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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법/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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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Section 1. After one year from the ratification of this article the manufacture, sale, or transportation of intoxicating liquors within, the importation thereof into, or the exportation thereof from the United States and all territory 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of for beverage purposes is hereby prohibited.
Section 2. The Congress and the several States shall have concurrent power to enforce this article by appropriate legislation.
Section 3. This article shall be inoperative unless it shall have been ratified as an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by the legislatures of the several States, as provided in the Constitution, within seven years from the date of the submission hereof to the States by the Congress.
제1절. 이 조항이 비준된 지 1년 후, 미국과 모든 사법권이 미치는 영토[2] 에서 음료용 주류의 제조, 판매, 또는 운송, 수입, 수출은 금지된다.
제2절. 의회와 여러 주는 적절한 사법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 조항을 동시에 강제할 수 있는 억제력을 행사한다.
제3절. 이 조항은 여러 주의 입법 기관에 의해 헌법의 수정안으로써 상정된 지 7년 이내 비준받지 못한다면 무효화될 것이다.
미국 수정헌법 18조
술의 제조, 판매, 운송, 수출입을 금지하던 수정헌법 18조를 뜻하는 표현이다. 줄여서 Prohibition[3] 이며, 이 수정헌법이 통과되어 적용되던 1919~1933년은 Prohibition Era로 굳었다. 의외로 술을 마시는 행위 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고, 미국 영토 내에서 술을 주조하거나 공급할 수 없게 만든 법이다.
2. 금주운동(금주법) 이전 미국의 술 문화[편집]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술을 즐기는 국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러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자원과 물자가 풍부한 미국땅에서 섞이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뭐든 크게 만들던 기조가[4] 음주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다. 살기 팍팍하면 곡물주건 과실주건 소비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미국은 뼈 발라먹기 귀찮다고 노예들에게 치킨(닭다리, 닭날개)을 던져주던 매우 풍요로운 나라였다.
2.1. 1700년대[편집]
1700년대까지 식민지 사람들은 발효된 복숭아 주스, 진한 사과주, 럼을 마셨다. 이들은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하거나 서인도 당밀을 증류해 만든 것이었다. 술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사람들은 바베큐, 장날, 선거 때마다 술 주전자나 술이 든 그릇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선거 후보자들은 공짜 술을 나눠줬고 이에 인색한 후보자는 이길 기회가 없었다. 심지어 금욕적인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술을 많이 마셨다. 청교도들은 알코올을 '신의 선한 창조물'이라고 불렀다. 자랑스럽지만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770년이 되자 미국인들은 매 끼니마다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눈뜨개'로 하루를 시작하였고,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갓난아기(!)를 포함한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술을 마셨는데, 아기들은 부모들의 럼 토디 머그잔 바닥에 설탕이 많이 든 부분을 다 마셨다. 한 사람당 알코올을 연간 3.5갤런(약 13.25리터) 남짓 소비했다. 참고로 여기서 3.5갤런 알코올은 일반적인 술 3.5갤런이 아니라 순수 에탄올 3.5갤런을 뜻한다.[5] 미국 혁명이 일어날 무렵에 평균적인 사람이 80프루프짜리 술을 연간 8.75갤런(약 33리터) 마신다는 것인데, 현재 소비 수준보다 45% 높은 수치.
그래도 당시는 고위층이 주로 술을 마시는 편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종종 술을 마셨는데 오크렌트의 책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은 농장에 증류기를 가지고 있었고, 존 애덤스는 매일 진한 사과주를 들이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토머스 제퍼슨은 와인 수집뿐만 아니라[6] 자기가 직접 호밀을 길러 위스키도 만들 정도였다. 제임스 매디슨은 매일 위스키를 한 파인트씩 마셨고, 미합중국 육군 사병들은 1782년 이래로 매일 배급의 일환으로 4온스(113.34g)의 위스키를 받았고, 조지 워싱턴 자신은 '강한 주류의 온건한 사용으로 인한 이점은, 모든 군대에서 경험되었으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선거 유세하면서 사이다와[7] 맥주를 돌렸었다. 메사추세츠 지사였던 새뮤얼 애덤스는 주류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술을 물처럼 마셔댔던 셈.
2.2. 1800년대[편집]
1800년대가 되자 영국이 노예제도와 관련됐다고 미국의 럼주 생산과 당밀 생산에 참여를 중단했고, 미 연방 정부는 럼주에 세금을 물리기 시작한다. 럼주의 소비가 그렇게 해서 줄어드는 와중 중서부 지대에 이른바 '옥수수 벨트'[8] 가 생기게 됐는데, 버번 위스키의 재료가 될 옥수수를 운반하다가 상하는걸 막기 위해서[9] 농부들이 아예 옥수수를 현지에서 위스키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옥수수로 만든, 엄청난 규모의 버번 위스키 생산량 덕에, 1820년대에는 위스키 한병의 값이 고작 25센트밖에 안 했다. 당시 차나 커피, 와인, 맥주, 심지어 우유보다 더 싼 가격이었다. 거기에 영국 해군의 준사관 이하에게 희석한 럼주를 매일 지급하던 관행을 그대로 따르던 미합중국 해군과 미합중국 해안경비대 역시, 영국의 간섭때문에 비싸진 럼 대신 농가에서 병에 마구 따라져 나오는 버번 위스키를 납품받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위스키 소비가 폭증했고, 규모의 경제 덕에 단가가 계속 싸지면서 전국적으로 증류소가 5배 이상 많아졌다.
당시 위스키 소비가 어느 정도였냐면, 도시에선 노동자가 주말 동안 퍼 마신 술 때문에 숙취에 절어서 월요일에 직장에 못 나와도
당시 영국인 여행자였던 프레데릭 마얏은 저서 《A Diary in America》에서 남긴 말이 있다.
