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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복

덤프버전 :

구선복
具善復
본관
능성 구씨

사초(士初)
출생
1718년(숙종 44)[1]
사망
1786년(정조 10) 12월 9일[2]
한성부
직업
무신
사인
능지처사 당함
죄명
상계군을 추대하려 함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무신. 상당한 권신으로 왕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권세를 누렸으나 정조 치세 당시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2. 생애[편집]


1718년(숙종 44)에 황해도 병마절도사(종2품)를 지낸 아버지 구성필(具聖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구선원(具善元)이 있었다.

1738년(영조 14)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1위로 입격한 뒤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총융사훈련대장 등을 역임하고, 최고 군사실력자로 병조판서·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구선복은 원래부터 성격이 잔인무도하여 재직기간 중에 하인부터 조정 고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인심을 잃었다. 심지어 구선복은 임오화변 때 뒤주 속에 갇혀 있는 사도세자를 향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테니) 술을 주랴, 떡을 주랴?"라고 능멸하고 희롱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만행을 일삼는 구선복이 장차 후세에 망할 거라고 입을 모았다.

당연하지만 임금인 정조도 자신의 아버지를 욕보인 구선복을 싫어했고, 구선복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치가 떨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권을 가진 권신이라 일단은 지켜 보면서 쳐낼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 명분은 엉뚱하게도 예순왕대비(정순왕후)가 흘렸다. 상계군 이담 문제로 왈가왈부하던 와중에 대비가 "(구선복네가) 점을 봤다느니 반정을 하겠다느니 하는 얘기했다던데 그거부터 시원하게 밝혀라!" 라고 하자 심문을 했다.

과연 구선복과 그 일당이 이담을 옹립할 정변을 계획하였고, 첫 대장은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번 대장은 구선복이었고, 또 이전 대장이 운세가 좋은지 문양해[3]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조는 자신의 아들 문효세자가 죽자 자신의 조카인 상계군 담을 추대하려고 시도했다는 죄를 물었고, 구선복은 이로써 완전히 실각하고 만다.

1786년(정조 10) 양자 구이겸(具以謙)[4], 조카 구명겸(具明謙)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구선복이 역모로 처형당하면서 조선 초기 이래 대대로 고위직 무관을 역임한 능성 구씨 일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1]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선복편.[2]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2월 9일 무신 4번째 기사.[3] 스스로를 신인의 제자라 칭하며 백성들을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구선복이 죽기 전에 처형당했다.[4] 생부는 통덕랑(通德郞:정5품 문관의 품계) 행 공릉 참봉(恭陵參奉:종9품)을 지낸 구종엽(具宗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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