를 보고 지폐를 발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조선 초기부터 교초를 본으로 삼아 저화를 발행하여 유통을 시도 했기 때문에 완전히 거짓이다. 조선의 지폐 유통 실패는 그보다는 조선 조정의 화폐 유통 정책이 지극히 신뢰하기 어렵고 백성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기 때문이다. 애당초 한반도에서는 조선 중기까지 지폐는 커녕 동전도 제대로 쓰인적이 없다. 고려시대 당시 개경에 거주하던 귀족들을 중심으로 활구(은으로 만든 병)가 활발하게 사용되기도 했으나, 일반 농민들 입장에서는 평소에 만져보기도 힘든 물건이었다.

조선 태종 때와 세종 때 중국을 본받아 저화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쌀을 본위로 하는 화폐로 유통 시도 되었다. 그러나 정작 저화를 팔 때는 쌀을 받으면서 저화를 받고서는 쌀로 태환해주지 않았으며, 다른 물품으로 태환을 해주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것도 예산 부족 문제로 태환을 중지하여 저화의 가치는 폭락했다. 또 실물가치가 거의 없는 종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실물 가치가 비교적 보증되는 동전을 세종 대에 유통하자 동전의 가격은 급격히 올랐는데, 이 때 저화의 가치를 지켜야한다며 저화를 동전으로 태환해주는 것도 정지해버려 저화의 가치는 또 폭락했다. 이렇게 저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처음에 저화로 받겠다고 했던 세금들도 저화의 액면상 가치에 해당하는 쌀로 받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즉 저화는 근본적으로 조선 조정이 재정을 조달하기 위한 꼼수로 운용했지 화폐로서 신뢰성 있게 유통시키기 위한 정책은 거의 지킨 것이 없던 점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조선의 화폐 유통 실패는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서 연유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조선이 상업이 주변국가나 유럽에 비해 미발달한 것은 사실이나, 조선은 전기 시점에 이미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물품화폐를 사용할 정도 수준의 상업에는 도달했다. 조선의 민간경제는 마직물이나 면직물로 간이 화폐를 만들어 그를 기반으로 교환을 하는 식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간이 화폐가 오승포(五升布)와 이승포(二升布)였다. 원래 삼베를 가지고 제대로 된 옷감을 만들려면 12승에서 26승 정도로 짜야 한다. 오승포는 옷감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옷을 만들어 입을 때나 혹은 속옷이나 푸대자루 등을 만들 때 쓰던 저질 옷감이었고, 삼승포나 이승포로 옷감을 지으면, 옷을 입어도 나체가 다 보이는 거의 누드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다. 조정에서는 이승포를 만들면 옷감만 낭비된다고 몇 번이나 제작을 금지시켰으나, 마땅한 물물교환 수단이 없어서 민간에서는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제작, 유통시켰다. 즉, 오승포와 이승포는 실물 가치가 없이 오직 화폐로써 통용되는 가치만 있는 물품화폐로 이미 정립되어 있던 것이다. 조정의 화폐 정책이 오승포와 이승포 만큼이나마 신뢰성이 있었다면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화폐가 성립되었을 것이다.

이 상태는 200년 후인 임진왜란때까지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군은 자국에서처럼 은을 전비로 잔뜩 가져와서 이것으로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급했고, 명나라 병사들은 이 봉급으로 조선에서 식량 및 필수품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조선에서는 은도 잘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보급난을 겪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화폐를 쓰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심지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가 되어서 어느정도 상업이 발달하자, 화폐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며 숙종때에 발행한 상평통보가 널리 쓰인다.

이렇게 당장 금속화폐의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 조선초기에 지폐가 사용될리가 있겠는가? 교초를 보유하고 있던 고려왕실은 국제 결제용으로 교초를 원나라에서 들여와 사용했을뿐이며 이는 일반 백성들이랑은 관련이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원리주의적인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이 집권했으며, 사대부들은 상업을 매우 천시했다. 이런 형편에서는 더욱 더 상업이 발달할 수 없었다. 조선후기 상평통포가 발행된 이후에 조선 멸망 직전인 고종 시절까지도 일종의 물물교환이라고 할 수 있는 쌀과 면포가 지속적으로 화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폐라는 것 자체가 은이나 금 따위의 금속으로 만든 동전만으로는 전체 경제를 커버하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화폐경제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고, 지폐의 가치를 보증할수 있는 귀금속 등의 실물자산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을때만 발행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때문에 지폐는 고액권이다. 문제는 조선은 이런 상황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 멸망 직전에도 경제상태나 조선 조정의 경제학적 지식이나 재정관리 수준은 500년전의 중국 원나라보다 나을게 없었으며, 이는 흥선대원군 때 발행했다가 조선의 경제 파탄 및 결과적인 국권침탈까지 부른 당백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교초같은 지폐의 발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3. 여담[편집]


원나라 당시에 발행 / 유통되었던 지폐이니 만큼 원나라 때의 중국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마르코 폴로가 유럽에서 "중국에서는 금화 대신 종이를 돈으로 쓰더라"라고 썰을 풀자 그를 듣던 모두가 "거짓말하지 마라. 금화 대신에 종이로 물건 값을 지불하다니, 중국에는 전부 바보들만 산단 말이냐?" 하고 비웃으며 허풍쟁이 취급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다.

서양의 최초의 지폐는 마르코폴로 이후 400년 지난 당시 1690년 영국 식민지였던 메사추세츠에서 발행된 것이다. 즉 중국에 비해 약 500년이 뒤진다.

이렇게 제국이 흥기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재정 정책 변화로 연구한 폴 케네디의 명저 강대국의 흥망이 있다. 이 책은 사실 원나라가 아니라 유럽국가들을 연구 주제로 다루었지만, 실제로 송, 금, 원이 멸망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묘사한 강대국이 쇠퇴하는 원인과 비슷하다. 이 책은 1980년대 나왔지만, 2020년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1] 북송은 조공으로 이들을 달래어 침략을 막았다.[2] 그때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은이 널리 유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