1830년이 되면 1인당 80프루프짜리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미국인들은 술 한 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누군가를 만나면, 술을 마셔야 한다. 헤어지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친분을 맺으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거래를 끝내면, 마셔야 한다. 만약 싸우게 되면, 마셔야 한다. 화해하게 되면, 마셔야 한다. 날씨가 더우면, 마신다. 날씨가 추워도, 마신다. 선거에 성공하면,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면서 욕을 한다. 그들은 아침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늦게 떠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시기 시작하고, 곧 무덤에 갈 때까지 마신다."
어쨌거나 이런 기조가 1900년대 초까지 계속돼서,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이 현상을 도저히 관망할 수가 없는 정도가 되니 수정헌법 18조가 나올 만했다. 단지 금주를 권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3. 금주 운동[편집]
금주 운동의 시작은 사회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은 구미권에서 사회 개선 운동이나 도덕 재건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라 마침 금주 운동도 최고 고조의 시기였다. 이미 유럽 각국에서는 금주 운동 단체가 출범했으며 영국에서는 1835년에 전국 절대 금주 교회가 출범하여 금주 집회가 열었다. 또한 술의 대안으로 홍차를 밀면서 금주 운동은 전 세계로 퍼졌으며, 19세기 후반에 스위스,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에서도 금주 단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4. 금주법 입법 [편집]
미국에서도 1890년대 들어서 금주동맹이 결성되면서 금주에 대한 연방법 제정이 본격화되었다. 금주법 입법을 주도한 측은 농촌지역의 개신교 세력인 금주 십자군과 로비 단체인 안티 살롱 동맹, 기독교 여성단체인 여성기독교금주연맹 등이었다.
특히 금주주의 페미니스트 운동가 캐리 네이션(Carrie Nation)[10] 은 '예수의 불독'을 자칭하며 술집을 폐쇄하기 위해 직접 도끼질을 하다가 3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다.[11] 당시는 보수성향 여성단체뿐 아니라 노동자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한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자유주의 정당들도 금주가 대세였다. 여성들이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금주를 요구한 이유는 남편들이 나갔다 오면 번 돈으로 술이나 마시고 처자식들을 구타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페미니스트들의 금주법 찬성은 단순 정치적 운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운동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실천적인 필요에 더하여 과학과 제도의 발전으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는 진보혁신주의적 사회기풍이 더해지면서 진보적 정치의제로서 금주법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17년에는 이미 미국의 주 중 2/3 이상이 금주법을 시행하고 있었고,12월 8일 상원에서 수정헌법 18조가 발의되었으며, 1919년 1월 16일에 이르자 48개 주 중 3/4인 36번째의 주 차원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그 헌법 조에 근거한 볼스티드 법(Volstead Act)안이 1919년 10월 28일 의회를 완전히 통과하고 제정되었다. 이에 민주당 정권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당시 의회는 공화당이 다수인 상황이라 재상정을 거쳐 그대로 통과시킨 후 미국 법률[12] 에 따라 1920년 1월 17일부터 여성의 참정권 부여와 함께 전국에 걸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볼스티드 법(Volstead Act)이 알코올 농도가 0.5% 이상이면 불법으로 규정지었다.[13] 즉 대놓고 법률에 '술 금지'라고 적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술에는 알코올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실질적으로는 모든 술이 걸릴 수밖에 없는 기준이다. 결국은 헌법에서 술 거래를 빼도 박도 못 하게 위법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1920년에 이 법은 미국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4.1.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이라는 설[편집]
미국도 초기 식민지 시대 때 매사추세츠의 법원에서 럼, 위스키, 와인, 브랜디 같은 주류를 불법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그러다 184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금주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감리교가 이를 주도하였다. 특히 목사 마크 A. 매튜스는 정치적 부패와 성매매를 술과 연관시켜 금주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결과 메인 주에서 약간 성공을 거두어 1851년에 법률로 통과된 적이 있다.
몇몇 정치인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1910~20년대 들어서 미국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와 도시 이주민 유입, 대량의 범죄 발생 등을 구조적인 악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음주, 흡연, 성적인 문란 등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했고, 또 이민자들에게 일자리 소개하는 술집을 정치 부패의 온상으로 간주하여 금주법을 주도해 나갔다.
4.2. 독일계 이민자 견제의 일환이었다는 설[편집]
1차 세계대전 때문에 감정이 악화일로로 치달은 미국과 독일 양국 간의 외교 감정으로 말미암아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 이민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1919년 1월에 수정헌법 18조를 제정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독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당시 손쉽게 뛰어들 수 있었던 양조업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는 볼스티드 법의 기준인 0.5%가 맥주를 노리고 정해졌음을 근거로 든다. 당시 시판 중이었던 맥주의 알코올 농도가 2.5% 내지는 3% 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반박이 되어 있다. 양조업 자체가 미국의 전체 산업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업종인데 금주법의 결과로서 모두가 예측할 있었듯이 거의 모든 남성이 마시는 술을 금지함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단 미국은 독일계 이민자의 비중이 굉장히 큰 나라인데 급증하는 산업 발달 덕에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을 겪고있어 이들의 미국 적응을 돕고 추가적인 인력을 끌어오기 위해 미국정부는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아일랜드계,[14] 이탈리아계[15] 등 주류 앵글로 색슨 계열 미국인들이 하얀 흑인이라고까지 멸시하던 민족들의 적응에도 사력을 다하던 시기였는데 미국이 그나마 인종적 유사성[16] 때문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게르만 계열 독일인들의 적응을 견제하기 위해 그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모순이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의 주류산업의 중심은 위스키와 진이었고 그 다음이 포도주였다. 한국인들이 만주까지 가서 벼농사를 지었듯이 전통적으로 위스키는 영국(스코틀랜드), 포도주는 프랑스, 맥주는 독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실제로 이 나라 출신 사람들이 주류업을 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위스키와 진이 압도적인 주류상품이었고 가정용/종교제례용으로 포도주 수요가 있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당연히 잉글랜드와 프랑스계가 양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금액 기준 미국 주류 소비량의 80%가 포도주와 위스키 진으로 거래되었고, 맥주는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전 세계에서 비교적 맥주 소비가 굉장히 적은 나라에 속했고, 금주법 당시에 마피아들이 밀조/밀수했던 술도 90%가 위스키의 밀조주인 문샤인이었다. 스피크이지라고 불리던 밀주 판매점에서도 대부분은 위스키와 그 칵테일만을 취급했다. 미국인들이 맥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나아졌다곤 해도, 지금도 미국은 맥주는 집이나 경기장에서나 마시는 음료고, 바에서는 위스키나 와인을 마시는 것이 보편적이다.
4.3. 마피아 배후설[편집]
한편 이 악법이 결과적으로 마피아 세력을 키워준 탓에 처음부터 마피아 세력에서 은밀하게 밀어준 게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이때 성장한 마피아들의 자산총액은 21세기로 치환하면 애플사 총액의 10배 이상이라는 조사까지 있어서...[17]
5. 시행 결과[편집]
역사상 이보다 더 기만적인 법도, 이보다 더 위선적인 법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술을 마셨다.
― 빌 브라이슨
폭력 금지법이 있어도 불법 폭력조직이 생기고, 마약 금지법이 있어도 마약 복용자가 생기며, 밀수 금지법이 있어도 불법 밀수업자가 생긴다. 사회 구성원들 절대다수가 마땅히 해악이고 불법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동의한 것들도 이럴진데, 잘 마셔오던 술을 갑자기 법으로 금지시키면 모든 사람들이 순순히 금주법에 복종할까?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오히려 금주법을 입법한 목적과는 정반대인 결과를 초래했다.내가 만든 술을 밀주라고 부르던 인간들이 그걸 은쟁반에 담아서 내놓으니까 '접대'라고 부르면서 기뻐한다. 내가 이 사업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 정치인들처럼 비싼 옷을 입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한심한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알 카포네
법으로 금지되니까 사람들은 술의 희소성에 집착해 오히려 전보다 더 마셔댔을 뿐더러, 그런 행위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다보니 마피아를 필두로 한 불법적인 세력들이 손을 뻗쳐서 마피아들에게 막대한 자금력과 힘을 실어주었다. 초창기에 금주법을 지지한 사람도 "어? 이게 아닌데?" 하고 부조리를 깨닫고 대대적으로 금주법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한때는 지지자였던 사람들도 등을 돌릴 정도로 결과는 부조리했다. 정책을 시행한 높으신 분들조차도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남 몰래 술을 비축해서 마셔대느라 바빴다. 윌슨은 애초에 반대 측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워런 G. 하딩은 이 법안을 무리해서 가결시킨 집권 여당 측이었는데도 틈만 나면 백악관에서 술판을 벌였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았다.
우선 금주법이 시행된 직후부터 미국 정부는 100억 달러가 넘는 주세[18] 를 거두지 못했다. 농부들도 금주법 때문에 날벼락을 맞았는데, 술은 無에서 창조하는 게 아니라 보리, 옥수수, 포도, 사과와 같은 농산물을 원료로 제작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술이 불법이 되니 술을 만들 원료가 될 농산물을 구입해갈 양조업자들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고, 양조업자들이 농산물들을 안 사주니 농부들도 수익을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팔지 못하고 쌓인 잉여 농산물들의 재고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재고를 방치하게 되면 관리비가 더 들어가고, 그렇다고 농작물을 조금만 재배하기에는 효율이 너무나도 나빴기에 농부들로서는 해결책이 없었다. 인간 역사에서 금주령이란 농업이 낙후된 국가나 대흉년과 같이 국가적인 재난 상태에서나 내린 정책이다. 즉 술을 만들어 마시기 전에 식량으로 쓸 곡물조차 없을 때나 하는 예외적인 명령이었다. 결국 양조업자들은 니어 비어(Near Beer. 도수 0.5% 맥주) 등의 새로운 아이템을 선보였지만, 시장에서는 외면을 받았다.[19]
이러한 상황에도 공화당과 금주법 지지자들은 이 부작용을 일시적인 것으로만 보며 희생을 감수하고 금주법으로 사회를 건전한 쪽으로 바꿀 야망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술을 마시던 문화권에서 갑자기 주조(酒造)를 금지하자 부작용이 속출해서, 사회가 더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이 금주 운동의 롤모델로 삼았던 이슬람 국가들은 사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술을 금지했던 것인데, 금주법은 그런 뒷배경을 알지 못한 채 만들어져서 문제였다. 이슬람 국가는 원래부터 식수와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술을 담가먹을 형편이 안 되어서 술이 널리 퍼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 탓에 술이 사치품이 되었고 따라서 술을 먹을 능력이 되는 권력자나 부호가 술을 먹으려고 하면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낭비를 막고자 율법으로 술을 금지시킨 것이다.[20] 줄여서 표현한다면, 금지해서 못 먹은 게 아니라, 못 먹어서 금지한 것이다.[21] 즉 소수의 취향[22] 이었던 술을 금지시킨 것이니 반항이 없었던 것이다.
금주법 지지자들은 이슬람 사람들이 술 대신 커피를 자주 마셔서 알코올에 대한 부작용이 없었다는 주장도 펼쳤지만, 미국이라고 커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술과 커피가 서로를 완전히 대체하는 성격의 음료가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다. 다만 술 대신 커피의 수요가 늘기는 했다. 이때 미국에서 커피는 '조(joe)'라고 불렸는데, 다름이 아니라 당시 미국 해군부에서 수병들의 상징과도 같은 술 배급을 중단하고 PX에서의 주류 판매도 금지시키는 바람에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해군부 장관인 조세퍼스 대니얼스의 이름을 붙여 불렀던 것이 민간에도 유행한 것이다. 각종 음료수의 매출이 늘기도 했는데, 커피 외에도 루트비어가 유행했다. 루트비어 역시 원래 루트 티라고 불리던 청량음료를 술 마시는 기분이라도 내자고 해서 비어(beer, 맥주)라고 이름 붙인 것.
그나마 합법적인 루트인 기독교의 성찬용 등 종교의식을 위한 포도주, 의료용 브랜디[23] 의 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또한 미국에서 술을 팔거나 만드는 길만 막았을 뿐,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그때도 불법이 아니었기에 금주법 시대 때 유람선들은 이러한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외국 선적으로 등록 후 미국 영해 밖에서 술잔치를 벌였다.[24] 게다가 금주법을 만든 하딩 대통령도 폭탄주를 즐겼고, 금주법을 지지한 후버 대통령은 꼼수를 써서 술을 마시는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알코올 중독을 고칠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늘어갔고 술을 합법적으로 사지 못하던 세상이라서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를 들킬까 의사에게 병을 숨기고 병원에 가는 것을 기피하다보니 국민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물론 단속도 많았다. 100년 역사를 자랑했던 유명한 음식점 델 모나코(Del Monaco)는 대낮에 개최한 비밀 무도회에서, 차보다 약간 더 자극적인 음료를 손님에게 제공했다가 손님으로 위장하여 잠입 수사를 벌이던 경찰들에게 발각되었다. 결국 이 가게는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며 폐업 직전까지 갔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셔대며 문제를 키워나갔다. 때마침 이때는 알코올 소비량이 미국 역사상 최고 수준까지 간 광란의 시기여서 그야말로 Speakeasy[25] 의 전성기였다.
이때에는 지역 사회 단위로 밀주가 기승을 부렸는데, 이웃나라인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술을 밀수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미국 현지에서도 생산된 밀주, 일명 문샤인이 넘쳐났다. 당연히 기생충 같은 조직폭력배들이 돈 냄새를 맡아서 밀주 사업에 개입하였고 때마침 20세기 초 이탈리아 이민자 가운데는, 대규모 경찰수사를 피해 도주한 시칠리아 마피아까지 섞여있었다. 동네 불량배로 지내던 마피아들은 밀주 사업으로 세력을 키우면서 전국구 폭력단으로 변모해갔으며, 갱스터들은 이권을 차지하려고 집단 싸움과 살인 청부 같은 강력범죄, 엽기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고, 평범한 시민들마저 손쉽게 범죄에 손을 뻗어 뒷세계의 밀주판은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여기에서 끝나도 문제가 많은데, 대공황까지 닥쳐와서 사회는 엉망이 되었다. 실제로 시카고 같은 곳에서는 조직원들이 검경이나 시장 같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뇌물을 먹였다. 엘리엇 네스도 카포네를 탈세 혐의[26] 로 겨우 법정에 넘길 정도로 부정부패가 들끓었다.
더군다나 합법적인 제조 기준마저 없어졌기 때문에 불량주가 판을 쳤다. 재료의 질이 나쁘고 썩은 것을 제조해 팔거나, 술에 독을 섞은 부류까지 나왔다. 또한 분별증류법[27] 같은 기술이 부족하여 생산비를 줄이고자 메탄올이 섞인 술을 만들어 판매하고 심지어는 공업용 에탄올로 제작한 술까지 만들어졌다. 이마저도 공업용 에탄올을 아끼려고 메탄올을 섞어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28] 보다못한 미국 정부는 공업용 에탄올에 메탄올을 섞어서 밀주 산업을 꺾으려 들었지만, 밀주 때문에 사망한 사람만 늘어났다. 그마저도 여러 법의학자가 밀주는 목숨에 위험하다고 꾸준히 말해주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알코올 농도가 100%에 육박하는, 따라서 술이 아니라 그냥 에탄올이라 불러야 할 스피리터스 렉티피코와니 같은 제품도 제조되었는데, 이런 것을 마시고 계단 등에서 굴러 떨어져 죽은 사람도 속출했다.[29] 게다가 알코올 농도가 100%인 것은, 체내 알코올 농도가 1% 이상이면 중독사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이용해 살인무기로도 악용되었다.
6.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편집]
6.1. 수요 측면[편집]
수요 측면에 대해 알려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 자체를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시민 대다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보다는 유럽 출신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동유럽/북유럽은 당연하지만 춥다. 때문에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온을 올려야 했고 이 또한 가장 간단한 방식이 음주였다.[30] 거기에 추운 지방이라 채소가 잘 크지도 않다 보니 육류 위주의 식단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게 주류 소비를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한마디로 북/동 유럽 사람들에게 음주란 단지 사치품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식량의 일부나 다름없던 것이다.[31] 주류인 서유럽의 영국, 독일, 프랑스 출신뿐만 아니라 동유럽과 러시아의 이주민들까지 몰려가 형성한 게 미국이라는 나라이니, 기후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시작부터 주류와 나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거기에 서방에서 널리 퍼진 기독교와 관련해서도 포도주와 관련이 깊다. 당장 기독교의 유명인사인 예수 관련 일화 중에서도 빈객들에게 대접할 술이 떨어지자 예수가 맹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가나의 혼인잔치 일화와 "빵은 나의 몸이고 술은 나의 피이니라"라고 말하며 제자들과 최후로 식사를 했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서도 평범한 식수가 아닌 포도주가 강조되고 있다. 즉 종교적인 의미에서 봐도 술은 관련이 깊은 것이며 아예 수도원에선 대대로 술을 직접 담가 마시는 곳도 있을 정도였고 종교적으로 적당량의 음주는 의무로 여겨질 정도였다.[32] 종교 자체가 그 시대와 사람들의 생활과 이래저래 엮여서 형성된 것이다보니 사회상의 영향을 받은 것도 컸다. 쉽게 말하면 나한테 필요한 거기도 한데 신까지 허락했으니 우리가 이걸 마시는 건 옳은 일이다.라는 명분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아주 오래전부터 술을 안 마시던 문화였거나, 이슬람 등 음주를 금지하는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이 아닌 이상, 금주법에 갑자기 영향을 받으면 대재앙이 생긴다. 조상 대대로 술을 마시다가 하루 아침에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금지 처분을 받으니까, 사람들은 술을 마시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캐나다나 영국에선 3달러 정도에 구할 수 있는 술을, 웃돈까지 줘가면서 손에 넣는 사람이 나왔다.
상황이 이러니 원래 술에 관심도 없던 사람마저, 술이 새로운 돈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갈수록 태산이 되었다. 제일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이전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사람도 금주법이 시행된 뒤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주를 정부에서 차단하니까 그 반작용이 튀어나온 사례다. 안 하던 짓도 하지 말라고 하면 괜히 하는 일이 사회 단위로 벌어진 셈이다.
6.2. 공급 측면[편집]
위에서 말했듯이 나라에서 금지하니 오히려 웃돈까지 주고서 술을 마시려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시장경제상 당연하지만 수요가 생기면 공급도 생긴다. 거기에 마약이나 총기 같이 기술도 재료도 여러 가지로 구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술은 재료를 구하는 것도 만드는 법도 크게 어렵지 않다. 당장 품질을 신경쓰지만 않으면 포도만 왕창 모아놔도 와인을 만들 수 있고, 과즙이나 꿀물을 입구가 넓은 병에 넣은 뒤 천으로 덮어 적당한 온도에 방치하기만 해도 알코올이 나오며, 이를 증류기로 증류하면 그대로 증류주가 나온다. 그나마 어려운 증류주도 증류기만 빼면 만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상술한 와인을 포함해 막걸리, 맥주 같은 건 말할 가치도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도 문샤인 같이 가족 단위로 밀주를 만들어 직접 먹거나 마시는 사례도 흔했고 그렇다보니 밀주자들이 경찰들에게 적발되는 경우도 있냐하면 그냥 물통인지 알고 들어갔다가 주류가 들어간 통인지라 아이가 그대로 통 안에서 익사해버리는 참사도 나왔을 정도였다.
거기에 자국 내에서만 해결했던 것도 아니고 미국 위아래로 있는 캐나다/멕시코 둘 다 미국처럼 유럽계 일족들이 크게 자리잡은 나라인지라 술 시장이 컸던 나라였으니 두 나라를 통해서 술을 사고파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캐나다 쪽은 오대호라는 들어가기는 쉽고 단속은 힘든 완벽한 밀수무역로까지 있었는데[33] , 게다가 이 지역은 디트로이트, 시카고, 뉴욕 등 주 소비자층과도 매우 가까운 곳으로 럼 러닝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양이 밀수입되었다. 국경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놓고 이 두 나라로 입국해 합법적으로 술 마시고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었다. 거기에 이 3국 술만 마시다가 질리면 캐나다 동부,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프랑스령 생피에르 미클롱을 통해 유럽산 주류 등도 쉽게 밀매할 수 있었던지라, 사실상 아시아 쪽으로 열린 미국 서부를 뺀 사방에서 밀주가 성행한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온갖 사건사고가 생겼는데, 제일 대표적인 것이 금주령 당시 밀주를 팔기 시작한 마피아/갱스터들의 팽창. 그 유명한 알 카포네도 금주령 당시 캐나다 위스키를 밀수해 파는 것으로 위세가 정점을 찍었고 그가 벌였던 밸런타인 데이 학살도 금주령 당시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마피아들은 이렇게 수입한 술을 이용하여 술을 뻥튀기[34] 할 수 있는 불법 양조장을 건설, 관리하였고, 대중에게 이런 술을 팔아먹으면서 많은 돈을 거머쥐었다. 미국 정부는 이 뻥튀기 술을 막으려고 공업용 알코올에 메탄올을 첨가했다. 뻥튀기 술은 공업용 에탄올로 농도를 맞추니까, '유독성 물질인 메탄올을 섞으면 최소한 뻥튀기해서 양을 늘리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범죄자들이 왜 범죄자들이겠는가? 이들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예상과 달리, 마피아들은 주류 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 범죄를 저지르는 시점에서 구매자의 건강 따위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마피아 본인들이 술을 마신다면, 안전하게 공수해 온 원액을 희석해서 마시면 땡이다. 구매자들 역시 귀한 술을 마시는 판에 그 술의 상태가 어떤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메탄올 때문에 죽거나 심각한 장애를 입는 일이 줄을 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정부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더 죽어나간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술들은 주점이나 음식점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불법 주점을 Speakeasy라고 불렀다.[35] 당시 이러한 주류점(酒類店)으로 시작하던 뉴욕의 21 Club은 지금까지도 레스토랑으로 업종을 바꿔서 살아남았다. 이런 곳에서 서민은 밀조주나 뻥튀기 술을, 상류층은 밀수입한 외국산 술을 소비했다. 당연히 손님이 낸 돈은 모조리 갱스터들에게 넘어갔다. 이게 얼마나 돈이 됐냐면, 캐나다에서 중상급의 위스키를 제조하는 브랜드 Canadian Club 의 기본 보틀 한 병 값이 그 당시 가격으로 16달러였다. 참고로 당시는 브레튼우즈 체제로 35달러 = 금 1온스가 통용되던 시절이며 금값 기준으로 이것의 현 시세를 계산하면 60만원 이다. 거의 1세기가 지난 Canadian Club 위스키는 대충 16달러에 팔린다,
또한 주류 밀매를 배경으로 성장한 미국 마피아는 금주법 폐지 이후로도 그 동안 구축해 둔 밀주 유통망을 활용해서 시칠리아 마피아들과 연계하여 서아시아의 헤로인을 유통했으며, 뒤늦게 FBI에서 1980년대에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세력을 축소시켰음에도 미국 최대 범죄조직으로 남아있다.
6.3. 관리 측면[편집]
금주령 당시 연방 정부가 배정한 금주단속요원은 고작 '수천 명'이었다. 그러니깐 그 넓은 미국을, 심지어 도시 지역만이 아니라 시골/해안선/국경선 등등을 겨우 수천 명으로 전부 관리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금주령을 내린 시점에서 주세를 걷을 의무도 사라졌으니 벌어들이는 세수가 상상 이상으로 줄어들었는데, 그렇게 줄어든 예산에서도 그나마 할애해서 만든 게 저 정도 인원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전부 단속될 리는 만무했고 오히려 금주령 말기엔 단속은 개나 주고 뒷돈이나 받아먹는 비리가 만연했을 정도였고 특히 알 카포네 같은 대규모 세력은 단지 단속요원들을 넘어서 공공기관의 높으신 분들에게도 뿌렸다. 이는 평범한 뇌물보다는 협박에 가까웠는데, 뇌물을 이미 한 번 받은 시점에서 공범자가 되는 꼴이므로 내가 기소되면 너희들이 뇌물 받은 거 전부 까발려서 너희도 데려간다며 경고하는 거나 다름없었고 실제로 알 카포네가 이런 식으로 사법 당국을 위협했다. 이른바 포획 현상이다.
거기에 주류를 직접 만드는 사업들만 망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맥주라면 보리가 와인이라면 포도가 들어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걸 밀주가들에게 팔거나 아니면 자기가 가꾼 맥주나 포도로 직접 밀주를 만들어 버리니 농업이 당연스레 도태되었고 개나소나 술을 쫓아다니다 보니까 경제 또한 상당히 파탄났다. 크게만 봐도 금주령 하나로 술 산업 도태 - 밀주 성행 - 밀주를 위한 곡식/과실이 대규모로 들어가느라 다른 데서 식량 문제가 발발 - 개나소나 거액의 술을 사들이는데, 그 돈이 전부 마피아 손에 들어가니 정부엔 단돈 1센트도 들어가지 않는 식의 붕괴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딱히 진지하게 지키려 하지도 않고, 법을 지키는 사람은 망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돈을 버니 사회적인 혼란도 가속되었다.
7. 금주법 폐지 과정[편집]
금주법에서 파생된 범죄가 급증하자 미국 전역에서는 금주법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AAPA(Association Against the Prohibition Amendment, 반금주법협회)가 있었고, GE, 듀폰처럼 1차대전으로 성장한 거대기업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듀퐁 소속인 피에르 듀퐁은 댈러웨어 주 지역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상임위원회를 압박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이들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술을 금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극렬히 침탈하는 행위이며, 이는 수정헌법이 잘못된 것이다.' 하는 논리를 내세워서, 금주법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법이라 주장했다.
AAPA는 금주법의 악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꾸준히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때 나온 보고서에서는, 1920년과 1921년 사이에 범죄 증가율이 총 24%에 이른다고 보고했을 정도였고, 술이 금지된 탓에 약물에 중독된 것이 보고된 사례만 40%가 넘었다고 미 정부에 경고할 지경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깊은 뜻이 들어간 상태다. 마피아에 의한 '암시장의 폭력'을 암시하였으므로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여기에 여성정치인 폴린 세이빈은 금주법 초기에는 "내 아들들이 살아갈 때 술 없는 세상은 매우 좋을 것이다." 라며 금주법 초기에 금주법을 열렬히 찬성했지만, 금주법이 얼마나 잘못된 법인지 깨달은 뒤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실제로 1926년에는 "법으로 술을 막으면 만사 OK일 줄 알았는데, 막으니까 오히려 건전한 시민들이 술에 빠져서 타락하였으며, 이는 여성과 청소년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어 버렸다." 라면서 비판했고, 결국 1929년에는 AAPA와 성격이 비슷한 WONPR(Women's Organization for National Prohibition Reform, 금주법 개정을 원하는 여성들의 모임)까지 결성하였다. 이 때문에 '그래도 여성들은 금주법을 찬성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조각조각 부서졌고, 금주법은 공공의 적(Public enermy)이 되었다.
1922년 Literary Digest에서 미국인 72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여론조사에서, 60%가 금주법에 회의적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결국 법률전문가들도 '금주법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법'으로 인식하고야 말았다. 1928년 콜럼비아 대학의 니콜라스 버틀러 총장은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사설에서, '미국의 자유주의에 철저히 반(反)하는, 미국의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 법'이라고 맹비난했다. 이후 1932년에는 연설에서 더욱 공격 수위를 높였다.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맥주를 허용해주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의회에서 나왔지만, AAPA는 맥주를 허용해 준다고 금주법에 찬성할 줄 안다면 오산이라고 말했고, 금주법을 완전히 없애라고 미 행정부를 압박했다.
1929년에는 금주법에서 비롯되는 범죄를 줄이려고, 미 준법집행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Law Observance and Enforcement: 법의 준수와 집행에 관한 국가적 차원의 위원회) 혹은 '위커샴 위원회'로 유명한 기구까지 결성되었다. 하나 이놈의 위원회는 밥값을 못했고, 내부에서는 하버드 학장 프라우드와 같은 하버드 교수 프랭크 퍼터가 파벌 싸움을 일으켰다. 시민들에게 분노를 산 위원회는 소멸되었으며, 프라우드 학장은 하버드에서 된통 까였다.
1929년 10월에 대공황이 미국을 덮치면서 금주법은 동력을 잃었다. 대공황 때문에 소비가 줄어들어서 세수가 줄어들자, 금주법을 폐지하면 주세를 징수할 수 있게 되고, 음지로 빠져든 양조업계를 다시 양지로 끌어올려 고용을 늘리면 경제에 활력이 들어간다는 관념이 정계, 재계,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금주법은 수정헌법 18조로 규정된 조항이었고,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은 자기들이 의기양양하게 만든 법이라서 수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침 민주당 소속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나를 밀어주면 금주법을 폐지하겠다면서 금주법 폐지를 제1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 때문에 AAPA에서도 "솔직히 우리는 그쪽이랑 상극이긴 한데[36] 금주법만 없애준다면 힘을 보태주겠다." 라고 선언했다. 금주법 폐지는 뉴욕타임즈 1932년 8월 10일자 사설에서 언급되었듯이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이슈였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공약의 차이는 여기에서 갈렸다. AAPA 지도층은 듀폰을 비롯한 대기업 고위층으로 구성된 상태였다. 성향이 상극인 루스벨트와 AAPA가 술심으로 의기투합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결국 1932년에 민주당 소속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되었다. 1933년 2월에 수정헌법 21조가 의회를 통과했고, 같은 해 12월 5일 인준이 완료되어 수정헌법 18조는 폐지되었다. 주 단위의 금주법은 그 후로도 남부지방 위주로 상당 기간 존재했는데 1966년 미시시피주에서 금주법이 폐지되며 사라졌다. 다만 현재도 카운티(군) 단위나 도시 단위로 술을 팔지 않는 행정구역은 존재한다.
결국 구체적으로 어떠한 효과와 역효과가 발생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정책을 안이하게 법으로 만들었다가 사회를 개판으로 만든 법으로, 의도는 좋은데 구상이 너무 허술한 사례다. 중독은 단순한 금지나 규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증명하였다.[37][38] 그리고 거대 갱인 마피아는 이미 미국에 깊이 자리를 잡고 말았다. 전국구 폭력단으로 변모한 마피아는 사업 분야를 점차 확대했다. 게다가 모하비 사막 한복판에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39] , 쿠바에 대규모 투자까지 하는 조직이 되었다. 마피아는 금주법이 시행된 뒤부터 수십 년간 강한 힘을 발휘했고 세력이 약화된 현재에도 미국의 뒷세계를 주름잡는 범죄조직으로 남아있다.
8. 여담[편집]
- 유튜버 Ahoy는 '미국의 '자유'의 기준은 특이합니다. 합법적으로 음료를 구매할 수는 없습니다. 허나 자동 화기를 구매하시려고요? 문제 없습니다!' 라며 톰슨 기관단총 소개영상에서 금주법을 비꼬았다. 자극적인 음료는 금지하면서 갱들이 사람 쏴죽일 때 쓰는 반자동도 아닌 완전 자동 화기는 금지하지 않았다는게 아이러니. 실제로 금주법 시대 마피아들은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합법적으로' 총을 산 뒤 온갖 사고를 쳐댔으니 그야말로 통렬한 비유가 아닐수가 없다.
- 금주법을 만든 공화당[40] 의 워런 G. 하딩 대통령은 취미가 백악관에서 술 마시면서 포커 하는 것이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파티 때 영부인이 직접 폭탄주를 말아줬다고 한다. 사실 금주법 시대에도 술 마시는 게 불법은 아니었고, 금주법 이전에 제조된 술은 그걸 사고팔지 않는 한 폐기하거나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이를 이용해 법 제정 이전에 사 둔 술을 마시는 것이라 둘러댔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방식은 제조년월이 표기된 라벨을 위조 혹은 변조하는 수법으로 민간에서도 꽤 쓰였다.
- 하딩 사후 캘빈 쿨리지 다음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는 금주법을 신성한 의무라 평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엔 미국 법이 적용되지 않는 벨기에 대사관에 자주 찾아가 술을 퍼마셨다고 한다. 일단 주조와 매매만 불법이지 술을 마시는 건 불법이 아닌데다, 법적으로 미국 사법권이 미치는 영토 및 영해 등에서만 단속할 수 있게 되어 있었으므로 외국 영토로 간주되는 대사관에서 술 마시는 게 불법은 아니었지만, 그러라고 만든 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당이나 시민들은 욕했다. 후버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후버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신성했던 짐이라고 깠다.
- 금주법과 마피아 덕분에 재즈, 그 중에서도 특히 빅밴드 편성의 스윙 재즈가 유행했다고 한다. 비밀 술집이 성황을 이루면서 더 많은 고객들을 유도하기 위해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밀' 술집이라는데 이렇게 대놓고 홍보를 했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그 원인은 그런 술집들은 대개 높으신 분들이 단골이었기 때문에 단속원들이 잘 안 건드렸기 때문이다.
- 《심슨 가족》에서도 이 금주법을 깐 에피소드가 있다. 시즌 8 18번째 에피소드로 이름은 'Homer vs. the Eighteenth Amendment'(호머 대 수정 헌법 18조). 밀주 양조, 마피아의 개입, 암암리에서 벌어지는 주류 유통 등 금주령이 내렸을 때 생기는 일을 한 에피소드로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 경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마피아들끼리 정기적으로 모여서 자동차 경주를 열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 나스카의 기원이 되었다. 또, 이 때 자동차의 껍데기, 뼈대만 놔두고 엔진을 바꾸는 등의 개조를 통해 성능을 올리는 방식의 자동차 튜닝이 발전해서, 오늘날 스톡카 레이스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 이 금주법을 지지하여 1869년 창당한 미국 원외 정당인 금주당(Prohibition Party)은 미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정당으로 남아 있다. 다만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당세가 완전히 쇠락해서 2012년 대선에서는 미 전역에서 불과 518표(…)를 획득하는 데 그치기도 했다. 2019년 9월 1일 창당 150주년을 맞았다. 2016년, 2020년 대선에서는 양 후보에 대한 불신 속에서 그나마 사정이 풀렸는지(?) 5,617표, 4,834표를 각각 득표해 1988년 이후 가장 선전하였다.
무려 10배나 당세를 늘렸다
- 국가 전반에 금주법을 퍼뜨리기 이전에도, 미국은 이미 남북전쟁 때 미군, 특히 육군의 주류 배급을 중단한 바 있다. 뭔 소린가 싶을 텐데, 원래 군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사기 진작 목적으로 술을 공급하곤 했다. 대체재로 나온 게 커피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커피산업이 시작되었고, 이 때 나온 대표적인 커피회사가 폴저스와 맥스웰 하우스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커피에 맛들인 장병들이 귀국하면서 미국 커피시장이 폭발하게 된다. 이게 나중엔 필로폰으로 발전했지만 필로폰의 부작용이 검출된 후 필로폰은 마약으로 분류되어 지급이 금지되었다.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스팀팩은 이런 식으로 지급되던 위로성 기호식품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으로, 자꾸 쓰면 몸이 망가진다는 것도 이런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나마 20세기에도 술을 배급하던 해군과 해병대, 해안경비대도 그간 배급되던 주류가 끊기니 별의 별 밀주 만들기가 성행했다. 그나마 상명하복 문화가 강해서 민간사회에 비해 통제가 비교적 쉬웠던데다가 금주라는 채찍 뒤에 당근으로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 초콜릿, 담배 등 기호품을 풍족히 공급해 술의 수요를 일부나마 줄일 수 있었다. 현재도 미군의 경우 기지 외에서 음주운전, 음주 후 성폭행 등의 사고가 거하게 터지거나, 훈련기간 중에는 PX, BX 내에서의 주류 판매가 중단된다.
- 금주법이 폐지된 현재도 미국에서는 알코올의 소비 및 판매, 소유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이를 Dry County(드라이 카운티) 또는 Dry Communities(드라이 커뮤니티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켄터키 주의 사례로 보듯 드라이 커뮤니티 내에서 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성행하고[47] , 술 파는 옆동네에서 음주하고 오다가 음주운전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게다가 드라이 커뮤니티즈의 경우 세수가 박살나고, 마약제조가 늘어나는 등의 부작용이 심각한 편. 우리나라도 그렇듯 미국도 식당의 주 수입원은 술이다. 그래서 돈 벌지 말라는 곳에 식당들이 문을 열 이유가 없고, 마운트 플레전트 같이 그나마 성공적인 드라이 카운티는 회원제로 술 제공을 한다는 전제 하에 술 판매를 부분허용하는 쪽에 가깝다. 이렇게 건전한 자영업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는 자연스레 불건전한 놀 거리를 찾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 1920~30년대 만화 베티 붑 중 베티 붑을 대통령으로 라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 맥주 그림이 나온다. 당시 금주법에 저항하는 의미라고.영상 여담으로 작중 등장인물인 Mr Nobody의 선거 중 내뱉는 대사들은 말장난을 이용한 것이다.
- 금주법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산업으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자동차 산업이 있다. 현대적 자동차산업(포드 T형) 이전에는 전기배터리, 증기기관, 에탄올, 목탄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연료/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자동차들이 존재했었다. 기본적으로 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상품이 아닌 귀족, 부르주아를 기반으로 하는 사치품의 성격을 띄고 있었기에 가격이 무척이나 비쌌는데, 1901년 텍사스 스핀들톱(Spindletop)에서 대형유전이 발견되는 것을 시작으로 석유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 석유를 기반으로 1908년 포드가 포드 모델 T를 개발 하면서 자동차는 대중화 되기 시작했다. 그 위세를 많이 잃기는 했지만 에탄올은 여전히 연료/동력 시장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금주법을 통해 곡물을 통한 알코올 제조가 금지되자 에탄올 자동차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9.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편집]
금주법 시대는 마피아와 갱스터들이 설치고 느와르적인 분위기가 짙은 시기라 미국 대중문화에서 서부극 이후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는 시기이다. 아래 나온 작품들 외에도 수많은 영화,게임,다큐멘터리,소설,드라마의 주제가 되었다.
- 91Days
- 건즈, 고어 & 카놀리[48]
- 리브 바이 나이트
- 마피아(비디오 게임)
- 바카노!
- 보드워크 엠파이어
- 언터처블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위대한 개츠비
- 가을의 전설
- 킹핀
- 스카페이스
- 로드 투 퍼디션
- 래커데이지
- 밀러스 크로싱
- 시카고
- 엠파이어 오브 신
- 갬블링 1945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49]
- 컵헤드
- 크로노 크루세이드
10. 관련 문서[편집]
- 대공황
- 광란의 20년대
- 마약과의 전쟁
- 마피아
- 아일랜드 마피아
- 유대인 마피아
- 폴란드 마피아
- 문샤인
- 러키 루치아노
- 알 카포네
- 프랭크 코스텔로
- 카를로 감비노
- 스트라이샌드 효과
- 풍선효과
- 힙 플라스크
- 공공의 적
- 미국 재무부[50]
- 성매매특별법[51]
- 쿠 클럭스 클랜 : 마피아들과 대립하던 이 집단은 이민자들은 술을 좋아하니 술을 없애면 이민자들이 사라질것 이라고 생각하여 금주법을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